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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⑨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사랑과 함께 죽은 ‘레전드’ 마리아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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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기니 집안에서는 나이 차가 많은 외국인 성악가를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메네기니는 집안의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고 1949년 칼라스와 결혼한다. 그를 위해 매니저로 일하며 전 세계를 함께 누볐다.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경제적인 안정 속에 칼라스는 음악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고, 일취월장하는 기량은 그를 최고의 스타 자리로 이끌었다. 이와 함께 특정 음(音)에서 소리가 갈라지고 투박한 메탈 음색에 스산하고 어수선한 느낌을 준다는 그동안의 혹평은 모두 사라지고, 팬들은 칼라스에 열광하면서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섰다. 결국 칼라스는 미운 오리새끼에서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쥔 백조가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칼라스는 겸손하고 무대를 위해 최대한 절제할 줄 아는 프리마돈나였다.

1953년에 만들어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호리호리한 헵번을 동경하던 칼라스는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1954년 10개월에 걸친 노력 끝에 체중을 30㎏ 줄이는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모든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주문해 시식할 정도로 음식을 좋아했던 그가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을 보면 그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로 보인다. 172㎝의 키에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로 변신해 본격적인 백조가 된 칼라스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명훈의 스승인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14~2005)는 다이어트 이후의 칼라스를 처음 보는 순간 너무 매혹적인 여인이어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칼라스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외모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탓이었을까. 이때부터 완벽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칼라스는 공연계약 파기, 공연 직전 출연 포기 등을 거듭하면서 불화와 분쟁의 장본인이 된다. 이탈리아 대통령이 관람하는 공연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을 중단하는가 하면 미국 메트로폴리탄극장과 계약서를 쓸 때는 “다른 프리마돈나보다 1센트를 더 달라”며 자신이 최고임을 계약서에 명시하라고 억지를 부린다.

칼라스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이탈리아의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1915~1982)에 의하면, 1955년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안드레아 세니에’를 공연할 때 그가 악보를 무시하고 테너인 자신보다 고음을 더 오래 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해서 무대 커튼 뒤에서 사나운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운 적이 있다고 한다. 이렇듯 칼라스는 극장 측이나 동료들뿐만 아니라 종종 본인의 팬들과 언론에까지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칼라스는 1000만 안티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동시에 1000만 명의 열광적 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될수록 칼라스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졌고, 극장 앞은 그의 공연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암표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동시에 그의 악명도 함께 뛰어오르게 된다.

“다른 프리마돈나보다 1센트 더 주세요”



1959년 세계 최고의 갑부인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1907~1975)가 개최한 선상파티에서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예기치 못한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다. 칼라스는 한때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부부와 가깝게 지냈는데, 로셀리니가 아내 잉그리드 버그만을 버리고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자 로셀리니와의 인연을 냉혹하게 끊어버린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는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신앙이 깊고 도덕적이라고 자신했다.

첫사랑 메네기니는 남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이자 매니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사랑에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면서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 오나시스의 장식품처럼 모든 행사에 동행하게 된다.

그 결과 컨디션은 엉망이 되었고, 음역은 점점 좁아져 고음에서 심각한 이상이 발생했다. 1960년 오나시스가 부인 티나와 이혼하자 칼라스는 남편 메네기니에게 노골적으로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 메네기니가 요구에 응하지 않자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다시 취득하면서까지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고집했다. 당시 그리스는 법으로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혼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취소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칼라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오나시스는 칼라스와 결혼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칼라스를 결혼 상대자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이 사실은 칼라스가 마흔이 넘어 극적으로 임신했을 때에 오나시스가 유산을 종용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에 눈이 멀었던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말을 따랐다.

오나시스가 세계 최고의 갑부였기에 사람들은 칼라스가 그의 도움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렇지만 칼라스 주변 인물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오나시스로부터 받은 선물은 강아지 두 마리뿐이었고, 칼라스가 쓰는 모든 돈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한다. 오나시스와 사귀면서 칼라스는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음반녹음을 더욱 활발히 했고, 그 덕분에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게 됐다.

칼라스는 1968년 그토록 사랑하던 오나시스가 미국 제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1917~1963)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1929~1994)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망연자실한다. 세기적 관심의 대상이었던 커플이었기에 칼라스가 감당해야 할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사회적인 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후 칼라스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고 했는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1922~2004)가 공연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찾아 무대의 숙적이었던 테발디와 극적인 화해를 했다. 그러고는 파리의 아파트에만 머무르면서 세간의 동정과 비웃음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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