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시간여 인터뷰하는 동안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유일하게 커졌다. 소파의 나무팔걸이 끝 부분을 꽉 잡은 오른손의 두툼한 정권(正拳)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느 대기업 사장과 달리 심리상태가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 드러났다. 사장이라는 ‘겉옷’이 44년을 건설인으로 살아온 그의 DNA와 자부심까지 가리진 못한 듯했다.
기자는 9월5일 서울 신문로1가 대우건설 본사에서 서종욱(62) 사장을 만났다. 서 사장은 한·리비아 수교 이전(1980년)부터 리비아 현지에서 일을 했고, 이후 리비아 건설본부 관리부장을 맡는 등 국내 몇 안 되는 ‘리비아 전문가’로 통한다. 지난해 국가정보원 직원 추방 문제로 한·리비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도, 비선을 통해 특사인 이상득 의원과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의 만남을 주선한 인물도 그다.
최근 리비아 재건사업에 건설업체의 관심이 쏠리면서 서 사장의 행보를 지켜보는 눈도 많아졌다. 하지만 서 사장은 ‘지켜보는 중’이다. 과도정부 구성 등 향후 4개월간의 움직임을 읽어야 ‘포스트 카다피’ 체제를 예측해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리비아는 물론 해외 곳곳에서 건설 공사를 수행하는 회사의 대표인만큼 그의 말 한 마디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 그가 인터뷰 요청을 어렵게 받아들인 것도, 인터뷰 도중 두 차례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구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인터뷰는 서 사장과 리비아와의 인연부터 시작했다.
1979년 리비아와 첫 인연
▼ 리비아에 처음 가신 게 1979년인가요?
“맞아요. 입사 3년차였죠. 한때 반정부 세력의 거점도시인 벵가지의 가리니우스 의과대학 신축 공사 현장으로 발령이 났죠. ‘DC1 현장’이라고 했어요. ‘Daewoo Contract No.1’이라고, 대우의 첫 계약이라는 의미였어요. 국교가 수립되기 전에 리비아에서 한국 회사가 수주한 첫 사업이었죠. 이 공사를 계기로 지금까지 리비아에서 114억달러의 공사를 수행해왔으니 큰 인연이라고 봐야죠. 그땐 정말 일밖에 몰랐어요.”
▼ 초기에는 힘들었겠어요.
“그럼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단체 체조하고 식사하고 7시 반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으니….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면서 동료들의 소중함도 알게 됐죠. 그땐 한 달에 두 번 쉬었는데, 쉬는 날에는 밤에 횃불을 들고 바다로 가 문어를 잡았어요. 현지 주민들은 뼈 없는 동물을 먹지 않으니까 문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죠. 문어를 잡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어요. (현지 경찰 생각에는) 쉬는 날에 쉬지도 않고 떼로 몰려다니니까 수상했던 거죠.”
▼ 1982년 귀국했다가 1988년에 다시 리비아로 갔는데요.
“88올림픽 기간이었어요. 1979년 갔을 때 현장소장 하시던 분이 본부장으로 있었는데, ‘SOS’를 친 거죠. 도로와 비행장, 학교, 주택건설 등 공사현장이 너무 많아 일손이 부족했거든요. 그때 직원들 비자 문제와 현장민원 때문에 이민국이나 시청 부동산국을 수없이 드나들었죠. 대관(對官) 업무를 많이 하면서 알게 된 인맥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네요.”
▼ 그 ‘인맥’이 결국 빛을 발했군요.
“네?”
▼ 이상득 의원이 특사자격으로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서 사장께서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와 이 의원 만남을 주선했으니까요.
“거, 참. 그 얘기는….”
헛헛하게 웃던 서 사장이 탁자에 놓인 차가운 결명자차를 반쯤 마셨다. 아랫입술을 윗입술에 포개더니 이마에 2개의 굵은 주름이 그려졌다. 가벼운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이 ‘그 얘기는 넘어갑시다’하고 말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