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민족사 암기과목’ 되면 독약 ‘세계 속 한국’ 시민교육 절실

한국사 수능 필수화

  •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장

    입력2013-08-21 17:5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민족사 암기과목’ 되면 독약 ‘세계 속 한국’ 시민교육 절실

    6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 선정’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뒷줄 가운데)와 배우 송일국 씨(뒷줄 오른쪽).

    한국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필수과목 지정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현재 수능은 한국사를 포함해 모두 10개 교과로 구성된 사회 교과목 중에서 2개 과목을 선택하게 돼 있다. 한국사를 필수로 지정하면 수험생들은 나머지 9개 과목 중 1개만을 선택해야 하므로 다른 사회과 교사들은 자기 과목이 학생들로부터 소외받을 것을 우려해 반대한다. 중요한 것은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어떤 과목이 우리의 미래를 짊어진 학생들에게 더 필요한 지식인지다.

    역사가 시간 속의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면, 사회는 공간 속의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과거라면, 후자는 현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경향성이 있다.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지식은 무용하다. 사회와 역사는 공간과 시간처럼 인간 삶의 궤적을 좌표로 그려내는 X축과 Y축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왜 이런 갈등이 생겨났는가. 그 기원은 광복 후 미군정 당시 입안된 교육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정은 미국의 예에 따라 역사를 사회 교과목 범주 안에 포함시켰다. 미국은 고대부터 형성돼 발전한 국가가 아니라 근대에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뒤 세계 각지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국가다. 그래서 역사교육의 중요 목표는 건국 과정, 이민자로 이뤄진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할 수 있는 민족적 정체성을 주입하는 데 있었다.

    미국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 해당하는 ‘Our Nation’은 첫 문장에서 미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 내내, 미국인들은 모두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주기 위해 일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헌법 이념에 따라 누가 미국인인지를 정의하며, 그런 이념을 지향하는 국가를 위해 이바지한 이민자들의 역사로 미국사를 기술한다. 그래서 오늘의 미국을 만들기까지 공헌한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대다수가 대통령과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 아닌 일반 시민이다. 그들이 미국을 건국하고 지켜냈다는 것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서술됐다. 이민자들의 사회로부터 국가와 민족이 탄생한 미국의 역사는 고대사와 중세사가 없기 때문에 사회 교과목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한국사에선 사회보다는 민족이 상위 범주로 여겨진다. 예컨대 현재 한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남한 사회만을 지칭하지만, 한국사는 당연히 북한을 포함한다. 한국 사회와 한국 민족 사이의 이 같은 불일치가 일어난 분단시대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역사적 과제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민족이 아니라 국가의 개념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한국현대사는 북한까지 포함하는 ‘민족’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주체로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 학자들이 집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 2008)다. 이 교과서의 콘셉트에 해당하는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는 이 책에서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 우리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역사 서술에 비해 꽤 큰 변혁이다. 이로써 지난 130년간의 역사가,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고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보통사람들의 역사로 바뀌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나아가 세계사에서 보편적으로 실천되어온 근대 문명의 한 가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화의 선결 문제는 한국사의 주인공을 민족과 국가 중 무엇으로 설정하고 서사를 구성할지를 정하는 것이다. 현행 중학교 교과서는 머리말에서 한국사를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이자 그에 대한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한국 민족이란 한국사를 정의하는 주체가 아니라 한국사로 해명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이 같은 정의는 엄밀하게 말해 시대착오적이다.

    왜 ‘사회’가 아니고 ‘역사’인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민족을 한국사의 주체로 설정하는 데 비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집필자들은 정치학이나 경제학등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들이다. 역사과목을 통한 민족교육인가, 사회과목을 통한 시민교육인가를 둘러싸고 197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교육과정 논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일대 반성이 일어났다. 몇몇 주정부에서는 민족교육 대신 시민교육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중등학교에서 역사 대신 사회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상 처음으로 좌파와 우파 역사가가 연대해 이 같은 개편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결국 개편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독일 역사학이 정치사에서 사회사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빌레펠트 학파’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얻었다.

    그렇다면 왜 사회가 아니고 역사여야 하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하지만 그 사회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역사를 알지 못하면 우리가 어떤 사회적 동물인지 알 수 없다. 역사와 사회의 관계는 ‘역사 없는 사회는 공허하고, 사회 없는 역사는 맹목적이다’라는 말로 정리된다.

    최근 동아시아컵 축구대회 한일전에서 벌어진 해프닝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 응원단은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그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대형 걸개를 내걸었다. 이에 대해 시모무라 하쿠분 일본 문부과학상은 “그런 일이 일본 국내에서 있었다면 다른 응원 관중이 막았을 것”이라며 “그 나라의 민도를 묻게 된다”는 말을 했다.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인이 다른 나라 국민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우리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축구는 축구일 뿐 ‘문명화한 전쟁’이 아니다. 이 사태는 일본 고위관료뿐 아니라 우리 응원단의 역사의식 수준을 잘 보여줬다. 맹목적인 민족주의 역사감정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역사교육을 하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민주시민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역사교육의 목표는 ‘세계시민 양성’

    역사교육의 두 가지 중요한 목표는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취하는 동시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배양하는 데 있다. 요컨대 역사를 잊은 민족과 사회엔 미래가 없기 때문에 역사를 사회교과목 중 하나로 상대화할 것이 아니라 사회교과의 핵심과목으로 필수화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과목에 이런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한국사가 아니라 세계사를 포함한 역사가 필수과목이 돼야 한다. 글로벌 시대, 다문화 사회에서 민족사로서 한국사를 교육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변해갈수록 민족교육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민주공화국 시민교육이 요구된다. 따라서 한국사와 세계사라는 이분법적 역사교육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한국’을 문명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

    둘째, 역사가 암기과목이 되지 않을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우리 삶에 정답이 없듯이 역사에도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파악하는 능력이지 답이 아니다.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심으로 역사교육을 개편하려면 수능 필수과목화가 명약은커녕 오히려 독약이 될 수 있다. 학생 스스로 역사 서사를 구성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을 목표로 시험문제가 출제돼야 한다. 예컨대 미국 고교에서는 ‘당신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의 참모로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예해방 이후 미국 역사를 참조해 어떤 조언을 하겠는가?’에 대해 논술하라는 시험문제가 출제된다. 이런 시험의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역사적 사고력이다.

    오늘날 사회와 국가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창조적 사고를 하면서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민과 국민이 얼마나 많은지에 달렸다. ‘역사는 역사가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가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융합이 화두가 된 시대에 다른 사회과목 담당자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해 역사교육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논점 2013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