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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홍귀달에게 앙심을 품은 연산군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

  • |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홍귀달에게 앙심을 품은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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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귀달에 대한 국문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가? 필시 그가 재상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니, 이는 모두 임금을 능멸하는 풍조에서 나온 것이다. 의금부 당상을 불러 방금 내가 한 말을 전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미 홍귀달의 직첩을 거두었으니 재상을 추국하는 상황이 아니다. 목에 쇠사슬은 채웠는가? <연산군일기 10년 3월 13일>


연산군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분위기에 대해 특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홍귀달의 목에 쇠사슬을 채웠냐고 물어본 것을 보면, 당시 연산군의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홍귀달은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연산군은 그렇게 하고도 화가 덜 풀렸던지 경기도 양근(楊根)까지 압송해 간 홍귀달을 다시 끌고 와 곤장을 치게 하고는 감독하는 승지를 통해 이런 말을 전하였다.


‘금오좌목(金吾座目)’에 실린 의금부 관사의 전경을 그린 그림. [규정각한국학연구원]

‘금오좌목(金吾座目)’에 실린 의금부 관사의 전경을 그린 그림. [규정각한국학연구원]

임금과 신하의 구분이 없어 임금을 능멸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반드시 먼저 나이가 많고 연륜이 있는 재상에게 벌을 주어야 아랫사람들이 조심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연산군일기 10년 3월 16일>


예부터 2품 이상의 신하는 신문할 때 형장을 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국가의 원로를 대접하는 기본 예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풍조를 뿌리 뽑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재상에게 모욕적인 형벌을 가하였다. 공포정치를 통해 온 세상을 꼼짝 못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불행은 홍귀달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네 아들도 귀양을 가고, 부인 김씨는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변방 귀양지에 갇힌 늙은 재상의 초라한 모습은 ‘허백정집(虛白亭集)’에 실린 그의 시에 잘 드러난다.

서울 떠나 삼천 리
온종일 고향 생각뿐이네
귀양 간 아들은 아득히 떨어져 있고
처자식도 먼 나라 사람이네
머리 들어 앞을 보니 산천은 막혀 있고
돌아갈 마음에 세월은 더디구나
자고 먹는 일 여전히 쉽지 않아
앙상한 뼈에 가죽만 붙어 있네 




홍귀달의 귀양은 대재앙의 서막에 불과했다.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追崇)하는 일을 추진하다가, 폐비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찾아내 처벌하는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눈엣가시 같던 조정 신하들에게 줄줄이 가혹한 처벌을 내렸는데, 당시 승지로 있었다 하여 홍귀달도 도성으로 압송해 오다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사형에 처하였다. 당시의 사관은 연산군이 유독 홍귀달을 가혹하게 대한 진짜 이유로 볼 만한 사실 하나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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