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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괴물여지도

용손 : 백령도 등 서해 각지

“고려 태조 왕건은 용의 자손이다”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용손 : 백령도 등 서해 각지

  • ‘용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가 있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 그런 존재가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면? 사람 몸을 한 용의 자손, 즉 용손(龍孫)이 있다는 소문은 한동안 우리나라 사람에게 굉장히 친숙했다. 고려 임금이 바로 용의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고려 임금은 왜 용손으로 여겨졌을까. 이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가 나온다. 조선 문종 때 조정에서 발간한 ‘고려사’ 첫머리에는 왕건의 조상에 대해 설명한 ‘고려세계(高麗世系)’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 용과 사람 사이에 자손이 생겼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이 기록은 고려 전기에 발간된 책 ‘편년통록’을 참고해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왕건 할아버지는 이름이 작제건(作帝建)이다. 작제건은 신라 후기 인물로 어릴 적부터 글씨를 잘 쓰고 활쏘기에 능했다. 워낙 솜씨가 좋아 무엇이든 쏘는 대로 다 맞힐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신궁(神弓)이라고 했다. 당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한참 지난 후였지만 작제건이 살던 곳은 지금의 개성 근방으로 옛 고구려 땅이었다. 

작제건의 집안은 선대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무역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 같다. 개성은 예성강을 따라 나가 바다를 출입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 작제건도 어느 날 장삿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결심을 했다. ‘고려사’는 작제건이 이때 아버지를 찾고자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볼 목적이었다고 언급한다. 작제건의 아버지 행방은 불분명하다. 당시엔 중국 당나라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심지어 작제건의 아버지가 당나라 황제였다는 이야기도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고려 후기가 되면 원나라 학자들이 고려 임금에게 “그런 전설은 좀 황당하지 않으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작제건의 모험

고려 왕씨 족보에 실린 왕건 초상화(왼쪽)와 왕건 청동상.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왕씨 족보에 실린 왕건 초상화(왼쪽)와 왕건 청동상. [국립중앙박물관]

어쨌든 ‘고려사’에는 활을 아주 잘 쏘는 청년 작제건이 무역선을 타고 가다 겪는 모험담이 기록돼 있다. 그 내용은 ‘삼국유사’에 담긴 거타지(居陀知)라는 사람의 모험담과 대단히 흡사하다. 

거타지 전설에 따르면 배를 타고 가던 일행이 곡도(鵠島)에서 난처한 일을 겪는다. 곡도는 지금의 백령도를 일컫는다. 한반도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간 자리에 있는 섬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안보상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서 중국 산둥반도까지는 거리가 200km도 채 되지 않는다. 요즘도 중국 어선이 갑자기 출현하곤 하는 지역이니, 중국으로 무역하러 떠나는 신라 뱃사람이 즐겨 이용할 만한 길목이다. 



그런데 작제건이 탄 배는 문득 바다 한가운데서 이상한 구름과 안개에 휩싸인다. 마치 사방이 어두컴컴한 곳에 갇힌 것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선원들은 겁에 질렸다. 마침 배를 탄 사람 중 점술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점을 치자 “고구려 땅에서 온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작제건의 고향이 옛 고구려 땅 아닌가. 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활과 화살을 챙겨 든 뒤 스스로 배에서 뛰어내린다. 

이다음부터는 민지라는 학자가 쓴 ‘편년강목’의 기록이 조금 더 극적이다. 바다에 뛰어든 작제건은 근처 암초에 기어올랐다. 그런데 암초 위에서 파도를 피하며 살펴보니 바닷물이 깊지 않아 걸어갈 수 있음직한 길이 눈에 띄었다. 어차피 바다 한가운데에 있어봤자 살 도리가 없으므로 작제건은 그 길을 따라나섰다. 길은 바위로 뒤덮인 작은 섬까지 이어졌다. 

그 섬에는 화려한 기와집이 한 채 서 있었다. 문이 열린 집 안에 들어서니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경전 같은 책이 한 권 보였다. 경전 옆으로 금가루를 풀어놓은 물감도 있었다. 누군가 경전 내용을 금으로 만든 물감으로 따라 쓰고 있던 흔적으로 보였다. 작제건이 가까이 가서 보니 글씨가 아직 촉촉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누군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없었다.


용녀와의 만남

작제건은 한참을 머무는 동안 점점 더 신비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누가 여기에 있었을까? 누구이기에 아무것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 섬에 이렇게 좋은 집을 지었을까?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그러다가 작제건은 일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무슨 판단이든 옳게 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고 경전을 뒤이어 베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어떤 사람이 작제건 앞에 나타났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었다. 작제건은 그 모습이 너무 신비로워서 순간 관세음보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벌떡 일어나 절을 하려고 하자 그 사람은 말없이 사라졌다가 얼마 후 다시 나타났다. 그제야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용녀(龍女)요. 여기서 몇 년 동안 경전을 베꼈지만 아직 다 쓰지 못했소. 다행히 그대는 글씨를 잘 쓰는 재주와 활을 잘 쏘는 재주가 있으니 이곳에 머물면서 내가 글씨 쓰는 것을 도와주시오. 또 우리 집안의 어려움도 한 가지 해결해 주기를 바라오.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7일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오.” 

용녀를 글자 그대로 옮기면 용의 딸이라는 뜻이다. 줄거리가 조금 다른 ‘편년통록’ 기록을 보면 먼저 서해 용왕이 나타나 작제건을 만나고, 그다음에 용왕의 맏딸과 작제건이 만나게 된다. 작제건이 용들을 다스리는 용왕의 첫째 딸, 첫째 공주를 만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편년통록’에는 용녀 이름이 ‘저민의(翥旻義)’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얼마 후 작제건은 용의 딸, 즉 저민의가 말한 집안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변신 재주가 있는 늙은 여우가 집안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늙은 여우, 즉 노호(老狐)는 저물녘이 되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모습으로 변신한다고 했다. 불교에서 치성광여래는 아름다운 불빛을 뿜으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는 신령스러운 존재다. 

노호는 그렇게 변신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주변을 구름과 안개로 가득 차게 만든 뒤 해, 달, 별을 펼쳐놓고 빛나게 한다. 그리고 소라로 만든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괴이한 음악을 연주한다. 그러면서 돌 위에 앉아 ‘옹종경(臃腫經)’이라는 책을 읽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용은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다.
 
‘삼국유사’의 거타지 이야기에는 이 노호의 신비한 재주 때문에 용 집안사람 여럿이 죽게 될 정도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저민의는 작제건에게 다시 노호가 나타나면 활로 쏘아 물리쳐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막상 저녁이 돼 노호가 하늘에서 나타나자 작제건은 그 모습에 크게 감탄하고 만다. 치성광여래의 화려하고 멋진 모습을 신비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 감히 활을 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옆에서 “정신 차리고 활을 쏘라”는 말을 들은 뒤에야 작제건은 노호를 공격한다. 과연 작제건의 화살이 명중했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노호는 땅에 떨어진다. 

작제건은 이후 궁궐 같은 곳으로 안내돼 용의 무리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제안을 받는다. 

“그대 덕분에 근심이 사라졌으니, 그 은혜를 갚고 싶소.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그대의 아버지를 찾겠소? 아니면 온갖 보물을 들고 동쪽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부자로 살겠소?” 

작제건은 이때 자신이 임금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용왕은 “그것은 나라의 운수와 엮인 일이라 때를 맞추지 않으면 어렵다. 당신의 자손 때나 이뤄질 수 있다”고 답한다. 대신 다른 소원은 다 들어주겠다고 다시 말한다.


“내가 용의 자손이다”

작제건이 망설이고 있으니 옆에서 한 할머니가 “왜 용녀와 결혼하겠다는 소원은 빌지 않는 거요?”라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결국 그 소원을 말해 작제건과 저민의가 부부가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게 이 전설의 결말이다. 

이후 다른 내용도 조금 덧붙어 있다. 저민의는 신라에 돌아온 뒤 우물을 파고 그것을 통해 용궁을 오갔다. 작제건에게는 자신이 우물 쪽에 갈 때 절대 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작제건이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그쪽을 봤고, 저민의가 딸과 함께 황룡(黃龍)으로 변신해 오색구름을 일으키며 우물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작제건이 약속을 어긴 걸 알게 된 저민의는 이후 그의 곁을 떠났다. 

저민의는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다. 그러니까 임금의 할머니가 서해 용왕의 첫째 딸이고 황룡으로 변해 여러 색깔 구름을 일으키며 우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존재였다는 얘기다. 이런 얘기가 고려 사람들 사이에는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이런 믿음을 황당하다고 비판한 사람도 많았다. 고려 말 학자 이제현은 ‘성원록’이라는 책 기록을 인용해 고려 태조의 할머니는 평주 사람 두은점각간(豆恩坫角干)의 딸이며 ‘저민의 전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제현조차 왕건 할머니를 ‘용녀’라고 칭했다. 세간에서 이 단어가 그만큼 유행했다. 

조선시대 이야기 책 ‘어우야담’에는 고려 임금 우왕이 죽기 전 자신도 ‘용의 자손’이라면서 웃옷을 벗어 용 비늘이 피부에 돋아 있는 부위를 보여줬다는 전설도 실려 있다. 이성계 일파가 “우왕은 고려 임금 자손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며 몰아내 처형하라고 하자, 자신은 ‘고려 임금의 자손이 맞다’고 반박하며 용 비늘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정말로 천 수백 년 전 서해에 용이 살았고, 그 딸이 사람으로 변해 ‘용손’을 낳을 수 있었을까? 근거 없는 상상일 뿐이지만, 나는 용의 딸 저민의가 사실 해적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왕건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는, 장보고가 해적을 물리치던 무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보고가 몰락한 후 해적 출몰은 신라의 심각한 사회문제이기도 했다.


해적의 후예

그렇다면 작제건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저민의는 용의 딸이 아니라, 용의 딸이라는 별명을 가진 해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저민의가 이끄는 해적 패거리가 다른 무리와 파벌 싸움을 벌이다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때 활을 잘 쏘는 작제건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승리한 건 아닐까. 그 ‘역사’가 신비로운 용손 이야기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저민의가 결혼 후 작제건에게 자신이 우물로 갈 때 절대 보지 말라고 일렀다는 부분은, 그가 해적과 비밀스럽게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걸 들키지 않으려 했다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저민의가 여러 보물을 갖고 있었던 점, 배가 항해하는 걸 가로막았다는 점 등도 그가 해적이었음을 연상케 하는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치성광여래로 변신했다는 노호는 저민의의 해적단과 대립하던 사이비종교 교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글씨 쓰는 재주가 좋은 부잣집 도련님이 바다로 나섰다가 해적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함께 적을 물리치는 와중에 정이 들어 부부가 됐으며, 그 부부의 손자가 왕국을 세운다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나는 우리 사극에서 민족의 위대한 혼을 되살리겠다면서 거창한 내용만 다루는 것보다, 이런 줄거리를 좀 더 많이 소개하는 게 쓸모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7월 21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예부터 원창왕후, 즉 저민의의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온 개성 온혜릉을 전면 조사해 국보 유적으로 등록했다고 보도했다. 돌짐승 3개를 비롯해서 여러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돌짐승 중에 용 모양인 것이 있었는지, 유물 중에 항해와 관련된 것은 없었는지 호기심이 생긴다. “혹시 무덤에서 지금까지 보고된 적 없는 이상한 생명체의 DNA가 발견되지는 않았느냐”고 한번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용손 : 백령도 등 서해 각지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신동아 2019년 9월호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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