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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④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싸움

  • 김민경| 전략기획팀 기자 holden@donga.com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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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탐욕, 명품 시대를 열다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구찌 쇼의 한 장면.

사치 경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외제니 황후는 특히 페티코트, 모자, 식기 등을 수십 개의 트렁크에 바리바리 실어 여행 다니길 좋아했다. 이때 곰팡이 슬지 않는 트렁크를 만들고, 남다른 ‘수납의 기술’로 발탁된 이가 바로 루이 비통이었다. 루이 비통은 반구형이었던 트렁크를 쌓기 좋도록 직육면체로 만들고 방수포를 씌우는 등 혁신적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나 훌륭한 아이디어의 특징은 누구든지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후 루이비통 브랜드의 역사는 물귀신 같은 모방 업체들을 따돌리기 위한 발상의 전환, 복제하기 어려운 디자인과 견고한 품질을 발전시켜 온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6년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는 알파벳 L과 V, 꽃과 잎의 그래픽으로 이뤄진 그 유명한 ‘모노그램’ 캔버스를 내놓았다. 이 역시 모조 방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상표권 등록(1905)까지 마쳐 이후 명품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모노그램’은 루이비통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3초 백’이라고 부를 만큼 흔히 보는 루이비통이 바로 모노그램 캔버스를 소재로 한다. 특히 일본 국민의 40% 이상이 소유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일본인의 루이비통에 대한 열광은 합리적인 설명을 넘어서는 터라 모노그램 문양이 일본의 우키요에 회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 무렵 피렌체에서 작은 마구상이 문을 열었다. 주인은 구치오 구치(1881~1953)란 젊은 청년이었다. 구치가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가문이었다. 격한 가족 싸움 끝에 집을 나와 영국으로 간 구치오는 런던 사보이 호텔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그는 귀족들의 가방을 눈여겨보며 제대로 된 가죽 가방을 만들겠다는 꿈과 자신감을 얻는다. 그는 곧 가죽과 공예 산업이 발달한 고향으로 돌아온다.



구치의 고향 피렌체는 또 어떤 곳인가. 피렌체는 앞서 언급한, 파리로 시집가 진주 다이아몬드 3000개 달린 드레스를 주문한 앙리 4세의 부인 마리 드 메디치의 친정이 아닌가. 파리에 비하면 많이 기울었지만 수백 년 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렸으며 뛰어난 장인들이 부를 쌓아 상공과 금융업이 발달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예술적 안목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구치오는 처음엔 마구상(1906)으로 시작했지만, 마차에서 자전거, 자동차로 이어지는 탈 것들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마구에서 영감을 얻어 귀족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로 여행할 때 갖고 다닐 수 있는 작은 가방, 벨트, 신발 등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구찌 공식 홈페이지는 당시 구찌의 가게에 ‘구름처럼 많은’ 손님이 밀려들었다고 기술한다.

구찌와 루이비통을 포함해 샤넬, 에르메스, 발렌시아가 등과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같은 진정한 의미의 명품들에 최고로 ‘좋은 시절’이었다. 유럽에서 왕과 귀족들은 이름만 남았지만 여전히 사치스럽게 살았다. 혁명으로 귀족을 몰락시킨 신흥 부르주아는 왕과 귀족이 입고, 먹는 폼을 따라 하느라 바빴고, 돈도 아끼지 않았다. 신흥 부르주아의 이러한 욕망을 사실적으로(꽤 시니컬하게) 그린 소설이 바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다.

부르주아들은 왕비와 황후의 단골이었던 루이비통에 가서 트렁크를 사고, 귀족이 즐겨 신는다는 구찌의 가죽 신발을 주문했다. 이뿐만 아니라 더 섬세하고, 더 사치스러운, 한마디로 더 귀족적인 물건을 얻으려고 솜씨 좋은 장인들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을 주문했다. 향수병은 크리스털로 만들어 황금이나 보석 뚜껑을 달았고, 향수 이름은 시인이 지었다. 적어도 일부 계층에게는 삶과 예술이 완벽하게 일치한 시기였다.

명성에 가려진 어두운 과거

한편으로 신대륙에는 록펠러, 카네기, 구겐하임, 밴더빌트 같은 재벌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유럽 귀족에 밀리지 않기 위해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돈은 너무 많았다. 미국의 재벌가는 유럽의 귀족과 혼사를 통해 고귀한 신분을 얻고 싶어 했고, 유럽의 몰락한 귀족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이해가 맞아떨어진 정략결혼이 대서양을 연결했다. 상심한 귀부인들은 명품과 보석을 쇼핑하고 작가들과 ‘교유’하면서 작품을 사주어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 신분상으론 평등한 세상이었지만, 소비가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 소비의 방식, 즉 무엇을 사느냐가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시대가 된 것이다(베블런, ).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던 명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위기를 맞았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샤넬 같은 프랑스의 대표적 디자이너들이 문을 닫거나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도 루이비통은 성업 중이었다. 루이비통 가족 일부가 괴뢰 정부에 협력하고, 훈장까지 받은 덕이다. 이것은 루이비통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된다(스테파니 본니비치, ).

구찌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국제사회에서 경제 제재를 받자 원자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구찌는 대나무를 휘어서 가방의 손잡이로 쓰고, 대마를 직조해 독특한 광택이 나는 캔버스 백을 만들었는데, 이런 신상품들이 유럽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미국에까지 구찌의 명성을 알리게 된다. 여세를 몰아 구찌는 1951년 이탈리아 브랜드로는 처음 뉴욕에 부티크도 연다. 구찌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는 ‘뱀부백’이나 ‘디아만테’ 캔버스백은 지금도 조금씩 디자인을 바꿔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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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전략기획팀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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