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유통구조 개선 주역 농협 안성농식품물류센터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13-08-22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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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하늘에서 내려다본 안성농식품물류센터.

    국내에 대형 마트(대형 유통업체)가 등장한 지 20년. 1993년 11월 국내 최초 할인점인 이마트 서울 창동점이 문을 연 이래 대형 마트는 셔틀버스까지 동원한 ‘동네 손님 싹쓸이’를 시발(始發)로 대한민국 유통사(史)를 새로 쓰며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월마트, 까르푸 등 세계 유수 유통기업도 이에 군침을 흘리고 한국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다양한 상품·서비스로 구색을 갖춘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3대 ‘한국형 마트’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현재 전국의 대형 마트는 440여 개, 직원은 22만 명을 웃돈다. 하루 평균 고객은 400만 명. 일부 목 좋은 점포에선 매일같이 8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린다. 대형 마트가 단순한 상품 구매를 넘어 외식과 취미활동 등 기분 전환을 겸한 ‘생활의 재발견’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대형 마트의 미래가 마냥 ‘장밋빛’만은 아니다. 경쟁 심화로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이를 타개하려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손댔다가 ‘골목상권’을 침해한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의무휴업 등 강도 높은 영업규제를 받는 신세다. 더욱이 경기침체 장기화, 경제민주화 여론 확산으로 대형 마트의 성장세는 눈에 띄게 둔화됐다.

    최근 들어 이들은 자체 농산물포장센터 건립을 통한 비용 절감으로 ‘저성장 탈출’을 모색하고 있다. 이마트는 지난해 9월 경기 이천에 연면적 4만6000여㎡의 ‘후레쉬센터’를 열었고, 롯데마트도 같은 해 7월과 10월 이천에 330㎡, 오산에 360㎡ 규모의 포장센터를 개설했다. 롯데슈퍼도 충남 논산에 1200㎡ 규모의 포장센터를 신축해 올 1월부터 가동 중이다. 지난 20년간 시장 판도를 좌지우지하며 ‘유통 공룡’으로 몸집을 불려온 대형 마트들이 그동안 축적한 전국적 물류 인프라와 막강한 마케팅 능력을 앞세워 농산물 산지(産地)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 요즘 유행어를 빌려 표현하면, ‘진격의 유통’쯤이랄까.

    유통비 절감…연간 800억 편익



    이 같은 농산물 유통환경 급변에 절박한 위기감을 갖게 된 곳은 단연 산지다. 대형 마트의 단순한 원물(原物) 공급기지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에서다. 산지 처지에선 읍·면단위 지역농협 간 연합 마케팅을 비롯해 조합공동사업법인(조공법인)·시군연합사업단 육성, 농산물 산지유통센터(APC) 확충 등으로 산지유통조직의 규모화 및 내실화를 시도하지만 아직 대형 마트와 대등한 가격교섭력을 확보하기엔 태부족한 상태다.

    APC는 산지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상품화하는 데 필수적인 선별·포장·가공·저장 등 일관시설을 갖추고 출하와 마케팅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시설. 이 중 농협이 운영하는 APC도 2012년 현재 전국 280여 개소에 달하지만, 상당수는 노후한 시설과 영세한 규모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생산자단체(농협) 중심의 계열화한 농산물 유통사업 확충이 절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 농업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는 곳이 경기 안성시 소재 안성농식품물류센터(이하 안성물류센터)다. 농협중앙회 농산물도매분사(분사장 안영철)가 8월 말 개장할 이곳은 산지에서 수확 후 대(大)포장 작업을 한 농산물을 한데 모아 저장하거나 소(小)포장 및 전(前)처리 작업을 추가한 뒤 소비지에 납품함으로써 유통비용 절감을 도모하는 초대형 물류기지다.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은 국가적 화두다. 박근혜 정부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인 ‘농협 중심의 농산물 유통계열화’는 그에 따른 혜택을 농업인과 소비자에게 돌려주자는 게 골자다. 안성물류센터의 미션은 바로 이 농산물 유통계열화의 첨병 구실이다. 즉, 산지 시장지배력 확대, 물류효율화를 꾀하는 대형 마트들의 전국 주요거점 물류센터 설립 추세에 맞서는 한편, 과다한 유통경로로 인한 고비용·저효율 유통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규모화한 전국단위 농산물 물류센터의 필요성이 건립 배경이다.

    안성물류센터의 주된 기능은 APC 등지에서 들어온 농산물을 소비지에 분산하는 집배송, 상품화, 단기저장 등이다. 취급 품목은 과일·채소 등 청과류와 이를 가공한 냉장·냉동식품. 농협 계통판매 채널(농협 하나로마트 등)과 대형 마트뿐 아니라 장기적으론 중소 슈퍼마켓, 온라인몰, 편의점, 전통시장, 급식 및 외식업체 등 신규 수요처에도 상품을 공급한다는 점에서 민간 유통업체의 물류센터와 차별성을 갖는다.

    이곳이 공식 개장하면 ‘생산자-산지농협(APC)-공판장(경매)-중도매인-하도매인-소매점-소비자’로 이어지던 기존 7개 농산물 유통단계가 ‘생산자-산지농협-안성물류센터-소매점-소비자’로 대폭 줄어든다. 2010년 한국개발연구원(KDI) 발표에 따르면, 안성물류센터 가동에 따른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으로 연간 800억 원의 사회적 편익이 발생하고, 유통비용 절감 등을 통한 개장 후 30년간의 사회적 편익은 2조35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대한민국 대표 물류기지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입하장엔 농산물을 가득 실은 화물차들이 끊임없이 오간다.

    농협이 이렇듯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안성물류센터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생(相生)을 이끄는 유통 전략을 추진할 수 있을까.

    기자가 안성물류센터를 찾은 날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31일. 내비게이션이 길 안내를 멈춘 곳은 안성시 미양면 강덕리 338번지였다. 이곳은 평택-음성 간 고속도로 중 남안성IC에서 불과 4㎞ 거리. 차량으로 5분 남짓 달리면 닿는 데다, 서울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 위치해 산지 농산물을 소비지로 빠르게 배송할 수 있는 광역교통망 접근성이 돋보인다.

    게다가 22km 떨어진 인근 평택물류센터와 연계한 협력배송으로 물류 효율성도 높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농민 조합원에게 필요한 생필품(공산품)을 취급하는 평택물류센터는 주로 농촌지역 농협 하나로마트에 물건을 공급한다. 평택에서 농촌으로 공산품을 싣고 간 물류차량이 되돌아올 때 안성물류센터로 보낼 산지 농산물을 싣고 오면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다.

    2011년 7월 첫 삽을 떠 올해 6월 13일 준공한 안성물류센터는 8월 말 공식 개장을 앞두고 시범 운영에 한창이다. 총 사업비 1352억 원을 들여 만든 지상 3층, 지하 1층짜리 평범한 외양의 건물. 그런데 넓다. 무척 넓다. ‘상상 그 이상의 널찍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성물류센터 부지면적은 9만3227㎡. 연면적은 5만8140㎡로, 국제규격 축구장 3개를 합친 넓이다. 농산물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단일 도매물류센터로는 국내 최초이자 최대. 유럽을 제외하면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대규모 최첨단 물류기지다. ‘대한민국 대표 농식품 전용 도매물류센터’답다.

    “엄청나죠? 하루에도 수십 차례 건물 내외부를 돌아다녀선지 다리에 근육이 단단하게 붙었어요. 기자님도 며칠 그렇게 하면 다리 힘이 팍팍 솟을 겁니다.”

    안내를 맡은 김상수 안성물류센터 팀장은 “15년 동안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와 농협가락공판장에 근무하며 평택 집에서 출퇴근하느라 아주 힘들었는데, 얼마 전 고향인 안성으로 발령이 나 지금은 마음이 푸근하다”고 했다.

    안성물류센터는 이미 7월 21일 농협중앙회 도매사업 전담조직인 농산물도매분사 청과사업단 소속 성남물류부 직원 30여 명이 현장 배치된 것을 시작으로 사실상 업무를 개시했다. 7월 29일부터는 서울 양재동 ㈜농협유통에 자리한 농산물도매분사 직원 대다수인 270여 명이 안성물류센터 현장 근무를 시작했다.

    김 팀장은 “안성물류센터 직원 상당수는 서울·경기지역의 가족과 떨어져 안성시내 아파트와 원룸 등에 기거하며 개장 준비로 동분서주하고 있다”며 “주말 부부도 많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안성물류센터가 ‘농협중앙회의 세종시’쯤으로 여겨질 법도 하겠다.

    寒氣 속 배분장 체험

    안성물류센터의 주요 시설은 크게 농산물 집배송장·소포장센터·전처리시설과 저장창고, 냉동창고, 관리시설(사무실, 운영통제실 등) 등으로 나뉜다.

    먼저 1층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배송장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안성물류센터는 농산물 물류 흐름에 최적화한 구조다. 지상 3층 건물 중 2층까지 농산물을 실은 화물차가 곧장 진입해 상·하차 작업을 할 수 있다. 농산물 수송에 주로 쓰이는 차량은 5t 화물차. 하지만 이곳은 11t 화물차까지 독(dock·짐을 싣고 부리기 위한 설비)에 접안할 수 있게 설계됐다. 또한 차량운송관리시스템(TMS)과 창고관리시스템(WMS) 등 전산화 물류정보시스템을 갖춰 최첨단 조달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당일·수시 발주를 없애고 이틀 전(D-2) 전산 자동 수발주 시스템을 갖춰 불필요한 물량 공급을 최소화하고 산지에서도 여유롭게 물량을 준비할 수 있게 함으로써 100% 책임 판매를 하는 것이 강점이다.

    통상 집송 작업이 이뤄지는 시간대는 오후 6시~밤 12시. APC 등지에서 수송돼온 산지 농산물이 일단 1층 입하장에서 하차 작업을 거쳐 같은 층의 분배장으로 옮겨지면 오후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검수·검품 및 분류 작업이 이뤄지고 다시 출고장에서 상차 작업을 거치게 된다. 상차된 농산물은 이내 수도권과 충청권 각지의 농협 계통판매 채널로 배송된다.

    현재는 시범 운영 중이어서 5t 화물차 기준으로 하루 100대 분량의 농산물이 집배송된다. 하지만 공식 개장 이후론 200대 분량으로 확대될 예정. 이철호 안성물류센터 단장은 “전국 1000여 곳에 달하는 농협중앙회 거래처 중 60%가량이 농협 계통판매 채널인데, 안성물류센터는 그 채널을 위한 물류허브 기능을 주로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오후 1시. 11t 화물차들이 대파와 고랭지 무를 잔뜩 싣고 입하장 독에 접안하자 지게차들이 연신 분배장으로 실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입하장은 상온 상태. 반면 분배장 실내온도는 15℃. 필요하면 10℃까지도 낮출 수 있단다.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한여름 날씨의 입하장과 만추(晩秋)의 선선함을 떠올리게 하는 분배장을 몇 번 들락날락하니 냉온탕이 따로 없다.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분배장과 출고장에서 검수·검품(왼쪽) 및 상차 작업을 하는 기자.

    기자도 분배장에서 토마토 검수·검품 작업을 했다. 강원 철원군 갈말농협이 출하한 것이다. 한 알 한 알 꼼꼼히 살피다보니 이 토마토를 정성들여 가꾸고 수확의 기쁨을 맛봤을 농민의 기분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상품 상태와 수량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은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1시간 이상 분배장에 있으니 서늘한 기운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김상수 팀장은 머리가 띵한지 자주 손을 이마에 갖다 댄다.

    “분배장 안팎의 온도차가 10℃ 이상입니다. 분배장에선 청과류의 신선도를 감안해 낮밤 없이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해서요. 저도 며칠 전부터 감기로 고생 중입니다. 분배장에선 여름에도 긴소매 점퍼를 입고 일합니다. 겨울철엔 히터를 틀고요.”

    집배송장은 저온 입하장도 갖췄다. 산지에서부터 소비지까지의 집배송에서 신선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연중 공급할 수 있는 콜드체인 시스템이 구축되면 본격적으로 가동하게 된다.

    출고장 독에서 상차 작업도 거들었다. 5t 화물차에 충남 공주 사곡농협에서 공급한 그물망 밤을 싣는 작업이다. 독과, 독에 주차한 차량의 적재함 높이와 간격을 맞춘 뒤 밤을 담은 종이상자들이 출고 수량에 맞춰 차곡차곡 쌓인 팔레트를 전동 팔레트 트럭(EPT TRUCK)에 싣고 적재함으로 옮겼다. 초심자라 조종이 쉽지 않다. 그래도 “자세만은 ‘물류 달인(達人)’에 가깝다”나?

    하루 15만 팩 소포장

    오후 2시10분. 2층 소포장센터로 향했다. 전처리시설과 함께 안성물류센터가 자랑하는 최첨단 상품화시설이다. 안성물류센터가 산지뿐 아니라 관련업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도 소포장센터와 전처리시설의 규모 및 기술력이 국내 기존 물류센터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소포장센터 면적은 1만3530㎡. 이 중 80%인 1만560㎡에선 일반 농산물을, 나머지 20%인 2640㎡에선 친환경 농산물의 소포장을 담당한다. 현재는 시범 운영기간이라 9248㎡만 가동 중이다. 2~3년 후엔 전체 면적을 다 사용할 계획이다. 친환경 농산물 취급 공간을 특별히 마련한 건 건강을 중시하는 최신 소비 트렌드를 감안해서다.

    소포장센터 전체 라인은 17개. 농산물별 특성과 기계화 수준에 따라 수동(9개 라인)·반자동(7개)·자동(1개) 등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는 농산물 계량 및 포장과정에서 사람 손이 닿는 부분을 최소화해 신속하고 위생적으로 작업하기 위한 것. 수요량을 감안한 단계별 시설투자로, 2020년엔 32개 라인으로 증설된다.

    산지에서 소포장하기 어려운 채소류 중 상품경쟁력이 높고 대량생산이 용이한 품목이 소포장 주력 상품이다. 즉, 산지에서 수송돼온 20~30kg들이 대포장 농산물을 소비지의 구매 패턴에 맞게 소포장하는 것.

    원물 자동공급 시스템(RGV)을 통해 원물이 포장라인에 투입되면 소분(小分·작게 나누는 일) 작업을 거친 뒤 해당 농산물 특성과 수요처 요구에 맞춰 스트레치·삼면·펜넷 등 다양한 포장작업을 한다. 여기에 품목명, 포장단위, 규격 등을 인쇄한 라벨을 붙인 후 상자에 담아 배출한다. RGV는 네덜란드의 세계적 원예협동조합 그리너리(Greenery)에서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안성물류센터 측은 소포장센터를 통해 하루 15만 팩의 과채류(고추, 오이, 파프리카, 피망 등) 및 엽채류(상추, 브로콜리, 치커리 등) 물량을 처리할 것으로 기대한다. 기자는 반자동 라인에서 브로콜리 소포장 작업을 했다. 빌린 작업 조끼를 걸치고 목장갑까지 끼니 꽤 그럴듯한 모양새가 나온다. 작업준비 완료!

    “밑동을 보기 좋게 가위로 다듬고 줄기에 지저분하게 붙은 잔줄기를 떼어내세요. 그러곤 2개씩 X자 모양으로 겹쳐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으세요. 그러면 자동으로 포장돼요.”

    이성자 소포장센터 총괄반장이 브로콜리 손질 요령을 일러준다. 이 반장은 농협 고양유통센터의 소포장 라인 총괄반장으로 있다가 6월 17일 안성물류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소포장 일을 한 지 3년. 베테랑답게 매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70여 명의 소포장 직원을 이끌고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데 이골이 난 듯 능숙했다. 그는 “포장 과정을 체계화하니 일하는 사람 처지에선 무엇보다 어수선하지 않아 좋다. 자동시스템이라 일일이 저울로 과일·채소 무게를 잴 필요도 없고 정확한 수량을 맞출 수 있어서 힘이 훨씬 덜 든다”고 말했다.

    이 반장 말대로 작업공간은 깔끔하다. 소포장 작업에 투입된 원물을 담았던 상자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소포장센터 한쪽에 모이도록 돼 있어 바닥에 불필요한 물건이 놓이는 법이 없다.

    브로콜리 출하처는 강원 평창군조합 공동사업법인, 출하주는 대화농협이다. 그런데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살짝 과장하면 삼계탕 속 닭보다 조금 작다고나 할까.

    브로콜리 다듬기는 그다지 숙련도를 요하진 않는다. 그런데 30분도 안 돼 슬슬 지겹기 시작한다. 역시 관건은 단순 작업을 장시간 하는 데 필수적인 지구력 같다. 옆 라인에선 강원 인제농협이 출하한 파프리카 소포장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기자가 소포장센터에서 브로콜리 포장 체험을 하고 있다(왼쪽). 전처리시설에서 세척한 대파를 절단하는 기자.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영하 21℃의 냉동창고. 문을 열자마자 급랭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한창 일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국적인 용모의 작업자가 눈에 띈다. 최 카트린 씨. 필리핀 수도 마닐라가 고향인 최 씨는 2006년 한국 생활을 시작한 결혼이민여성이다. 안성시 미양면에 사는 그는 덤프트럭 운전과 농사일을 병행하는 남편과 사이에 여섯 살, 네 살 된 딸을 뒀다고 했다. 한때 안성시청 주부 모니터로 활동하고 자동차부품회사에서도 일했다는 그는 달포 전부터 소포장센터에서 일한다.

    “좀 춥긴 해도 일은 할 만해요. 돈도 벌고 다른 아줌마들과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 좋아요. 이런 대규모 포장시설을 처음 봐서 무척 신기했어요.”

    최 씨는 농협에 대한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한 달간 가족과 함께 고향 방문을 할 수 있게 농협에서 도와줬어요. 안성지역 거주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출신 다문화가정 주부들이 대상이었는데, 그때 농협에 고마움을 느껴 이곳에서 꼭 일하고 싶었어요.”

    식품안전성 중시한 前처리

    다음은 안성물류센터만의 차별화된 상품화시설인 전처리시설을 볼 차례. ‘신선편이센터’로도 불리는 전처리시설의 면적은 4290㎡. 소포장센터와 같은 2층에 자리했다. 전처리는 감자, 당근, 무, 대파 등 음식 조리에 많이 쓰이는 채소들을 미리 세척하거나 절단해 외식업체나 단체급식소 등에서 별도 손질 없이 바로 조리에 사용하게끔 하는 맞춤형 상품화 과정. 이를 위해 근채류 세척 설비를 대거 도입하고 살균수로 기존 전해수 외에 오존수를 추가 사용함으로써 식품안전성을 크게 강화했다. 전처리 과정엔 8명의 식품안전 전문가가 상근하면서 농산물 잔류농약검사, 미생물 검사 등에 참여한다.

    전처리시설엔 소량 다품목 생산과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이 가능한 해썹(HACCP·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설비도 있다. 이는 최근 1~2인 가구 급증에 따른 소비 트렌드 변화에 발맞춘 것이기도 하다. 각급 학교 및 단체 급식용 원물 분배장, 일반 농산물 및 친환경 농산물 설비도 구분 설치해 급식, 군납 식자재용 등 2차 전처리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한 것도 특징이다. 전처리시설을 거치는 농산물은 하루 26t. 시설 라인도 올해 9개에서 2020년엔 16개로 확대된다.

    전처리는 원물 투입-세척-절단-진공포장 순으로 이뤄진다. 창고에서 원물을 꺼내와 흙을 털어내고 벌레가 먹은 부분을 제거한 뒤 깨끗이 씻고 조리하기 쉽게 다듬는 게 그것이다.

    전처리시설 역시 테스트 단계다. 기자는 클린룸에서 6~7초가량 먼지를 털어내고 소독하는 ‘에어샤워’를 마친 뒤 작업장에서 바로 칼잡이로 변신했다. 깎거나, 벗기거나, 자르거나, 조각내거나, 폐기하거나. 위생복을 입고 아주머니 직원들 틈에서 도마에 세척한 대파를 얹어 식칼로 쓱쓱 자르노라니 왠지 수술실이 연상돼서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들었다.

    소포장센터와 전처리시설을 둘러보면서 ‘만들면 팔리던 시대는 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젠 농산물도 수요처 요구에 맞춘 소포장·전처리로 부가가치를 높이지 않으면 제값을 받기 힘들다고 한다.

    온대·냉대·아열대 공존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주차, 전기, 방재 등 안성농식품물류센터 운영 전반을 관리하는 운영통제실.

    안성물류센터 곳곳을 누비다보니 몸이 온대와 냉대, 아열대 지역을 넘나든 듯 찌뿌둥하다. 하루만 있어도 이럴진대, 매일 일하는 직원들의 고충은 오죽할까. 이날 안성시의 낮 최고기온은 31.8℃.

    마지막으로 주차, 전기, 방재 등 물류센터 운영 전반을 관리하는 운영통제실을 거쳐 지하 1층 냉동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 위쪽에 부착된 액정 표시 온도계는 영하 21℃를 가리키고 있다. 창고 문을 열자마자 실내외 온도차로 인해 급랭된 수증기가 하얀 연기처럼 얼굴에 확 끼친다. 호기심이 동해 5초쯤 들어가 있어보니 순식간에 몸이 얼얼해진다. 이곳에 저장한 상품은 1층 집배송장으로 옮겨져 소비지로 배송된다. 가공한 오디, 블루베리 등 냉동보관 제품들이다.

    안성물류센터의 농산물 처리 규모는 연간 110만t, 금액으로는 2조 원에 달한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농협중앙회는 산지와 소비지를 직접 연계하는 ‘권역별 도매물류센터’를 통해 도매유통을 농협 중심의 단순한 유통체계로 구축기로 하고, 2014년엔 경남 밀양, 2015년강원 횡성, 2016년 전남 장성, 제주까지 전국에 5개 물류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표 참조). 5개 모두 완전 가동되면 농협은 2020년 기준으로 연간 농산물 도매유통액 3조 원을 달성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안성물류센터의 정상 가동은 1980년대 서울 가락시장 개장, 1990년대 ㈜농협유통 창립 못지않게 농산물 유통구조에 일대 혁신을 일으킬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아쉬운 점도 있다. 국산 농산물을 처리하는 농업용 시설인데도 농업용 전기료 감면 대상에서 빠져 한 해 30억~40억 원에 달하는 비싼 전기료를 내야 한다. 정부는 지난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후속대책으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금을 받고 농작물 또는 임산물 생산자단체가 직접 운영하는 APC는 농사용 전력 대상에 포함시켰지만, 안성물류센터는 산지유통시설이 아니란 이유로 제외했다. 김종길 안성물류센터 부장은 “농산물 판매는 농협 본연의 업무인 만큼 안성물류센터도 APC와 동일선상에 놓고 농업용 전기를 쓰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또한 보다 효율적으로 돌아가려면 물류비용을 더욱 절감할 수 있게 농산물 포장상자의 균일화, 표준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생산자 만족, 소비자 행복, 유통인 활성화라는 중대한 과제를 떠안고 개장박두에 이른 안성물류센터는 연착륙할 수 있을까. 취임 직후인 3월 13일 서울 양재동 농협 하나로마트를 방문해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을 공언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조만간 안성물류센터도 찾아 ‘안성맞춤’형 농산물 공급 현장을 지켜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축구장 3개 넓이…110만t, 2조 원 농산물 ‘안성맞춤’ 공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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