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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

‘에로 거장’ 봉만대가 본 영화 ‘1987’

이한열이 봉만대에게 건넨 하얀 운동화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에로 거장’ 봉만대가 본 영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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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론가 수전 손택은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은 해석하기보다 경험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보다 감성, 판단보다 직관을 따를 때 예술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예술 작품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감상하는지에 따라 수천 수만 개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동아는 2018년 2월호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예술을 접한 이들을 만나 ‘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를 연재한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박종철과 이한열이 목숨을 잃은 1987년, 봉만대(48)는 광주 한 인문계 고교 3학년 학생이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에로영화 감독이 됐지만 당시엔 자칭 ‘순수를 좇던 한 시대의 청년’이었다. 서울 한 대학 연극영화과 진학을 목표로 학교-집-교회만 오가던 시절이다. 그보다 겨우 두세 살 많은 대학생들이 한 명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다른 한 명은 연희동 거리에서 참혹하게 생을 마감하던 순간에도 그는 교과서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을 영화 ‘1987’에서 만났을 때 봉 감독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화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박종철의 어머니가 아들 시신이 안치된 한양대병원에 들어서던 때 첫울음이 터지더군요. 이후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봉 감독이 그 시대를 몰랐던 건 아니다. 1970년 1월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언제나처럼 만화영화를 보려고 TV를 켰는데 정규방송이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의 시작이었다. 알고 보니 그때 막 ‘5·18 광주 진압 작전’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이후 봉 감독은 기세등등하게 도심을 오가는 공수부대원들을 봤고, 광주를 뒤흔드는 총성도 들었다.

영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른 뒤 학교에 돌아갔을 때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흐르던 무거운 침묵도 그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한국 사회 어디에서도 내놓고 얘기할 수 없던 ‘광주의 진실’을, 봉 감독은 이때부터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청소년 시절 수차례 금남로에 나가 시국 관련 ‘데모’를 했다. 하지만 1987년엔 달랐다. 그때는 연극영화과에 꼭 합격하고 싶은 ‘고3’이었던 것이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돌아보면 저는 격동기를 살았지만 그 시대를 만든 사람은 아닌 거예요. 1980년에는 초등학생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1987년에는 다른 꿈이 너무 컸죠. 그 시대에 마치 퍼즐 조각처럼 놓여 있었을 뿐 단 한 번도 용감해지지 못했구나….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장준환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 때 ‘당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친구들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있다’고 했죠.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영화가 끝난 뒤 극장 앞 흡연구역에서 막 담배를 빼어 물면서, 그가 “왜 우셨느냐”는 질문에 내놓은 답이다. 봉 감독은 이날 기자와 함께 ‘1987’을 보기 전, 아내와 이미 한 번 영화를 본 터였다. 그때 펑펑 울고 난 뒤 장준환 감독에게 ‘작품 너무 좋다’는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건, 부끄럽기 때문이에요.” 

뭐가 부끄러우세요? 

“헛살고 있는 것.” 

네? 

“아니다, 왜 이 영화가 싫은지를 얘기해야겠어요. 기억하게 하거든요, 부끄러움을.”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그렇게 봉 감독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하늘에선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화 ‘1987’에서 박종철의 아버지가 아들 뼛가루를 꽁꽁 언 강물에 뿌리며 통곡할 때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던 그 눈송이처럼, 하얗고 작고 가벼운 것이었다. 그는 “지금 막 영화 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다”며 내리는 눈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본 극장은 서울 종로 ‘CGV피카디리1958’이다. 1960년대 문을 연 옛 피카디리극장 자리에 새롭게 문을 연 멀티플렉스다. 1997년 개봉한 영화 ‘접속’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년 문화의 중심이던 그 극장에, 이제는 중·노년 관객이 훨씬 많이 앉아 있었다. 극장 근처에서 70년째 영업 중인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주위에 온통 중·노년뿐이었다. 1987년 청춘을 지나 어느새 30년을 더 살아온 봉 감독 역시 그 자리에 큰 어색함 없이 어울렸다. 

“역시 술은 빈속이야.” 

봉 감독이 소주를 한 잔 가득 따른 뒤 단번에 비워내며 한 말이다. 영화 ‘1987’ 속 ‘최 검사’의 대사다. 서울지검 공안부장인 최 검사는 박종철을 화장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거부한 뒤 쓴 소주를 털어 넣으며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역할이 좀 멋있었죠. 다른 사람들은 이래저래 흔들리고 갈등하는 구석이 있는데, 최 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권력하고 ‘맞짱’ 까잖아요. 그런 배역을 담백하게 소화하는 하정우 연기도 참 좋았어요. 이 영화 캐스팅이 말 그대로 ‘어벤저스급’인데, 배우들이 하나같이 욕심을 버리고 조연을 자처하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 덕에 ‘1987년’이 그 자체로 이 작품의 주연이 됐죠.”

봉 감독은 “여러 배우가 함께 연기하면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 태도가 영화를 살렸다”고 했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이처럼 배우들이 뒤로 물러선 대신 ‘시대’가 영화 전면에 섰다. ‘1987’은 유재하의 노래 ‘가리워진 길’을 통해 당시 시대 모습을 은유적으로 소개한다.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중략)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이라는 가사의 이 노래가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건 대학 신입생 ‘연희’가 듣는 라디오 속 DJ의 목소리를 통해서다. 그는 이 노래를 ‘이 시대 청춘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곡’이라고 소개한다.

가리워진 길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1987’에서는 그렇게 ‘가리워진 길’ 앞에서 헤매는 청년들을 위로하는 소품으로 새하얀 운동화가 등장한다. 처음엔 연희가 이한열에게, 그 뒤엔 이한열이 연희에게 각각 선물하는 운동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이 큰 의미를 지녔던 1987년, 그 시대의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는 게 봉 감독의 생각이다. 그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발을 클로즈업한 화면이 자주 등장한다. 고문에 시달리는 박종철의 맨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이를 가차 없이 발길질하는 치안감 ‘박 처장’의 구둣발, 학생들을 진압하러 달려가는 전경들의 군홧발과 시위 현장에서 신발을 잃은 채 양말바람으로 걸어가는 대학생들의 피맺힌 발 등이다. 봉 감독은 그 많은 발의 풍경을 통해 ‘1987’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신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걷고 있는가’를 묻는 듯하다고 했다.

“특히 이한열이 연희에게 운동화를 건네는 장면에 저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 부분에서 영화 속 과거와 현재가 여러 번 교차되기 때문에 연희와 이한열이 다시 만나는 시점이 언제인지가 분명히 표현돼 있지 않죠. 이한열이 한마디 말도 없이 운동화만 건네는 그 대목이 과연 현실이었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어쩌면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서다 떠나간 이한열의 영혼이 다시 돌아와, 연희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하얀 운동화를 건네준 건 아니었을까요.”

그 대목을 이렇게 해석하면 1987년 7월의 어느 날에서 막을 내린 듯 보이는 영화 ‘1987’의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1987’의 이 물음은 에로영화 감독으로 20년을 살아왔으나 이제 초등학생 두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자신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고민하고 있는 봉 감독의 오늘과도 맞닿아 있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사람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을 이력(履歷)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履)가 신발을 뜻하잖아요. 저는 ‘1987’을 통해 내가 걸어온 길,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오늘의 삶에서 이한열의 운동화가 제게 건넨 물음의 답을 찾는 게, 지금의 제게 남은 과제인 듯합니다.”

봉 감독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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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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