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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고구려 금관(?) 최초 발견기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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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가야 금관. 위에서부터 리움금관, 오구라금관, 호림금관. 리움 금관은 ‘현풍도굴사건’으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최종 구입한 리움 금관에는 ‘날 출(出)’자형 신라 금관 처럼 곡옥(曲玉)이 달개장식으로 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도굴됐기에 객관적으로 출토지를 증명할 수 없는 유물에는, 출토지로 주장되는 곳 앞에 ‘~라고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 자를 붙인다. 교동에서 도굴로 출토됐다고 하는 금관은 ‘전(傳)교동 금관’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전’자를 떼어낸다. 알려지는 출토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면 소장한 곳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신라 금관은 관테 위에 ‘날 출(出)’자 형태의 세움장식 여러 개가 우뚝 서 있어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교동 금관만은 ‘뫼 산(山)’자 형태에 가까운 ‘세움장식’ 세 개만 삐죽 올라와 있다. 미적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것이다. 교동 금관은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사라진 가야 금관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때문에 학자들은 교동 금관이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됐을 것으로 본다.

일제가 발굴한 최초의 금관인 금관총 금관은 국보로 지정됐다. 그다음으로 발굴해낸 금령총과 서봉총 금관은 최초가 아니기에 보물로 지정됐다. 반면 광복 후 우리가 처음으로 발굴해낸 천마총 금관과 두 번째 발굴해낸 황남대총 금관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이는 국보 지정에도 ‘최초냐 아니냐’ ‘우리가 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치적 판단이 개입한다는 뜻이다.

교동 금관은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도 도굴된 탓인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다. 다른 판단도 해볼 수 있다. ‘고졸하다고 해서 반드시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추측이다. 이는 기술이나 물자가 부족하면 후대에 했더라도 수준이 떨어진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제작 시기를 알려면 이 금관과 함께 나온 동반유물을 조사해봐야 하는데, 교동 금관은 도굴로 세상에 나왔으니 당연히 동반 유물이 없다. 그래서 국보나 보물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신라 금관보다 단순한 가야 금관



가야 금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전(傳)고령 금관’, 일명 ‘리움 금관’이다. 이 금관은 대가야가 있었던 경북 고령군에서 도굴로 출토됐다고 하여 ‘전고령 금관’으로 불린다. 여러 차례 거래되다 최종적으로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매입해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돼 있기에 ‘리움 금관’이라고도 한다. 이 금관은, 도굴 세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1963년의 ‘현풍도굴사건’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사건은 경북 달성군 현풍면 농민을 포함한 일단의 도굴꾼들이 현풍면을 비롯한 경북 일대의 고분을 대놓고 도굴해 출토품을 밀거래하다 대구경찰에 검거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다. 규모가 컸고 귀중한 유물을 다수 밀거래했기에 ‘현풍도굴사건’으로 불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검찰에 송치돼 조사받던 중 한 도굴꾼이 “금관이 발견돼 다른 도굴꾼 몰래 빼돌려 매매했다”고 자백했다. 광복 후 이 땅에서 최초로 금관이 나왔다는 자백인지라 온 나라가 주목했다(천마총 금관은 1973년 발굴됐다).

당국은 “그 금관은 매각돼 찾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회장이 구입해 1971년 중앙박물관에서 자신의 호를 딴 ‘호암컬렉션’전을 하면서 공개했고 국보 138호로 지정됐다. 이는 도굴로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교동 금관처럼 반드시 불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보로 지정된 청자· 백자의 99%는 도굴로 세상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진품으로 판정하고 제작시기를 추정하면 당당히 국보로 지정된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일본 도쿄(東京)박물관이 소장한 ‘오구라 금관’이다. 이 금관은 대일항쟁기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을 한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매입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오구라는 문화재 환수 운동을 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거론하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오구라가 죽자 1981년 그의 아들이 기증해 도쿄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 금관을 둘러싼 최대의 궁금증은 출토지다. 오구라는 경남 창녕군에서 도굴로 나온 유물을 주로 수집했기에 이 금관도 창녕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문에 ‘전(傳)창녕 금관’으로 부를 수도 있다. 창녕에는 ‘삼국유사’에 후기 6가야 중의 하나라고 기록된 ‘비화(非火)가야’가 있었으니, 이 금관도 가야 금관으로 분류됐다. 이 금관에서는 풀잎이 양쪽으로 갈라져 솟은 듯한 세움장식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의 3대 사립 박물관으로는 리움미술관과 고 전형필 선생의 유물을 모은 간송미술관, 그리고 수집가로 유명한 윤장섭 선생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세운 호림박물관이 꼽힌다. 호림박물관도 가야시대 것으로 주장하는 금관을 갖고 있다. ‘호림 금관’으로 불리는 이 금관은 아주 단순한 모양이다. 장식 없는 관테에, 앞에는 나무줄기 형상의 세움장식, 뒤에는 더 작은 세움장식 하나가 있다.

원산에서 큰돈 번 조부가 구입

호림박물관 측은 이 금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증언이나 자료 없이 가야 금관이라고만 주장한다. 윤장섭 선생 자녀를 포함한 박물관 측에 수차 연락했지만 응답이 없거나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호림박물관은 문화재청에 평가나 감정을 요구한 적이 없기에 이 금관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가야 금관은 매우 수수하다. 그래서 신라 금관보다 먼저 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가야 금관이 신라 금관에 영향을 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금관을 만들기 전 두 나라는 모두 금동관을 제작했으니, 그 기술이 각자의 금관 제작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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