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막지 못한 조직 축소
4월 6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국가인권위원회 직제령이 관보에 게재됐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법적 현실이 된 것이다. 당일 아침 인권위 전원위원회를 열고 대국민 호소문을 결의했다. 오전 10시, 기자가 모인 가운데 호소문을 발표했다.
“조속한 업무 정상화를 위해 헌법재판소가 가처분에 대한 판단을 신속히 내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 국가인권위원회는 헌법재판소를 통한 법적 대응과는 별도로 향후 국가기관으로부터의 실질적인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적극 모색할 것입니다. … 직제령 개정에 따른 일련의 후속조치를 인권위답게 객관성, 공정성, 투명성을 기초로 진행할 것입니다, 또한 업무수행의 집중도와 효율성도 제고할 것입니다. 직제령의 시행은 우리 위원회의 구성원들에게 쓰라린 상처를 안겨줄 것이나, 우리는 그 아픔을 달래면서 국민이 부여한 소임을 차질 없이 수행할 것입니다. 절차와 내용에 흠이 많은 직제령을 하루속히 원점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동시에 직제령의 시행이라는 법적 책무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인권위 직원 208명 전원을 일단 사무처로 발령 내고 새 조직에 맞춰 각 부서에 일시적으로 지원 근무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어서 구체적인 인원 배치 작업에 들어갔다. 일반직 공무원은 신분에 영향이 없지만 별정직은 6개월 후면 자동적으로 자리를 잃게 된다. 계약직은 계약기간 만료 후에는 재계약이 불가능하다. 직급마다 정원이 정해져 있고, 그 외 사람은 정원 외 ‘초과인원’으로 분류해야 한다.
2002년 11월, 출범 1년이 지난 시점의 인권위는 직원의 약 60%가 직업 공무원 출신이었다. 당시까지 공무원에게 인권 업무는 생소했다. 정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인권위 업무는 정부의 입장을 지키도록 훈련된 이들에게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40%는 시민단체, 연구소 등 사적인 기관 출신이었다. 이들은 직업 공무원과는 정반대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정부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푸는 지혜를 배양할 기회는 없었다. 이렇듯 확연하게 다른 경력과 성향의 두 부류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설립 5년이 지나 내가 취임한 시점에는 나름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초기에 일반직 공무원이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의 여운은 있었기에 나는 이 점을 유념하고자 애썼다.
인권위를 ‘국가기구’로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별정직, 계약직 공무원의 일반직 전환이 필요했다. 내가 부임하기 얼마 전, 경력요건을 갖춘 민간 출신 직원이 대거 일반직으로 전환했다. 소정의 법적 절차를 거친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보수 성향 언론은 이런 조치를 고깝게 여겼다. 나도 기회가 되면 나머지 별정직, 계약직을 일반직으로 전환시키고 싶었지만, 재임 중 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마치 내 속내를 간파라도 했는지 한 일간지는 나의 취임 직후 대대적인 일반직 전환이 이뤄졌다는 오보를 냈다. 청년 시절부터 흠모에 가까운 애정을 가꿨던 신문이라 더욱 실망이 컸다. 그 신문은 4월 7일 “인원감축 시행령 막판 수정 - 시민단체 출신 별정직 간부 살리기”, 8일“청와대 ‘인권위 별정직 간부 살리기’ 진상조사”, 9일 “인권위 11명 줄이고 인사마무리 - 행안부 ‘추가 감축해야”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달면서 인권위 탄압의 정당성을 끈질기게 홍보했다.
한국 인권史의 순교자들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챙기는 것이 인간의 사악한 본성인가. 이 틈을 노려 ‘외인부대’ 동료를 몰아내려는 정부의 음모에 은밀하게 가담한 내부인도 있었다는 씁쓸한 후문을 들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보다 처지가 어려운 동료를 위해 ‘정원 외 초과인원’으로 분류되기를 자원한 이들의 눈물겨운 미담도 있다.
4월 8일, 인사 절차를 마무리했다. 팀장급 중 11명은 보직 발령을 받고 나머지 11명은 대기 발령을 받았다. 직원 33명도 대기 조치됐다. 인사 결과를 통보하면서 내부통신망에 ‘동료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올렸다. 내게 사본은 남아 있지 않다. 다음 날 나온 한 신문에 몇 구절이 인용돼 있다.
“지금 이런 현실이 닥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오늘처럼 야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 저의 60평생에 가장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누구를 선택하기도 버리기도 힘든 인사권자로서 ‘사람은 운명 아래서만 죽을 수 있다’는 비장한 수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강요하는 희생은 후일 우리의 인권사에 장엄한 순교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 지식인 독자에게는 광복 후 한국문학사상 최고 작품의 하나로 인식되는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 신문은 “대기 발령을 받은 팀장조차 위원장의 편지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월 23일, 토요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는 바위에서 뛰어내려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택했다. 바로 그날 인권위는 경기도 과천의 한 공원에서 가랑비가 뿌리는 가운데 조촐한 체육대회를 열고 있었다. 전통대로 가족을 동반한 행사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몸담고 있는 기관의 불행에 봄조차 빼앗겨버린 직원들의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자는 뜻이었다. 행사 도중 비보를 전해 듣고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 주체할 수 없었다. 후미진 곳으로 몸을 감추는 내 뒤를 한 직원이 따라와서 쪼그려 앉은 나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녀의 마음의 온기를 오래 기억한다. 서둘러 행사를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내몰린’ 죽음에 청와대도 몹시 당황했다. 논란 끝에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결정됐다. 정부의전에 따른 의식이다. 외적인 형식은 결정됐지만 정부의 어느 누구도 선뜻 성의 있게 챙기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일군의 사람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임시 조문소를 설치했다. 많은 사람이 정부가 곳곳에 설치한 공식 조문소를 외면하고 비공식 조문소에 몰려들었다. 당황한 경찰이 조문객을 차단했다. 나는 정부의 옹졸한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점심시간에 비서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조문소에 들렀다. 행여 나를 제지라도 하면 정식으로 문제 삼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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