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서울 이젠 동방예의지국 아니다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회

  • 정수복│사회학 박사

    입력2012-04-20 17: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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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이젠 동방예의지국 아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은 프랑스 파리에서 10년을 살다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온 한 중년 남자의 서울 관찰기록이 될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10년 만에 돌아와 다시 보고 느끼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은 10년 전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어버렸다는 옛말이 떠오를 정도다. 나의 이런 느낌은 어쩌면 배가 난파되어서 어쩔 수 없이 무인도에 살다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로빈슨 크루소의 심정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풍경들이 나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똑같은 사물이나 풍경도 관찰자의 관심, 경험, 지향점,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 아닌가?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시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오랜 기간 프랑스 문화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계속 한국 문화 속에서 살았던 사람과는 다른 이방인의 시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파리에서의 장기 체류는 나를 알게 모르게 프랑스화된 한국 사람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서울에 살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서울의 다양한 풍경을 조금 다른 눈으로 관찰하게 된다. 나는 서울에 사는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울 방배동 주변에 모여 사는 프랑스 사람들과도 다르다. 그들에게는 한국 문화가 이방의 문화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고 오로지 프랑스적인 관점에서 서울과 서울 사람들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국 문화 속에 들어가 있다. 아니 내 뼛속 깊이 한국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서울에서 초·중·고교와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내 몸속에는 한국 문화가 피처럼 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파리라는 이방의 도시에서 살았으니 내 마음속에는 프랑스 문화의 요소들이 여기저기 깃들어 있을 것이다.

    파리 17년, 서울 40년

    서울 관찰기록을 써내려가기 전에 관찰자의 신상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두는 것이 독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6·25전쟁이 끝나고 두 해가 지난 1955년 세상에 태어났다. 나의 할아버지 세대는 한 마을에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농촌을 떠나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이주한 첫 세대다. 나의 세대는 한반도를 떠나 미국과 유럽, 중국과 일본으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된 세대다.



    1982년 6월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1989년 초에 귀국했다. 그 후 서울에서 13년을 살다가 2002년 초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10년을 살다가 2011년 말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공간적으로 보면 서울-파리-서울-파리의 삶을 산 셈이고 시간적으로 보자면 이 세상에서 보낸 57년의 세월 가운데 4분의 1이 넘는 17년이라는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스무 살을 성년의 시작으로 치자면 성인기의 거의 반에 가까운 17년을 이방의 땅 파리에서 산 셈이다.

    나의 세대 가운데 프랑스에 유학한 사람은 꽤 있지만 나처럼 유학 이후 다시 프랑스로 가서 10년을 살다 돌아온 사람은 흔하지 않다. 유학생으로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아 교민이 된 사람들은 있지만 나처럼 두 번씩이나 파리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사람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서울과 파리를 번갈아 오가며 살 팔자를 타고 태어난 사람인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서울 생활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파리 생활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영원한 ‘떠돌이’다. 나는 서울에서는 파리 사람의 시선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하고 파리에서는 서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당연하고 익숙한 세상에 남보다 쉽게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무언가 낯선 풍경이 있어야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유학을 마치고 13년 동안 서울에 살다보니 서울 풍경이 너무 당연하게 보였다. 그래서 서울을 떠나 다시 파리로 갔다. 그런데 세계 어느 도시든 그곳에 한 해 두 해 살아가다보면 낯설게 보이던 풍경들이 점차 익숙해지고 신기하게 보이던 것들이 점차 사라진다. 신기함과 경이로움의 체험이 점점 줄어들어 간다. 파리에서 10년을 살다보니 파리가 ‘당연의 세계’가 돼버렸다. 그래서 다시 낯설게 보이는 서울로 왔다. 낯설음과 당연함 사이가 내가 숨 쉬며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다.

    이 글의 배경에는 나의 파리 생활 체험이 녹아들어 있다. 2002년 파리에 가서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5000개가 넘는 파리 시내의 모든 길을 다 걸어 다니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매일 오후 파리의 스무 개 구(區)를 샅샅이 걸어 다니는 ‘파리를 걷는 남자’가 되었다. 내가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고 글을 쓰던 서재의 책상 맞은편 벽에 파리전도를 붙여놓고 내 발로 직접 걸어 다닌 길들을 저녁마다 초록색 형광펜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지도는 점차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해 몇 해가 지나니까 온통 초록 숲이 되었다. 한 번 가본 길도 있지만 수백 번을 걸어 다닌 길도 있다. 요즈음 서울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내 눈앞에는 가끔씩 내가 파리에서 걸어 다니던 길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문화충격

    서울로 다시 돌아온 지 5개월이 지났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는데 점차 서울 풍경에 눈이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새봄이 오면서 나의 서울 생활이라는 나무에도 잔뿌리가 내리는 느낌이다.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유학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를 공유한다. 그 친구들에게는 나처럼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유럽의 흔적을 벗고 한국 사람이 됐다. 유학을 마치고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 느끼던 생소한 느낌은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고 여느 한국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당연한 시선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후배들에게 서울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느끼는 문화적 충격 또는 문화적 차이를 기록해서 글로 써보라고 권하곤 했다. 그런데 각자 서울 생활에 적응하면서 자기 전공 분야 논문을 쓰기에 바빠서 아무도 그런 체험을 글로 써서 발표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결국 강제적 논문 쓰기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고 파리에 한 번 유학한 게 아니라 두 번이나 길게 체류했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내가 그 일을 직접 담당하기로 했다. 한국과 프랑스라는 두 문화 사이를 오가며 느낀 나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서울과 서울 사람들을 다소 거리를 두고 관찰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나의 의무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서울의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 서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크고 작은 풍경들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낀 점을 적어놓아야겠다는 의무감이 이 글을 쓰게 했다. 기록해놓지 않으면 세월이 한 달 두 달 흘러갈수록 처음에는 새롭게 보이던 풍경들이 당연하고 일상적인 풍경으로 바뀌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시작하는 말이 다소 장황했다. 이제 서둘러 관찰기록으로 들어가자.

    풍경 #1 얼굴 표정

    서울 이젠 동방예의지국 아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

    2002년 다시 파리로 가서 살게 되었을 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물끄러미 승객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모두 다 제각각의 모습이었다. 각자 다 자기 나름의 분위기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라는 분위기를 얼굴에 풍기는 파리지앵들은 도도해보였고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다. 뭐 그렇게 잘났다고 그렇게 오만한 분위기로 앉아 있는지 다소 기분이 상할 정도였다.

    2012년 서울에 돌아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얼굴 표정에 개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느낌이 든다. 20대 여성들은 그들만이 공유하는 특성을 80% 정도 가지고 있고 20% 정도만 개인성을 드러낸다. 50대 남자는 90%는 공통 요소고 10% 정도만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튀지 말아야 한다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삶이 만들어낸 얼굴 표정들이다. 서울 사람들은 파리 사람들에 비해 겸손해보이지만 때로 지루해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 출신의 화가 이우환은 도쿄와 파리의 아틀리에를 6개월에 한 번씩 오가며 작업을 했다. 그는 파리에 가는 이유를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의 얼굴이 다양해서 삶의 활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 사람들보다도 무표정한 도쿄 사람들의 얼굴이 그에게 지루함과 답답함을 주었을 것이다.

    파리에 여행 가는 아시아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일반적으로 단조롭다. 1970년대에는 일본 사람들이 밀려가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한국 사람들이, 2010년대에는 중국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다. 단체관광을 가서 집단으로 함께 다니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나 거동에는 개인성이 없다. 단체관광이 아니라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다니는 한국 사람들의 경우에도 옷차림, 머리 모양, 얼굴 표정에 큰 차이가 없다. 가족적 유사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비슷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파리가 인종, 국적, 종교와 문화가 다른 이질적인 사람들이 섞여 사는 코스모폴리탄 도시인 반면 서울은 외국인의 유입이 거의 없었고 오랫동안 단일민족으로 자기들끼리 살아온 도시라는 점이 얼굴 표정의 다양성과 동질성을 어느 정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차이로 얼굴 표정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 개성과 특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집단의 동화와 순응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사회와 어른의 말을 잘 듣고 어른의 지시를 따르도록 유도하는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 사이에는 세상을 사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고, 그것이 얼굴 표정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풍경 #2 탈(脫)동방예의지국

    서울의 지하철은 파리의 지하철에 비해 훨씬 더 깨끗하고 쾌적하다. 여름이면 냉방이 되고 겨울이면 난방이 잘되며 정거장 안내가 소리와 영상으로 친절하게 이루어진다. 이상한 눈초리로 젊은 여성을 바라보거나 붐비는 시간에 육체적 접근(?)을 시도하는 치한도 많이 사라진 듯하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지하철에서는 서로 몸이 닿거나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파리에서는 지하철의 환승구간이나 지하철 차량 안에서 옆 사람과 스치기만 해도 ‘파르동’(Pardon!·미안합니다!)이라는 말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온다. 그들은 공공장소에서도 각자 자기가 관할하는 공간이 있는 듯 행동한다.

    그런데 서울의 지하철에서는 어느 정도 부딪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뭐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지하철에서 그 정도 부딪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무심한 얼굴 표정들이다. 예절이란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사양지심 예지단야(辭讓之心 禮之端也).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이야말로 예의의 출발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먼저 빨리 가려고 서두르다가 다른 사람을 치고 가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등에 메고 다니는 배낭이나 어깨에 걸친 가방으로 옆의 사람이나 뒷사람을 치고 다니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남의 발등을 밟아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동방예의지국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탈(脫)동방예의지국의 시대가 온 것인가? 아직도 예의를 따지는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격리시켜 노인석을 따로 만들어놓은 것도 눈에 띈다.

    파리의 지하철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순서는 전쟁에서 부상한 사람, 장애인, 임산부 다음에 노인이 온다. 그러나 우리는 노인이 우선권을 갖는다. 나는 여기에서 아직도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내세워 연장자를 우대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지하철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세대갈등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풍경 #3 훈계의 나라

    길거리를 걷다보면 휴대전화나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씩 보게 된다. 길거리의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아서 크게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는 통화 상대자에게 따지거나 훈계하거나 호통을 치는 경우도 있다. 돈 문제나 감정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상대방을 비난하고 위협하고 협박까지 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어느 중년 남자가 휴대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너 말이야, 인생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돼!”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한국 영화에 관심이 많은 파리지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은 이래라저래라 하는 도덕적 규제가 많은 사회인 것 같다.” 서울에서 종종 듣게 되는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발언은 파리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말이다. 각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남이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다. 돈 문제나 감정상의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그 사람이 사는 방식 전체를 싸잡아 “너 그렇게 살면 안돼!”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서울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근저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파리 사람들에게는 그런 전제가 없다. 각자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풍경 #4 소음

    세계 여러 나라의 도시들을 다녀보면 각각의 도시에 특유한 소리들이 있다. 일단 서울은 파리보다 소음이 많은 도시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자동차 바깥에 확성기를 장치하고 녹음된 내용을 크게 틀어놓고 다니는 자동차가 많다. 중고물건 팔라는 소리, 두부장수가 왔다고 알리는 소리, 아파트 단지 안에 시장이 섰음을 알리는 소리, 산지 직송 영광 굴비가 왔다고 알리는 소리, 영덕 대게가 왔다는 소리….

    길거리뿐만 아니라 아파트 실내에도 스피커를 통해 관리사무소에서 알리는 소리가 많다. 오늘은 아파트 전체 소독날이니까 협조해달라, 아파트 관리비 마감 날이다, 겨울철 수도관 동파에 대비해라 등등 아무 때나 자기들 마음대로 방송을 한다. 택시를 타면 운전사 마음대로 남녀 진행자가 나와 낯 뜨거운 소리를 해대는 방송을 크게 틀어놓고 있어 스피커가 가까이에 장착된 뒷좌석에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일은 고역이다. 참다못해 소리를 조금 줄여달라고 하면 운전사의 표정은 금방 굳어진다. 커피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점에 가도 자기들 마음대로 음악을 틀어놓고 있다. 종업원에게 소리를 줄이거나 꺼달라고 하면 어디서 외계인이 왔느냐는 표정이다. 10년 전에 다니던 동네 대중목욕탕에 가보면 때를 밀어주는 아저씨가 흘러간 가요를 틀어놓고 일을 하고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듣지 않을 수가 없다. 뉴코아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빵빵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외제 승용차 운전대 앞에는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리대게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 조심하라는 경적이었다. 그렇다 나는 서울의 이방인이다.

    풍경 #5 먼지

    서울에는 먼지가 많다. 셔츠를 이틀만 입어도 목이 닿는 부분에 검은 때가 앉아서 갈아입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파리에서는 셔츠를 일주일 입어도 그렇게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아파트 바닥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청소해도 먼지가 날아다닌다. 파리에서는 이틀에 한 번씩 청소를 하면 집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사장이 많고 기동성이 높은 ‘다이내믹 코리아’니까 먼지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늙은 도시 파리보다는 젊은 도시 서울이 요란하고 시끄럽고 먼지가 많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도 10년 동안 파리에 익숙해진 나의 감각기관들은 서울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눈감고 귀 막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서울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풍경 #6 음식 냄새

    내가 파리에서 살던 아파트는 1904년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2002년에서 2012년까지 그 건물에 살았으니까 2004년에 100주년을 보낸 셈이다. 물론 수도, 가스, 전기, 환기시설, 승강기 등은 몇 번에 걸쳐 보수 공사를 했겠지만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금 내가 서울에 살고 있는 아파트는 30년 정도 된 아파트인데 건축업자들과 동네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재개발을 하려고 촉각을 세우고 있다. 오늘날 새로 지은 한국 아파트의 서비스 수준은 세계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올라섰다. 그런 아파트들에 비교하자면 30년이 넘은 아파트는 거의 수명을 다한 아파트나 다름없이 취급된다.

    그러나 나는 파리에서 100년이 넘은 아파트에 살았으니 30년 된 아파트는 거의 새 아파트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욕실의 환기시설이 노후해 거의 작동하지 않아서 옆집, 윗집, 아랫집에서 아침 식사 준비하는 냄새가 온통 아파트 거실로 밀려들어 왔다. 창문을 열면 옆집의 부엌에서 나오는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냄새 대란이었다. 아침에 밥 대신 간단하게 빵을 먹는 습관을 갖게 된 나에게 온갖 음식 냄새는 참기 어려웠다. 냄새가 가장 심하게 새어나오는 욕실 천장의 사이가 뜬 부분을 폭이 넓은 스카치테이프로 막고 나니까 냄새가 덜 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아파트만이 아니라 길거리에 있는 포장마차나 곳곳에 있는 먹자골목에도 음식 냄새가 풍긴다. 냄새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향수를 자극하는 감각이고 음식이야말로 한 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이룬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갑자기 침입하는 음식 냄새는 나를 당황하게 하고 때로 불쾌하게 만들기도 한다.

    풍경 #7 어머니의 밥상

    귀향이나 귀국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려면 고향이나 고국을 떠나기 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어야 조국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실감할 수 있다. 어머니 없는 고향, 어머니가 없는 조국에서는 내가 정말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내가 정말 서울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이제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손수 차려준 밥상을 받았을 때다. 어머니가 손수 담근 열무김치와 어머니가 손수 요리한 된장찌개, 조기구이, 계란찜, 김, 불고기, 상추쌈 등이 가득 차려진 밥상 앞에서 나는 이제야 내가 서울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미국이나 일본, 러시아나 중앙아시아로 이민을 가거나 강제로 이주해 사는 동포들은 3세대가 내려가면 다 모국어를 잃어버린다. 겉모습은 한국 사람이어도 말은 그 나라말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잃어버리지 않는 한국 문화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김치를 먹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먹어 입에 익숙한 김치는 평생 먹어야 하는 음식이 되어버린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다가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자라 어른이 된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말이 ‘모국어’라면 어머니가 해준 음식은 ‘모국식’이 될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 어머니와 마주 앉아 모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모국식을 먹을 때 나는 내가 여전히 한국 사람이며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풍경 #8 ‘던킨도너츠’의 어머니들

    동네의 카페나 ‘던킨도너츠’ 매장에 들어가 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풍경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30대에서 40대로 보이는 이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 주제는 아이들의 성적관리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자녀를 둔 이 어머니들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시험 점수를 높여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느냐가 인생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 듯 열정적으로 토론에 임한다. 학부모끼리의 집담회도 있고 때로는 과외 선생님인 듯 보이는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학교 교실보다는 학원 교실이 시험 점수를 올리는 데 훨씬 중요하므로 아이를 어느 학원 어느 선생에게 보내느냐는 중요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아이의 성적은 아버지의 무관심과 어머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에 달려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교육열’이 아니라 ‘교육 과열’이다. 일류대학이라는 고지를 향해 돌진하는 점수 경쟁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현실주의적 신화가 학부모와 아이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래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들의 얼굴은 밝다. 고개를 돌리면 길거리에는 노란색 승합버스들이 줄지어 다닌다. 자동차 속에는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다. 영어 유아원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세계화 시대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유아원이라지만, 이를 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풍경 #9 담뱃불 빌리기

    강남고속터미널 주변이 완전히 변했다. 동쪽으로는 ‘자이’, 서쪽으로는 ‘래미안’이라는 이름의 고층 아파트 숲이 조성되었고 남쪽으로는 메리어트 호텔과 가톨릭서울성모병원, 효성빌딩 등이 높다랗게 서 있다. 강북에서 한강을 건너 강남으로 이어지는 반포대로를 따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래미안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퍼스티지’(first와 prestige의 합성어같다)상가의 길가 쪽에 ‘투 썸 플레이스(A Twosome Place)’라는 이상한 이름의 카페가 있다. 실내에서 흡연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실외에 테라스를 만들어 흡연자들을 배려하고 있다. 거기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둘이 서로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앞을 70대 중반의 노부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무언가를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젊은 여성들에게 다가가 담뱃불을 빌려온다. 할아버지는 입에 문 담배에 손녀뻘이나 될 법한 젊은 여성이 피우던 담배를 가져다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불을 붙인 다음, 그 담배를 다시 할머니에게 전한다. 할머니는 그 담배를 젊은 여성에게 전하며 고맙다고 인사한다. 할아버지는 들이마신 담배를 푸우 하고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울 이젠 동방예의지국 아니다
    정수복

    1955년 서울 출생, 연세대 정외과 졸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사회학 박사

    사회운동연구소

    KBS ‘정수복의 세상읽기’ 진행

    저서:‘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파리의 장소들’ 등


    이 풍경은 나에게 이중으로 낯설다. 10년 전에는 젊은 여성이 남이 다 바라볼 수 있는 대로변에서 버젓하게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젊은 여성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아니 그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훈계해야 할 의무였다. 그런데 이제 할아버지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조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낯설음은 이런 것이다. 파리에서는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하는데 나이와 성별이 그렇게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스무 살이 넘은 남녀는 모두 대등한 성인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남녀간의 내외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파리에서는 할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젊은 여성에게 직접 담뱃불을 빌렸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더 이상 옛날같이 장유유서와 남녀유별의 규범이 작동하지 않는데 아직 대등한 개인과 개인이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문화적 문법’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내가 볼 때 서울 사람들은 지나간 문법과 아직 오지 않은 문법 사이에서 눈치껏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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