2011년 10월호

석유 둘러싼 강대국 이권싸움이 ‘자유 리비아’의 운명 가른다

심층분석 - 카다피 몰락의 숨은 진실

  •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gabjini3@hanmail.net

    입력2011-09-21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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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년간 이어진 장기 독재의 종말.
    • 이제 리비아 사람들은 포스트 카다피를 고민한다.
    • 리비아는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인가.
    • 31명으로 구성된 국가과도위원회는 그 답을 알고 있을까. 서방 국가들이 리비아 내전에 깊이 간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바로 석유 때문이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반군 내 갈등의 이면에도 석유를 둘러싼 이권이 도사리고 있다. 포스트 카다피는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리비아의 그 많은 석유는 누구의 몫이 될 것인가.
    석유 둘러싼 강대국 이권싸움이 ‘자유 리비아’의 운명 가른다


    올해 초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은 리비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집트, 알제리의 민주화 시민항쟁에 이어 2월15일 리비아 제2도시 벵가지에서 최초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사실 리비아에서 벌어진 이 최초 시위는 아주 작은 규모였다. 2006년 벵가지에서 열렸던 이슬람주의자 집회에서 14명이 숨진 사건을 기리기 위해 벌인 시위로 페이스북을 통해 듣고 삼삼오오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 시위대 사이에서 반정부 구호가 나오면서 순식간에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벌어졌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부군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상사였다. 이 시위대는 ‘인터넷 세대’ 젊은이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을 겪으며 중동과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의 젊은이들이 인터넷에 더욱 가까워졌다.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이들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부모 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인터넷 덕에 세상일을 시시각각 알 수 있다. 사막에서 태어난 부모세대의 관심은 부족과 가족에 국한됐다. 그러나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넓어진 눈으로 다른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민주화가 무엇인지 등에 눈을 뜬 것이다. 처음 시위를 호소한 페이스북 그룹 ‘우리 모두 칼레드 사이드다’는 이를 반증한다. 그들은 카다피 독재 40여 년간 억압되었던 민중의 상징으로 유혈시위에 분노한 시민들과 다시 모여 민주화 시위를 들불처럼 펴져가게 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시위대에서 반정부 세력으로 커져 리비아 동부와 서부의 여러 도시에 대해 통제력을 확보해갔다. 드디어 3월5일, 반군은 벵가지에서 대표기구인 국가과도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of Libya·NTC)를 발족해 리비아 국민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인터넷 혁명



    시대적인 변화와 시민들의 열망을 자각하지 못한 리비아의 대통령 카다피는 끝까지 무력으로 이들에 대응했다. 리비아는 곧 내전에 휩싸였다. 정부군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벵가지 인근까지 진격해 반군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이어갔다. 사실 이것은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전투기와 탱크로 밀고 나오는 정부군은 AK 소총 몇 자루와 RPG(로켓 추진형 유탄) 만 가지고 싸우는 반군보다 전투력이 우월했다. 카다피는 정부군을 동원해 반군의 근거지를 초토화해갔다. 그렇게 리비아의 민주화 열망이 사그라질 즈음 반군에게 뜻밖의 지원군이 나타났다. 프랑스 전투기가 리비아 영공에 뜬 것이다. 그리고 곧 카다피군에게 맹렬한 공습을 시작했다. ‘미국도 아니고 왜 하필 프랑스 전투기가 카다피군을 공격한 걸까?’라고 의아해할 수 있지만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의 행보를 보면 이해가 간다.

    프랑스는 이미 전세계에서 최초로 리비아 반군의 국가과도위원회를 리비아의 ‘합법적 대표’로 인정한 바 있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리비아 대통령이 카다피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는 처음으로 이를 전면 부정한 나라다. 유엔 안보리의 ‘비행금지구역설정’ 결의안이 통과된 이틀 뒤인 3월19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각국 정상과 주요 국제기구 책임자 회의를 대통령궁인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리비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할지 말지 논의하고자 마련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깜짝 놀랄 돌발선언을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모인 세계 각국 정상들에게 그는 “프랑스 전투기들이 리비아 내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이미 이륙했다”고 한 것이다.

    안보리 결의를 한 지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프랑스 전투기가 국제사회와는 아무 상의도 없이 벌써 리비아로 떠났다는 것이다. 사르코지는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이 나토군 연합 작전을 주도하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프랑스 주도로 작전이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사르코지는 군사 작전 개시를 선언하면서 “카다피의 대량살육을 중단시키기 위해 프랑스는 역사 앞에서 역할을 맡는다”고 말했다. 군사작전에서 영원한 조연을 거부하고 리비아에서는 프랑스가 주연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또한 사르코지는 리비아전을 계기로 강력한 국제적 리더십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대통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르코지의 이 작전은 일단 프랑스 국민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내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리비아 공습을 지지하고 나서고 70만명의 네티즌이 투표한 결과에서도 66%가 리비아 공습을 지지했다.

    3월20일 오전, 일명 ‘오딧세이 새벽’으로 불린 이 작전에는 프랑스군 전투기 라팔과 미라지 등 10여 대가 참여했다. 뒤늦게 미군도 B2 스텔스기, F15·F16 전투기 등을 포함한 군 항공기 19대를 동원해 리비아의 방공 시스템을 공습했다. 미국 B2 스텔스기 3대가 리비아 주요 비행장에 폭탄 40발을 떨어뜨렸고 미 공군 전투기들이 리비아 육군을 공격하기 위한 정찰임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프랑스군의 첫 공격 몇 시간 뒤 미국과 영국 해군 함정들이 리비아 방공망 등 20곳을 목표로 토마호크 미사일 124발을 발사했다. 카다피군에게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반군은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다. 나토군의 군사공격으로 반군은 카다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고 이 기세를 몰아 3월23일 드디어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 반군에 의한 임시정부가 공식 출범했다. 또한 프랑스에 이어 카타르, 영국, 미국 등이 이 임시정부를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27세 카다피 대위의 등장

    리비아의 역사는 곧 식민의 역사였다. 지중해를 끼고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고 있는 리비아는 원래 베르베르족들이 살던 평화로운 땅이었다. 7세기경 이 땅에 아랍 민족이 들어오면서 베르베르족은 사막으로 밀려나고 베드윈족이 리비아 땅에 살게 됐다. BC 631년부터 약 550년 동안 그리스의 식민지를 시작으로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터키 제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됐고, 근대에 들어서는 이탈리아에 30년 넘게 혹독한 식민 통치를 받았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반부터 9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군정의 지배를 받다가 1951년에야 리비아라는 이름으로 겨우 독립했다. 기원전부터 식민의 역사였던 이 신생 독립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독립 직후 즉위한 리비아의 국왕 이드리스는 그저 말뿐인 국왕이었다. 독립은 했지만 열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나세르의 영향력을 봉쇄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리비아에 군사기지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비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1955년 처음으로 리비아 유전 개발이 추진되고 1961년 석유를 수출하게 되면서 리비아는 최빈국에서 석유 수출국으로 변신했다.

    리비아 사람들의 생활도 달라졌다. 양떼나 치고 밀농사나 짓던 유목민들이 석유 산업의 노동자가 됐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시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산유국 리비아의 돈은 특정 계층에게만 돌아갔다. 국민은 오일머니를 구경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석유는 있으나 기술과 인프라가 없었던 리비아는 결국 석유를 보고 몰려든 영국과 미국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 간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불만이 점점 끓어올랐다.

    그럴 즈음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1967년 6월4일,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대한 응징과 아랍 국가의 공격 기도에 대한 자기 방어를 명분으로 공중 기습공격과 시나이 반도에 대한 대공세를 전개했다. 전쟁은 시리아·요르단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해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요르단 강·서안지구·골란고원 등을 점령했다. 그해 6월6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전(停戰)결의안을 양측이 수락함으로써 같은 달 9일 정전이 성립됐다. 말 그대로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 것이다.

    이 전쟁은 아랍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편을 들어준 서방 국가 때문에 아랍이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서방 국가들에 대한 불만이 아랍 국가 전역에 들끓었다. 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리비아 노동자와 학생들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침략에 항의해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있던 영국과 미국 기업들의 재산을 공격했다. 석유 산업 노동자들도 이 공격에 적극 나섰다.

    젊은 장교들은 은밀히 모여 쿠데타를 기획했다. 서방 국가에 굽실거리는 국왕 이드리스를 몰아내고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델로 하는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신병 치료를 위해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하는 신세가 됐다. 무혈혁명으로 끝난 이 쿠데타를 이끈 지도자가 바로 무하마드 카다피 대위였다. 쿠데타를 일으키던 1969년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에 불과했다.

    리비아식 사회주의

    1942년, 카다피는 리비아 북부 사르테 사막지대에 있는 한 천막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목인인 베드윈족의 일파인 카다파 부족이다. 카다피는 전통적인 베드윈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사망했고 아버지 역시 이탈리아 항전에 참가한 전사 집안이었다. 어린 카다피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키웠고 그의 아버지도 자녀 교육에 열성이었다. 덕분에 카다피는 다른 유목민 아이들처럼 양떼나 치는 아이로 자라는 대신 초등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를 거쳐 1963년 벵가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막의 천막에서 자란 가난한 카다피로서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영국의 육군사관학교까지 진학해 집안에서 해외 유학을 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됐다.

    카다피는 학창 시절 항상 혁명에 관한 연구를 즐겨 했으며 육사 생도 시절 ‘자주 통일주의 장교단’을 만드는 등 남다른 지도자 자질을 갖춘 총명한 젊은이였다. 그는 철저하게 이슬람적인 청렴결백한 삶을 지향했으며 담배도 술도 하지 않고 코란을 즐겨 읽는 검소한 생활을 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유년 시절을 보냈던 사르테 사막지대를 홀로 찾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외국에 순방하더라도 비싼 호텔 대신 베드윈식 천막을 공원에 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군인이 된 뒤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육군 대위 카다피는 1969년 9월1일, 11명의 동료 장교와 함께 수도 트리폴리에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해 성공했다. 무혈 쿠데타로 사실상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27세의 나이로 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그해 11월에는 잠정 헌법을 공포하고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쿠데타 이후 리비아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1969년 9월1일 리비아 비상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혁명위원장이 되면서 그는 총리와 국방장관과 국가평의회 의장과 국가원수를 모두 겸직하며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 그 후 43년간 그는 세계에서 제일 긴 장기 집권을 누렸다.

    쿠데타 직후 최고기관으로 설립된 혁명사령부위원회(RCC)는 카다피와 쿠데타에 참여했던 장교 11명으로 구성됐다. 그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영국군과 미군부터 철수시켰다. 리비아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인 3만명의 자산을 동결하고 추방했다. 또한 외국계 은행들과 석유 기업의 60%를 국유화하고 다국적기업의 권한을 축소했다. 그것은 카다피의 외세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는 석유 국유화로 1973~74년에는 유가를 무려 네 배나 끌어올릴 수 있었다.

    청년 카다피는 늘어난 석유 수익으로 리비아 발전 계획을 추진하고 국민을 위한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도로, 학교, 병원 등을 지었고, 노동자의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특히 카다피는 국민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교육 사업에 주력해 리비아 국민 문맹률을 90%에서 50%로 낮추었다. 당시 400만명이 조금 넘는 리비아 총인구 가운데 140만명이나 무상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게 했으며 여성을 문교장관과 문공차관으로 임명하는 사회적 개혁 정치를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지금은 독재정권의 상징처럼 된 카다피도 처음에는 아주 훌륭한 지도자였다.

    국민은 무능했던 국왕보다 이 젊고 야심에 찬,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카다피에게 열광했다. 카다피는 일종의 ‘리비아식’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리비아는 사람들의 빈곤, 굶주림, 후진성, 무지를 제거하는 길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라고 말하며 리비아 전반에 사회주의식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리비아식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는 달랐다. 카다피는 “계급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고 계급 차이의 격차를 좁히는 중간의 길이다”라고 했다. 그는 ‘제3의 진로 이론(Third Universal Theory)’을 내세웠는데 요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있는 제3의 길을 따라 세상이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다피는 그것을 리비아식 사회주의로 정의하며 이를 근거로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이론은 좋았으나 사실 그 중간의 길이라는 것이 참 애매했다. 계급의 격차를 줄인다고 했던 카다피의 행보는 그러지 못했다.

    영원한 유목민 카다피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자신이 성공했듯 다른 누군가도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주변 권력을 견제해야 했고 노동자 계급이 정치에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1972년 3월 트리폴리의 항만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일주일간 파업을 벌였다. 그러자 카다피는 파업과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그리고 ‘정당을 건설하거나 참여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지금껏 국민의 복지 정책이나 리비아식 사회주의 등을 내세웠던 카다피였지만 자신의 권력을 뒤흔들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과 같이 쿠데타에 참여했던 동료 장교들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본인도 쿠데타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5년, 카다피 제거를 기도한 쿠데타가 두 건 있었고 지금까지 그는 52회에 걸친 암살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그가 이렇게 위기의 순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대적하는 그 어떤 행위도 철저히 싹을 없애는 철권통치 때문이다. 그가 만든 혁명위원회는 사실상 정치경찰과도 같은 역할로 공장, 사무실, 학교, 대학, 도시 지구, 군대 내 곳곳에 포진해 군대 내 반대파를 제거하고, 학생 저항의 조짐을 살피기 위해 대학을 순찰하고, 국외 추방한 반대 세력을 감시·살해했다. 카다피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가혹한 탄압을 통해 국민을 옥죄었다. 그리고 석유로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류에게는 떡고물을 나눠주며 지지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대통령까지 올라갔어도 사막의 부족민 출신 한계를 드러냈다. 그가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들들과 친인척이었다. 카다피는 베드윈족의 문화인 혈통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원한 유목민이었다. 카다피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 무함마드는 우편과 통신위원회를, 그리고 둘째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은 석유회사와 국영방송사를 소유했으며, 셋째아들 사디는 국영영화사업의 책임자, 넷째아들 무타심은 군사령관, 다섯째아들 한니발은 석유사업경영자, 여섯째아들 카미스는 특수부대 사령관이다. 딸 아이샤도 사설 금융기관과 에너지와 건설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카다피는 철저하게 반미주의 노선을 걸었다. 리비아 내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다. 석유와 도로와 해운, 항만, 항공 등의 기반시설도 국유화하거나 국영화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아랍 국가들과 달리 서방과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카다피는 가장 강경한 반외세 아랍민족주의 중심에 있는 아랍 지도자로서 미국과 서방에 등을 돌렸다. 아무리 석유가 쏟아지는 나라이지만 미국에 카다피는 눈엣가시이고 리비아의 석유는 먹지 못하는 떡이었다. 자연 카다피와 미국은 서로 원수 사이가 되어갔고 미국에 카다피는 반드시 손봐야 하는 대상이었다.

    결국 1981년부터 미국은 대(對)리비아 경제제재에 들어갔다. 1992년부터는 유엔도 경제제재를 가했으며 1996년부터는 이란·리비아 제재법으로 석유 개발마저 원천 봉쇄했다.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1986년 4월15일 트리폴리와 벵가지에서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폭탄이 60t이나 쏟아지는 미국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카다피가 아닌 무고한 리비아 시민 1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렇게 미국과 리비아의 대립이 극도에 달한 즈음인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에서 팬암 항공기 폭파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은 그 사건의 배후에 카다피가 있다고 지목하고 경제제재를 확대했다. 미국 정부는 카다피가 팬암기 폭파 사건에 책임을 지지 않는 한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경제제재의 여파는 리비아 전반에 퍼졌다. 경제제재나 군사작전이나 항상 피해를 보는 쪽은 리비아 서민들이었다. 국민의 가난과 불만은 극에 달했다. 결국 카다피는 사건이 일어난 지 10여 년이나 지난 1999년, 서방이 팬암기 폭파 사건으로 지목한 용의자 두 명을 넘겨줬다. 2003년에는 재판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유가족들에게 배상금도 지급했다. 같은 해, 카다피는 스스로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공식 선언하며 서방과의 화해 모드를 모색했다. 철권통치 독재자, 심지어는 중동의 미친개라는 오명을 듣던 카다피도 세상의 변화에 마냥 마이동풍은 아니었다. 사담 후세인의 죽음과 이라크, 아프간 전쟁을 지켜보며 본인도 그들과 비슷한 신세가 될 것이라는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카다피가 한 수 접고 서방과 화해모드로 들어서자 유엔과 미국은 곧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했다.

    그러자마자 미국과 서방이 달려든 것은 리비아의 석유 개발이었다. 리비아의 원유 매장량은 391억 배럴로 세계 8위 수준이다. 세계 굴지의 석유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면 석유 매장량은 1000억 배럴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노다지를 두고 미국과 유럽 정부 지도자들은 앞 다투어 리비아로 달려가 카다피를 만나려 했다. 어제의 천덕꾸러기가 이제는 귀하신 몸이 된 것이다. 카다피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나 딸이라도 만나려 아우성이었다. 과거 카다피를 두고 중동의 미친개 운운하던 미국과 유럽이 웃는 얼굴로 카다피를 만나려 하는 것은 오로지 석유 개발 때문이었다. 거대 석유 기업들은 물론이요, 과거 리비아를 식민통치하던 이탈리아도 프랑스도 중국과 한국도 이 카다피 눈에 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카다피 재산, 169조원

    카다피도 이런 분위기를 업고 40년 만에 처음으로 석유채굴권 공개 입찰에 다국적기업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광구 채굴권 300여 개를 국제 입찰에 부쳐서 배당했다. 리비아 내 석유 기업들을 국유화했던 카다피지만 자국 경제를 해외에 개방하고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카다피는 2000년 미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오늘의 세계는 어제의 세계가 아니고 현재의 리비아도 과거의 리비아가 아니다”며 “집권 이후 30년간 세계가 급변했으며 나도 그 과정에 함께 변화했다”고 말했다.

    리비아로 달려든 세계 굴지의 석유 기업들이 노다지를 캐는 대가로 카다피 일가와 그 측근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올렸다. 석유 산업과 각종 이권에 관여해온 카다피 일가의 재산은 1500억달러(약 169조원)에 달한다. 카다피 일가는 해외 부동산과 기업에 공개적으로 투자해왔으며, 이탈리아의 정유회사와 통신사 등에 지분을 갖고 있다. 국영 석유회사와 그 자회사들은 카다피 일가의 수입원 역할을 맡았다.

    카다피와 그의 일가가 엄청난 부를 누리는 반면 서방과의 경제 개방 속에서 리비아 국민의 삶은 더욱 악화됐다. 리비아 대부분의 산업이 국영기업 중심으로 전체 노동인구의 90%가 국영기업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개방정책으로 인한 국영기업 구조조정이 실업자를 양산했다. 최근에는 사하라 이남 국가로부터 불법 이주한 값싼 흑인 노동력이 대거 유입되면서 리비아의 실업률은 치솟았다.

    또한 1990년대부터 카다피 정권은 공공 지출도 크게 줄였다. 특히 보건과 교육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보조금 제도와 실업수당도 폐지했다. 인플레이션마저 발생해 노동자들은 실질임금 하락으로 고통받았다. 실업률이 35%를 넘어가며 20대 이하 젊은층이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다. 리비아 최고 명문 알 파타 대학교 4학년에 다니는 제이난은 “졸업을 해도 취직할 자리가 없다. 취업을 하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상황이다.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거나 외국인 회사에 줄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 같은 서민들은 아예 취업을 포기해야 한다. 이 문제가 우리를 카다피에게 등 돌리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리비아의 대학생 수는 20만명 정도이고 매년 약 5만명이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지만 이들을 받아줄 곳이 없다. 이것이 오늘날 리비아의 몰락을 가져온 주요 원인이다. 이들은 인터넷에 능숙해 자신들이 처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카다피 독재 타파와 리비아 민주화만이 이들을 실업의 늪에서 구할 수 있음을 알았다. 최근의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등 리비아와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의 민주화 바람에 편승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열망을 가진 리비아 젊은 이들이 카다피 정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젊은 시위대가 다시 반군으로, 그리고 지금의 국가과도위원회까지 리비아의 반정부 세력은 지난 6개월간 숨 가쁘게 달려왔다. 반군은 리비아 동부에 있는 그들의 중심 도시 벵가지를 중심으로 카디피의 중심 도시가 있는 서쪽으로 진격과 퇴각을 반복하고 했다. 이 반군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앞으로 리비아에 들어설 새 정부를 구성할 사람들이다.

    해외 망명파와 국가과도위원회

    그럼 리비아의 미래를 책임질 반군 지도자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전직 법무장관 출신인 무스타파 압둘 잘릴이 이끌고 있는 국가과도위원회는 모두 31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출신은 매우 다양하다. 현재 파악된 국가과도위원회 수뇌부는 크게 카다피의 폭정을 피해 미국으로 갔던 해외 망명파와 카다피 정권 아래서 장관을 지낸 장관파로 나뉜다. 그 외에 이슬람세력과 각 부족 대표 등 서방 세계도 모두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제각각이다.

    그중 언론에 자주 노출돼온 사람으로는 최고 사령관 격인 압둘 파타 유네스 전 내무장관과 야전사령관인 칼리파 헤프티르 전 장군, 그리고 오마르 엘-하리리 임시 국가위원회 국방장관을 꼽을 수 있다. 해외 망명파에는 칼리드 히프티르 전 장군이 있다. 히프티르는 리비아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소시민으로 거주했다. 그는 1980년대 카다피 정권에서 잘나가는 군장성이었다. 당시 리비아와 차드 사이에 영토분쟁이 있었는데, 그 전투에서 그는 수천 명의 병력을 잃고 차드에 완패했다. 이에 분노한 카다피는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국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30년 가까이 미국에서 조용히 미국식 사고방식이나 문화에 익숙한 미국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민주화 봉기가 발생하자 리비아로 돌아와 반군에 합류해 전선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현재 아들들까지 반군 참모로 활동시키며 반군을 지휘하고 있다. 미국인으로 살았던 그는 군복 대신 터틀넥 셔츠와 정장을 입고 카다피 정권에서 군 장성으로 복무한 경험을 살려 반군을 지휘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장군으로 군대를 지휘한 시절은 이미 30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반군 내부에서 퇴역군인인 그를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보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 임시정부의 총리를 맡고 있는 사람은 마무드 지브릴이다. 지브릴 총리는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전략 계획과 의사결정’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대학에서 강의를 해왔다. 미국에서 교수였던 그는 미국 등 서구세계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고 영어에도 능통하다.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문서에선 지브릴 총리를 “개혁적 마인드의 소유자이며 미국적 시각을 가진 진지한 협상 상대”라고 평가했다. 리비아와 미국의 중간에서 훌륭하게 외교적 수완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오래전에 리비아를 떠났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그의 정체성이 미국인지 리비아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현재 리비아가 아니라 미국에서 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본국의 과도정부와 얼마나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반군 내부에서조차 “우리는 그를 본 적도 없으며 미국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그가 우리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아랍어 대신 영어만 사용한다고 들었다”라는 불평이 나오고 있다.

    재무·경제장관을 맡은 알리 타로니도 미국 워싱턴대 포스터 비즈니스스쿨의 경제학 교수다. 벵가지 출신으로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하다 발각되어 197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도 그는 카다피 정권 반대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지금은 거의 40여 년 만에 리비아로 돌아와 국가과도위원회의 지도부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해외 망명파 대부분은 30~ 40년 미국 시민으로 살아왔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조국 리비아를 위해 반군의 지도부로 활동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의 대역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 등 서방의 중간다리로 반군 내부에 대한 서방의 지원을 받아내는 등 현재로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들이다.

    석유 쟁탈전

    위의 인물들이 카다피를 피해 오랜 시간 조국 리비아를 비운 사람들이라면 장관파는 카다피 정권에서 장관까지 지낸 국내파다. 현재 국가위원회를 이끄는 무스타파 압둘 잘릴은 전직 법무장관 출신이고 반군의 대열을 지휘해온 압둘 파타 유네스는 내무장관 출신으로 모두 카다피 시절 내각에 있었다. 내전이 발발하자 카다피를 버리고 영국으로 망명한 무사 쿠사 전 외무장관도 리비아 밖에서 국가과도위원회를 외교적으로 지원 사격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카디피 내각의 주요 인물이었지만 시민들에 의한 민주화 봉기가 시작된 후 카다피를 버리고 반군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국가가 어려울 때 자기 한 몸 살기 위해 미국으로 도망가서 편하게 지내다 온 망명파보다 리비아에서 국민과 함께한 그들이 리비아 안에서는 해외 망명파보다 더욱 신망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크게 두 파로 나뉘기는 하지만 종교와 부족으로 다시 또 나뉘고 쪼개져 조직도가 도저히 파악이 안 될 정도다. 그리고 그들 내부에서는 서로 갈등이 심하다. 반군의 한 인사는 “지휘부 회의 때마다 초등학생 같은 고성이 오간다. 한 번도 전원 일치를 이뤄본 적이 없다. 지금은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각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며 그동안 이들 내부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 갈등은 마침내 한 사건으로 폭발했다. 국가과도위원회의 최고사령관이자 카다피 정권 내무장관이었다가 반군에 투항했던 압둘 파타 유네스(67)가 암살된 사건이다. 그는 40여 년 전 젊은 카다피 대위가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그의 옆에서 충성하던 친(親)카다피파였다. 지난 2월 벵가지에서 민주 시위가 있을 때 카다피가 군사력을 동원해 수백 명의 시위자를 학살한 사건을 계기로 카다피를 버리고 시민 편에 섰다. 차기 리비아의 구심점으로 물망에 오르던 인물로 그가 사망한 사건은 리비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의 사망을 발표한 반군 지도부는 “유네스가 전투 중 카다피 정부군의 총격을 받아서 사망했다”는 성명을 공식 발표했었다. 하지만 반군 내부에서 폭로가 이어졌다. 폭로자는 반군 안에서 활동하던 지도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네스가 그동안 카다피 정부군과 휴전을 이뤄내는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반군 내부 해외 망명파가 유네스 장군을 납치해서 감금하고 고문을 가하다가 급기야 사살한 것이라고 밝혔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유네스의 죽음을 사주한 사람이 지금 임시 정부의 총리를 맡고 있는 마무드 지브릴이라는 것이다. 교수 출신의 그는 이제 암살자의 의혹을 받고 있다. 이 기자회견 도중에도 정체 모를 세력이 총을 쏘며 기자회견장에 난입해 기자들까지 죽을 뻔했다. 이를 두고 그날 현장에 있었던 리비아 주간지 ‘알 타우드’기자 사마라는 “국가과도위원회는 서로 의견을 총으로 나눈다고 할 만큼 분열되어 싸운다. 유네스의 죽음이 이를 반증한다”고 했다. 현재 반군들은 카다피를 체포하는 전투뿐만 아니라 자기들 안에서의 권력 싸움도 벌이고 있다.

    카다피라는 공공의 적이 있는데 왜 반군들은 서로 싸우는 걸까? 리비아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표한다는 그들이 어째서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이 의문들을 들여다보면 리비아의 현재 상황이 저절로 읽힌다. 지금 반군을 도와 리비아를 공격하는 나토군의 경우 대부분이 리비아를 식민 통치하던 국가들이다. 이탈리아는 30년간 잔혹하게 리비아를 식민통치했던 나라고 영국과 프랑스도 그 뒤를 이어 9년이나 리비아를 통치했다. 미국은 1969년 카다피의 쿠데타 전까지 본토 밖에서는 가장 큰 공군기지를 리비아에 뒀다.

    이들의 목적은 리비아에 있는 석유와 천연자원이다. 반군을 도와 리비아의 민주화를 앞당기고자 나토군의 폭격기가 리비아를 때리고 있지만 이들의 인도주의 뒤에는 바로 이 석유와 관계된 이권(利權)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리비아 내전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카다피가 리비아의 독재자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석유 때문에 앞 다투어 카다피에게 달려갔었다. 이번 나토군 공습에 가장 앞장선 프랑스는 리비아에 ‘평화적 핵’ 사용을 지원할 정도로 카다피와 관계가 돈독했었고, 2007년 대선 당시에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카다피의 돈을 받았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던 사르코지가 돌변해 반군편에 서서 카다피에게 총을 들이대는 것은 바로 석유 때문이다.

    다른 서방 국가들이 이번 리비아 작전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리비아 석유의 85%가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고 미국과 유럽의 지배자들은 석유를 둘러싼 기존 사업 계약을 지키고 싶어한다. 사실 미국과 유럽이 지금 전쟁에 뛰어들 만큼 경제적 여력이 있는 건 아니다. 아프간 전쟁, 이라크전쟁에서 미국과 나토국가들은 국가 부도 위기까지 갈 정도로 전비를 지출했다. 그래서 리비아 내전이 벌어진 올해 초만 해도 이들 국가는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

    하지만 이내 주판알을 튕겨 투자 대비 남는 수익 사업이라는 계산을 했다. 반군을 도와 카다피를 제거하면 반군들과 관계를 도모해 리비아 내 석유 관련 이권을 챙기는 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고 이로 인한 수익이 전쟁비용을 감당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카다피라는 독재자를 제거하는 데 세계가 힘을 합쳐 리비아 민중을 해방시킨다는 인도주의적인 이미지도 가질 수 있어 일석이조라는 판단이다. 이 발 빠른 계산을 먼저 한 프랑스나 이탈리아, 미국, 영국 등이 자국의 전투기를 동원해 반군을 지원하는 것이다.

    오리무중인 포스트 카다피

    이것을 반군 지도자들도 잘 알고 있다. 포스트 리비아의 핵심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곧 리비아 석유사업의 주인공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결국 반군들은 석유사업의 주인공 자리를 놓고 내부에서 피 말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네스 사령관이 제거된 것도 이런 사정과 관계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카다피 체포 작전 일정보다 외국 바이어를 상대하는 미팅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서방과 반군 지도부의 행보는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헤프티르 사령관이 군복보다 양복 정장을 입고 있는 이유도 전투보다는 공식 미팅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미 석유 개발과 향후 리비아 재건공사 수주에 대한 양해각서가 남발되고 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실제로 한 이탈리아 건설업자는 “가격을 밝힐 수 없으나 반군 지도부와 양해각서를 썼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공사 수주건에 대해 다른 반군 지도자의 이름으로 경쟁업체와 양해각서가 체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낙담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필자에게 과연 둘 중의 누가 차기 리비아의 대권을 쥘 것 같으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런 현실은 카다피 축출 후에도 리비아가 조용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예고편처럼 보인다. 국제 석유업체 간에 신규사업권 획득을 위한 경합도 벌어지고 있다. 특히 리비아에 대규모 투자를 해둔 업체일수록 기득권 유지와 신규사업권 획득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새 정부가 구성되면 어떤 상황이 올지는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석유탐사와 개발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어느 정권이나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리비아의 석유는 묵혀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마라톤석유, 옥시덴털 페틀롤리엄, 코노코필립스, 헤스 등은 벌써부터 반군측에 줄을 대고 있다.

    그러나 반군 중에는 아직 그들을 확실히 대표하고 국제적인 협상 테이블에서 리비아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이들 각자의 배경이 무엇인지, 어떤 동기를 가졌는지 국제사회가 파악할 수 없고 이들 중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또 대부분 지휘관을 자처하는 이들은 의사결정 과정이 불투명하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신들은 이 반군의 명칭과 직함에 항상 고민스러워한다. 언론에 반군 대변인을 자처하며 인터뷰한 인물만도 20명이 넘어간다. 외신들은 매번 바뀌는 대변인의 이름을 알지 못해 “대변인이라 자처하는”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ABC방송의 시사프로그램 ‘디스위크’에 출연해 “반군 구성원의 배경과 동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무장 지원이 꺼려진다”고 말한 부분에서도 리비아 반군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담겨 있다. 지금 국제사회에 비친 리비아 지도부는 여러 명의 사령관과 지도자가 우후죽순으로 언론에 노출된 어수선한 모습이다. 딱히 리비아 반군을 이끈다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없다. 이렇게 리비아에 인물이 없는 이유는 카다피가 자신 외에 그 어떤 세력도 꿈틀거리지 못하게 씨를 말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군들이 만든 국가과도위원회가 차기 리비아를 이끌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NTC가 내부 혼란을 빨리 정비하고 안정을 찾아 민주주의로의 정권 이양을 이룰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중동전문가 앤서니 코즈먼씨도 “아무 정치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통치에 나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리비아 사태를 취재하며 알게 된 리비아 일간지 ‘알-샴스’의 한 기자는 “리비아 사람들이 지금의 리비아 사태를 보며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필자의 질문에 영화 한 편을 보라고 추천해준 적이 있다. 그 기자가 말한 영화는 1981년 개봉된 ‘사막의 라이온’이다. 리비아의 전설적인 독립투사 오마르 무크타르(1862~ 1931)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명배우 앤서니 퀸이 무크타르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이탈리아가 1910년부터 리비아를 침공해 식민지배할 때 한 시골마을에서 코란을 가르치는 교사인 무크타르가 조국 리비아를 위해 이탈리아와 투쟁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탈리아군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에 대항해 무크타르는 사막전과 산악전에서 뛰어난 전술로 현대병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시켰다. 무크타르는 리비아 구국의 영웅으로, 흩어져 있던 리비아의 부족들을 하나로 결집해 20여 년 항쟁을 이끌었다. 옛 로마제국부터 이어진 침탈에 길든 베르베르족, 베두인족 등 리비아 유목민에게 리비아라는 민족 정체성을 일깨워준 선구자다.

    그는 끝내 이탈리아군에 잡혀 1931년 9월16일 공개 교수형에 처해진다. 처형을 당하기 직전 그는 “나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승리 아니면 죽음이다. 투쟁은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치는 리비아의 국민은 지금 제2의 무크타르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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