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2-04-19 11:5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알렉산드르 2세(Alexandr II Nikolaevich·1818∼1881, 재위기간 1855∼1881)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역대 황제 중에서 표트르 대제 이후 가장 획기적인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재임 기간 내내 반대 진영의 암살 기도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유명한 샴페인 제품 역시 그에 대한 집요한 암살 위협 속에서 탄생한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끈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18년 철저한 반혁명주의자로 유명한 부친 니콜라스 1세(1796~1855, 재위기간 1825~1855)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훗날 그의 개혁적 행보에 비해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큰 키에 준수한 용모의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선진국인 서유럽은 물론, 당시로는 드물게 러시아 자국 내를 6개월가량 여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황태자의 신분으로 처음 시베리아를 방문한 인물로 기록됐다. 1841년 23세의 나이에 마리아와 결혼해 6남2녀를 두게 되는데, 이 중 차남이 훗날 그의 왕위 계승자가 되는 알렉산드르 3세다.

    1855년 그가 37세가 되는 해의 3월이었다. 아버지 니콜라스 1세가 크림 전쟁의 와중에 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시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게 된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림 전쟁에 매달렸다.

    크림 전쟁(Crimean war·1853~1856)은 러시아가 1853년 흑해 연안의 크림 반도를 주 무대로 오스만튀르크,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연합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었다. 우리에게는 오늘날 ‘백의의 천사’란 별칭으로 잘 알려진 나이팅게일(1820~1910)이 활약한 전쟁으로도 유명하다. 이 전쟁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당시 오스만튀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 성지 관리권을 주장하자, 그리스정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니콜라스 1세가 발끈하면서 시작됐다. 명분은 이러했지만 러시아의 목적은 쇠약한 오스만튀르크 영토로 남하하려는 남하정책 일환이었고, 연합군으로서는 러시아의 이런 팽창 전략을 허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정치·사회개혁 나선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위협 속에 탄생한 황제의 샴페인 ‘크리스털’

    알렉산드르 2세.

    그런데 이 전쟁은 처음부터 러시아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이 때문에 니콜라스 1세는 전쟁 내내 분노와 실망에 사로잡혀 지냈고, 마침내 러시아의 패색이 완연한 전황 속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황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국정 쇄신을 위해 되도록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는 일련의 외교 노력 끝에 즉위한 지 1년 만인 1856년 3월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오스만튀르크로부터 빼앗은 영토 일부를 양도하고, 흑해에서의 제해권을 포기하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강화조약을 맺고 서둘러 전쟁을 끝낸다.



    알렉산드르 2세는 그의 부친이 저지른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자마자 곧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획기적인 내정 개혁 작업에 착수한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 그의 개혁 정책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농노해방이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지주 귀족들에게 소속된 농노제가 지속되는 국가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당시 정세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농민들의 불만이 더 고조돼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선제적으로 농노제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콘스탄틴 대공을 위원장으로 하는 ‘농민 생활조건 향상위원회’의 실무 작업을 거쳐, 마침내 1861년 3월 3일 그의 즉위 6년째 되던 해에 농노해방 칙령을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훗날 알렉산드르 2세가 ‘해방황제(解放皇帝)’로 불리는 것도 바로 그의 이러한 업적 때문이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 폐지 이후에도 일련의 개혁 정책을 지속시켜나갔다. 1864년에는 ‘젬스트보(zemstvo)’로 불리는 지방자치 제도를 도입해 과거 중앙정부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운영되던 지방행정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다. 이 제도는 처음에는 농촌 지역에만 적용되다가, 1870년에 큰 도시로 확대됐다.

    1864년에는 프랑스식 제도에 기반을 둔 사법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여기에는 법관 임기 보장, 재판 과정 공개 및 간소화, 배심원제 수립 등이 포함됐다.

    또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겪은 무기력한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병역제도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1874년에 발표된 국민개병제였다. 이전의 러시아 군대는 억지로 동원된 농노 계급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진 장교들도 정규 사관학교에서 정식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여서 제대로 된 군사작전을 펼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했고, 국방 인프라 확충에도 힘썼다. 이런 제도의 개혁에 힘입어 러시아는 훗날 1877년에 벌어진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농노해방과 알래스카 매각

    알렉산드르 2세의 집권 시절에 그가 내린 결정 중 주목할 만한 것은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기로 한 것이다. 당시 그는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알래스카 땅을 경쟁국인 영국으로부터 지켜내기 어렵다고 보고 그때 돈으로 70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았다.

    그러나 이 ‘위대한 해방자’이자 ‘자유의 차르(Czar)’는 과감한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과격파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에 대한 암살 기도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1866~1880년 사이 네 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계획 단계에서 그친 암살 기도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암살을 시도한 주체는 서유럽의 정치 변화에 영향을 받은 급진적 성향의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르 2세 집권 이후 과거에 비해 많은 개혁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차르 체제에 입각한 절대 왕정이 지속되는 데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공식적인 첫 암살 시도는 1866년 4월 4일에 발생했는데, 이때 암살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의 생존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 전역의 도시에 많은 교회를 짓게 했다.

    두 번째 공식적으로 기록된 암살 기도는 10여 년 후에 벌어졌다. 학생 출신의 알렉산드르 솔로피에프(Alexandre Soloviev)는 1879년 4월 20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를 향해 권총 5발을 쏘아댔지만 황제는 암살자의 공격을 지그재그로 피해 달아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데 세 번째 암살 시도가 있은 1879년 12월부터가 문제였다. 그전까지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시도는 개인적인 단독 범행으로 밝혀졌지만, 이때부터는 급진 혁명조직이 암살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직의 주체는 ‘나로드니키(Narodniki)’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간을 둔 ‘인민의 의지파(Narodnaya Volya)’라는 단체였다. ‘나로드니키’는 ‘인민주의자’라는 뜻의 러시아어로, 농촌 공동체를 바탕으로 농민을 혁명운동 주체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 이 단체의 이름은 ‘토지와 자유파’였는데, 1874년 분쇄된 후 혁명노선을 두고 대립하다가 1879년에 ‘인민의 의지파’와 ‘흑토 재분할파(Chyornyl peredel)’로 분열됐다. 이 두 분파 중에서 ‘인민의 의지파’는 보다 과격한 단체로서 테러 중심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단체는 황제가 탄 기차를 폭파시키려고 했지만, 해당 기차를 놓쳐 역시 미수에 그치고 만다. 이듬해에도 ‘인민의 의지파’에 의한 암살 시도는 끈질기게 계속됐다. 1880년 2월에 황제가 저녁식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겨울궁전의 식당을 폭파해 황제를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결국 그날 ‘인민의 의지파’ 조직원인 스테판 칼투린이 식당 아래층 경호원 휴게실에 장착한 폭탄이 터져 11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다행히 식사 시간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해 간신히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사건 이후 알렉산드르 2세는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그들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의회 제도의 시행을 검토하는 위원회 설립을 검토하는 등 유화 정책도 병행했다.

    ‘인민의 의지파’ 조직원이 던진 폭탄

    그러나 여러 차례 암살 기도를 극적으로 모면한 알렉산드르 2세도 결국 집요한 암살자들의 마수를 끝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때는 1881년 3월 13일 아침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수년간 매주 일요일마다 해오던 관습대로 군사점호에 참석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가를 달리고 있었다. 황제가 탄 마차는 6명의 용맹한 코사크 호위 기병이 둘러싸고 있었고, 또 한 명의 호위병은 마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마차 뒤로는 경호책임자와 경찰대장이 뒤따랐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일행이 다리를 통과하던 순간 좁은 인도에서 손수건으로 폭탄을 싸서 숨긴 채로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이 리사코프(Nikolai Rysakov)라는 ‘인민의 의지파’ 소속 젊은 조직원이 마차 쪽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음과 함께 코사크 호위병 한 명이 죽고 마부가 크게 다쳤지만, 황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무사했다. 암살 시도에 놀란 황제는 마차에서 나와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암살범 니콜라이가 갑자기 현장 주위에 몰려든 행인 중 한 명에게 소리를 쳤고, 이를 들은 경찰대장은 호위병들에게 즉각 황제를 현장에서 피신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인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2의 암살자가 황제를 정확히 겨냥해 또 다른 폭탄을 던졌다. 수없는 암살 기도를 극적으로 모면해왔던 알렉산드르 2세도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폭탄으로 치명상을 입은 뒤 현장에서 겨울궁전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결국 얼마 후 사망하고 만다. 뒷날 수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이날 제2의 암살자뿐 아니라 두 번째 시도마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세 번째 암살자까지 현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은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한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와 손자 니콜라스 2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부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르자 마자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보복이나 하듯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과 반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실 알렉산드르 2세는 암살당하기 바로 전날 반대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 선거로 선출되는 의회 설립안을 완성하고 발표만을 남기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3세는 즉위한 이후 이런 계획을 즉각 폐기했고, 러시아는 결국 입헌군주제를 좀 더 일찍 도입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알렉산드르 2세는 재임 기간 내내 불안한 정국 속에 반대파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만큼 즉위 후 일찌감치 암살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그의 걱정과 예민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술이 바로 오늘날까지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샴페인 ‘크리스털(Cristal, 영어로는 Crystal)’이다.

    크리스털 샴페인은 짙은 초록색 병을 특징으로 하는 여느 샴페인과는 달리 속이 환히 비치는 투명한 병의 유명 샴페인이다. 크리스털이라는 이름도 결국 이러한 병 모양에서 유래했다.

    세 황제의 만찬에 선보인 ‘크리스털’

    이 투명한 병의 탄생 기원은 1867년 6월 7일 당시 명성이 높았던 프랑스 파리의 카페 앙글레(Cafe ′ Anglais)에서 벌어진 이른바 ‘세 황제의 만찬(Three Emperors Dinner)’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 독일의 첫 황제가 되는 빌헬름 1세(1797~1888, 재위기간 1861~1888)는 당시 프로이센 왕 자격으로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를 카페 앙글레에 초대했다. 카페 앙글레는 빌헬름 1세가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석할 때 종종 찾았던 레스토랑으로,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서도 음식 맛이 훌륭하기로 소문 난 식당이었다.

    빌헬름 1세는 카페 앙글레의 셰프에게 비용에는 구애하지 말고 초대 손님을 위해 최고의 음식을 준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날 만찬에는 알렉산드르 2세 이외에도 그의 아들과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도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 자리가 오늘날 ‘세 황제의 만찬’으로 불리는 것도 빌헬름 1세, 알렉산드르 2세와 함께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식사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만찬에 초대받은 알렉산드르 2세는 평소 즐겨 마시던 샴페인을 빠뜨릴 수 없었다. 제정러시아 시절 러시아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당시 최고의 문화 선진국인 프랑스의 영향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프랑스어가 통용되고, 외교 문서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될 정도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고급술이 없었던 러시아에 프랑스의 술이 공급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탓에 알렉산드르 2세가 만찬에 샴페인을 준비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샴페인 특유의 무겁고 속이 거의 보이지 않는 짙은 초록색의 병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샴페인 병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 소형 폭탄을 장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프랑스의 유명 샴페인 회사인 루이 뢰드르(Louis Roederer) 사에 속을 훤히 볼 수 있는 투명한 샴페인 병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루이 뢰드르 사는 즉시 플랑드르의 유리 제조 장인에 의뢰해 병 밑이 편평하면서 병 전체가 투명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샴페인 병을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병에 자사의 최고급 샴페인으로 속을 채웠다. 이때부터 이 샴페인은 투명한 병의 모습을 따 크리스털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된 ‘세 황제의 만찬’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모두 16가지 최고급 음식으로 마련된 만찬은 당시 돈으로 1인당 400프랑씩 들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2012년 화폐 가치로 따지면 약 8800유로(1320만 원)이다. 만찬에 사용된 술도 그야말로 최고급 제품들이 다 동원되다시피 했다. 여기에 알렉산드르 2세가 미리 준비한 회심의 샴페인 크리스털이 포함됐다. 이날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리스털 샴페인의 금빛과 투명한 병을 통해 보이는 아름다운 기포에 찬탄했다고 한다.

    이후 크리스털 샴페인은 러시아 황실을 비롯해 일부 특권층에서 소비되다가 로마노프 왕조가 망한 이후인 1945년에 일반에 공개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현재 크리스털 샴페인은 흔히 ‘황제의 샴페인’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홍보되고 있다. 샴페인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포도는 샤도네이(Chardonnay)와 피노누아(Pinot Noir) 품종을 혼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털 샴페인은 원래 고급 샴페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법 비싼 가격에 팔려 쉽게 맛보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사실 크리스털 샴페인이 아니더라도 샴페인을 잔에 따라놓고 보면 매혹적인 기포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튤립 또는 플루트 모양의 맵시 있는 긴 잔에서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샴페인의 작은 거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별을 마시고 있다(I am drinking stars!)’라고 외친 프랑스의 수도승 동 페리뇽(Dom Pe′rignon)이 문득 생각난다. 샴페인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의 말을 굳이 되새기지 않더라도 샴페인은 영화 ‘007’의 단골 술로 각종 파티를 장식하는 낭만의 술로서 많은 사람에게 아름답고도 황홀한 상상의 꿈을 펼치게 만들어준다.

    샴페인 도시 프랑스 샹파뉴

    샴페인은 간단히 말하자면 1차 발효가 끝난 와인을 병에 넣은 뒤 2차 발효를 유도해 작은 탄산가스를 생기게 한 발포주다. 매력적인 거품과 코르크 마개를 딸 때 터져나오는 특유의 ‘뻥’하는 소리는 샴페인을 축제의 상징주로 만들었다. 하지만 샴페인은 비싼 고급술이다. 거품을 쏟아내는 방식의 음주 방법은 삼가는 것이 원칙이다. 단순히 거품 발포용으로 주로 사용되는 술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진짜 샴페인이 아닌 유사 샴페인으로 보면 된다.

    진짜 샴페인은 엄격한 원산지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오직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영어로는 ‘샴페인’) 지방에서 나는 발포주에만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때문에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오스카 샴페인’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던 유사 샴페인도 최근에는 발포주(sparkling wine)라는 명칭으로 생산되고 있다.

    세계적 명주 샴페인을 생산하는 샹파뉴 지역은 수도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160㎞ 정도 떨어진 곳이다. 샴페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를 재배하는 곳은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실제 샴페인을 만들고 숙성시키는 곳은 샹파뉴 지역의 상업 중심지인 랭스(Reims)와 에페르네에 밀집돼 있다. 두 곳 모두 철도망이 잘 연결돼 파리에서 어렵지 않게 당일 관광이 가능하다.

    랭스는 샹파뉴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도시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대성당(Cathedral of Notre-Dame of Reims)으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이곳 대성당은 프랑스 왕위계승권 분쟁으로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백년전쟁(1337~1453) 중 그 유명한 잔 다르크(1412~1431)의 주도하에 샤를 7세가 대관식을 올린 역사적인 장소다.

    에페르네(Epernay)는 랭스와 달리 인구 3만 명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세계 최대 샴페인 회사인 모에 샹동 본사가 있고, 샴페인 하우스가 밀집해 있다.

    샴페인은 가격 면에서나 품질 면에서 크게 ①비(非)빈티지 샴페인(non-vintage Champagne) ②빈티지 샴페인(vintage Champagne) ③프리미엄 빈티지 샴페인(premium vintage Champagne) 3종류가 있다.

    비빈티지 샴페인은 전체 샴페인 생산량의 85~90%를 차지하는 흔한 술이다. ‘전통(classic) 샴페인’으로 불리기도 하고, 특정 빈티지의 포도를 사용하지 않고 여러 해에 수확된 포도를 혼합해 사용하기 때문에 ‘다년 빈티지(multi-vintage) 샴페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빈티지 샴페인은 상표에 일부러 이를 알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특정 빈티지가 표기되지 않은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상파뉴 지역의 특성상 좋은 품질의 포도는 약 4, 5년에 한 해 정도 생산되기 때문에 해마다 빈티지 샴페인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비빈티지 샴페인은 이러한 여건을 감안해 만든 것이다. 법적으로는 한 해에 생산되는 포도 중 적어도 20%는 비빈티지 샴페인용으로 보관해야 한다. 그러나 각 샴페인 회사에서는 실제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포도를 비빈티지 샴페인 생산에 사용하고 있다.

    비빈티지샴페인에 사용되는 포도 품종은 일반적으로 3분의 2는 피노누아(Pinot Noir)와 피노뫼니에(Pinot Meunier)를, 나머지 3분의 1은 샤도네이(Chardonnay)를 사용한다. 숙성 기간은 법적으로 최소 15개월이지만 대부분 2년 반에서 3년 정도 숙성시킨다.

    빈티지 샴페인은 빈티지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특정 연도에 수확된 포도만을 사용해 만든 샴페인을 말한다. 따라서 상표에는 포도 수확연도를 나타내는 연도 표시가 있다. 빈티지 샴페인은 향도 풍부하고 가격도 비싸다. 빈티지 샴페인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좋은 포도밭의 포도를 사용하고 △비빈티지 제품에 비해 2~3년 더 숙성시키며 △포도 품질이 좋은 해에만 생산하기 때문이다. 포도 품종으로는 대부분 피노누아와 샤도네이를 쓴다.

    끝으로 최고 샴페인인 프리미엄 빈티지 샴페인이 있다. 이 샴페인은 각 샴페인 회사들이 자존심을 걸고 생산하는, 그야말로 최고급 제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품들은 기포가 더 작고 섬세하며, 향과 맛이 복합적이고 강하며, 뒷맛에 여운이 있는 게 특징이다. 프리미엄 빈티지 샴페인이 특별한 이유는 가장 좋은 포도밭에서 생산된 최고 품질의 포도를 사용하고, 숙성 연도(일반적으로 5~8년)가 더 길기 때문이다.

    프리미엄 빈티지 샴페인의 대표 제품들에는 앞서 말한 루이 뢰드레사의 크리스털 이외에도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고 있는 모에 샹동사의 동 페리뇽(Cuvee Dom Perignon), 뵈브 클리코사의 라 그랑드 담므(La Grande Dame) 등이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