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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⑩

고가(古家) 기왓장에 쌓인 세월

안동 편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고가(古家) 기왓장에 쌓인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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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에서는 세월이 냇물처럼 흐르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인생과 세상을 다 읽은 원숙한 시인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데 그 말소리조차 평소의 음성처럼 낮고 그윽하며 한편으로 어눌하다.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인 세월쯤이야 누군들 눈치 채지 못하랴만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는 세월 같은 것은 이런 큰 시인이 아니곤 도저히 바라볼 방법이 없다. 나아가 시인은 어린 뽕나무 잎새와 모과나무 열매 속에서도 자라온 그 세월이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 공사장’에서 재구성된다며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그것이 긍정이요 승인이란 뜻인가, 아니면 부질없다 웃긴다는 뜻인가, 물어볼 이치도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잠깐 앉았던 의자가 어느새 이 자존심 강한 양반 동네에서도 소중한 유물이 되어 모셔져 있는 사실에서 보듯, 시간의 구성은 어디까지나 지금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하회마을 솔밭 쪽에서 강 너머로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부용대다. 절벽의 오른쪽 끝에 깃들인 기와채가 류성룡의 독서당인 옥연정사요 왼쪽 숲 속에 든 집채가 서애의 형인 류운룡이 공부하던 겸암정사다. 형과 아우의 거처를 연결하는 좁고 위태로운 돌길이 그 바위벽 허리에 가로질러 나 있는데 사람들 눈에는 쉬 뜨이지 않는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이 바윗길에는 없는 길을 내겠다고 정으로 돌을 쪼아낸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서애가 고향에 머물며 책을 읽던 때는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걸어 형님께 문안을 드리고 학문을 논했다고 전한다. 옛 사람의 정과 예를 더듬어 생각할 수 있는 이 길을 걷는 경험은 하회의 속살을 보듬는 것과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버리고 산기슭 길을 걸어 도산서원으로 드는 때는 문득 석굴암을 찾아가는 토함산 산길이 연상된다. 그리고 서원 뜰 앞, 짓궂은 내 학생들은 간혹 이쯤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들고 그 뒷면에 그려진 서원 그림과 현실의 서원을 비교해보기도 했으니 나도 잠깐 돈 얘기를 해도 괜찮을 성싶다. 다른 인물보다 퇴계와 율곡이 비교되는데 왜 율곡이 5000원권이고 퇴계가 1000원권인가? 액면 따라 인물의 서열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식의 정의를 보더라도 율곡보다 학번(?)이 높은 퇴계가 마땅히 5000원권에 와야 하지 않는가? 이것은 실제로 안동 유림에서 있었던 얘기다. 여기엔 신사임당과 퇴계의 어머니 박씨 부인의 비교도 한몫 곁들여진다. 부덕으로 치면 박씨 부인이 신사임당에 뒤질 바 없는데 세상엔 신사임당만 드높게 현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 유림은 늘 이런 결론을 낸다. “나라 망하는 때까지 노론이 세상 권세를 다 쥐었는데 그 영향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산서원은 이러한 한가한 시비까지 곁들이면서 구경하면 한결 흥미가 있다. 퇴계의 위패 옆 어느 쪽에 류성룡과 김성일을 모시느냐는 문제 때문에 영남 유림끼리 붙은 200년의 서열싸움 ‘병호시비(屛虎是非)’를 떠올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도산서당이 있다. 이곳은 아직 서원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늦은 봄날이면 진도문으로 오르는 층계 길 양편에는 작약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당을 둘러보고 쪽문을 나서면 서원의 살림집인 고직사(庫直舍)들이 나타나는데 작은 방들과 곳간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이 살가운 공간에 서면 그 옛날의 고지기들이 문틈으로 전교당을 훔쳐보며 저희끼리 속삭이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흔 번 사직한 퇴계의 도산서원

조선시대 사대부 가운데 퇴계만큼 여러 번 벼슬하러 오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또 그럴 때마다 사정을 하며 물러나기를 많이 한 이도 드물 듯싶다. 일흔 번 넘게 사직소를 올린 것만 봐도 그렇다. 취미와 특기가 공부뿐인 퇴계에게는 장관이며 도지사 벼슬 같은 것은 성가시기만 할 뿐 전혀 영양가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퇴계가 임금의 명을 받고 정말 서울까지 올라왔다. “이번엔 벼슬을 받으실 모양이다”해서 서울에 있던 후배들이며 제자들이 죄 뚝섬으로 환영인사를 갔다. 나룻배에서 내린 퇴계는 곧 자리를 펴 북쪽 궁궐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리곤 이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돌아가버렸다. 명색이 신하인데 산골에서만 매번 사양하기가 미안해서 잠깐 서울 행차를 했던 것뿐이었다.

3년의 봄을 한양에서 지내니/ 시절은 망아지에 멍에 매기 재촉하네./ 한가한 뜻에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 밤낮으로 나라의 은혜만 부끄럽구나./ 내 집은 맑은 물가 즐겁게 노닐 수 있는 한가한 촌이라네./ 이웃에서는 봄 일을 시작하고/ 닭과 개가 울타리 지키는 곳/ 책이 있는 자리는 고요하고/ 아지랑이 개울물에 피어오르네./ 시내엔 고기와 새들 소나무 밑에는 학과 원숭이가 있네./ 즐겁구나, 산사람이여!/ 돌아간다 말하며 술잔 높이 드네.

-퇴계 이황 시 ‘봄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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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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