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 이미숙│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일본고전문학 mslee82@snu.ac.kr

    입력2011-09-21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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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초기 불교는 씨족 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부터 중앙집권체제가 진척되면서 씨족들이 세운 절은 차츰 관사(官寺)로 변해갔다. 더불어 사원과 승려 또한 국가기구에 편입되면서 국가 불교로 이행되었고, 불교를 둘러싼 논쟁은 정치적 대립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고대 일본에 전래된 불교가 단순히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에만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불교는 일본 열도의 전통적이며 폐쇄적인 사회구조와 의식형태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자로 기술된 교의를 이해하고, 사원을 건립하며, 금동불을 제작하는 데는 높은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즉, 불교에는 ‘문화’가 수반돼 들어왔던 것이다. 수준 높은 문화복합체였던 만큼 6세기 중반 고대 일본 사회의 토착문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587년 5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과 ‘천황’이라는 호칭 대신 ‘왜(倭)’와 ‘대왕(大王)’으로 불리던 야마토(大和) 시대의 일이다. 소가 우마코(蘇我馬子)가 이끄는 숭불파(崇佛派)와 모노노베 모리야(物部守屋)가 이끄는 배불파(排佛派)가 한 달 전 세상을 떠난 요메이 대왕(用明大王·재위 585~587)의 뒤를 이은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당시에는 군신들의 천거로 신왕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대립이 격화되면 싸움이 일어났다. 소가씨와 모노노베씨는 당시 일본 정치를 쥐고 흔들던 유력 호족들이었다.

    먼저 공세를 취한 쪽은 모노노베 모리야였다. 그는 요메이 대왕의 이복동생인 아나호베(穴穗部) 왕자를 신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소가 우마코가 여러 왕자와 군신을 끌어들여 모노노베 모리야를 토벌하는 데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모노노베 모리야는 저택에 볏짚을 쌓아 성을 만들고 스스로 무기를 들고 강하게 저항했고 소가 우마코의 공격은 실패를 거듭했다.

    ‘숭불파’ vs ‘배불파’

    이때 소가 우마코 측에 가담한 요메이 대왕의 둘째 왕자인 우마야도(廐戶)가 나쁜 기운을 없애준다는 붉나무(오배자나무)를 잘라 불법의 수호신인 사천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머리 꼭대기에 올려두고는 서약했다.

    “혹시 저로 하여금 적에게 이길 수 있게 해주신다면, 반드시 뒷날 사탑(寺塔)을 세우겠습니다.”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의 보급을 약속한 것이다. 소가 우마코도 사원 건립과 불교 보급을 내걸고 진격했다. 그 덕분인지 모노노베 일족은 모두 죽었고, 소가 우마코는 승리했다. 그 뒤 약속대로 소가 우마코가 596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인 아스카데라(飛鳥寺)를 창건했다. 이보다 늦게 우마야도 왕자 또한 시텐노지(四天王寺)와 호류지(法隆寺)를 세웠다. 이 싸움에 참가한 우마야도 왕자가 바로 오늘날 일본인이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꼽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다. 당시 14세였다. 우마야도 왕자의 아버지인 요메이 대왕과 어머니인 아나호베 왕녀는 둘 다 긴메이 대왕(欽明大王· 재위 539?~571)의 소생으로 이복 남매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어머니는 소가 우마코의 아버지인 소가 이나메(蘇我稻目)의 딸들이었다. 우마야도 왕자는 이렇게 소가씨와 강한 혈연관계로 얽혀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 새로운 왕으로는 요메이 대왕의 이복동생이자 소가 우마코의 조카인 하쓰세베(泊瀨部) 왕자가 즉위했다. 그가 스대왕(崇峻大王·재위 587~592)이다. 그 또한 소가씨와 혈연관계로 얽혀 있었다.

    720년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587년 5월부터 7월까지 벌어진 이 내전을 소가 우마코가 ‘평정한 난’으로 묘사해 모노노베 모리야가 일으킨 반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실은 이 싸움은, 소가 우마코와 모노노베 모리야 두 사람의 아버지인 소가 이나메와 모리야 오코시(守屋尾輿) 생전부터 시작되어 몇 십년간 대립해온 숭불파와 배불파 사이의 종교전쟁이기도 했다. 이 싸움을 끝으로 백제 성왕 때 일본으로 전래된 뒤 고대 일본의 국론을 분열시켰던 외래종교 불교는,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와 융합하며 일본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렇듯, 고대 일본이 불교를 수용하는 데 실질적으로 길을 연 것은 소가 우마코의 군사력이었다. 그리고 신도와 불교를 절충시키는 데 초석을 놓은 것은 뒷날 스이코 대왕(推古大王·재위 592~628)의 섭정이 된 우마야도 왕자, 즉 쇼토쿠 태자였다.

    569년 일본의 첫 불교탄압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시기는 두 가지 설로 나뉜다. 538년설과 552년설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확실치 않으나, 6세기 소가 이나메가 대신으로 있을 때 백제 성왕이 불상과 경전을 일본에 전했다는 사실만은 같다.

    불교와의 만남은 고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52년 긴메이 대왕은 불상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신하들에게 수용 여부를 물었다.

    “서쪽 나라가 헌상한 불상의 용모는 장엄하며 아름답고 지금까지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예배할 만한가.”

    긴메이 대왕이 생각하기에 불교 수용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숭불파와 배불파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백제 성왕이 보내온 불상과 불경을 앞에 놓고 신하들에게 수용 여부를 물어본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다. 이에 소가 이나메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불교 수용과 숭불 입장을 밝혔다.

    “서쪽 여러 나라는 모두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반해 모노노베 오코시와 나카토미 가마코(中臣鎌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배불의 견해를 표명했다.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寺).

    “우리나라 왕은 항상 천지사직의 백팔십신(神)을 춘하추동 제사 지내오셨습니다. 지금 그것을 바꾸어 타국 신을 예배하신다면 반드시 국신(國神)의 노여움을 살 것입니다.”

    ‘국신’이란 일본 고래의 신으로 가미(神)를 가리킨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부처를 ‘타국 신’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전래 당시 일본인에게 석가모니는 ‘타국 신’이었으며 불교는 ‘타국 신의 가르침’으로 이해된 것이다. 불교에 기대한 것도 치료와 연명 등의 현세 이익과 죽은 자의 공양이었다. 그래서 나라 안에 역병이 돌거나 하면, 국신이나 타국 신의 지벌이라고 여겼다.

    결국 긴메이 대왕은 소가 이나메에게 불상을 하사하고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도록 허락했다. 소가 이나메는 자기 집에 불당을 차리고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역병이 창궐하고 병에 걸려 많은 사람이 죽었다. 배불파는 숭불파가 타국 신을 예배한 탓에 국신의 지벌을 입은 것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배불파는 왕의 허락을 얻어 소가 이나메가 모시던 백제 불상을 오늘날 오사카인 나니와(難波)의 하천에 내던져버리고 가람에는 불을 질렀다. 역병 발생의 근원인 불상을 빨리 백제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최초의 불교탄압’이다. 569년경의 일이었다.

    그 뒤 한동안 불교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다 비다쓰 대왕(敏達大王·재위 572~585) 때인 584년, 백제에서 미륵 석불을 들여온 것을 계기로 소가 이나메의 아들인 우마코가 아버지 유지를 이어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는 고구려 승려인 혜편(惠便)을 스승으로 하여 세 명의 비구니를 출가시켰다. 저택 동쪽에 불전을 만들어 미륵 석상을 안치하고 법회를 열었다. 그때 사리가 나와 진기한 영험을 보였고, 소가 우마코의 불심은 더욱 깊어졌다. ‘일본서기’에는 불법이 여기에서 비롯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다음해인 585년, 법회를 열고 얼마 뒤 소가 우마코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점을 쳐봤더니, “아버지가 모시던 부처님이 지벌을 내리셨다”고 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 국신이든 타국 신이든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인간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여긴 것이다. 우마코는 더욱 간절히 미륵 석불에 수명을 연장해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나라 안에 역병이 돌아 오히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모노노베 오코시의 아들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배불파의 대표였던 모리야가 나서 왕에게 아뢰었다.

    “어째서 저희들의 의견을 들어주시지 않으십니까. 선친이 생전에 모시던 임금 때부터 전하 대까지 역병이 유행해 백성이 남아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소가씨가 불법을 일으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왕은 불법을 금했다. 모노노베 모리야는 직접 절로 가 탑을 무너뜨려 불태우고 불상과 불전에 불을 지른 뒤 타고 남은 불상은 나니와의 하천에 내다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불교탄압’이다. ‘간고지 연기(元興寺緣起)’라는 책에는 이때 불교탄압을 명한 주체가 비다쓰 대왕이라고 명기돼 있다. 긴메이 대왕 소생으로 왕좌에 오른 네 명의 임금, ‘비다쓰-요메이-스-스이코 대왕’ 가운데 비다쓰 대왕만 유일하게 어머니가 소가 이나메의 딸이 아니었다. 그 뒤 왕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천연두에 걸리고 부스럼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했다. 모두들 불상을 태운 벌이라고 수군댔다. 이에 왕은 다시 불도를 믿게 해달라는 소가 우마코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만 특별히 홀로 불도를 믿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스 대왕 암살과 일본 최초의 여왕

    그 뒤 불교는 비다쓰 대왕의 사후 즉위한 요메이 대왕 때 왕의 비호를 받고 한 걸음 나아갔다. ‘일본서기’에는 우마야도 왕자의 아버지인 요메이 대왕에 관해 “불법을 믿으시고 신도를 존중하신다”고 소개하고 있다. ‘신도’라는 용어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원래 신도는 경전도 없는 자연종교다. 산, 나무, 바위 등 자연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불교라는 외래종교, 즉 타자와 조우하면서 고래의 토착종교를 ‘신도’라는 용어로 재구축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그러나 587년 4월 병석에 누운 요메이 대왕이 “짐은 삼보(三寶=불교)에 귀의하고자 하니, 신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라”며 불교 귀의를 원하면서 불교와 신도는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요메이 대왕은 불교를 들여온 긴메이 대왕의 아들이며 일본 최초의 불교신자인 소가 이나메의 손자인 만큼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다. 왕이라는 정치적 입지 때문에 불교와 신도의 균형을 꾀해왔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개인적으로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왕의 바람은 숭불파와 배불파의 갈등만 키운 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즉위한 지 2년도 채 안 되어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로 숭불파와 배불파의 마지막 싸움, 일본 최초의 종교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592년 10월, ‘왕의 살해’라는 희대의 정치사건이 일어났다. 살해된 왕은 587년 종교전쟁 끝에 왕으로 옹립된 스대왕이었다. 어느 날, 스대왕은 조정에 헌상된 멧돼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언제쯤이면 이 멧돼지가 목이 베인 것처럼 내가 못마땅해하는 사람을 벨까.”

    소가 우마코를 살해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다. 이 사실은 바로 소가 우마코에게 전해졌다. 그 다음 달 군신들 앞에서 왕은 자객 손에 살해당했다. 왕이 자신을 즉위시켜준 외삼촌 소가 우마코에게 불만을 갖게 된 배경에는, 그의 세력에 눌려 왕으로서 권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의 지원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가는 불교와 유교 등의 외래문명 탓에 자신의 존재기반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왕으로서의 권위는 신도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사회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시대 일본에 들어온 것은 불교만이 아니었다. 유교와 도교도 들어왔다. 따라서 맹자가 이론화한 역성혁명사상도 들어왔다. 이 시대 중국은 수나라가 건국된 지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왕가가 왕을 계속 낼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것은 아마테라스 신의 후손이라는 신화에 의거한 것이기에, 신도를 부정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스대왕은 알아차린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숭불파의 추대로 왕이 되었지만, 배불파로 돌아섰고 소가 우마코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왕을 암살할 만큼 이미 숭불파인 소가 우마코의 세력은 단단했다.”

    스대왕이 암살당한 뒤 일본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 대왕이 592년에 즉위했다. 여왕의 나이는 39세. 그는 긴메이 대왕의 왕녀로 이복 오빠인 비다쓰 대왕의 비였다. 그녀 또한 소가 우마코의 조카였다. 소가 우마코는 당연히 스이코 대왕 때도 국정의 중심이었고, 이때 여왕의 조카인 열아홉 살의 우마야도 왕자가 섭정으로 정치에 나서게 되었다.

    고대 일본 토착문명과 충돌한 불교

    소가 우마코가 비다쓰 대왕 이래 4대에 걸쳐 정치적인 실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자매 두 명이 긴메이 대왕의 비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 두 왕비의 소생 가운데서 3명의 조카가 대왕으로 즉위했다. 스이코 대왕이 즉위한 것은 왕가와 소가 우마코 사이의 타협으로 보인다. 여왕이라면 좀 더 쉽게 휘두를 수 있을 거라는 소가 우마코의 계산과 그와 정면으로 대립하고 싶지 않았던 왕가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게 오늘날 쇼토쿠 태자로 불리는 우마야도 왕자였다.

    스이코 대왕 때 불교는 왕의 명령을 받은 소가 우마코와 우마야도 왕자에 의해 융성해졌고, 절도 잇따라 건립되었다. 고대 일본에서 불교가 드디어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듯 가장 먼저 소가씨가 받아들인 불교는 차츰 왕가와 다른 씨족들에게 수용돼 사원이 건립됐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초기 불교는 씨족 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부터 중앙집권체제가 진척되면서 씨족들이 세운 절은 차츰 관사(官寺)로 변해갔다. 더불어 사원과 승려 또한 국가기구에 편입되면서 국가 불교로 이행되었다.

    불교를 둘러싼 논쟁은 당초부터 정치적 대립 성격이 강했다. 소가씨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모노노베씨가 배불파로서 맞선 것도, 그리고 비다쓰 대왕의 불교 탄압도, 스대왕이 숭불에서 입장을 바꾼 것도 모두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얽혀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대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단순히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다. 불교는 일본열도의 전통적이며 폐쇄적인 사회구조와 의식형태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자로 기술된 교의를 이해하고 사원을 건립하며 금동불을 제작하는 데는 높은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즉, 불교에는 ‘문화’가 수반돼 들어왔던 것이다. 불교는 수준 높은 문화복합체였던 만큼 6세기 중반 고대 일본 사회의 토착문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륙의 선진국들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불교는 선진문화의 상징으로서 동경의 대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진문화를 동경해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도 당연히 많았고, 불교 자체보다도 기술 습득 등 현세 이익을 추구해 귀의하는 사람도 많았다.

    배불파의 대표로서 수구적일 수밖에 없는 모노노베씨와 숭불파로서 개혁적일 수밖에 없는 소가씨의 불교를 둘러싼 논쟁은 종교 대립이라는 겉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이 또한 토착문명과 외래문명의 충돌이기도 했다.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일본 호류지(法隆寺)의 백제관음상 모작.

    모노노베씨는 야마토 조정을 지탱한 여러 호족 가운데서 군사를 담당하는 씨족이었다. 모노노베의 모노(物)는 무기를 의미했다. 모노노베씨의 본거지는 오늘날 오사카 동쪽지방인 가와치(河內)로 야마토 강(大和川) 중류에 위치했다. 모노노베씨는 단순히 무력만을 지니고 왕을 모시는 씨족이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부족도 거느리고 있는, 오늘날의 군수산업가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신화에 나오는 ‘후쓰’라는 영검을 모시는 이소노카미 신사(石上神社)의 제사권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모노노베씨는 일본 고래의 신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소가씨는 야마토 조정의 경제를 담당한 씨족이었다. 소가씨란 아스카(飛鳥) 서북쪽에 있는 소가 강(曾我川) 부근을 영유한 호족을 의미한다. 소가씨는 원래 도래계 씨족과 돈독한 관계를 맺은 씨족으로 알려졌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다수의 도래인(渡來人)을 수하에 두고 문자해독 등 그들의 재능을 이용해 조정의 재정부문을 장악하고, 야마토 조정의 직할령인 미야케(屯倉)를 선진적으로 경영했다. 이러한 도래인과의 밀접한 관계가 소가씨의 개혁적인 성격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왕권 내에서 높은 정치적 지위도 유지할 수 있었다. 소가씨가 해외 선진문명국 모두가 믿는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데는 이러한 씨족의 존재기반과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으로 상징되는 선진문명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신불유 습합’의 원조, 쇼토쿠 태자

    6세기 초엽부터 고대 일본에는 새로운 대륙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활발히 유입되었다. 그즈음 동아시아 세계는 모두 불교라는 종교를 받아들여 국가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은 소가씨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 한 모노노베씨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 역사상 쇼토쿠 태자만큼 여러 문헌에서 다루어지고, 오늘날에도 각광을 받는 인물은 없다. 1930년부터 일본 화폐에 등장했고 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초상이 쓰이기 이전 1만엔권의 첫 모델이었다는 점만 봐도 쇼토쿠 태자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왕족 중에서 위대한 인물로 숭상받던 쇼토쿠 태자가 더욱 더 부각된 측면도 있다. 최근에는 그가 신도와 불교와 유교를 절충하려 했다는 점에 주목해, 외래문화의 좋은 점만을 받아들여 토착문화와 융합시켜나가는 일본 나름의 문화수용 방식을 처음으로 창안하고 실천한 인물이라는 점이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쇼토쿠 태자 자신이 ‘신불유 습합(神佛儒習合)’이라는 표현을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발상의 원조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서로 다른 교리 등을 절충하는 것을 ‘습합’이라고 한다.

    쇼토쿠 태자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일본서기’에 있다. ‘일본서기’는 편년체 역사서인 만큼 정리된 형태로 실려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요메이 대왕 조부터 섭정이 된 스이코 대왕 조까지 그에 관해 기술된 내용을 아울러 삶의 여정을 조망할 수 있다. 그밖에 10세기 초 헤이안 시대 때 쓰인 것으로 알려진 ‘쇼토쿠 태자 전력(聖德太子傳曆)’을 비롯한 일련의 전기물과 그림 등을 통해 쇼토쿠 태자는 민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위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구축되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쇼토쿠 태자상은 깊은 신앙의 베일에 덮여 있다.

    그는 요메이 대왕의 왕자로 본명은 우마야도였다. 외가인 소가씨 집 마굿간(=우마야) 문(=도) 앞에서 태어나서 붙은 이름이다. 고모이자 이모인 스이코 대왕의 황태자로 섭정이 되었다. 관위 12계와 헌법 17조를 제정해 내정을 정비했고, 견수사(遣隋史)를 파견해 선진 대륙문화를 도입하는 데 힘썼다. 불교에 귀의해 거처로 삼고 있던 이카루가 궁(斑鳩宮) 바로 옆에 호류지를 세웠고, 나니와에 시텐노지를 건립했다. 법화경, 유마경, 승만경의 주석서인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지었다. 고구려 승려인 혜자(惠慈)에게 불교를 배웠고, 백제에서 온 오경박사 각가(覺·#52898;)에게 유교를 배워 오의(奧義)를 터득했다고 한다. 49세의 나이로 죽을 때도 본인이 죽을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신불유(神佛儒)’는 한 그루 한 나무?

    요약하자면, 쇼토쿠 태자는 비범한 인물로 태어나 관위 12계와 헌법 17조를 제정해 율령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삼경의소’와 호류지 등 사원 건립으로 일본불교의 기반을 구축해 아스카(飛鳥) 문화를 꽃피웠다. 여기에 신도와 불교를 절충한, 위인 중의 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쇼토쿠 태자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그가 꿈꾼 정치는 불교와 유교 등 대륙의 선진문화에 의거해 국가의 통일성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603년에 추진된 ‘관위 12계’는 조정에 출사하는 관리의 위(位)를 열둘로 나누고 그에 따라 색이 다른 관(冠)을 쓰게 한다는 제도다. 고구려의 관위 13계제, 백제의 16계제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조정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던 호칭으로 씨족 단위로 부여되어 세습되던 ‘가바네(姓)’ 대신 개인 단위로 정치 서열을 나타내는 관위를 도입하고자 한 것이다. 604년에 제정된 ‘헌법 17조’는 조정을 구성하는 지배층, 주로 관료들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고자 만든 것으로 훈시의 성격을 띤다.

    두 제도 모두 씨족을 관료화함으로써 국가체제를 정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가씨가 관위 12계에서 빠지는 등 그 제도는 불완전해 당대에는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의 국가개혁 이상은 645년의 다이카 개신으로 이어져 실현되었다.

    쇼토쿠 태자가 유교와 불교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려 했다는 사실은 헌법 17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조에서 3조의 내용을 보자.

    “첫 번째로 이르길, 화(和)를 중요시하고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람에게는 모두 당(黨)이 있지만, 현자는 적다. 이에, 군부(君父)에 순응하지 않고, 또는 이웃사람과 싸운다. 하지만 위아래가 온화하고 의좋게 지내고, 일의 시비를 가려 합의가 이루어지면 사물의 도리는 저절로 통한다. 성취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두 번째로 이르길, 삼보(三寶)를 독실하게 공경하라. 삼보는 불법승(佛法僧)을 이른다. 즉, 모든 살아 있는 것이 다다르는 곳이고 모든 나라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어느 시대, 누구든 이 법을 존중하지 않겠는가. 사람 가운데 극악한 사람은 적고 잘 가르치면 따른다. 삼보에 귀의하지 않고 무엇으로 사악함을 바르게 할까.

    세 번째로 이르길, 조칙을 받잡으면 반드시 삼가 따르라. 군(君)은 하늘이고 신(臣)은 땅이다. 하늘은 덮고 땅은 받친다. 그리하여 사계가 순환하고 만물이 생성한다. 땅이 하늘을 덮으려 하면 만물은 파멸할 것이다. 따라서 군이 명하면 신은 받잡고, 위가 행동하면 아래는 따른다. 때문에 조칙을 반드시 삼가 따르라. 삼가 따르지 않으면 스스로 멸할 것이다.”

    헌법 17조는 관리가 왕의 명령을 받아 직무를 잘 수행하고 백성을 다스릴 때 지켜야 하는 규범을 정리해둔 만큼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를 숭상할 것을 권장하는 조문을 두 번째로 배치한 것은 험난했던 불교수용 과정을 되돌아보았을 때 크나큰 진보다.

    쇼토쿠 태자의 신불유 습합을 한마디로 나타내주는 것으로는 “신도를 줄기로 하고 불교를 가지로 하여 뻗게 하고 유교적 예절을 무성하게 하여 현실적인 번영을 이룬다”라는 구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구절은 사카이야 다이이치(堺屋太一)씨의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실린 내용이다. 신도와 불교와 유교를 한 그루의 나무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에 비유하면서, 일본이라는 한 그루의 나무를 이루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로 융합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사실 쇼토쿠 태자 관계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다.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俱)의 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요시다 가네토모는 15세기 중후반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신도가다. 요시다 신도의 창시자로 불교보다 신도의 우위를 주장했다. 그의 신불 습합 사상은 다음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일본은 종자를 돋아나게 하고 진단(중국)은 지엽(枝葉)으로 나타나고 천축(인도)은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불교는 만법의 꽃과 열매다. 유교는 만법의 줄기며 잎이다. 신도는 만법의 근본이다. 그 두 종교는 모두 신도에서 분화된 것이다.”

    우마야도 왕자와 쇼토쿠 태자 사이

    요시다는 이 설의 출처로 ‘우에노미야 태자 밀주(上宮太子密奏)’라는 책을 들고 있지만, 이 책은 실재하지 않는다. 14세기 신도 연구가이자 학승이었던 지헨(慈遍)의 저서에도 비슷한 견해가 보인다. 하지만 우에노미야 태자, 즉 쇼토쿠 태자의 권위를 이용해 신도가 불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 그의 신불유 습합 사상은 그 진위와는 관계없이 쇼토쿠 태자 이래 일본에 뿌리내린 신불유 절충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왕족의 한 사람으로서 우마야도 왕자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과연 그가 전하는 바와 같은 모든 일을 다 했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제기돼왔다. ‘일본서기’ 등 쇼토쿠 태자에 관한 사료는 우마야도 왕자가 죽고 나서 100년이나 지난 나라(奈良) 시대에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쇼토쿠 태자의 업적으로 알려진 모든 것은 917년 성립되었다는‘쇼토쿠 태자 전력’에 쓰여 있을 뿐이다. ‘일본서기’만을 보더라도, 관위 12계를 쇼토쿠 태자가 만들었다는 기술은 없다. 다만 ‘조구 쇼토쿠 법왕 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이라는 책에 태자가 소가 우마코와 함께 제정했다고 나와 있을 뿐이다. 헌법 17조 또한 “황태자, 몸소 처음으로 헌법 17조를 만드셨다”는 구절이 ‘일본서기’에 명시돼 있지만, 이 또한 조문에 쓰인 표현 등을 보았을 때 7세기 후반 덴무(天武·재위 673~686) 조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또 하나는 ‘니혼쇼키’에 기술된 ‘황태자’라는 호칭이다. 쇼토쿠 태자는 우마야도 왕자, 도요토미미(豊聰耳) 왕자, 우에노미야(上宮) 왕자, 황태자 등으로 기록돼 있다. 황태자는 천황이 있어야 존재하는 호칭이다. 일본에서 천황제는 호류지 불상에 새겨진 글귀 등을 근거로 스이코 대왕 때부터라는 설도 있지만, 이들 불상이 670년 호류지가 불탄 뒤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져 신빙성이 없다. 고대 일본에서 ‘일본’과 ‘천황’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7세기 후반 덴무-지토(持統·재위 690~697) 조부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쇼토쿠 태자가 섭정으로 있던 스이코 대왕 때 ‘황태자’라는 호칭은 있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에 기록된 쇼토쿠 태자 관련 내용은 8세기 초 ‘일본서기’ 편찬자와 그 시대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쇼토쿠 태자’라는 호칭 또한 751년 성립된 ‘가이후소(懷風藻)’라는 한시집의 서문에 처음 보인다. 즉, 쇼토쿠 태자는 후대에 붙은 호칭으로, 사후에 추증된 시호(諡號)의 일종으로 보인다. ‘쇼토쿠(聖德)’라는 것은 부처님에게 구비된 뛰어난 덕, 또는 불교에 깊게 통달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어, 그 자체로 우마야도 왕자 사후에 일어난 쇼토쿠 태자 신앙의 산물로 보인다.

    이러한 의문에서 오야마 세이치(大山誠一)씨는 ‘쇼토쿠 태자 허구설’을 주장했다. 요메이 대왕의 아들로 이카루가 궁에 살았으며 호류지를 건립한 역사상 실재 인물인 우마야도 왕자를, ‘니혼쇼키’의 편찬자들이 의도적으로 ‘쇼토쿠 태자’라는 가공의 성인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701년에 편찬된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으로 완성된 율령국가의 주재자인 천황의 모델로서 중국적인 성천자(聖天子) 의상을 그리고자 했고, 이야말로 쇼토쿠 태자의 신격화이며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쇼토쿠 태자 신앙은 7세기 후반 불탄 호류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성립되기 시작했고,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이러한 태자의 이미지를 모아 유교사상 등을 가미해 쇼토쿠 태자상을 완성했다는 견해도 있다.

    어찌됐든 ‘일본서기’가 편찬된 720년경에 쇼토쿠 태자는 이미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쇼토쿠 태자 신앙의 흔적은 지금도 존재하는 ‘태자당(太子堂)’을 통해 볼 수 있다. 태자당은 쇼토쿠 태자의 상(像)을 안치해놓은 불당이며, 쇼토쿠 태자는 일본의 불교를 중흥시킨 원조로서 종파와 관계없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교신자였던 우마야도 왕자가 쇼토쿠 태자로서 여러 문헌에 기술된 모든 일, 특히 신불유 절충의 초석을 놓았든, 아니면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정치적인 목적 아래 쇼토쿠 태자를 신격화했든, 고대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고 150여 년이 흐른 뒤인 8세기 초 신도와 불교 절충 사상이 일본 사회에 뿌리내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외래문화 수용방식 ‘용광로’

    일본 근대문학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작품 가운데 1922년에 나온 ‘신들의 미소’라는 단편이 있다. 16세기 후반 대항해 시대,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으로 포교하러 와 남만사(南蠻寺)라는 교회를 세우고 겉으로 보기에 순조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느낌에 그는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 곳곳에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 중에 아마테라스 신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하기도 하다가, 한 늙은 영(靈)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일본에 전래되어온 외래의 사상과 문화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듣는다. 기독교 이전에 일본에 들어온 노장사상, 유교철학, 불교는 모두 어디에나 깃들어 있는 영들의 숨결로 부드러워져 일본 풍토 속에서 질적으로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한 뒤, 노인은 이렇게 말을 맺는다. “우리들의 힘은 바꾸는 힘입니다”라고.

    아쿠타가와가 작품 속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에 전래된 불교 또한 신도와 절충됐다. 나라 시대 때인 8세기 초부터 신사 경내 신궁사(神宮寺)에서는 스님이 신사 앞에서 불경을 외는 등 신사 제사를 불교식으로 지냈고, 그 뒤 헤이안 시대에 와서는 불교를 우위에 둔 신불 습합의 논리가 펼쳐졌다. 이에 따라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의 경우 대일여래(大日如來·밀교의 본존 불상)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불교 우위의 이러한 논리는 13세기 후반부터 신도 측의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메이지(明治) 시대에 들어서면서 1868년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이 내려졌다. 신사에 불상 등을 두거나 불사를 올려서도 안 되며 신사의 관리와 제사도 승려가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도를 국교로 하는 근대 천황제국가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국가신도가 해체될 때까지 불교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오랜 세월을 거쳐 신도와 더불어 일상생활 속에 뿌리를 내려왔기에, 신불 습합 의식은 쉽사리 쇠퇴하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인은 아무런 마음의 갈등 없이 아기가 태어나면 대부분 신사에 가서 현세의 행복을 빌어준다. 해마다 정월 초에는 반드시 신사에 참배해 한 해의 평안을 빈다. 결혼식은 본인의 바람에 따라 신도식이든 불교식이든 기독교식이든 골라 올린다. 죽어서는 대부분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절에 딸린 묘에 묻혀 내세의 안녕을 바란다. 불교의 우란분에 해당하는 8월 중순 무렵에는 전국의 절이 가장 바쁘다고 할 정도로 조상의 영을 맞아들여 불사를 올린다. 한 집안에 신을 모시는 신단인 가미다나(神棚)와 불단(佛壇)을 함께 모셔두고 살아 있는 자의 하루하루의 안녕과 죽은 조상들의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빈다.

    누군가는 이러한 일본인의 외래문화 수용방식을 ‘용광로’에 비유했다. 모든 외래의 문화가 일본에 들어오면 그것은 용광로 속에 들어가 녹아 일본 고유의 것과 섞인다는 것이다. ‘신들의 미소’에 나오는 ‘바꾸는 힘’, 이것이 바로 일본의 문화 수용방식이었다. 오늘날 ‘장례식 불교’로 변한 일본 불교의 현주소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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