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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나는 이용당했을 뿐 …” 누가 오스왈드를 쏘았나

케네디 암살과 음모론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나는 이용당했을 뿐 …” 누가 오스왈드를 쏘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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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퍼레이드에 참석하려는 시민의 편의를 돕고자 케네디의 카퍼레이드 일정 및 경로는 도착 며칠 전부터 댈러스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됐다. 케네디 도착 사흘 전인 11월 19일 댈러스 지역신문 ‘타임스헤럴드’는 카퍼레이드의 이동 경로와 각 지점 통과 시각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소련으로 망명할 때 영웅 대접을 받기 원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오스왈드에게 그가 추앙해 마지않는 카스트로의 적인 미국 정부의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은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오스왈드는 케네디를 저격하기 수개월 전 극우 성향의 예비역 장군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이 있다. 11월 22일 아침 오스왈드는 이탈리아제 카르카노 소총을 갈색 종이에 둘둘 말아 품에 넣은 뒤 그가 한 달 전부터 일해온 교과서 보관창고 6층으로 올라갔다.

꼬리 물고 이어진 죽음

그가 일하던 교과서 보관창고 바로 옆을 대통령이 탄 차가 지나갔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뭔가 수상하다. 음모론이 꿈틀거릴 여지가 있다. 더욱이 오스왈드가 댈러스 경찰본부에서 구치소로 이송되는 도중 잭 루비가 그를 사살하자 의문은 더 증폭됐다.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주인이던 루비는 케네디 암살에 너무 상심했고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가 오스왈드의 재판과정에서 또다시 슬픔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오스왈드를 죽였다고 진술했지만, 오스왈드가 진실을 털어놓는 것을 막기 위해 죽였다는 음모론적 주장이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얼 워런 연방 대법원장이 위원장을 맡아 암살 사건 진상조사를 벌인 ‘워런 위원회’는 10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무리한 뒤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지었다. 사건 자체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탓인지 사실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여러 주장이 혼재했다. 현장에 있던 다수의 사람이 총소리를 세 번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한 발이 더 발사됐다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됐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직간접적으로 암살사건과 관련된 사람 가운데 의문스럽게 죽은 이가 20명이 넘는 것도 궁금증을 더한다. 1966년 2월 루이지애나에서 사체로 발견된 알버트 가이는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오스왈드가 자신의 상점에 들어와 “이제 곧 큰돈이 들어온다”고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같은 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리 보우어 역시 딜리 광장 부근에서 두 남자와 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1969년 뉴올리언스 지방검사 짐 개리슨이 “전직 CIA(중앙정보국) 요원과 마피아 등에 의한 암살 음모를 밝혀 빠른 시일 내 용의자들을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용의 선상에 있던 데이비드 페리가 자택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또 다른 용의자인 마피아 보스 잔커너, 로젤리까지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사건 당시 댈러스에 거주했던 소련 출신 지질학자 로렌시루츠가 1977년 하원 진상조사위원회 증인 소환 당일 자살한 것도 의문의 사건이다. 로렌시루츠는 소련에서 돌아온 오스왈드를 포섭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1961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한 케네디는 개혁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밀고 나갔다. 외교정책도 강경했다. 카스트로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1961년 4월 쿠바 피그스만 침공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2년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케네디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다. 훗날 흐루시초프가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케네디는 소련 측에 “미국은 쿠바를 결코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망명 쿠바인과 극우보수 세력이 깊은 적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케네디는 임기 시작과 함께 베트남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1963년 하반기 이후 정책 변화를 시사했다. 1963년 10월, 고문단 형태로 베트남에 있던 1000명의 미군을 그해 말까지 1단계로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1965년 말까지 완전 철수한다는 계획을 마련하고 실제로 국가안전보장행동(NSAM) 263호 각서에 서명했다. 한 달 뒤인 11월 1일 하와이에서 백악관 고위층과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 국방부 고위 간부들이 참석한 합동회의에서 ‘263호 각서’ 내용을 재확인했다. 그러고는 채 한 달도 안 돼 암살됐다.

미국의 전면 개입을 주장하는 보수 강경파에게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베트남을 빼앗기면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할 수 있다는 이른바 ‘도미노’ 우려가 컸다. 그래서 강경파는 베트남과 관련한 각종 통계자료를 조작하기도 했다. 남베트남군의 숫자를 줄여 보고하고 북베트남군의 무기와 전력 등에 대해서도 조작된 수치를 보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통해 커질 대로 커진 군산복합체의 거대한 기제가 베트남전과 같은 호재를 놓칠 수 없다는 위기감 또한 케네디 암살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음모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실제로 케네디 암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64년 1월 미군 합참은 ‘전쟁수행계획’을 완성했다. 1964년 8월 미군 구축함이 베트남 통킹만에서 어뢰공격을 받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

결국 케네디 암살 사건의 진상을 재조사하기 위한 하원 진상조사위원회가 1976년 구성됐다. 조사위원회는 1978년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저격 당시 총이 모두 4차례 발사됐으며 2명이 총을 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연찮게 카퍼레이드를 호위하던 경찰관의 무전기가 꺼지지 않아 저격 당시 상황이 녹음돼 있었다. 녹음 내용이 새로운 증거로 채택됐다. 하원 조사위원회는 또 케네디가 음모에 의해 암살됐을 소지가 크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소련이나 CIA, 마피아와 같은 곳이 조직적으로 관여하진 않았다고 결론 내렸지만, 미국 내 쿠바 망명세력이나 마피아 조직에서 개별적으로 몇 명이 관여했을 소지는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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