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찰(察)이다. 남을 관찰(觀察)하고, 나를 성찰(省察)하며, 세상을 통찰(洞察)하는 도구여서다. 찰과 찰이 모여 지식과 교양을 잉태한다. 덕분에 찰나의 ‘책 수다’가 묘한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 정작 살다보면 이 쾌감을 충족하기가 녹록지 않다. 이에 창간 88주년을 맞는 국내 최고 권위의 시사 종합지 ‘신동아’가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한 시즌(4개월)간 월 1회 씩 책 한 권을 고재석 기자와 함께 읽는다. [편집자 주]
조선을 지배한 이기(理氣)론이 현대 한국의 가치체계와 한국인의 행동양식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저자의 분석을 재밌게 읽었다. 이기론으로 사소한 것(한국인들 간 호칭, 각 직업에 대한 생각,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 등)부터 한일관계 같은 거대 담론까지 분석해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저자는 한국을 ‘상승지향사회’라고 분석한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와 자신이 ‘있는 자리’의 간극을 확인하며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이 한국 사람의 기질이란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한편으로 정진이지만 한편으로는 복마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올라가고자 하는 목표가 하나다. 성취할 수단은 시험뿐(조선시대에는 과거)이다. 물론 지금은 ‘기’의 영역인 예술, 기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없다. 다만 ‘리’에 해당하는 ‘머리 쓰는 사람과 직업’에 대한 인정과 존경이 여전하다. 고로 ‘대입 수능’과 ‘고시’ 열풍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 열풍이 자아낸 크고 작은 사회문제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테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1990년대에 한국은 ‘민중의 시대’에서 ‘대중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념(민주주의)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로 탈바꿈했다. 책의 언어를 빌리자면 시대정신이 ‘리’에서 ‘기’로 변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소비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리’와 ‘기’ 중 무엇이 사회를 지배할 것인지를 시대적 맥락이 결정하는 셈이다.
2019년 한국은 어떤 맥락 위에 서 있나? 거칠게 단순화하면 지금 한국은 ‘저성장’ ‘적폐 청산’ ‘북한, 일본, 중국, 미국 등과의 대외관계’를 당면 과제로 둔 채 역사를 통과하고 있다. ‘저성장’ 탓에 ‘우리’보다는 ‘나’의 안위가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됐다. 정작 ‘적폐청산’과 ‘대외관계’에서는 ‘우리’(민족)가 주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리’와 ‘기’가 섞여 있는 복잡다단한 시대다.
어떤 시대정신을 지향하고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론 내리기란 쉽지 않다. 아직 이정표가 흐릿하다. 이럴 때 ‘이기론’으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 저자의 시각이 꽤 유용했다. 희뿌연 안개에 싸인 머릿속에 등대가 켜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