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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도구는 진실”

정호승 시인

  • 이소리│ 시인, 문학in 대표 lsr21@naver.com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도구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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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문예의 성찰-고교시를 중심으로

▼ 고교 때 경희대 전국고교문예작품모집에 당선해 1968년에 경희대 문예대학생으로 입학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쓴 작품도 시였나요?

“6회 대회였죠. 저는 시를 써서 당선한 게 아니라 평론을 써서 당선했어요. 평론 당선은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제목이 ‘고교문예의 성찰-고교시를 중심으로’였어요. 그 평론을 쓰기 위해 어머니에게 ‘학교(고교)에서 연락 오면 아프다고 하십시오’라고 핑계를 대도록 하고, 1주일 동안 집에 틀어박혀 120매 정도를 썼어요. 그 평론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분은 그때 심사위원이었던 김우종 선생님이었죠.”

경희대에서는 지금도 전국고교문예작품을 공모하고 있지만, 그때에도 전국 고교생들이 쓴 문예작품을 모집해 당선한 학생에게는 1년 동안 문예장학금을 주었다. 재학 중에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제를 거쳐 기성 문인이 되면 졸업할 때까지 총장 장학금을 줬다. 시인 정호승은 1년 동안 문예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다가 1969년 휴학을 한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최종심에서 떨어져 학비를 더 이상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때 경주에 있는 외갓집인 초가 암자에 들어가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시를 써서 다시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또다시 최종심에서 미끄러진다. 시인이 1970년 그해 자원입대를 한 것도 휴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럼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된 때는 군인 신분이었군요.



“그렇죠. 근데 참 안타까운 일은 제가 시로 당선한 그해 ‘대한일보’가 없어졌어요. 그때가 유신 초기였는데, 대한일보 사주인 김연준 이사장이 수재의연금을 모아 포탈했다는 혐의로 그만…. 저로서는 나자마자 엄마가 죽은 것과 같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태어나게 해준 것만도 감사한 일이지요. 등단을 어디로 하든 태어났으면 스스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너무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어 스스로의 삶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신춘문예 당선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어요. 시작이 곧 끝이 되어서는 안 되죠.”

정 시인은 “(대한일보 폐간으로) 엄마 젖도 못 먹어 죽어야 했지만, 40년 동안 그래도 스스로 시를 쓰며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라며 “시를 쓰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며, 어떤 중심(목표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귀띔한다. 그래서일까. 정호승 시인이 펴낸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나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에는 도시 변두리 삶이 많이 깃들어 있다. 시인 스스로도 농촌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대구나 서울에 있는 도시 변두리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나자마자 엄마가 죽은 것

▼ 왜 시를 쓰려고 했나요?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도구는 진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원’이 유일한 잡지였어요.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아버지께서 민중서관에서 나온 ‘한국문학전집’을 사놓으셨어요. 그 책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형과 누나들 읽으라고 사놓으신 거였죠. 그 책은 깨알만한 세로글씨에 2단으로 빼곡하게 편집해 중학생들이 읽기에는 꽤 어려웠어요. 아버지께서 특별히 그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저는 그래도 다 읽었어요. 고교에 다닐 때부터는 용돈이 생기면 대구 시내에 있는 헌책방에 가서 현대문학 작품을 사서 시, 소설, 평론 등 닥치는 대로 다 읽었어요. 이때 평론은 곧 작가론이자 문학사론, 문학쟁점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경희대에 평론을 응모한 것도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고교 때 읽은 ‘순애보’ 등 단편소설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시인의 눈에는 호기심이 톡톡 튀었다.

“그때 읽은 단편소설 가운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구절이 있어요. 어느 겨울날 창녀가 하는 말 가운데 ‘다들 불알이 탱탱 얼어붙었나? 왜 한 명도 안 오는 거야’라는 구절 말이에요. 이 구절을 읽고 당시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때부터 ‘어른들이 지닌 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어요.”

▼ 평론이나 소설을 더 좋아했는데, 왜 시를 쓰게 되었나요?

“사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대구 대륜고에 다닐 때 문예담당 선생님이나 문예반 학생들이 대부분 시를 썼기에 저도 덩달아 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된 것도 제가 소설가에 대한 꿈을 끝내 저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시인 정호승은 나이 41세 때인 1991년에 멀쩡하게 잘 다니던 ‘월간조선’을 그만둔다. 마치 고교 때 시인 아버지가 은행원을 그만둔 것을 대물림하듯. 시인은 직장생활을 처음 할 때부터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 10년 뒤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겠다는 야무진 꿈, 그것이다. 10년은 1년처럼 재빨리 지나갔다. 시인은 그때부터 6년 동안 소설에 모든 것을 건다.

▼ 소설이 시보다 더 적성에 맞던가요?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아무런 수입도 없이 소설에 매달리니까 긴 시간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6년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깨달았죠. 문학 장르가 여러 가지지만, 제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는 결국 시라는 것을. 그때부터 ‘아, 나는 소설이 아니다. 이러다가 시도 못 쓰겠다’ 생각하고 손을 놓았습니다. 시인으로서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난 셈이죠. 그해(1997)에 낸 시집이 ‘사랑하다 죽어버려라’입니다. 그 시집은 5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쓴 시예요. 저는 평소 떠오르는 시상을 노트에 메모했다가 집중적으로 시를 쓰는 스타일이에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시인이지 소설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자기를 빨리 알아야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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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리│ 시인, 문학in 대표 ls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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