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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의 유산

‘스타트업 도시’ 만든 혁신적 마인드

  •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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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위쪽) 샌프란시스코 시청사. [샌프로시스코 시장실 공식 홈페이지, 사진제공·황장석]

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위쪽) 샌프란시스코 시청사. [샌프로시스코 시장실 공식 홈페이지, 사진제공·황장석]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건 2011년 1월이었다.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실업률은 8.9%.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이 터졌을 때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가 일을 마감하고 떠난 2017년 12월 샌프란시스코의 실업률은 2.7%. 미국 내에서도 최저 수준이었다. 그가 재임한 7년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선 우버와 에어비앤비 같은 기업이 성장했다. 지난해 12월 갑작스럽게 숨진 에드윈 리(Edwin Mah Lee, 줄여서 에드 리) 샌프란시스코 시장의 얘기다. 

에드 리 시장이 숨진 건 지난해 12월 12일 새벽 1시경이었다. 퇴근한 뒤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아내와 함께 장을 보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지 3시간 만의 일이었다. 그가 쓰러지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앰뷸런스를 불러 곧바로 인근 저커버그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Zuckerberg San Francisco General Hospital)으로 옮겼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향년 65세. 

에드 리 시장이 숨지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머큐리뉴스 같은 현지 언론뿐 아니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주요 언론이 부고를 냈다. 뉴욕타임스는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아시아계 시장, 에드 리, 65세에 숨지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워싱턴포스트 역시 비슷한 제목으로 부고를 냈다. 주지사도 아니고 숱하게 많은 미국 도시 시장 중 한 명에 불과한 그의 사망이 이토록 큰 뉴스가 된 건 그가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지내며 남긴 유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중국인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인권변호사가 됐고, 아시아계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시장으로 선출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재임 기간 샌프란시스코를 ‘스타트업 도시’로 변모시킨 혁신적인 행정가였다.

이민자 가정의 공부 잘하는 아들

1977년 8월 4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인터내셔널호텔 앞에서 이 호텔에 세 들어 살아온 노동자들을 강제퇴거하려는 경찰들과 그에 맞서는 학생과 인권단체 활동가, 세입자 등이 대치하고 있다. 당시 UC 버클리 법학대학원 학생이던 에드 리도 투쟁 대열에 참여했다. [사진 Nancy W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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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8월 4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인터내셔널호텔 앞에서 이 호텔에 세 들어 살아온 노동자들을 강제퇴거하려는 경찰들과 그에 맞서는 학생과 인권단체 활동가, 세입자 등이 대치하고 있다. 당시 UC 버클리 법학대학원 학생이던 에드 리도 투쟁 대열에 참여했다. [사진 Nancy Wong ]

에드 리는 1952년 5월 5일 워싱턴주 시애틀 남부 지역 비컨힐(Beacon Hill)에서 태어났다. 언덕이란 명칭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가파른 언덕에 있는 가난한 마을이다. 당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모여든 곳이었는데, 지금도 아시아계가 전체 주민의 40%를 넘을 만큼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한다. 2011년 12월 15일 에드 리 시장은 시애틀의 아시아계 매체 ‘Northwest Asian Weekly’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여러 가지가 확인된다. 그는 중국 광둥 지방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이민 온 가정의 여섯 자녀 중 다섯째다. 아버지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주방에서 요리를 했고,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49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졌는데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그와 형제들은 홀로 생계를 책임지게 된 어머니를 도우며 힘겹게 공부했다. 가난했던 에드 리와 그의 형제들은 당연히 등록금이 없는 공립학교를 다녔다. 그는 공부를 무척 잘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동부 메인주에 있는 명문 사립대인 보든칼리지(Bowdoin College)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으니 말이다. 이 학교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순수학문, 풍부한 교양, 학습능력 등에 주안점을 두는 대학)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이다. 미국에서는 통상 돈이 많고 학생 수는 적은 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이 훌륭하다고들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학교는 최상위권 대학이다. 학교 웹사이트를 보면 대학원이 없는 이 학교의 학생 수는 1800명가량인데 2017학년(2016년 7월~2017년 6월) 이 학교의 대학기금은 14억6000만 달러였다. 물론 사립대학이면서 종합대학인 스탠퍼드대는 같은 시기 대학기금이 248억 달러로 훨씬 많았다. 다만 학생 수도 1만6000명(학부생은 7000명가량)이란 점을 고려하면 기금 차이가 그렇게 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공립대인 UC버클리의 경우 2016학년 대학기금이 15억9000만 달러로 보든칼리지보다 조금 많았지만, 학생 수는 4만여 명(학부생은 3만여 명)이나 된다(UC버클리는 1월 4일 현재 2017학년 대학기금 통계가 공개되지 않았다). 하여튼 에드 리는 1974년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되고자 UC버클리 로스쿨에 진학한다. 대서양과 맞닿은 동부의 저 끝에서 다시 태평양 연안의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Bay Area)으로 돌아온 것이다. 

에드 리와 샌프란시스코의 인연이 시작된 건 이때부터였다고 해야겠다. 그는 1978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고는 1979~89년 아시아계 저소득층 주민을 위한 법률지원단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언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1978년이나 1979년 어느 시점인 듯하다). 에드 리를 인권변호사로 이끈 사건은 1977년 인터내셔널호텔 철거 반대 시위였다. 당시 가난한 필리핀계, 중국계 노동자들이 싼값에 세 들어 살던 인터내셔널호텔이 부동산개발업자에게 팔리면서 이들이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가 되자 이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투쟁에는 쫓겨날 처지에 있던 노동자와 UC버클리 및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아시아계 학생들, 지역 활동가들이 결합했다. 이때 에드 리도 투쟁 대열에 있었다. 육체노동으로 겨우 먹고사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주거권을 지키는 건 같은 처지에서 살아온 그에게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 샌프란시스코 시장

공식 철거를 앞두고 경찰과 시위대가 맞섰을 때 그도 시위대에 있었다. 결국 경찰의 완력에 시위대는 두들겨 맞으며 해산됐고 세 들어 살던 노동자들은 쫓겨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투쟁이 이어지면서 결국 철거된 호텔 자리엔 원래 부동산개발업자가 원했던 상업용 건물이 아니라 쫓겨났던 필리핀계, 중국계 노동자들을 위한 저렴한 주거시설이 들어섰다. 에드 리는 앞서 언급한 Northwest Asian Weekly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가난한 주민들의 주거권과 이민자 권익 보장 같은 사회운동에 적극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에드 리는 이후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중국계 시장이자 아시아계 시장으로 선출됐다. 원래부터 정치적 야심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시장이 된 과정을 살펴보면 어쩌다 보니 운 좋게 그 자리에 오르게 된 측면이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2010년 11월 선거에서 당시 시장이던 개빈 뉴섬(Gavin Newsom)이 캘리포니아주 부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시장직 공백이 생겼다. 시장직 공백이 생기면 시의회에서 공식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임시 시장을 임명해야 하는데, 시장직을 노리던 시의원(및 파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임시 시장직을 차지하고자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2011년 1월 시의회는 가장 정치적 야심이 없어 보이던 에드 리를 그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그는 당시 시장이 임명하는 5년 임기의 고위 공무원 직책을 맡고 있었다. 가난한 주민을 돕는 법률지원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샌프란시스코시 인권위원회 일을 하게 됐고, 그러다가 다른 공무원 직책을 맡으면서 ‘어쩌다 공무원’ 생활이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불출마 선언을 뒤집다

에드 리는 당시 자신을 임시 시장으로 뽑아달라며, 뽑아만 주면 나중에 공식 시장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정치적 경쟁자를 키우고 싶지 않아 눈치를 보던 시의원들은 에드 리를 임시 시장 자리에 앉혔다. ‘이 친구를 바지사장으로 잠시 앉혀두자’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에드 리는 불출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11년 11월 시장 선거에 출마해 현직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가볍게 경쟁자를 따돌리며 당선됐다. 그가 불출마 선언을 번복한 배경엔 분명 자신의 정치적 야심도 있었겠지만 그의 등을 강하게 떠민 주위 사람들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장 출신으로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흑인 시장이던 윌리 브라운(1934~), 샌프란시스코 정치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차이나타운의 실력자 로즈 팩(1947~2016) 등이 그의 출마를 종용했다. 윌리 브라운 시장 재임 기간 에드 리는 샌프란시스코시 인권위원회 집행이사로 일한 인연이 있었다. 로즈 팩은 이때가 에드 리를 최초의 중국계 시장이자 아시아계 시장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라고 봤을 것이다. 결국 에드 리는 11월 선거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그리고 4년 뒤인 2015년 11월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한다. 2016년 1월 8일 시작된 그의 두 번째 공식 시장 임기는 2020년 1월 7일까지였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연달아 두 번까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될 수 있다. 이번이 그의 마지막 임기였다. 

샌프란시스코는 현재 사무실 품귀 현상을 빚을 만큼 기업이 몰려들고 있다. 기술기업들이 잇따라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얻고 있어서다. 지난해 10월엔 드롭박스(Dropbox)가 약 2만 평(73만6000ft²) 수준의 건물을 임차했고, 9월엔 페이스북이 8800평(31만4000ft²) 규모 건물을 임차했다. 구글과 애플 등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다른 기업들도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넓혀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시는 건축제한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샌프란시스코가 기업들에 이렇듯 인기를 끌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직원들이 놀기 좋은 곳이어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사정은 이렇다. 실리콘밸리 경기가 호황을 이어가면서 엔지니어(특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고 있고, 기업들의 인재 유치 전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기업은 탐나는 인재를 뽑기 위해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하는 20, 30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직장을 선호한다. 대중교통이 취약하고 한적한 교외에 있는 실리콘밸리와 달리 버스, 전차 등을 이용하기 편하고 공연문화 시설과 클럽 등이 널려 있는 젊음의 도시가 샌프란시스코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경기장도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다.

세금 깎아주며 기업을 붙들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가 기업에 인기를 얻게 된 더욱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에드 리 시장 시절의 기업친화 정책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위터 감세’다. 에드 리는 2011년 초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실리콘밸리 도시로 이사 가려던 트위터에 세금 감면 특혜를 제공했다. 경제위기로 폐업이 늘어 빈 건물이 많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미드마켓(Mid-Market·샌프란시스코 시내 마켓스트리트를 중심으로 개발이 덜 이뤄진 일부 지역을 일컫는 말) 지역에 입주하는 것을 조건으로 세금 혜택을 준 것이었다. 

세금 혜택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스톡옵션 행사 차익과 관련이 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시 조례에 따르면 한 해 직원들에게 지급하는 총 금액이 25만 달러가 넘으면 그 회사는 해당 금액의 1.5%를 시에 세금으로 낸다. 그런데 이 금액에는 월급과 보너스 외에 스톡옵션 행사 차익도 포함돼 있다. 직원들에게 실제 지급한 월급과 보너스, 그리고 직원들이 스톡옵션을 행사해서 얻은 차익 등이 총 100만 달러였다고 치면 1만5000달러를 시에 세금으로 내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세금은 시정부에 내는 세금만을 의미한다. 연방정부, 주정부에 내는 세금은 별도다. 2011년 5월 에드 리 시장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시의회에서 통과된 조례 개정안은 직원들의 스톡옵션 행사 차익으로 회사 측이 세금을 내야 하는 대상 금액의 한도를 총 75만 달러로 제한하도록 했다(다만 2010년에 직원들의 스톡옵션 행사 차익이 75만 달러보다 컸다면 그 금액에 대해 세금을 내도록 했다). 예컨대 회사가 상장하게 돼 스톡옵션 행사로 1000만 달러의 차익이 생겼더라도 75만 달러에 대해서만 세금을 내고 나머지 925만 달러에 대해서는 회사 측이 내야 할 세금을 면제해준다는 것이다. 

트위터는 2013년 11월 상장하면서 스톡옵션으로 100만 달러 이상 차익을 얻은 직원이 수두룩하게 탄생했다. 100명이 백만장자가 됐으면 스톡옵션 행사 차익이 1억 달러일 텐데, 그 경우 회사 측은 1억 달러에 대해서가 아니라 75만 달러에 대해서만 세금을 내면 됐던 것이다. 직원들이 행사하는 스톡옵션 차익을 회사가 직원들에게 지급한 급여 총액에 포함해 이런 방식으로 세금을 매기는 시는 캘리포니아주 전체에서 샌프란시스코가 유일했다. 당시 주식시장 상장(IPO)을 준비하던 트위터 측에서 보면 다른 동네로 회사를 옮기면 안 내도 되는 막대한 세금을 샌프란시스코에선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로서는 시장과 세금 감면 흥정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버와 에어비앤비 편에 서다

샌프란시스코 시청 근처 마켓스트리트에 있는 트위터 본사.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다른 도시로 둥지를 옮기려던 트위터는 에드 리 시장의 세금 감면 제안을 받고 이곳으로 본사를 옮겼다. [사진제공·황장석]

샌프란시스코 시청 근처 마켓스트리트에 있는 트위터 본사.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다른 도시로 둥지를 옮기려던 트위터는 에드 리 시장의 세금 감면 제안을 받고 이곳으로 본사를 옮겼다. [사진제공·황장석]

결과적으로 트위터는 세금 감면 혜택을 받으면서 샌프란시스코 폴섬스트리트에 있던 본사를 시에서 제안한 동네의 빈 건물(폐업한 가구회사 건물)로 옮겼다. 이후 트위터는 2013년 11월 상장했다. 상장 가격이 주당 26달러였는데 그날 마감한 가격이 44.94달러였다. 2014년 1월 초 주당 69달러로 최고점을 찍은 뒤 하향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말이다(트위터는 1월 4일 주당 23.99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트위터를 시작으로 다른 기술기업들도 세금 감면 혜택을 얻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았다. 2015년 10월 19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2014년 한 해 동안 이 기업들이 받은 세금 감면 혜택이 3400만 달러였다고 보도했다. 편의상 1달러를 1000원으로 환산하면 340억 원이다.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들을 샌프란시스코에 붙잡아둘 유인책으로 매우 강력한 특혜를 제공했음이 확인된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에드 리는 기업에 이렇듯 세금 감면 혜택을 주면서 비판도 많이 받았다. 기업들 세금 깎는 대신 그 세금을 받아 저소득층 주거 안정과 같은 복지에 써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꼭 그런 게 신경 쓰였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에드 리는 세금 감면 혜택을 주면서 기업에 사회공헌 협약을 하도록 했다. 세금 혜택을 받는 회사들 중 직원에게 지급하는 금액이 연간 100만 달러가 넘는 규모의 회사는 지역사회를 위해 별도의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협정을 맺도록 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업을 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것 외에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었다. 2016년 4월 29일 월스트리트저널은 그 같은 협약으로 2014년과 2015년 2년 동안 기업들이 내놓은 장학금과 기부금이 420만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금전적으로 볼 때 시가 기업에 제공한 세금 감면 혜택에 비추면 매우 적은 금액이지만 말이다. 

에드 리가 시장 재임 중 가장 힘 있게 추진한 건 일자리 만들기였다. 기술기업 중심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 싶은 기업에 각종 혜택을 제공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트위터에 세금 감면 선물을 안긴 것처럼 말이다. 트위터 세금 감면은 어찌 보면 샌프란시스코를 지금의 스타트업 도시로 만든 첫 단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게 우버와 에어비앤비 같은 기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이다. 

20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우버는 규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업을 지속할 수 없는 기업이었다. 2010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모바일 리무진 콜 서비스 우버택시(UberCab)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우버는 시작 3개월 만에 캘리포니아주와 샌프란시스코시 당국에서 운행 중지 명령을 받았다. 이름에다 떡하니 택시(Cab)란 명칭을 쓴 것부터 문제가 됐다.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우버는 사명을 그냥 우버(Uber)로 변경하고 버티기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곤 2012년 7월 오늘날 우버를 대표하는 서비스가 된 우버엑스(UberX)를 시작한다. 택시면허 없는 일반인이 자가용으로 택시처럼 영업을 하는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우버는 2012년 11월 캘리포니아주로부터 벌금 2만 달러를 부과받았는데, 결과적으로 2013년 1월 사고보험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합법 서비스로 인정을 받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시의 규제 담당자들과 우버 측의 대화 통로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정부의 규제 담당자들과의 대화도 이뤄졌다. 물론 우버뿐 아니라 같은 업종 기업인 리프트(Lyft)도 마찬가지 지원(?)을 받았다.

기업만 좋은 도시?

트위터 본사에서 도보로 1, 2분 거리의 마켓스트리트에 있는 우버 본사. [사진제공·황장석]

트위터 본사에서 도보로 1, 2분 거리의 마켓스트리트에 있는 우버 본사. [사진제공·황장석]

에어비앤비의 합법화는 더욱 극적이었다. 2008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에어비앤비는 에드 리가 아니었으면 사업을 지금처럼 확장하는 게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비슷한 시기 사업을 시작한 뉴욕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에어비앤비는 합법이지만 뉴욕에선 여전히 불법이다. 2017년 4월 17일 뉴욕타임스는 뉴욕에서 에어비앤비가 여전히 불법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주인과 함께 기거하지 않고 30일 미만으로 집을 빌려주면 불법’이란 규정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규정이 있었던 샌프란시스코는 에드 리 시장 시절 이 규정을 고쳐 에어비앤비 영업을 합법화했다. 

에드 리가 시장 재임 중 우버, 에어비앤비 같은 기업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지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2012년 3월 발족한 공유경제워킹그룹(Sharing Economy Working Group)이다. 공유경제지원단체 ‘셰어러블(Shareable)’ 공동창업자인 닐 고렌플로(Neal Gorenflo)의 기록에 따르면, 에드 리는 이 워킹그룹을 발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워킹그룹의 목적은 지금 성장하고 있는 공유경제와 관련한 경제적 이익, 관련된 혁신기업들, 그리고 정책 이슈 등을 면밀하게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공유경제는 모든 분야에서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의 새로운 일자리와 소득을 창출하는 기술과 혁신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롭고 보다 지속가능한 공유경제 탄생지로서, 샌프란시스코는 그 성장을 촉진하고 (낡은) 법을 현실에 맞게 고치고, 새로 등장하는 정책적 이슈와 우려에 대응하는 데 있어 선봉에 서야만 합니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저소득층 주거권 보장 등을 위해 투쟁하고 법률지원을 했던 인권변호사 에드 리. 그는 시장직을 수행하며 기업에 세금 혜택을 주고, 기존의 법규와 충돌하는 우버, 에어비앤비 같은 기업이 합법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그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경제는 실업률 급락에서 보듯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이들에겐 배제를 의미했다. 그래서 에드 리는 집값 월세 등이 급등해 외곽 도시로 밀려난 주민, 그리고 스타트업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산업 노동자들에겐 원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기업이 사업하기 좋은 도시를 만들면 일자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해 도시 전체가 잘살게 된다는 게 에드 리가 시장 재임 기간 보여준 철학이었다. 그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고질적인 샌프란시스코의 홈리스 문제를 개선하고, 저소득층에게 저렴한 주거공간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망 전까지 올겨울 안에 길거리에 있는 홈리스 중 1000명 이상을 시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생활하도록 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이를 위해 최대한 빨리 홈리스 숙소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며 시의회에 요청했는데, 자신의 지역구에 홈리스 숙소가 더 지어지는 걸 반대하는 시의원들과의 갈등으로 정체 상태에 있었던 안건은 그가 사망한 다음 날 시의회에서 통과됐다. 

사실 홈리스 문제는 그로서도 풀기 힘든 숙제였다. 에드 리 재임 기간 홈리스 숫자는 꾸준히 늘었다. 지난해에만 1년 전과 비교해 0.5% 줄어들었지만 증가 추세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해 6월 샌프란시스코시의 홈리스 조사에서 파악된 숫자는 7499명. 한 조사에선 미국 주요 대도시 가운데 인구 10만 명당 홈리스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1위 뉴욕에 이어 샌프란시스코가 2위를 차지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다니면 어렵지 않게 길거리의 홈리스 텐트를 발견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에겐 뭔가에 취해 길거리에서 대낮에 대소변을 보는 홈리스도 낯설지 않다. 이들이 홈리스가 되는 이유는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샌프란시스코시가 2015년 실시한 홈리스 조사에서 왜 홈리스가 됐는지 물었을 때 응답자의 25%는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18%는 셋집에서 강제로 쫓겨나거나 월세를 감당하지 못했거나 집을 차압당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 홈리스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에드 리의 유산

사람이 몰려들고 집값이 오르는 데 비해 에드 리 시장 재임 기간 새로 짓는 집 숫자는 빠르게 늘지 않았다. 2017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보도에 따르면 한 해 5000가구 건물을 새롭게 지어야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2011년엔 달랑 269가구가 새로 지어졌고, 2012년 1317가구, 2013년 1960가구, 2014년 3514가구, 2015년 2954가구, 그리고 2016년에 와서야 5046가구가 늘었기 때문이다. 시에선 나름대로 충분히 건축 허가를 내줬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만큼 건축이 이뤄지진 못했던 것이다. 

에드 리 재임 시절 샌프란시스코의 경기 호황이 스톡옵션으로 대박을 내는 기술기업 직원들과 집값 월세 급등으로 수입이 증가한 집주인 등에게만 과실을 나눠줬다는 비판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방 한 칸, 화장실 하나인 코딱지만 한 아파트의 한 달 월세로 3000달러가 우스운 곳이 샌프란시스코다. 경우에 따라선 7, 8년 사이 월세가 두 배 가까이 급등하기도 했다. 물론 집값은 그보다 더 올랐으면 올랐지 덜하지 않았다. 시에서 정책적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과의 경쟁에서 낙오한 산업 노동자도 있다. 대표적인 게 우버에 밀려난 택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우버가 등장하기 전까진 택시면허만 있으면 먹고살 만했다. 또 택시면허를 시에서 엄격하게 규제했기 때문에 기존의 택시면허는 재산이었다. 지난해 12월 29일 현지 언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에 택시운전사 켈리 디세인트(Kelly Dessaint)가 기고한 글을 보면, 25만 달러를 대출받아 택시면허를 산 그의 동료 택시운전사가 ‘에드 리 시장이 내 인생을 망쳤다’며 한탄하는 내용이 나온다. 에드 리 시장이 우버, 리프트 편을 들어주면서 사업이 합법화됐고, 그러면서 택시면허는 종이쪼가리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켈리의 동료는 택시운전으로 대출 이자 갚느라 허덕대느니 파산 선고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이라고 말한다. 

에드 리 시장의 장례식이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치러지고 열흘 뒤인 지난 연말 샌프란시스코 시청을 찾았다. 건물 앞뒤에 있는 출입구에서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통과하면 누구나 출입 가능하다. 장례식이 거행된 1층 중앙 원형 홀과 계단에선 아프리카 민속음악 공연이 한창이었다. 주변에선 신혼부부가 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원형 홀 옆 강당 한편에선 요가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그 맞은편에 진열된 사진 속에 에드 리가 있었다. 그는 사진 속에서 역대 시장들이 시청을 찾은 귀빈들에게 선물해온 청사 기념열쇠를 이 지역 미국프로농구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타 스테판 커리 선수에게 증정하며 활짝 웃고 있다. 

에드 리의 집무실이 있던 시청에서 마켓스트리트 트위터 본사까지는 정확히 3분이 걸렸다. 천천히 걸어도 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시청에서 트위터 본사까지 걸어가는 도중 만난 홈리스 남성은 혼잣말을 하며 뭔가 화가 난다는 듯 침을 퉤퉤 뱉어댔다. 트위터 본사에서 길 하나를 건너 2분 거리에 우버 본사가 있었다. 같은 건물엔 샌프란시스코 교통국도 입주해 있었다. 

시정부가 나서서 혁신적인 기업을 유치하면 일자리가 늘고, 경제성장을 통해 복지도 확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에드 리. 샌프란시스코는 그의 바람대로 변화하게 될지, 실험은 아직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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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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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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