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스릴러 ‘이웃사람’으로 돌아온 월드스타 김윤진

“배우는 내 인생의 축복, 새 작품 할 때마다 교훈 얻어요”

  • 김지영 기자│kjy@donga.com

    입력2012-07-24 0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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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먹을수록 과감해져요”
    • ‘로스트’ 하며 주연과 조연의 차이 배워
    • “어딜 가나 이방인이었어요”
    • 노출과 스킨십에 ‘쿨’한 동갑내기 남편
    • “미워할 수 없는 악역 욕심나요”
    • 어릴 적 우상 궁리 보며 연기로 성공하는 꿈 키워
    스릴러 ‘이웃사람’으로 돌아온 월드스타  김윤진
    “‘심장이 뛴다’ 이후 꼭 1년 반 만이네요. 한국 영화에 출연하는 게….”

    영화 ‘이웃사람’의 개봉이 8월로 연기됐는데도 김윤진(39)은 예정대로 7월 9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사회와 배우 인터뷰 일정은 개봉 직전에 잡는 것이 국내 영화계의 관례이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다. ‘이웃사람’을 찍기 전 미국 ABC-TV드라마 ‘미스트리스(Mistresses)’의 파일럿(TV 방송용 견본)에 출연한 그는 본편 촬영을 위해 7월 중순 출국해야 한다. 그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은데도 미국에 가기 전 영화를 알리려고 인터뷰에 나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영화기에 김윤진이 이토록 애착을 보이는 걸까.

    인기 만화가 강풀의 동명 인터넷 만화가 원작인 ‘이웃사람’은 연쇄살인범과 그를 둘러싼 이웃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다. ‘댄싱 퀸’의 김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각본도 직접 썼다. 이 영화에서 김윤진은 의붓딸이 아랫집에 사는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한 후 죄책감을 안고 사는 여린 엄마 송경희로 등장한다. 영화 시사회가 열리기 전 미리 본 시나리오에서 얻은 정보는 이 정도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그 역시 어떤 걸 물어도 술술 풀어놓을 태세다. 긴장과 경계를 풀고 기자의 눈을 쳐다보며 귀를 쫑긋 세운 이 여자, 인터뷰 매너도 최상급이다.

    “소심한 엄마 역 힘들었어요”

    ▼ 또 엄마 역을 맡았네요. 영화에서만 벌써 네 번째 아닌가요?



    “다섯 번째더라고요. 캐릭터가 작품마다 다 달라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어요. ‘6월의 일기’에서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아이들에게 복수하는 엄마였고, ‘세븐 데이즈’에선 납치된 딸을 구하려고 살인범을 석방시키려 애쓰는 열혈 변호사였어요. 또 ‘하모니’에선 배 속 아이를 지키려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입양을 앞둔 아이와 보낼 단 하루의 외출을 위해 합창단을 결성하는 지극한 모성애의 소유자였죠. ‘심장이 뛴다’에선 심장병을 앓는 딸을 살리려고 사력을 다하는 엄마였고요. 모두 엄마 역이라 비슷해 보이지만 캐릭터도 모성애를 표현하는 방법도 처한 상황도 저마다 달라요.”

    ▼ 이번에 맡은 송경희는 뭐가 다른가요?

    “새엄마고, 아이도 친딸이 아니다보니 다른 캐릭터에 비해 굉장히 수동적이죠. 경희는 의붓딸과 관계가 개선되기 전에 딸이 살해된 것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딸을 때맞춰 데리러 갔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 때문인지 죽은 딸이 매일 책가방을 메고 교복을 입고 비에 젖은 모습으로 집에 와요. 귀신이 진짜 나타나는 건지 자책감 때문에 허상을 보는 건지 알 순 없지만 경희는 딸을 계속 피해요. 그 정도로 소심해서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죠.”

    ▼ 심리묘사가 중요한 역인데 연기하기가 힘들진 않았나요?

    “힘들었어요. 딸에 대한 감정을 관객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하는데 출연 분량이 많지 않았거든요. 다른 영화에서는 나오는 신이 많으니까 배분해서 보여줄 수 있었어요. 좀 길게 가야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수월한데 이번에는 촬영이 2주 만에 끝났어요. 중심인물 중 한 명이긴 하지만 제 분량이 적어서요. 짧게 보여줘야 하니까 엔딩에서도 쉽지 않았어요. 만날 울고 벌벌 떨던 여자가 잘 모르는 아이를 구하려고 손을 잡고 뛰는 신이에요. 작은 변화지만 소극적이던 경희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죠. 그 장면을 찍을 때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었어요.”

    ▼ 실제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경희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을 것 같아요. 아이가 없어서 자식을 잃은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저라면 적어도 혼자서 끙끙 앓지는 않았을 거예요.”

    ▼ 아직 경험하지 못한 엄마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연기하는 비법은 뭔가요?

    “항상 상상을 하죠. ‘만약 나한테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서요. 이번에도 그랬어요. 경희만큼은 아니지만 A형이라 저도 굉장히 소심한 면이 있어요. 겁도 많고, 일단 친해지면 오래가지만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 부분을 뻥 키워서 극적인 상황에 대입시켜 어떻게 그릴지에 대한 설계를 하는 거죠.”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어요. 대부분의 촬영을 아역배우인 김새론하고만 했거든요. 포스터 촬영하던 날 영화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찍었어요. 서로 교감할 일이 별로 없어서 좀 아쉬웠죠.”

    ▼ 딱히 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인물도 아닌데 출연한 이유가 뭔가요?

    “배역의 비중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작품을 고를 땐 원래 캐릭터보다 내용을 많이 보거든요. 분량으로 치면 경비원 역의 천호진 선배가 주인공이에요. 연쇄살인범이나 1인2역을 한 김새론보다 더 많이 나오거든요(웃음).”

    ▼ 시나리오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보네요?

    “지난해 말에 시나리오를 처음 봤는데 내용이 흥미진진했어요. 김휘 감독님과의 친분도 무시할 수 없었고요. 감독님이 ‘하모니’를 각색하고, ‘해운대’ 대본도 쓰셨어요. 강제규 감독님이 운영하는 JK필름을 통해 감독님을 알게 됐는데 이번 작품을 준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제가 먼저 찾아갔어요. 대본은 솔직히 모니터 차원에서 주신 것 같아요. 그동안 계속 엄마 역을 했으니 당연히 안 하겠거니 하신 거죠. 근데 제가 선뜻 하겠다고 해서 감독님도 무척 놀라셨대요.”

    ‘준비된’ 월드스타

    김윤진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기 활동을 한 지도 어언 8년째. 그는 시즌별로 촬영하는 미국 드라마의 휴식기를 활용해 한국 영화에 출연해왔다. 그의 미국 진출에 물꼬를 튼 작품은 ABC-TV 드라마 ‘로스트(LOST)’였다. 2004년 방송을 시작해 2010년 시즌6를 끝으로 막을 내린 이 드라마는 세계 300여 개국에서 방영할 정도로 크게 히트하고 골든글로브 작품상까지 받았다. 드라마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계 미국인 ‘선화’를 열연한 김윤진도 제12회 미국배우조합상 TV시리즈 부문 앙상블연기상을 수상했다. ‘로스트’로 유명세를 타자 할리우드에서도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대표적인 예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다. 제작진은 ‘아바타’의 파일럿 작업에 참여한 그를 여주인공감으로 점찍었지만 공교롭게도 ‘로스트’와 촬영 일정이 겹쳤다. 그는 “출연을 거절한 게 아니라 시간이 안 맞아 포기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작품이 좋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할리우드 진출을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건 제 오랜 꿈인 걸요. 비록 ‘아바타’에 출연하진 못했지만 파일럿에 참여하며 좋은 경험을 했어요. ‘로스트’ 출연 역시 제 배우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죠. 어울리지 않게 월드스타란 칭호를 얻었잖아요. 드라마 한 편 했다고 월드스타라고 하니 민망하지만 그 말이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죠.”

    어릴 적 그의 꿈은 “미국에서 배우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서울 태생인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 뉴욕의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1996년 MBC TV 드라마 ‘화려한 휴가’로 데뷔하기 직전까지 14년을 살았으니 그의 영어 실력이 원어민 수준인 건 놀랄 일도 아니다. 게다가 그는 뉴욕 예술고를 졸업하고 보스턴대와 영국드라마아카데미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다. 이미 준비된 ‘월드스타’였던 셈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8년 동안 영어로 연기를 해서 미국 TV나 영화에 당연히 출연하게 될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 먼저 활동할 기회를 잡았죠. 운 좋게도 제 능력에 비해 과분한 기회를요. 처음엔 짐가방 하나 달랑 들고 한국에 왔는데 짐이 조금씩 늘어났어요. 어머니도 절 돌보려고 왔다 갔다 하다가 한국에서 사시게 됐죠. 한국에 정착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정말 계획에도 없던 일이 벌어진 거예요. 미국에서 배우 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이렇게 오래 연기생활을 하는 게 더 놀라워요. 한국어를 정말 못했거든요.”

    ▼ 미국에서는 한국어를 쓰지 않았나요?

    “부모님이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게 해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한자가 들어간 단어는 전혀 몰랐어요. ‘화려한 휴가’ 때는 대사가 많지 않은 역을 맡아서 한국말을 잘 몰라도 문제가 없었는데 ‘예감’이라는 드라마를 찍을 때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버터 발음에 단어를 잘 몰라 엄청 헤맸어요. 특히 ‘~토대로’ 같은 한자어가 나오면 숨이 턱 막히는 거예요. 게다가 촬영 들어가기 20분 전에 쪽 대본이 나오던 시절이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또박또박 외우기만 했으니 연기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웠겠어요. 다행히 오래된 작품이라 재방송을 안 하더라고요. 감사한 일이죠(웃음).”

    “무대만 서면 자신감 생겼어요”

    ▼ 배우를 꿈꾸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굉장히 예민한 나이에 이민을 가서 미국 아이들처럼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게 창피했어요. 숫기도 없고 말도 안 통하니 학교에서 벙어리처럼 있다 오기 일쑤였죠. 보다 못한 엄마가 절 드라마 클럽에 보냈는데 그 덕에 중학교 때는 교내 뮤지컬 무대에 서곤 했어요. 그때까지도 발음이 원어민만큼 정확하진 않았는데 무대에 서면 자신감이 생겼어요. 영어도 못하고 친구도 없어서 만날 주눅 들었던 제가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고, 평소에 안 쓰던 목소리로 크게 노래를 부르고…. 제 잃어버린 목소리를 다시 찾은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연기에 빠져 ‘페임(Fame)’으로 유명한 뉴욕 예술고에 들어가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페임’은 1980년 앨런 파커 감독이 제작한 동명의 영화를 2009년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로 뉴욕 예술고 학생들의 꿈과 사랑, 성공과 시련을 그렸다. 원작에서 팝가수 아이린 카라가 부른 주제곡 ‘페임’은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당시 롤 모델이 있었나요?

    “그때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양 배우가 거의 없었어요. 맨 처음 본 동양 배우가 청룽(成龍)이에요. 더빙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큰 화면에 동양 사람이 나오는 걸 보면 신기했고 나도 배우가 될 수 있겠구나싶었어요. 궁리(鞏?)는 저한테 대단한 우상이었죠. 소극적이던 제가 자부심을 느끼고 어깨를 펴게 만들었으니까요.”

    ▼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가요?

    “유색인종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차별이 더 심한 것 같아요. 캔자스처럼 동양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오히려 동양 사람을 신기하게 보죠.”

    ▼ 미국에 진출한 후 현지 교포들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교포 2세, 3세는 영어를 잘하지만 부모 세대는 영어에 약해서 제가 나온다고 일부러 드라마를 더 챙겨 보진 않아요. 한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DVD로 빌려보죠. 미국에 사는 동양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빠요.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LA)에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 인구의 5%도 안 돼요. 마케팅 효과를 보려면 전체 인구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라틴계 미국인이나 흑인을 캐스팅하는 게 더 합리적인 거죠. 그 사람들은 같은 혈통인 라틴계 배우나 흑인 배우가 주연하는 영화는 다 보러가고 소비 패턴이 굉장히 적극적이거든요.”

    스릴러 ‘이웃사람’으로 돌아온 월드스타  김윤진

    김윤진은 ‘로스트’촬영 당시 같은 옷을 5개월씩 입어야 하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고 한다.

    ▼ 한국엔 어쩌다 오게 됐나요?

    “뉴욕에서 연극을 하던 시절 우연히 한국 드라마에 캐스팅됐어요. 그 작품이 ‘화려한 휴가’였죠. 영화를 전공하던 아는 오빠가 한국에서 드라마 팀이 왔는데 제 얘기를 했더니 궁금해하더래요. 그래서 한국 식당에서 한 번 만났는데 그 팀의 감독님이 한국말로 연기할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분이 바로 ‘질투’ 같은 트렌디 드라마로 유명한 이승렬 PD셨죠. 한국말로 연기한 적은 없다고 했더니 식당 메뉴판을 읽어보게 하시곤 바로 최재성 씨의 여동생 역을 맡기셨어요. 정신병자여서 대사는 별로 없었어요. 발음이 안 좋아서 캐스팅이 안 될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었죠.”

    ▼ 첫눈에 맘에 들었나보네요.

    “느낌이 새로웠대요. 그때는 교포 출신 배우가 많지 않았거든요. 가수 중에는 꽤 있었지만. 어느 정도 연기가 되니까 미국에서 연극을 하는 게 아니겠어? 그런 믿음이 있으셨대요. 뉴욕과 라스베이거스에서 일부를 찍고 한국 분량을 마저 촬영한 다음 다시 미국에 들어와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출연 제의가 밀려들었어요. 드라마를 봤는데 느낌이 신선했다, 꾸밈이 없어서 좋았다면서요. 다들 한번 보자고 했는데 연극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어요. 그러다 이듬해 이승렬 감독의 ‘예감’이란 작품을 또 하게 됐죠. 처음에는 주인공 역을 주셨는데 한국말을 잘 못해서 제가 포기했어요. 대신 화장품회사의 매력적인 실장 역을 했는데 그 역시 어려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촬영했죠.”

    ▼ 미국에 이민 가서는 영어 못해서 고생하고, 한국에 들어와선 한국어 못해서 고생했군요.

    “그렇죠. 어딜 가나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했죠.”

    ▼ 한국어가 서툰 것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죠. 발음 교정하려고 연필 물고 책 읽고, 모르는 단어도 익히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24시간 한국어를 들었어요. 심지어 잠잘 때도요.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한국말을 듣고 있으면 한국말로 꿈을 꾸지 않을까 했던 거죠. 그만큼 절실했으니까요. 한국어 배우는 데 오래 걸렸어요.”

    “미국 진출 성공은 인복 덕분”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어에 익숙해진 그는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영화 ‘쉬리’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오른다. 대종상영화제와 황금촬영상 시상식에서 신인 여우상을 수상하는 기쁨도 맛본다. 이후 그의 활동무대는 자연히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2002년 영화 ‘밀애’는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2007년 ‘세븐 데이즈’는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그에게 안겼다. 2004년 미국 진출 후에도 한국 영화에 변함없는 열정을 쏟은 그의 수상 소식은 영화 팬들 사이에서 훈훈한 화제를 낳았다.

    ▼ 미국 진출은 원래 계획했던 일인가요?

    “미리 계획하고 진행한 건 아니에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은 좋았지만 어릴 적 꿈이던 미국 드라마나 영화 출연에 대한 갈망이 늘 있었어요. 사실 계속 기다렸어요. 언젠가 나를 불러주겠지 하고요. 근데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갔어요. 유일하게 아는 프로듀서 한 사람만 믿고요. 밑도 끝도 없이 갔더니 제가 딱했는지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 프로듀서가 발이 넓어 미국의 5대 에이전시를 죄다 소개해줬는데 미팅 후 모두 반응이 좋았어요. 그중에서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와 가장 잘 맞을 것 같아서 계약을 했는데 그 주에 ABC의 총괄 캐스팅 디렉터를 만났어요. ‘케리 리’라고 하는 한국 여성이었는데 그분을 만나 잘 풀린 거죠.정말 운이 좋았어요. 전 인복(人福)이 많은 것 같아요.”

    ▼ 한국에서 쌓은 커리어가 캐스팅에 영향을 미쳤나요?

    “어느 정도 감안은 됐겠지만 운도 많이 작용한 것 같아요. 실력이 있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전 운이 좋았어요. 인복이 많은 것 같아요.”

    ‘로스트’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표류한 13명의 다양한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드라마의 총지휘감독은 TV드라마를 연달아 히트시켜 스타 감독이 된 JJ 에이브럼스가 맡았다. 한국에서는 강인하고 당찬 역을 주로 한 김윤진은 이 영화에서 여리고 여성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했다.

    “저도 의외였죠. 처음에는 여주인공 역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제작진에서 그리던 주인공감은 아니었어요. 백인이 아니니까.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라 기대를 안했는데 오디션 본 지 5시간 만에 연락이 왔어요. 나한테 맞는 배역을 써주면 출연하겠느냐고요. JJ 에이브럼스를 거부하는 건 바보짓이었어요. 가장 잘나가던 감독이니까요. 바로 승낙했더니 그분이 제 상황에 맞게 캐릭터를 설정해주셨어요. 영어를 못해 한국어를 쓰는 신비로운 여성으로요. 원래 주요 배역은 11명이었는데 저와 제 남편 역을 더 캐스팅해 13명이 된 거예요.”

    ▼ 한 작품 6년 넘게 했는데 힘들지 않았나요?

    “힘들었죠. 영화 ‘단적비연수’도 9개월 동안 찍긴 했지만 한 작품을 이렇게 오래 한 건 처음이에요. 새 시즌 촬영 때마다 같은 배역에 푹 빠졌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계속 섬에 갇혀 있는 내용이라서 5개월간 같은 셔츠만 입었어요. 물론 디자인이 같은 셔츠 20벌을 번갈아 입긴 했죠. 그래도 워낙 스케일이 커서 드라마를 필름으로 촬영하고 컴퓨터그래픽(CG)도 많이 썼어요. 그런 유례없는 드라마에 출연한 건 굉장한 영광이었죠.”

    ▼ 드라마가 끝났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시원섭섭했어요. 시원한 감정이 앞선 것 같아요. 정확히 6년 반을 매달렸으니까.”

    주연배우로 사는 법

    오랜 꿈이던 미국 드라마 출연은 그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선물했다. 그는 무엇보다 “주인공과 조연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다”면서 “운이 좋아서 데뷔 초반부터 주인공을 하다가 조연의 처지가 되니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지난날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고 털어놨다.

    “예전엔 촬영 현장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연기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제작진이 너무 한다 싶으면 주인공이 나서서 의견을 조율하고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것을 조연을 하면서 알게 됐죠. ‘세븐 데이즈’ 이후부터 촬영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것 같아요. 분위기를 띄우려고 재미없는 상황에서도 큰 소리로 웃고, 후배에게 먼저 다가가고, 술도 못 마시면서 술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고…. 그전까지 제가 프로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던 거죠.”

    ▼ 그렇게 하니 현장 분위기가 달라졌나요?

    “물론이죠. 분위기도 좋아지고 사람들을 대하기도 편해졌어요. 그전엔 내가 친절하게 대하는 데도 거리를 두는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젠 알아요. 더 적극적으로 했어야 한다는 걸. 주인공은 연기도 잘해야 하지만 함께하는 모든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걸요.”

    ▼ 곧 촬영에 들어가는 ABC-TV 새 드라마 ‘미스트리스’는 좋은 작품인가요?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한국말로 하면 ‘정부(情婦)들’이라는 뜻인데 나이가 비슷한 4명의 커리어우먼이 정부가 되거나 정부 때문에 상처를 받는 내용이에요. 제가 맡은 정신과 의사 카렌은 유부남 환자와 사랑에 빠져요. 그 남자의 정부인 거죠. 근데 남자가 갑자기 죽고 장례식에서 만난 그의 아들이 카렌에게 반해요. 카렌도 계속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는데 아들이 24세예요. 파격적이죠.”

    ▼ 미국도 막장드라마가 대세인가요?

    “그런가 봐요(웃음). 내용은 막장드라마인데 주인공이 오열하거나 소리 지르진 않아요. 약간 품위 있는 막장드라마랄까. 노출 수위도 엄청 높아요. 케이블방송에서는 과감한 노출을 허용해도 ABC나 NBC는 원래 노출을 자제하거든요. 근데 ‘미스트리스’에 출연하는 다른 여배우들은 브라와 팬티만 걸치고 나오더라고요. DVD로 나온 파일럿을 보고 화들짝 놀랐어요.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30대 여성 시청자라면 100% 대리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 최근엔 3040세대를 겨냥한 드라마가 많아졌어요. 그게 세계적인 추세라고 하던데 미국시장은 어떤가요?

    “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20대 초반 관객을 겨냥하는 영화보다 오히려 30대 관객을 노린 영화가 많아졌어요. 제 또래 분들이 소비성향과 구매력이 강해서 영화 흥행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거든요. 3040세대가 기가 센가 봐요. 저희 세대가 아직도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걸 보면(웃음).”

    “진즉에 결혼할걸…”

    한국 나이로 치면 김윤진은 올해 불혹(不惑)이다. 말 그대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다.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됐으니 기실 흔들릴 일도 없을 터. 김윤진의 남편은 2002년부터 그의 전담 매니저로 헌신한 박정혁(39) 자이온엔터테인먼트 대표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2007년 김윤진이 미국 진출 성공기를 담은 책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를 쓸 당시부터 남녀로 만나다 201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양가 친지만 참석한 가운데 하와이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어요. 원래 ‘로스트’ 식구들을 다 초대하려고 했는데 인원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웃음)”

    ▼ 왜 진즉에 결혼하지 않았나요?

    “예전엔 결혼에 대해 좀 부정적이었어요. 배우가 결혼하는 건 배우자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죠. 밤늦게까지 촬영하거나 집에 못 들어갈 때도 있는데 온전한 아내나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결혼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배우는 연기에 푹 빠지는 재미로 사는데 결혼해서도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남편이 외조를 잘해줘서 전보다 더 편해요. 진즉에 할 걸 그랬어요. 뭐가 그렇게 두려웠나 싶어요.”

    ▼ 불혹이 되니 삶을 대하는 태도나 인생관이 바뀐 건가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그래요. 눈가에 주름만 늘었지, 저는 저더라고요. 10대 때는 마흔 살이 되면 세상의 이치를 다 알 것 같고, 내 생각이 다 정답일 것 같고, 굉장히 어른스러울 줄 알았는데 약간 성숙한 것 외엔 큰 변화가 없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엄마를 보면 좀 짠해요. 엄마도 제 나이 때는 저와 다르지 않았을 텐데 엄마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요구하는 게 많았거든요.”

    ▼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나요?

    “두렵기보다 오히려 더 과감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어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다보니 더 소심해지더군요. 화낼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화를 못 냈죠. 안 그래도 인상이 강해서 안 웃으면 차갑게 보이는데 화까지 내면 욕먹을까봐요. 그럴 땐 혼자서 삭이고 그랬는데 지금은 10분 늦은 건 늦은 게 아니냐며 반농담조로 할 말 다 해요. 시쳇말로 ‘갈구면서’욕 안 먹는 방법을 터득해 스트레스가 줄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워졌어요. 예전에는 농담도 신경이 쓰였는데 결혼한 뒤에는 ‘나, 유부녀야’ 하면서 제가 먼저 마음을 열고, 남자배우와도 편하게 농담할 정도가 됐죠(웃음).”

    ▼ 결혼한 후 더 여유 있어 보여요.

    “그런 얘기 종종 들어요. 결혼도 결혼이지만 마흔 넘어가는 이 시점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또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게, 제가 ‘쉬리’에 출연할 때만 해도 30대 여배우는 주인공으로 안 썼어요. 20대 후반의 여배우도 나이 많다고 아줌마 역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 또래 여배우들이 주인공을 하고 있고, 40대 초반에도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 좋은 거죠. 이런 추세가 죽 갔으면 좋겠어요.”

    ▼ 남편이 연기에 관여하기도 하나요?

    “연기 가지고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안 해요. 작품을 선택할 때 조언을 많이 해주죠. 생각보다 프로페셔널해서 야한 장면이나 스킨십에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에요.”

    나이 구애없이 연기 하고파

    “연기자가 모든 연기를 경험을 토대로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경험이 배우에겐 큰 재산”이라는 게 기자가 그동안 만난 배우들의 공통된 견해다. 일로도, 한 여자로서도 중요한 경험인 사랑과 결혼에 모두 성공한 그가 아직 더 해야 할 경험이 있다면 임신과 출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행여 실례가 될까 싶어 “일부러 피임을 하는 거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그가 손사래를 친다.

    “아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에요. 미국에서는 여배우가 임신을 해도 활동에 지장이 없어요. 작가가 상황에 맞게 알아서 써주기 때문에 배가 나오고 만삭이 돼도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몇 년씩 장기적으로 방영하진 않으니까 임신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미국 드라마는 7년을 할지, 10년을 할지 알 수 없으니 아이를 갖는 게 별문제가 되지 않아요. 대본도 미리미리 주고, 최장 14시간만 촬영해 최적의 상태에서 연기할 수 있게 배려해줘요.”

    ▼ 2세는 딸이 좋나요? 아들이길 바라나요?

    “건강한 아이면 돼요. 임신한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서요(웃음).”

    ▼ 김윤진에게 배우로 산다는 것은…?

    “제 인생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아이가 생기면 달라지겠지만 아직은 배우 김윤진이 70% 차지하죠.”

    ▼ 최근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목소리를 높이는 ‘소셜테이너’가 많아졌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뭐 하나가 마음에 들면 정신없이 빠지는 성향이 있어서 SNS를 일부러 안 하고 있어요. 궁금한 것을 못 참고, 좀 집착하는 스타일이라서 아예 시작도 안 했어요. 한번 빠지면 무섭게 빠지니까.”

    ▼ 40대에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요?

    “배우생활을 계속 하는 거요. 나이에 구애되지 않고 연기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 욕심나는 역이 있나요?

    “지금까지 의롭고 옳은 소리 하는 역을 많이 해서 악역을 해보고 싶어요. 진짜 악역인데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요. 저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악역 하면 더 무섭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 왜 안 시켜주시는지 모르겠어요.”

    불현듯 영화 ‘심장이 뛴다’ 촬영 후 한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 기억났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 드라마는 불륜과 폭력이 주류를 이뤄서 출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목소리가 굵어진다.

    “한국에선 제 나이의 사랑은 대개 불륜으로 그려지더라고요. ‘미스트리스’에서도 초반엔 유부남과 연애하는 불륜 설정이지만 그 남자의 아들과는 불륜이 아니에요. 여자는 38세, 남자는 24세로 나이 차가 많긴 하지만 둘 다 솔로거든요.”

    ▼ 우리나라 드라마에 원하는 것도 그런 파격인가요?

    “파격보다는 울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슴 절절한 진짜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오열하고, 바람피우고, 소리 지르는 거 말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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