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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⑧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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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년간에 걸친 일련의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그리스군을 격퇴시킨 아타튀르크는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서 1922년 11월 술탄 제도를 폐지했다. 이듬해인 1923년 7월에는 연합국과 ‘대국민회의를 터키의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는 ‘로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과거 세브르 조약에 의해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0월29일 앙카라를 수도로 한 터키공화국 출범이 정식으로 선포됐다.

술탄 제도 없애고 1923년 터키공화국 출범 선포

아타튀르크는 같은 날 새로운 공화제 국가의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193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15년 이상 이어진 재임 기간 아타튀르크는 신생 터키공화국을 기존의 이슬람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서구화된 국가로 변신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 경제 ,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당시 발전된 서구 사회를 모델로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일환으로 1925년에는 서양식 옷 착용이 권장되면서 이슬람 전통 복장이 폐지됐다. 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인 페즈(fez) 모자(터키 사람들이 애용하는 챙 없는 원통형 모자)를 봉건주의 상징물로 보고, 이 모자 착용을 금지하고 서양식 모자를 쓸 것을 권장했다. 그 자신도 스스로 유럽식 복장과 모자를 쓰고 다녔다. 여자들 역시 전통적 히잡 대신 서양식 옷을 입고 다니도록 했다. 1926년에는 새로운 민법이 제정되어 일부일처제를 비롯한 남녀평등권을 도입했고, 1930년에는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1928년에는 종래의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를 약간 변형한 터키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고안됐다. 새로운 표기법 도입으로 일반 국민이 더 쉽게 터키어를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됐으며, 정부에서는 6~40세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교에 나가 새로운 알파벳을 익히게 했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 재임 기간에 터키 문맹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한편 아타튀르크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의 정책에 대한 반대 세력을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그의 신정부에서 일부 반대 인사들은 강제로 국외 추방되기도 했으며, 1925년에는 사회질서법을 발효시켜 체제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단체는 언제든지 폐쇄시킬 수 있도록 했다.

1937년 아타튀르크가 56세가 되던 해부터 그의 건강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해, 1938년 이스탄불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그의 병명은 간경변증이었다.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10일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5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아타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 패배 후 풍전등화 신세인 터키를 국민의 단결된 지지를 바탕으로 살려낸 인물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그의 개혁 정책을 이슬람 정신을 손상하는 것으로 비난하기도 했지만, 국민 대부분은 이슬람이 민주주의와 공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그의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이 때문에 1934년 터키 국회는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란 경칭을 수여했다. 이후 이 이름은 그의 옛 이름과 함께 그를 상징하는 호칭이 되면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남았다.

그런데 아타튀르크 주도하에 현 터키공화국이 출범한 지 85주년이 된 2008년에는 터키에서 그의 일대기를 그린 한 다큐멘터리 필름이 국민의 구설에 올랐다.

‘무스타파(Mustafa)’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터키의 유명 언론인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칸 뒨다르(Can Dundar·1961~)가 제작, 감독한 작품. 그런데 이 필름에서 뒨다르가 터키 국민으로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웅인 아타튀르크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를 모독하는 것 자체를 범죄시하는 터키의 많은 사람은 이 필름을 보고 나서 뒨다르를 강력히 비난했다.

남녀평등권 도입, 터키어 표기법 도입…강력한 개혁 드라이브

이 필름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되었던 묘사는 그의 음주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아타튀르크는 앙카라의 집무실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매일 세 갑의 담배를 피우고, 병째 술을 마시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터키 국민들은 이 또한 아타튀르크를 호주가로 묘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 아타튀르크의 과도한 음주는 사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터키의 국민주로 불리는 ‘라키’라는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영화에서 마시는 술도 바로 이 술이다. 아타튀르크는 실제 종종 늦은 밤까지 그의 친한 친구들이나 각료들과 어울려 라키를 마시면서 세상사를 논하기도 했다. 개혁 정책 중 이슬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되어오던 금주법을 폐지한 것도 아타튀르크가 대단한 애주가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사망 원인인 간경변증도 음주와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정설로 알려져 있다. 아타튀르크가 즐겨 마신 술 라키는 알코올 도수가 매우 높은 독주로, 비록 물을 섞어 농도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음용하면 그 자체로 몸에 상당히 부담이 될 수 있는 술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지만 터키의 국민주이자 아타튀르크가 즐겨 마셨던 라키는 어떤 술일까?

라키(raki·터키식 발음으로는 ‘라크’에 가깝다)는 포도주스를 1차 증류해 ‘수마’(suma)로 불리는 포도주정(grape alcohol)을 만들고, 이를 다시 아니스 열매(aniseed)와 함께 2차 증류해 만든 술이다. 포도주스는 건포도 또는 생포도에서 추출하는데, 아무래도 생포도로 만든 제품을 고급품으로 간주한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포도주스를 짜고 난 포도 찌꺼기를 주로 이용했다. 당시 포도 찌꺼기 공급이 부족할 때는 외국에서 값싼 재료로 대량 생산한 주정을 수입해 라키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포도 대신 사탕무(sugar beet) 등으로 만든 주정을 사용하는 제품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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