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노론사관과 일제 식민사관 벗어나 대한민국 정신세계 새로 구축해야

  • 입력2011-09-21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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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신세계가 왜곡된 시발점은 인조반정이다. 조선 왕은 중국 황제의 신하라는 논리.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선의 정치를 주물렀던 노론의 세계관이었다. 그것이 일제 식민사관으로 이어지면서 역사가 왜곡되고 대한민국의 주체성이 말살됐다. 이덕일 소장의 강연은 8월23일 오후 7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됐다.<편집자>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오늘 드릴 말씀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입니다. 조선 후기사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인조반정은 지금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로는 인조반정이 있고 그 다음에 일제강점기가 있고, 6·25전쟁이 있다고 꼽을 수 있겠죠.

    인조반정이 뭡니까? 신하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겁니다. 그런데 이 신하들이 모두 유학자예요. 유학의 기본을 두 자로 표현하면 효(孝)와 충(忠)입니다. 충효가 아니라 효가 먼저고 다음이 충입니다. 그래서 효자 집안에 충신 난다고 말하는 겁니다. 집에서 효도하는 자세로 공직에 복무하라는 겁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이 나라에는 충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겠죠. 효와 충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유학자들이 국왕을 내쫓으려고 하다보니까 명분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명분이 뭐냐? 우리의 임금은 명나라 황제라는 것입니다. 조선 왕은 신하인 제후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 국왕과 우리 사대부는 같은 계급이라는 얘기입니다. 인조반정이 외교정책을 명분으로 삼은 것은 모두 여기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중원의 패권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데 조선에서 그 사태를 주도하지 못할 바에는 이긴 쪽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됩니다. 명과 청 두 나라를 연구해보면 재미있는 게 아주 많아요. 명나라는 대대로 무능한 황제가 계속 즉위합니다. 그래서 환관(宦官)정치가 득세하지요.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반기

    반면 인구가 한족의 100분의 1도 안되는 만주족의 청나라는 통치기술에 관한 한 대단한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말하는 열하(熱河)는 지금 허베이(河北)성 북쪽의 청더(承德)이라는 곳인데 여기에 청나라 황제들이 피서 산장을 지어놓고 매년 갔습니다. 열하에 가서 사냥을 하는데 사냥이라는 게 군사훈련입니다.



    청나라는 잠시라도 방심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후계자를 선출할 때도 태자를 미리 결정하지 않습니다. 태자밀건법입니다. 자금성의 황제 집무실에 ‘광명정대(光明正大)’라는 글귀가 쓰인 액자가 있는데 그 액자 뒤에 자기가 죽으면 황제가 될 사람의 이름을 써놓습니다. 그리고 내부에도 하나 있어서 황제가 세상 떠난 다음에 두 개를 맞춰봐서 즉위하는 겁니다. 여러 황자에게 다 기회가 있는 겁니다. 장남이라고 무조건 차기 황제가 되는 게 아니라 모든 황자에게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런 자세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인조반정은 정권에서 소외된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겁니다. 명분이 숭명반청(崇明反淸)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광해군의 중립 외교정책을 확 바꿔서 후금(청)을 적대시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킵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전쟁이에요. 인조반정을 일으킨 지배층이 초래한 겁니다. 후금 입장에서는 산해관을 건너서 중원에 들어가기 전에 조선 문제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냥 들어갔다가 조선이 치고 올라오면 전선이 두 개가 되지 않습니까?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조선을 먼저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과 만주족(여진족)은 원래 같은 민족이에요. 중국에서 바라볼 때 동이족이라고 불렀던 같은 민족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만주, 거란, 숙신 다 같은 민족이에요. 수나라가 통일하고 나서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니까 영양왕이 말갈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서 수나라를 먼저 공격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을 선제공격하는 거예요. 말갈이 후에 이르면 여진족, 만주족이 되는데 이때 영양왕이 말갈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갈 때 통역병을 데리고 갔겠어요? 안 데리고 갔겠어요? 만주어와 우리말은 같은 언어예요. 서로 통하는 겁니다. 옛날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로는 만주인과 우리 민족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면 6개월이나 1년 지나면 의사소통이 다 된다고 그랬어요. 기본적으로 같은 언어들입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이 만주족을 오랑캐로 보게 되죠.

    말로만 북벌

    우리를 단일민족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구조입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동이족이에요. 그런데 단일민족론이 뭐냐 하면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말갈, 거란, 숙신을 전부 다 오랑캐로 내몰고 우리는 중국인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그래서 ‘소중화(小中華)’ ‘우리는 작은 중국인이다’라는 것이 단일민족론이에요. 그 시초가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만든 개념입니다.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고 나니까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변변한 싸움 한 번 못해보고 항복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조선 후기의 이중성이 시작되는데, 이상으로는 망한 명나라를 섬기지만 현실적으로는 매년 청나라에 조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북벌(北伐)을 소리 높여서 주창합니다. 문제는 실제 북벌할 마음이 있느냐는 겁니다. 효종 임금이 실제로 북벌을 하려고 하니까 이들이 반대하고 나오는 겁니다. 말로는 북벌을 주창하면서 실제로 북벌하려면 발목 잡는 겁니다. 북벌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국방비를 늘려야죠. 그런데 이들은 국방비를 줄이고 복지예산을 늘려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입으로는 북벌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북벌과는 거꾸로 가는 거죠.

    제가 아까 인조반정을 주도한 사람들은 조선 임금은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로 본다고 그랬죠. 사대부 중의 제일사대부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바로 예송논쟁이 나왔습니다. 예송논쟁이 간단한 논리가 아닙니다. 효종, 즉 국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3년 입어야 하느냐, 1년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발생하지요. 부모가 먼저 세상 떠나면 자식은 3년복을 입습니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장남일 경우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1년복을 입습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광해군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정책을 펴다 쿠데타로 폐위됐다. 사진은 광해군 묘.

    효종이 세상 떠났을 때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은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백호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펴냈습니다. 지금은 윤휴를 잘 모르지만 당대엔 송시열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학자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때 윤휴의 사랑방에 여러 선비가 모여 있는데 송시열이 사람을 보내가지고 ‘자신의 견해는 1년’이라면서 윤휴의 견해를 물어봤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취규 이류라는 선비가 “그 사람 ‘상례비요’를 다시 봐야 할 사람이네”라고 말합니다. 1년복은 사가의 예법이지 어찌 왕가에 그 예법을 쓰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세상 떠났는데 가족장 치르라는 이야기입니다.

    남인 중용 직후 죽은 현종

    윤휴는 3년복을 주장하고 송시열은 1년복을 주장하다가 결국 1년복이 승리합니다. 그래서 백호 윤휴와 청남(淸南)은 선왕의 장례를 1년복으로 치른 정권에 참여를 거부합니다. 1년복설은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이론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현종이 1년복설이 선왕을 둘째아들 대우하는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경국대전’에는 장남과 차남 구분 없이 다 1년복을 입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15년 후에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 떠났는데 똑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맏며느리가 세상을 먼저 떠났을 때는 시부모가 1년복을 입고 둘째며느리 이하가 세상 떠났을 때는 9개월복을 입습니다. ‘경국대전’에 이 경우에는 1년복과 9개월복으로 구분지어 놨습니다.

    예조에서 처음에 1년복으로 올렸다가 남편 상사(喪事) 때와 같으니까 9개월복으로 고쳐 올렸습니다. 그러자 대구 유생 도신징이 대구에서부터 걸어와서 “둘째며느리라는 뜻 아닙니까?”라고 상소를 올리죠. 그러자 현종이 대신들을 불러다 묻습니다. 대신들이 “9개월복이 맞다”고 답하자 “너희들이 국모로 모셨던 분을 둘째며느리 대우했다는 거냐?”라고 묻습니다. 다시 의정하라고 하니까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현종은 오늘 중으로 결정하라고 합니다. 왜 시간을 달라고 하냐면 충청도 회덕에 있는 송시열에게 사람을 보내서 송시열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려고 하는 겁니다. 조선 왕들이 이런 정치구조를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중으로 결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와서 “9개월복이 맞다”고 하니까 현종이 “‘경국대전’대로 하면 1년복이 맞느냐, 9개월복이 맞느냐?”라고 묻습니다. ‘경국대전’대로 하면 1년복이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인들이 자기모순에 빠진 겁니다. 현종이 “경들이 선왕의 은혜를 그렇게 두텁게 입고도 선왕에게 이토록 박하게 하면서 누구에게 그토록 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냐?”라고 화를 내면서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중용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현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제가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책을 썼는데, 단순히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닙니다. 인조반정 이후 허수아비에 불과한 조선 임금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서인의 주류인 노론(老論)과 어떤 사안을 두고 충돌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충돌 직전에 왕이 때마침 죽어주는 것으로 정리되는 패턴이 거듭되는 겁니다. 효종이 세상 떠나기 한 달 전에 송시열과 독대해서 “경에게 정권 다 줄 테니까 대신 북벌을 추진하라”고 제안합니다. 북벌 안 할 거면 정권 내놓고 다 나가라는 뜻입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아느냐”

    송시열을 북벌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송시열이 정태화를 찾아와서 북벌 이야기를 하니까 정태화는 “나는 경이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올라가는 걸 보는 게 꿈이지만 몸이 약해서 같이 못하겠다”고 거절합니다. 송시열이 실망해서 간 다음에 정태화 아들이 “무슨 북벌 이야기냐”고 물으니 정태화는 “만약 내 입에서 북벌을 찬성한다는 한마디만 나오면 내게 뒤집어씌울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식으로 내가 병을 핑계대고 빠진 거다”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송시열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데 한 달 후에 효종이 급서합니다. 종기가 났는데 신가귀라는 어의가 침으로 종기를 찢다가 혈락, 즉 혈관을 터뜨려서 세상을 떠난 겁니다. 신가귀를 조사해봤더니 수전증, 손 떨리는 증세가 있는 어의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그래서 효종이 나이 마흔에 갑자기 세상 떠났습니다. 그리고 2차 예송논쟁 와중에 현종이 정권을 남인에 넘기다가 서른넷의 나이로 또 급서합니다. 그래서 청나라 강희제가 불쌍하다고 제사를 두 번 지내줍니다. 그런데 현종이 세상 떠나기 1년 전에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납니다.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이란 한족 출신 번왕들이 군사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양자강 이남이 쑥대밭이 됩니다. 그러자 백호 윤휴가 상소를 올려서 북벌을 주장합니다.

    윤휴는 송시열과 한때 친하게 지내다가 갈라서게 됩니다. 윤휴가 ‘중용’의 장과 절을 구분하는데 주자가 구분한 것과 다르게 합니다. 그랬더니 송시열이 “네가 감히 주자가 한 것과 달리할 수 있느냐?”라고 하니까 윤휴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만약 주자가 다시 살아나면 내가 틀렸다고 하겠지만 자사(子思)가 다시 태어나면 내가 맞다고 할 것이다”라고 답합니다. 자사가 바로 ‘중용’의 저자입니다.

    이 말이 대단한 말이에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사상의 상대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는 단순히 송시열과 윤휴 두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미래 진로를 둘러싼 중요한 논쟁이 됩니다. 송시열이 주자를 절대화하려 했다면 윤휴는 주자를 상대화하려 합니다. 송시열은 주자를 절대화하는 것으로, 조선의 흔들리는 신분질서를 양반 사대부 중심으로 재편하려 합니다. 반면 윤휴는 주자를 상대화하는 것으로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완화 내지 해체하려고 합니다. 양자는 바로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충돌한 것입니다.

    “호패보고 싸우라 하지”

    그리고 윤휴는 진정한 북벌론자죠. 윤휴는 중국 남방이 쑥대밭 됐을 때 압록강을 건너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조선의 정예군, 효종이 기른 정예 포병, 조총수가 압록강을 건너면 상황은 뒤바뀝니다. 윤휴가 북벌을 주창할 때 서인 정권의 최고 실력자였던 송시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국사 교과서는 송시열을 북벌론자로 가르쳐왔죠. 노론 후예 학자들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나온 현상입니다.

    윤휴는 북벌하려면 나라가 부강해야 하는데,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백성들이 잘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성들이 잘살려면 양반 사대부의 특권이 철폐 내지는 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윤휴는 호패법을 지패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질이 다릅니다. 보통 2품 이상은 상아로 만든 걸 차고, 양반들은 뿔로 만든 걸 차고, 일반 상민이나 노비는 나무로 된 걸 찹니다.

    그래서 윤휴가 지금 같은 종이신분증인 지패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겁니다. 그러면서 정묘호란 때 안주성을 예로 듭니다. 후금군이 안주성을 포위하자 감사 윤훤이 병사들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하니까 병사들이 호패를 끌러서 쌓아놓고 “호패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지 왜 우리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느냐” 하고 반발합니다. 임진왜란 때 서애 유성룡이 면천법(免賤法)을 실시했어요. 면천법이 뭐냐면 천인(賤人)이나 상민도 공을 세우면 양반이 될 수 있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준 겁니다. 그러다가 전쟁 끝나니까 유성룡을 실각시키고 다 없던 걸로 만들었어요. 역사는 차별을 철폐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발전합니다. 그런데 전쟁 끝나니까 다시 과거로 돌아갔어요. 그러다 정묘호란 일어나 싸우라고 하니까 병사들이 호패 끌러놓고 “이 호패보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지 왜 우리보고 싸우라고 그러느냐?”라고 반발하지요.

    아주 중요한 사례입니다. 그래서 안주성이 삽시간에 무너집니다. 임진왜란 때 면천법을 실시하니까 의병이 일어난 겁니다. 정묘·병자호란 때는 의병도 안 일어납니다. 임진왜란 때 면천법 실시해놓고 종전 후 폐기하니까 다시 의병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신분제를 철폐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래서 윤휴가 호패법을 지패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윤휴는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자고 주장합니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는 병역의무가 없어요. 지금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들의 병역 면제 비율이 높은 것이 다 이 잘못된 유산을 이어받은 겁니다. 병역을 천하게 여기는 그 뿌리가 바로 조선 후기에 있어요. 1년에 두 필씩 군포를 내게 돼 있는데 농토가 많은 부자인 양반 사대부는 합법적으로 면제되었습니다. 가난한 상놈들만 내는 거예요. 군사비가 자꾸 늘어나니까 이미 세상 떠난 부친 것도 씌우고, 갓난아이 것도 씌워서 한 사람이 3명 몫을 내야 됩니다. 그러니까 못 견뎌서 도망가면 가족에게 대신 씌우는 족징(族徵)이 성행합니다.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씌우는 인징(隣徵)이 성행합니다. 그래서 한 마을이 텅 비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북벌론자 윤휴, 사약 받다

    해결책은 뭡니까? 양반 사대부도 군포를 내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호포제(戶布制)죠. 그런데 조정에 올라오면 번번이 부결됩니다. 조정에는 양반 사대부들뿐이지 상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벼슬아치는 없지 않습니까? 이때 숙종 초에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조정에 들어간 윤휴가 호포제 실시를 주장합니다.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모두 군포를 매겨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상민은 원래 납부해왔으니까 결국 양반 사대부도 군포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양반 사대부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지요. 이런 와중에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실패로 끝나면서 숙종이 정권을 갈아치웁니다. 국제정세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번의 난이 실패로 끝나니까 북벌을 주창한 남인 정권을 갈아치운 겁니다. 청나라가 혹시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할 경우에 대비한 겁니다. 서인들은 이때다 하고 윤휴를 사형시키려고 하는데 사형시킬 죄목이 없어요. 윤휴가 3년복설을 주장할 때 1년복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임금을 임금 대접 안 한 것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을 높여야 한다면서 3년복을 주장한 사람을 죽일 죄목이 없습니다.

    윤휴는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북벌을 주장하고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해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국대전’ ‘대명률’을 다 뒤져도 해당 죄명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민정중이 “전하께서 결단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임금을 살인자로 유도하는 말입니다. 사형시킬 죄가 없지만 전하께서 결단해서 죽이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백호 윤휴는 사형당합니다. 야사에서는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 후 조선은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이야기를 못 하는 침묵의 제국이 됩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노론의 거두 송시열.

    조선 후기에 외주내양(外朱內陽)이라는 말이 있어요, 겉으로는 주자학자인데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입니다. 공부해보니까 양명학이 맞지만 양명학자라고 시인했다가는 심할 경우 윤휴처럼 사형당할 수 있으니까 겉으로는 주자학자인 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곡 정제두(鄭齊斗)가 공부하다보니까 양명학이 맞습니다. 그러다가 병에 걸리자 유서 비슷하게 박세채에게 편지를 써서 양명학이 맞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나자 내놓고 양명학자로 자처합니다. 외양내양(外陽內陽)이 된 거죠. 그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그 작은 섬에 스스로 유배당해 학문의 자유를 누립니다. 백호 윤휴가 사형당하지 않고 주자를 상대화했으면 조선 후기 사회가 상당히 달라졌을 겁니다. 사상의 자유는 사회의 다양화, 다원화를 이끌어냅니다.

    노론과 충돌하다 죽은 임금들

    지금 우리나라 학계는 조선 후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미국 아이비리그 탈락률이 44%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아이비리그에서는 “네 생각은 뭐냐?”라고 물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생각을 외우는 데만 익숙합니다. “주자(朱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줄기차게 외우는 겁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빠져 있는 거예요. 자기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시스템인 국내에서는 견뎌도 아이비리그에서는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엊그제 신문 보니까 수능 만점자 중에 수학도 외웠다는 이야기가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수학도 외워서 만점 맞을 수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교육현실이에요. 노벨상은 다 자기 시각, 자기 사고로 사물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거지 남의 생각, 남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윤휴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라고 맞섰다가 사형당한 사건이 그래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생각이 다른 것을 ‘틀리다’고 표현하지요. 이게 다 언어폭력이에요. 다르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여기에 똑같은 옷 입은 분 한 분도 안 계시죠? 이만큼 세상은 다양합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인데 하나의 틀 속에 억지로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유학의 주류가 예학(禮學), 즉 예론(禮論)으로 갑니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등이 모두 예학의 대가입니다. 왜 예학이 학문의 주류가 되느냐?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 이후 조선사회의 신분제가 흔들립니다. 임진왜란으로 사대부 지배체제는 이미 끝났습니다. 또한 면천제로 신분 해방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양란 후 다시 구 지배체제로 회귀하자 상민들이 저항합니다. 힘이 약한 사람은 도망가고 강한 사람은 산이나 바다로 들어가서 떼도적이 된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백호 윤휴는 신분제를 해체 내지는 완화하는 것으로 조선사회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송시열 등은 신분제를 계속 강화해서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유지하는 쪽으로 사회를 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예론이 나오는 겁니다.

    철학에 체제나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지 않으면 철학이 아니라 지적 유희, 말장난에 불과 합니다. 철학엔 반드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치열한 현실문제가 담겨있어야 합니다. 윤휴가 사형당한 후 주자는 임금도 감히 넘을 수 있는 신성한 존재로 한층 올라섭니다. 조선 임금이 주자를 절대화하는 사상을 가진 서인이라는 정파, 그 서인의 핵심인 노론과 어떤 사안을 두고 충돌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충돌 직전에 조선 왕이 급서하는 것으로 정리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소현세자가 그렇게 죽었고, 효종, 현종, 경종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노론에 맞섰다가 뒤주 속에 갇혀 죽습니다. 정조도 죽은 후 독살설에 휘말리고, 순조가 아들 효명세자를 내세워서 노론과 맞섰다가 3년 만에 또 급서합니다.

    청나라에 뇌물 로비

    조선 후기에 결국 택군(擇君)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임금을 선택하는 시대, 왕조 국가에서 택군이라는 말 자체가 역심(逆心)입니다. 지금은 대통령이 밤중에 누굴 만나는지 전혀 모르죠? 조선시대 때는 국왕과 신하의 독대(獨對)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어요.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배석하게 돼 있습니다. 지금 이 제도를 복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공작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됩니다. 숙종 43년,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이 독대하는데, 그해가 정유년이라서 정유독대라고 합니다. 정유독대 후 갑자기 사형당한 장희빈의 아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명이 내려집니다.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남인이라는 당적이 찍혔습니다. 숙빈 최씨가 연잉군(영조)을 낳으니까 노론은 연잉군을 국왕으로 택군했습니다. 그 일환이 세자의 대리청정입니다. 소론 쪽에서는 대리청정을 시켜가지고 꼬투리 잡아서 내쫓으려는 속셈이라면서 거세게 반발합니다. 소론 영수 윤지완이 구순이 다 된 노구에 시골에서 와병 중에 있다가 관을 짊어지고 올라와서 상소합니다. 이때 상소문 중에 “전하께서는 어찌 상신(相臣:정승)을 사신(私臣:개인의 신하) 부리듯이 하며 이이명은 한 나라의 상신이 되어가지고 어찌 임금의 사신(私臣)인 것처럼 처신하느냐”라고 숙종과 이이명을 모두 꾸짖습니다. 대단한 의기죠. 이런 게 바로 선비정신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대통령 개인의 장관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장관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장관으로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 현실이 어디 그렇습니까?

    소론에서 이처럼 격렬하게 반발하니까 세자를 갈아치우려 하다가 못 갈아치웁니다. 그러다 경종이 끝내 즉위하니까 노론에서 청나라에 이 사실을 보고하러 가면서 노론 영수 이이명이 은화 수만 냥을 청나라 조정에 바칩니다. 청나라 사신이 나오면 연잉군을 좀 만나달라는 로비입니다. 겉으로는 끝까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노론 당론인데 실제로는 뇌물까지 가지고 가서 로비합니다. 사신이 나오면 왕을 만나면 되는 겁니다. 미국 대통령이 나오면 한국 대통령 만나면 되지 대통령의 야심 많은 이복동생을 왜 만납니까? 국왕 후보니까 미리 면접 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 스토리대로 돼가지고 경종은 4년 만에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연잉군이 즉위합니다. 영조가 즉위하니까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습니다. 영조가 즉위 초에 능행을 가는데, 이천해라는 군사가 어가를 가로막고 욕을 합니다. 영조는 이천해를 사형시키면서 그가 한 말은 기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실록에는 ‘불인지언(不忍之言)’, 차마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고 나오는데 모두 경종 독살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천해라는 군사가 “이 선왕을 독살한 역적”이라고 영조에게 욕을 한 겁니다.

    과대포장된 영조

    영조는 우리 역사에서 과대포장된 임금입니다. 노론과 손잡고 사도세자를 죽였기 때문에 노론 후예 학자들이 실제보다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국어교과서에 사도세자 관련해서는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만 실려 있었습니다. 한중록 이야기는 뭡니까? 사도세자는 정신병자고 영조 또한 정신병자에 가까운 성격 이상자인데 이 두 부자가 충돌해서 뒤주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우리 친정은 이 사건에 책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서울대학교 국문과의 한 교수가 제가 쓴 ‘사도세자의 고백’은 다 틀렸다면서 ‘한중록이 100% 다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학문 현실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노론 당론에 따라서 남편 죽이는 데 가담했습니다. 그런데 노론에서 세손도 쫓아내야겠다고 하니까 여기에는 반대합니다. 세손이 쫓겨나면 죽는 겁니다. 영조도 내 자식은 죽였지만 손자는 못 죽이겠다고 반대합니다. 세존(정조)은 부친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봤기 때문에 자기의 색깔을 전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본능적인 생존술이죠.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고 나서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으니까 세손을 이미 죽은 효장세자의 호적에 입적시킵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이것을 정확하게 예견합니다. “나는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 삼으면 어떨꼬”라고 말합니다. 또한 혜경궁 홍씨에게 “그 뜻들이 무서워”라고 말하죠. 사도세자는 다 아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적진, 노론에 가담해서 자기를 죽이는 데 일조한다는 걸 다 아는 거예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때는 음력 윤5월이니 양력으로 치면 한여름입니다. 이때 세자는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정신병자 행세하려고 하니까 세손의 가죽 털모자인 휘항을 갖다달라고 말합니다. 한여름에 가죽 털모자를 빌려달라는 세자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답변이 “세손 거는 작으니까 당신 걸 쓰고 가세요”라는 겁니다. 그러자 세자가 “나는 오늘 나가서 죽겠기에 자네는 세손하고 오래 살겠기에 안 빌려주려는 그 속셈을 알겠네”라고 말하지요. 혜경궁 홍씨가 세손을 보호했던 것이 정조가 즉위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은 분명히 밝혔지만, 13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과거회귀의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정조가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입니다. 과거는 과거, 역사에 맡기는 겁니다. 현재의 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흘러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정치를 잘함으로써 더욱 나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역사학은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학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지는 겁니다. 현재의 권력을 가지고 과거 역사를 뒤바꾸려고 한 모든 정권, 모든 국왕은 다 실패했습니다.

    한중록의 오류

    영조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선왕 독살설을 없애기 위해 과거의 정치에 매진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사도세자도 죽인 겁니다. 미래를 선택한 정조는 자기 부친을 죽인 노론과도 손잡고 “함께 미래로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정조 10년, 노론에서 정조를 압박하기 위해서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사형시키라고 주창하다가 그 와중에 구선복이라는 인물에게 불똥이 튑니다. 그래서 노론으로 군권을 잡고 있는 구선복이 사형당하는데 정조가 “저놈이 나의 원수인데 내가 저놈과 10년 동안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얼굴 맞대면서 정치를 했으니 내가 어찌 화병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구선복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던 인물이죠. 한 나라의 국왕, 한 나라의 대통령은 이 정도의 진정성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정조는, 무엇을 가지고 미래를 지향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이런 정치체제로는 미래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노론일당 독재체제를 이가환이나 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 계열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다당제로 바꿉니다. 그리고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바꾸어 양명학과 서학이라고 불렸던 천주학까지 용인하는 것으로 사상의 다원화를 꾀합니다. 그리고 신분제 완화를 시도합니다.

    재위 1년에 서류허통절목, 서자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법을 만들고 재위 3년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리수 이 네 명의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합니다. 이들은 사검서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면서 조선의 지식지도를 확 바꿔버립니다. 이들 서자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중상주의(重商主義) 실학입니다. 노론이라는 당파는 끝까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인정하자는 중상주의, 북학파는 노론과는 다른 서자 지식인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봤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간 국사 교과서는 중상주의 실학을 노론에서 주창한 것처럼 써놨었습니다. 거짓말이죠. 그러다가 얼마 전 교과서 바꿀 때 노론이라는 부분을 슬그머니 빼버리면서 중농주의 실학, 즉 경세치용 학파는 남인들이었다는 사실까지 빼버렸습니다. 아까 국어교과서에 ‘한중록’만 실었었다고 말했지요. ‘한중록’과 반대되는 내용은 많습니다. ‘영조실록’에도 있고 정조가 편찬한 ‘어제장헌대왕지문’도 있고 여러 야사도 있습니다. 교과서에 한중록을 실으려면 다른 시각의 사료도 싣고 난 후 학생들에게 어떤 게 맞는지 한번 조사해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비리그식 공부법이죠. 반면 우리나라는 “한중록만 믿어야 돼”라고 가르칩니다.

    ‘한중록’이 100% 맞다고 주장하는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그 근거로 “진술이 구체적”이라고 말합니다. 살인자도 구체적으로 혐의를 부인하면 무죄라는 이야기예요. 이것이 우리나라 학문 수준입니다. ‘한중록’만 배운 학생들에게 아이비리그에서 “사도세자가 과연 정신병 때문에 죽었을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고 물어보니까 답변을 못하는 겁니다. 사고의 다양성, 한 사건을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훈련을 못 받았기 때문에 탈락하는 거예요.

    정조 독살설의 의미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사후 독살설에 휘말렸던 정조.

    정조는 서자도 등용해 신분제를 완화하는 것으로 미래를 지향합니다. 그러다가 정조가 결국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세상을 떠나게 되죠. 얼마 전에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받은 어찰이 나왔죠. 그러니까 정조어찰을 연구했다는 학자들이 느닷없이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결정적 자료라고 주장했지요. 제가 어떤 방송 인터뷰에서 “아내가 살해당하면 제1 용의자가 누가 되는지 아느냐? 남편이 아니냐” 그랬더니 진행자가 “남편이 보험에 들어놨을 때 그렇다”고 답해요. 그래서 제가 “심환지가 정조가 세상 떠난 당일로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그게 보험금 탄 거 아니냐?”라고 답했습니다.

    정조어찰이 나왔으면 기본적인 연구 자세는 어떠해야 하느냐?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기존 사료와 그 내용이 배치되는지 아닌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조어찰은 기존사료를 뒤집는 사료가 아니라 그 배경을 설명해주는 보조사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록에 심환지가 우의정을 사퇴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는데, 정조어찰이 그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니까 독살했을 리가 없다는 단순무식한 이야기를 기자들 앞에서 해서 약 이틀 동안 그게 통용됐어요.

    심환지가 정조 독살 혐의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조가 세상 떠난 후에 심환지가 정조의 정치노선을 조금이라도 계승하려고 노력하다가 귀양을 간다든지 파직당한다든지 하는 정치적 불이익을 당한다면 정조 독살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환지는 정조가 세상을 떠나던 1800년과 그 다음해인 1801년, 이때가 바로 다산의 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정약전은 정약용과 귀양 가는 등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신유박해가 발생한 해입니다. 정조 때 성장했던 남인은 대부분 죽거나 귀양 가죠. ‘순조실록’은 이 모든 옥사를 심환지가 주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 ‘순조실록’에는 선왕(정조)이 선향(仙鄕:저승)으로 떠나던 당일로 선왕을 배신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백주대낮에 학자라는 사람들이 ‘정조와 심환지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니까 독살했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 심환지에 대한 실록 기록입니다. 21세기의 학자들이 ‘정조독살설’을 자신들에게 아픈 이론 구조, 아픈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그 구조가 문제라는 겁니다. 정조 죽음은 200여 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그 진실을 밝히려면 사건을 객관화, 대상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정조가 노론에 의해서 독살당했다는, ‘이 노론에 의해서’란 문구를 너무 아프게 생각하는 학자가 많아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200년 전, 300년 전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겁니다.

    이완용 비서 이인직의 매국행위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자행되죠. 세도정치가 뭐냐? 노론의 10여 개 집안이 모든 국정을 농단하는 겁니다. 강화도령, 즉 철종의 형인 회평군을 노론에서 죽였어요. 죽인 사람의 동생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곧 왕은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고종 시대를 맞이하죠.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10년 8월 이인직이라는 인물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밤중에 몰래 찾아갑니다. 이인직이 이완용의 비서입니다. 이인직을 보내 “나라를 넘기면 우리에게 어떻게 해줄 것이냐?”라고 묻는 겁니다. 고마쓰가 “귀족령을 만들어서 계속 귀족으로 대우하고 막대한 은사금으로 나라 팔아먹은 대가를 지불할 거다”라고 말하니까 이인직이 좋아서 갑니다.

    이완용이 데라우치 통감하고 협상하면서 “고종의 지위는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어요. 데라우치가 “왕으로 봉할 거다”라고 하니까 이완용이 “대공(大公)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합니다. 대공은 왕과 공작 사이의 중간 계급으로서 왕이 아닙니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노론, 인조반정의 쿠데타 명분, 조선 왕은 왕이 아니라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겁니다. 이완용이 노론 당수예요.

    나라가 망했을 때 일본에서 76명에 달하는 조선인에게 훈장과 작위를 주죠. 이 76명을 조사하면 두 부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왕족입니다. 대원군의 조카가 있고 순종의 장인도 있어요. 다른 하나는 당인(黨人)들입니다. 64명 정도의 당적을 알 수 있는데 남인은 없고 북인은 2명이고 소론이 6명이고 나머지 56명이 다 노론입니다. 이인직이 고마쓰를 찾아가서 “우리는 중국을 섬겨왔는데 이제 일본으로 바꾸는 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정확히 노론 당론입니다.

    그런데 국어교과서에서 이인직을 뭐라고 가르쳐 왔습니까? ‘혈의 누’를 쓴 선각자로 가르쳐왔지 않습니까? 이 상태에서 대한민국이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혈의 누’ 내용이 뭔지 아세요?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가 조선 처녀를 겁탈하려는 것을 일본군이 구해준다는 내용이에요.

    훈민정음의 변질

    우리 언어는 지난 100년 사이에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한글날이면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표음문자라고 자랑하죠. 그런데 이 우수하다는 표음문자가 L과 R을 구분 못하고, P와 F, 또 B와 V도 구분 못하죠.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게 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다 나와 있어요. 이 원칙에 따르면 R과 L을 구분할 수 있게 돼 있어요. 병서(竝書) 원칙이 있습니다. 초성(初聲)을 두 개, 세 개 써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칙에 따르면 L은 그냥 ‘ㄹ’ 로 쓰고 R은 ‘ㅇㄹ’로 쓰든지 ‘ㄹㄹ’로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연서(連書) 원칙이 있어요. 순경음을 적는 방법입니다. P와 F, B와 V 모두 입술소리죠. 하나는 ㅂ으로 적고 다른 하나는 ㅂ아래에 ㅇ을 써서 순경음을 만들면 구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만든 겁니다.

    그런데 1912년에 일본 사람들이 언문철자표기법이라는 걸 만들어요. 지금 한글맞춤법통일안이라는 것은 언문철자표기법을 한글로 옮겨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음법칙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전세계에서 특정음을 발음 못하게 국가권력으로 강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어요. 앞에 ㄹ이 발음되면 ㄹ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강제로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언어를 절름발이로 만든 겁니다. 다 일제시대의 잘못된 유산입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원칙으로 돌아가면 모든 발음을 다 구분해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학 때 교사들 교육시켜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면 영어 때문에 그렇게 난리 치지 않아도 다 잘할 수 있게 돼 있어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그렇게 만들어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자고 하면 반대하는 국어 학자가 많습니다.

    강화도로 들어갔던 양명학자들은 대부분 소론 계열입니다. 이들이 나라 망하니까 만주로 망명해요. 만주에 가보면 횡도천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이건창의 동생인 이건승, 홍승원, 정제두의 6대손 정원하 같은 양명학자들이 망명해서 독립운동 합니다. 그런데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홍승헌, 정원하를 찾아보면 세상 떠난 해가 물음표로 돼 있어요. 이러니까 대한민국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거예요. 나라 팔아먹는 데 가담한 쪽은 계속 호사를 누리는데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분들은 생사조차 모릅니다. 최소한 명예라도 높여줘야 되는데 이게 안 돼 있는 겁니다. 이상을 선택해서 자기 몸을 던졌으면 그 명예를 후대인들이 기려줘야 하는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서는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가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웁니다. 그리고 또 충청도 진천에 있는 양명학자들과 경상도 안동에 있는 남인 계열의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같은 인물이 만주로 망명해서 횡도천에 모였다가 추가가라는 마을로 이주해 경학사라는 민단자치조직을 만듭니다. 저는 이 경학사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요,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100년 전인 1911년 음력 4월경에 일단의 양반 사대부들이 만주의 추가가라는 마을 뒷산, 대고산이라는 곳에 모여서 노천군중대회를 엽니다. 노천군중대회라는 민주적 집회를 하고 그 결과로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를 만들고 경학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일본을 구축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을 꾸는 겁니다. 나중에 많은 독립군 지휘관이 이 신흥무관학교에서 나옵니다. 나라가 망했을 때 나라 팔아먹은 쪽에서 막대한 은사금을 받고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자기 모든 걸 던져서 만주로 망명하고 추가가에 모여서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었던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를 찾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전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의 답이 나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사회 불만지수는 가난할 때보다 훨씬 높지 않습니까? 그 물질에 걸맞은 정신을 못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제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을 비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론사관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고 일제 식민사관은 일본인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봐야 합니다. 세계 10대 교역국이라는 덩치에 걸맞은 정신세계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이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안동에서 망명한 석주 이상룡 선생이 ‘서사록’이라는 망명일기를 남기는데 그 기록을 보면 일제가 나중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우리 역사를 왜곡하리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써놓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은 아직까지 한사군은 평양 중심, 한강 이북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북공정의 주요 논리입니다.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이 한사군은 한강 이북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고조선사 같지만 대한민국사이자 현대 영토 문제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15일에 해체됐지만 조선사편수회는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역사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사군이 설치되었을 당시에 쓰였던 사마천의 ‘사기’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같은 책은 한사군의 위치를 ‘재요동(在遼東)’, 즉 ‘요동에 있다’고 써 놨습니다. 요동이 만주죠. 모든 중국 역사서는 다 요동에 있다고 써 놨는데, 100년 전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강 이북에 있다고 새롭게 주장한 것을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나라의 정신계가 황폐한 겁니다.

    일본 고관만 죽이고 운전수는 살릴 방법이 없겠느냐

    이제는 새로운 역사관, 언어관으로 대한민국의 그랜드 디자인을 다시 짤 때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나라가 망했을 때 자기의 모든 걸 다 털어가지고 대한민국 건국의 씨앗이 된 분들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합니다. 구파 백정기라는 분이 있습니다. 상해 육삼정에 일본군 고위 장성들과 중국의 부패관료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폭탄을 던지려고 하는데 일본 고관만 죽이고 운전수는 죽이지 않을방법이 없겠느냐고 고민합니다. 아무나 무차별로 살상하는 알 카에다와는 정신적, 도덕적 차원이 다른 겁니다. 한국 독립운동이 이렇게 대단히 높은 도덕적 사고 속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나라가 제 길을 잡으려면 이 독립운동가들이 갖고 있던 마음, 나라 망할 때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로 망명해 처음 시작했던 마음, 일본과는 추호의 흔들림 없이 싸우면서도 관련 없는 사람은 한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던 마음으로 대한민국의 정신세계를 다시 세워야 하는 겁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의의
    이덕일

    1961년 출생

    숭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사도세자의 고백’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조선왕 독살사건’ ‘조선왕을 말하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


    엄형순 선생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 이규창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어린 규창에게 “너는 좋은 세상 만나면 나가서 어머니께 효도하고 살아라”면서 모든 일을 혼자 했다고 진술하고 사형 선고 받습니다. 법정에서 마지막 진술 때 “내가 비록 인간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한 행위지만 어쨌든 그 와중에 희생된 인물들에게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사형당합니다. 바로 이런 정신세계를 가지고 우리 후세를 가르치고 우리 공무원이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미래의 선진국으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그런 문제점 속에서 이런 귀한 씨앗들, 즉 나라 망했을 때 모든 것을 바치고 만주로 망명하는 선비정신이 있었고, 그런 정신이 현재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되살아날 때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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