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호

난임전문의 이성구의 수태이야기

만리장성 쌓아도 쉽지 않은 임신

  • 입력2018-02-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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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호언장담 중에서 ‘3대 착각’이라 생각되는 것이 있다. 대박의 확신과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세상일과 사람의 마음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고 기대보다는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는 걸 아직 잘 몰라서 내뱉는 우언(愚言)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착각이 “애 만드는 건 문제없다”는, ‘임신은 선택’이라는 호언장담이 아닐까 싶다. 임신이 그토록 쉬웠더라면 전 세계 난임 인구가 이토록 많을 리가 없다. 

    임신이 쉽지 않다는 증거는 구중궁궐만 봐도 알 수 있다. 후사를 잇는 것이 종묘사직을 바로 세우는 대업 중 하나이던 궁궐에서야말로 자식 낳기를 얼마나 소원했을까. 조선시대 27명의 임금에게 총 174명의 아내(중전과 후궁)가 있었다. 이들에게서 총 273명의 자녀(왕비의 자녀 93명, 후궁의 자녀 180명)가 태어났다. 27명의 임금으로 계산하면 평균 자녀 수가 10명이지만, 임금의 여인 1명당 1.57명밖에 낳지 못했다. 단 한 명도 낳지 못한 임금(단종과 인종, 경종, 순종)도 있었다. 

    국왕에게는 다처(多妻)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자손이 귀했을까. 드라마 속 임금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중전이든 후궁을 만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임금의 부부생활은 오로지 후사 즉 대통을 잇기 위한 책임과 의무로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라는 저서에 따르면, 임금의 저녁 수라상에는 궁중 여인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올라가는데, 합궁 대기자(중전/후궁)가 되려면 배란기에 접어든 여인이어야 가능했다고 적혀 있다. 그 시절 여인들은 수태 가능 기간(배란기)을 생리 끝나고 5일 후나 속곳에 묻은 분비물(달걀흰자처럼 끊어지지 않는 점액)로 1차 체크를 했다고 한다. 문제는 임금의 합궁(부부생활)은 길일에만 이루어졌기에 배란일에 속하는 중전과 후궁이라고 해도 길일에 해당하지 않으면 임금의 용안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유인즉 음력 초하루, 그믐날, 보름날, 뱀날(巳)과 호랑이날(寅) 같은 날에는 합궁을 피하다 보면 고작 한 달에 2~3일밖에 합궁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 길일에 때마침 배란기인 여인이 그리 많지 않았을 터. 설상가상으로 하늘이 노했다고 여겨지던 천둥이 치고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날이면 그날의 합궁 계획은 무산되기까지 했다니 제아무리 임금이라지만 한창나이에 넘쳐나는 성욕을 어찌 참을 수 있었을까 싶다. 그토록 절제의 삶을 살았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다 챙겨 먹었을 임금들이 평균적으로 45세 언저리에 생을 마감한 건 국왕으로서 겪어내는 스트레스가 범인(凡人)과 달라서가 아닐까 싶다. 



    다시 강조하지만 임신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다소 쉬운 나이가 있을 뿐이다. 왜 그토록 어려운지 설명해보겠다. 정자의 생존 기간이 3~5일, 난자가 정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24시간(하루)일 때가 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 꽃다운 청춘 시기가 이런 슈퍼 수태력 기간에 속한다. 하지만 이 시기를 넘기면 정자는 1~2일, 난자는 배란 후 10~15시간 정도 정자를 기다리다가 철수해버린다. 만남, 그 절묘한 타이밍이 짧아도 너무 짧다.
     
    설령 배란기에 남녀가 합궁을 했다고 해도 임신율은 25%에 불과하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아서다. 매달 1개 난자로 임신을 꿈꾸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수(多정자)로 승부수를 던진다. 난자와 만나 수정을 이루기 위해 남성이 쏘아 올리는 화살(정자)은 무려 수천~수억 개가 된다. 하지만 자기 몸길이의 3000배나 되는 대장정(질에서 나팔관까지)을 마치고 무사히 난자 옆에서 수정을 시도하는 정자는 고작해야 100마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화살(정자)이 많을수록 좋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부부 합궁 이전에 보름간 금욕시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요즘 들어서 부쩍 화살(정자)이 부족하거나 부실한(정자 활동성 저하) 남성이 늘고 있다. 만혼(晩婚)으로 인해 난자가 부실한 여성이 많은데, 참새가 방앗간 가듯 안방을 드나들어야 할 남편이 성욕 저하에 정자까지 비실댄다면 자연 임신이 힘들어진다.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다. 정자는 수도 많아야 하지만 결정적으로 파워도 있어야 한다. 정자가 난자 옆에 힘들게 도착하더라도 거대한 콘트리트 성벽과 같은 난자를 뚫지 못하면 허사가 된다. 

    난임의 이유에는 난자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정자는 끊임없이 만들어지지만, 난자는 한 달에 한 번, 1년으로 치면 10~13회밖에 배란이 되지 않아서 만남(수정)이 쉽지 않다. 부부생활이야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임신 가능성의 기회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이토록 연장되고 있는데 난자의 수는 변함이 없다. 정자는 나이가 들면 불량 정자의 빈도가 높아질지언정 꾸준히 생산되지만 난자는 사정이 다르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만큼 난자를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나야 하는데,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의 난자 수는 비슷하다. 임신과 출산으로 난소가 쉬지 않는 이상 매달 배란으로 난자를 소진할 수밖에 없다. 초경이 시작되면 가장 좋은 난자부터 배란되므로 40대에는 염색체 이상을 담은 부실 난자가 90%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여성은 도저히 회춘할 수 없는 난소, 한정적인 수의 난자를 품고 있다. 

    임신을 원한다면 부부가 함께 다음 사항을 실천해야 한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임신하기 위해 노력할 것. 산부인과(초음파로 배란일 확인)를 최대한 활용할 것. 1년간 부부생활을 해도 임신이 안 되면 가능한 한 빨리 난임의사의 도움(인공수정,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을 것.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보다 제철음식으로 골고루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잠을 푹 잘 것. 남성은 햇빛 많이 보며 몸을 열심히 사용하고 항상 아랫도리를 차게 할 것 등이다. 

    임신은 운명이다. 또한 기적이다. 정자와 난자의 수정 확률이 3억분의 1인데 어찌 기적이 아닐 수 있겠는가. 노력 없이 안 된다. 죽을 때까지 무자식으로 살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자식을 낳고 싶다면 나이와 때를 염두에 둬야 한다.


    이성구
    ● 1961년 대구 출생
    ● 서울대 의대 졸업
    ●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 대구마리아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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