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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⑩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 이미숙│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일본고전문학 mslee82@snu.ac.kr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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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초기 불교는 씨족 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부터 중앙집권체제가 진척되면서 씨족들이 세운 절은 차츰 관사(官寺)로 변해갔다. 더불어 사원과 승려 또한 국가기구에 편입되면서 국가 불교로 이행되었고, 불교를 둘러싼 논쟁은 정치적 대립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고대 일본에 전래된 불교가 단순히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에만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불교는 일본 열도의 전통적이며 폐쇄적인 사회구조와 의식형태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자로 기술된 교의를 이해하고, 사원을 건립하며, 금동불을 제작하는 데는 높은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즉, 불교에는 ‘문화’가 수반돼 들어왔던 것이다. 수준 높은 문화복합체였던 만큼 6세기 중반 고대 일본 사회의 토착문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587년 5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과 ‘천황’이라는 호칭 대신 ‘왜(倭)’와 ‘대왕(大王)’으로 불리던 야마토(大和) 시대의 일이다. 소가 우마코(蘇我馬子)가 이끄는 숭불파(崇佛派)와 모노노베 모리야(物部守屋)가 이끄는 배불파(排佛派)가 한 달 전 세상을 떠난 요메이 대왕(用明大王·재위 585~587)의 뒤를 이은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당시에는 군신들의 천거로 신왕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대립이 격화되면 싸움이 일어났다. 소가씨와 모노노베씨는 당시 일본 정치를 쥐고 흔들던 유력 호족들이었다.

먼저 공세를 취한 쪽은 모노노베 모리야였다. 그는 요메이 대왕의 이복동생인 아나호베(穴穗部) 왕자를 신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소가 우마코가 여러 왕자와 군신을 끌어들여 모노노베 모리야를 토벌하는 데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모노노베 모리야는 저택에 볏짚을 쌓아 성을 만들고 스스로 무기를 들고 강하게 저항했고 소가 우마코의 공격은 실패를 거듭했다.

‘숭불파’ vs ‘배불파’

이때 소가 우마코 측에 가담한 요메이 대왕의 둘째 왕자인 우마야도(廐戶)가 나쁜 기운을 없애준다는 붉나무(오배자나무)를 잘라 불법의 수호신인 사천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머리 꼭대기에 올려두고는 서약했다.

“혹시 저로 하여금 적에게 이길 수 있게 해주신다면, 반드시 뒷날 사탑(寺塔)을 세우겠습니다.”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의 보급을 약속한 것이다. 소가 우마코도 사원 건립과 불교 보급을 내걸고 진격했다. 그 덕분인지 모노노베 일족은 모두 죽었고, 소가 우마코는 승리했다. 그 뒤 약속대로 소가 우마코가 596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인 아스카데라(飛鳥寺)를 창건했다. 이보다 늦게 우마야도 왕자 또한 시텐노지(四天王寺)와 호류지(法隆寺)를 세웠다. 이 싸움에 참가한 우마야도 왕자가 바로 오늘날 일본인이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꼽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다. 당시 14세였다. 우마야도 왕자의 아버지인 요메이 대왕과 어머니인 아나호베 왕녀는 둘 다 긴메이 대왕(欽明大王· 재위 539?~571)의 소생으로 이복 남매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어머니는 소가 우마코의 아버지인 소가 이나메(蘇我稻目)의 딸들이었다. 우마야도 왕자는 이렇게 소가씨와 강한 혈연관계로 얽혀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 새로운 왕으로는 요메이 대왕의 이복동생이자 소가 우마코의 조카인 하쓰세베(泊瀨部) 왕자가 즉위했다. 그가 스대왕(崇峻大王·재위 587~592)이다. 그 또한 소가씨와 혈연관계로 얽혀 있었다.

720년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587년 5월부터 7월까지 벌어진 이 내전을 소가 우마코가 ‘평정한 난’으로 묘사해 모노노베 모리야가 일으킨 반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실은 이 싸움은, 소가 우마코와 모노노베 모리야 두 사람의 아버지인 소가 이나메와 모리야 오코시(守屋尾輿) 생전부터 시작되어 몇 십년간 대립해온 숭불파와 배불파 사이의 종교전쟁이기도 했다. 이 싸움을 끝으로 백제 성왕 때 일본으로 전래된 뒤 고대 일본의 국론을 분열시켰던 외래종교 불교는,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와 융합하며 일본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렇듯, 고대 일본이 불교를 수용하는 데 실질적으로 길을 연 것은 소가 우마코의 군사력이었다. 그리고 신도와 불교를 절충시키는 데 초석을 놓은 것은 뒷날 스이코 대왕(推古大王·재위 592~628)의 섭정이 된 우마야도 왕자, 즉 쇼토쿠 태자였다.

569년 일본의 첫 불교탄압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시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뉜다. 538년설과 552년설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확실치 않으나, 6세기 소가 이나메가 대신으로 있을 때 백제 성왕이 불상과 경전을 일본에 전했다는 사실만은 같다.

불교와의 만남은 고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52년 긴메이 대왕은 불상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신하들에게 수용 여부를 물었다.

“서쪽 나라가 헌상한 불상의 용모는 장엄하며 아름답고 지금까지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예배할 만한가.”

긴메이 대왕이 생각하기에 불교 수용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숭불파와 배불파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백제 성왕이 보내온 불상과 불경을 앞에 놓고 신하들에게 수용 여부를 물어본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다. 이에 소가 이나메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불교 수용과 숭불 입장을 밝혔다.

“서쪽 여러 나라는 모두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반해 모노노베 오코시와 나카토미 가마코(中臣鎌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배불의 견해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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