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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홍귀달에게 앙심을 품은 연산군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

  • |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홍귀달에게 앙심을 품은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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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이 지나치게 원칙을 고집하거나 강직하게 행동하면 남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정을 맞는 것이 모난 개인 탓일 수도 있지만 그 모난 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나 주변 사람, 혹은 그를 포용하고 이끌어주어야 할 지도자 탓일 수도 있다. 원칙을 고수하는 모난 돌 같은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 시대 지도자의 포용력이 어떠한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연산군 때 스스로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은 인물이 있었다. 

홍귀달은 세조 때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온 이래 성종 때에는 대사성, 대제학, 이조 판서, 호조 판서 등을 거쳤다. 그는 문장 실력이 뛰어났고 중신(重臣)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기 싫어하던 연산군에게 할 말은 하는 강직한 신하 홍귀달은 늘 거북한 존재였다. 연산군 10년(1504) 2월 21일, 세자빈을 간택한다는 명이 내렸는데, 홍귀달의 손녀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20일 뒤에 경기 관찰사 홍귀달은 이 문제를 가지고 아뢰었다.

홍귀달 
신의 손녀는 참봉 홍언국(洪彦國)의 딸로 신의 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처녀이므로 대궐에 나가야 하는데, 마침 병이 있어 신이 언국을 시켜 사유를 갖추어 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담당 관사에서는 대궐에 나오기를 꺼리는 것이라 하여 언국을 국문하게 하였습니다. 정말 병이 없다면 신이 어찌 감히 대궐에 보내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명하셔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언국의 딸이기는 하지만 신이 실질적인 가장이므로 처벌을 받겠습니다.

연산군 
홍언국을 국문하면 진상을 알게 될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위하여 해명하고 아들이 아비를 위하여 해명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니, 홍귀달도 국문하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11일>


홍귀달이 아뢴 말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명하셔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부분이었다. 병이 심해 지금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 말을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한 것으로 듣고 묵과할 수 없다고 여겼다. 분노가 폭발한 연산군은 홍귀달을 처벌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공손치 못한 말을 그대로 보고한 승지들까지 국문하게 하였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심문이 느리다고 의금부 당상을 심하게 독촉하였다.



홍귀달에 대한 국문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가? 필시 그가 재상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니, 이는 모두 임금을 능멸하는 풍조에서 나온 것이다. 의금부 당상을 불러 방금 내가 한 말을 전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미 홍귀달의 직첩을 거두었으니 재상을 추국하는 상황이 아니다. 목에 쇠사슬은 채웠는가? <연산군일기 10년 3월 13일>

연산군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분위기에 대해 특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홍귀달의 목에 쇠사슬을 채웠냐고 물어본 것을 보면, 당시 연산군의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홍귀달은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연산군은 그렇게 하고도 화가 덜 풀렸던지 경기도 양근(楊根)까지 압송해 간 홍귀달을 다시 끌고 와 곤장을 치게 하고는 감독하는 승지를 통해 이런 말을 전하였다.

‘금오좌목(金吾座目)’에 실린 의금부 관사의 전경을 그린 그림. [규정각한국학연구원]

‘금오좌목(金吾座目)’에 실린 의금부 관사의 전경을 그린 그림. [규정각한국학연구원]

임금과 신하의 구분이 없어 임금을 능멸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반드시 먼저 나이가 많고 연륜이 있는 재상에게 벌을 주어야 아랫사람들이 조심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연산군일기 10년 3월 16일>

예부터 2품 이상의 신하는 신문할 때 형장을 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국가의 원로를 대접하는 기본 예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풍조를 뿌리 뽑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재상에게 모욕적인 형벌을 가하였다. 공포정치를 통해 온 세상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불행은 홍귀달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네 아들도 귀양을 가고, 부인 김씨는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변방 귀양지에 갇힌 늙은 재상의 초라한 모습은 ‘허백정집(虛白亭集)’에 실린 그의 시에 잘 드러난다.

서울 떠나 삼천 리
온종일 고향 생각뿐이네
귀양 간 아들은 아득히 떨어져 있고
처자식도 먼 나라 사람이네
머리 들어 앞을 보니 산천은 막혀 있고
돌아갈 마음에 세월은 더디구나
자고 먹는 일 여전히 쉽지 않아
앙상한 뼈에 가죽만 붙어 있네 


홍귀달의 귀양은 대재앙의 서막에 불과했다.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追崇)하는 일을 추진하다가, 폐비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찾아내 처벌하는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눈엣가시 같던 조정 신하들에게 줄줄이 가혹한 처벌을 내렸는데, 당시 승지로 있었다 하여 홍귀달도 도성으로 압송해 오다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사형에 처하였다. 당시의 사관은 연산군이 유독 홍귀달을 가혹하게 대한 진짜 이유로 볼 만한 사실 하나를 기록하였다.

홍귀달은 당시 정사가 날로 타락해가는 것을 보고 경연에서 누차 간언하다가 왕의 비위를 거슬렀다. 그가 경기 감사로 있을 때 경영고(京營庫)의 고지기[庫直]가 되고자 하는 자가 왕이 총애하던 장녹수(張綠水)를 통해 왕에게 청탁을 하였다. 이에 왕이 몰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을 시켜 자기의 뜻이라고 하며 부탁하게 하였으나 홍귀달은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으나, 결국 다른 일로 귀양을 보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죄가 없는데 죽었다고 슬퍼하였다.
<연산군일기 10년 6월 16일>


20세기 초 태형을 집행하는 장면. [국립민속박물관]

20세기 초 태형을 집행하는 장면. [국립민속박물관]

홍귀달이 연산군의 청탁을 거부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죽었다는 말이다. ‘잘 달리는 말은 발길질도 잘한다’라는 옛말이 있다. 강직하고 소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능력도 뛰어나다는 말이다.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홍귀달과 같은 모난 돌이 필요하다. 그 모난 돌을 포용하는 정도가 그 사회의 성숙도와 발전 가능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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