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 선정’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뒷줄 가운데)와 배우 송일국 씨(뒷줄 오른쪽).
역사가 시간 속의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면, 사회는 공간 속의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과거라면, 후자는 현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경향성이 있다.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지식은 무용하다. 사회와 역사는 공간과 시간처럼 인간 삶의 궤적을 좌표로 그려내는 X축과 Y축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왜 이런 갈등이 생겨났는가. 그 기원은 광복 후 미군정 당시 입안된 교육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정은 미국의 예에 따라 역사를 사회 교과목 범주 안에 포함시켰다. 미국은 고대부터 형성돼 발전한 국가가 아니라 근대에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뒤 세계 각지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국가다. 그래서 역사교육의 중요 목표는 건국 과정, 이민자로 이뤄진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할 수 있는 민족적 정체성을 주입하는 데 있었다.
미국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 해당하는 ‘Our Nation’은 첫 문장에서 미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 내내, 미국인들은 모두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주기 위해 일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헌법 이념에 따라 누가 미국인인지를 정의하며, 그런 이념을 지향하는 국가를 위해 이바지한 이민자들의 역사로 미국사를 기술한다. 그래서 오늘의 미국을 만들기까지 공헌한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대다수가 대통령과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 아닌 일반 시민이다. 그들이 미국을 건국하고 지켜냈다는 것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서술됐다. 이민자들의 사회로부터 국가와 민족이 탄생한 미국의 역사는 고대사와 중세사가 없기 때문에 사회 교과목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한국사에선 사회보다는 민족이 상위 범주로 여겨진다. 예컨대 현재 한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남한 사회만을 지칭하지만, 한국사는 당연히 북한을 포함한다. 한국 사회와 한국 민족 사이의 이 같은 불일치가 일어난 분단시대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역사적 과제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민족이 아니라 국가의 개념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한국현대사는 북한까지 포함하는 ‘민족’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주체로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 학자들이 집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기파랑, 2008)다. 이 교과서의 콘셉트에 해당하는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는 이 책에서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 우리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 대신에 ‘한국인’을 역사적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역사 서술에 비해 꽤 큰 변혁이다. 이로써 지난 130년간의 역사가,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고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보통사람들의 역사로 바뀌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나아가 세계사에서 보편적으로 실천되어온 근대 문명의 한 가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화의 선결 문제는 한국사의 주인공을 민족과 국가 중 무엇으로 설정하고 서사를 구성할지를 정하는 것이다. 현행 중학교 교과서는 머리말에서 한국사를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이자 그에 대한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한국 민족이란 한국사를 정의하는 주체가 아니라 한국사로 해명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이 같은 정의는 엄밀하게 말해 시대착오적이다.
왜 ‘사회’가 아니고 ‘역사’인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민족을 한국사의 주체로 설정하는 데 비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집필자들은 정치학이나 경제학등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들이다. 역사과목을 통한 민족교육인가, 사회과목을 통한 시민교육인가를 둘러싸고 197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교육과정 논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일대 반성이 일어났다. 몇몇 주정부에서는 민족교육 대신 시민교육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중등학교에서 역사 대신 사회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상 처음으로 좌파와 우파 역사가가 연대해 이 같은 개편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결국 개편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독일 역사학이 정치사에서 사회사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빌레펠트 학파’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