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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전 인권위원장 회고록

한낱 도박 같았던 나의 인권 사랑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⑧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ahnkw@snu.ac.kr

한낱 도박 같았던 나의 인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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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09년 봄, 내 생애 가장 길었던 100일
  • ● 소송을 해서라도 막고 싶었던 인권위 조직 축소
  • ● 인권위 건물에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포스터 붙인 이유
  • ● 수포로 돌아간 ICC 의장국 선거 운동
한낱 도박 같았던 나의 인권 사랑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조문하고 있는 안경환 당시 국가인권위원장.

“사랑은 자신에 대한 기망에서 시작해 상대에 대한 기망으로 끝난다.”

수많은 사랑의 경구 가운데 왜 이 말이 요즘 들어 가슴에 절절한지 모를 일이다. 언제부턴가 내가 ‘인권’이란 정체불명의 여인의 환영을 붙잡고 허덕이는 것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나 자신에 대한 기망은 아닐까?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에’라는 자기최면으로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닐까?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대한 내 애정의 정체도 여행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여인의 역경을 외면하고 떠난 나그네의 객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내 만년의 삶은 진정한 자기가 아닌, 또 다른 자기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죽어가는 인생인가? 지난 3년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물음들이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은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 에미 씹이다. 統一(통일)도 中立(중립)도 개좆이다. … 아이스크림은 미국 놈 좆 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무식)쟁이, 이 모든 無數(무수)한 反動(반동)이 좋다.”

때때로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1964)의 구절이 입 언저리에 맴돈다. 동원된 시어(詩語)들의 정확한 의미나 심오한 속내는 제대로 알 수 없고, 내 나이나 알량한 세속의 자리에 걸려 드러내놓고 옮길 수도 없지만, 가슴속에 눌려 담긴 막연한 울분을 대변하는 듯해 적지 않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마치 내가 인권과 연애하는 동안 부딪친 무수한 적과 벽들을 향해 내뿜는 한줄기 취중수액과도 같은 느낌이다.

“상대가 보통 인간임을 깨우치는 순간 연애는 종말이다.” 한 연륜 지긋한 ‘연애의 달인’이 들려준 말이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정부의 상식과 선의를 믿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여인, 인권의 너른 품에 함께 안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5년 내내 그들이 보여준 인권 관과 민주의식은 보통의 수준을 한참이나 밑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비극은 사내에게 몸을 주고서도 진정한 자신을 주지 못하는 여인의 사랑이다. 도대체 그게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자신도 찾아낼 수 없으니 말이다.” 영국 작가 로렌스 듀렐의 역설이다. 필경 내 참담한 심경을 그린 말이려니.



한 헌법학자는 이명박 정부를 ‘인권 알레르기 정권’ ‘민주주의 알레르기 정권’이라고 비판하면서 ‘인권=민주주의=반정부=좌파’라는 등식을 신봉한다고 혹평했다. 마치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 ‘반미=반정부=반국가=용공’이라는 공식이 사실상 정권의 지도이념이 됐듯이 말이다. 평소 그 헌법학자의 거친 언어가 적잖이 부담스러웠던 나지만, 이 말만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선 실체를 담고 있다는 느낌이다.

행안부 직제령 불복 소송

2009년 3월 30일부터 7월 8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긴 100일이었다. 하루도 편히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된 듯한 징후도 있었다. 이미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기관의 수장으로서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많은 직원의 일자리를 빼앗아야 한다. 위축된 동료들의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그러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위용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제사회에서 손상된 나라의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정부의 인권위 탄압에 항의하는 각종 시위와 성명이 잇따르는 가운데 전직 위원 16인도 성명을 발표했다. 한나라당 추천으로 초대 상임위원을 지낸 유현 변호사도 동참해주었다.

그해 3월 20일, 나의 사퇴를 촉구하고 인권위 조직 축소에 찬성하는 뉴라이트계 시민단체의 집회가 있었다. 규모도 조직력도 보잘것없지만 ‘동원된 흔적’이 역력했다. 집회 참석자 중 한 연로한 분이 지인을 통해 본의가 아니었다며 나에게 격려와 위로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몇몇 신문은 인권위의 저항은 적반하장이니 자업자득이니 하면서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과 언론은 침묵으로 탄압에 동조하거나 방관했다.

그 무렵 MBC의 ‘100분 토론’에 김칠준 당시 인권위 사무총장과 행정안전부(행안부) 조직실장이 출연했다. 맞상대가 되는 토론일 수 없었다. 행안부 주장대로 인권위의 방만한 조직운영을 입증할 근거자료가 있을 리 없었다. 정부 방침이 미리 정해져 있듯, 시청자의 관점도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다만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데 간접적인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이 토론이 진행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00분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 손석희 씨가 교체됐다.

인권위 조직을 축소하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그 소속기관 직제 전부개정령안(직제령)’이 국무회의에 상정된 3월 30일, 인권위는 헌법재판소에 직제령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서와 권한쟁의심판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미 예고하고 준비해 온 일이다. 헌법 제 111조 4항과 헌법재판소법 제 62조 1항 1호는 국가기관 상호 간의 권한쟁의 심판을 헌법재판소 관할로 규정한다. 인권위는 헌법에 명시된 국가기관은 아니다. 현행 헌법은 1987년 ‘시민항쟁’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고, 인권위는 2001년 비로소 창설된 기관이기에 헌법에 반영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국가기관도 당연히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할 ‘당사자 능력’이 있다. 헌법재판소도 이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해양수산부장관은 헌법과 정부조직법에 의하여 행정 각부를 구성하는 국가기관으로서 독자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으므로 권한쟁의심판의 당사자 능력이 있다.” (2008. 3. 27 2006 헌라1)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인권위의 권한쟁의 심판 청구를 ‘헌법에 따라 설치된 기관이 아니어서 심판청구 당사자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그것도 18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2010. 10. 26. 2009 헌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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