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세상을 떠난 지 7월 23일로 꼭 1년이 됐다. 최인훈은 생전에 한국 현대사와 정치 현실을 깊이 있게 성찰한 작품들로 평단과 독자의 큰 사랑을 받았다. 20대 초반 등단해 평생을 작가로 활동했지만 일상생활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딸 최윤경 씨를 만나 대작가의 숨은 면모에 대해 들었다.
[동아일보]
“나는 기본적으로 이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고, 그다음에 에너지가 좀 남아 있어 시작한 일이 예술가·과학자·연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식 앞에서도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을 만큼 단정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건조하고 딱딱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딸 최윤경(45) 씨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추운 겨울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내 두 손을 잡고 안방으로 데려가 아랫목에 깔아두는 이불 아래 나를 묻어두곤 했다.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꽁꽁 언 손과 발을 냉기가 가실 때까지 주물러줬고, 부지런히 비벼서 열을 낸 손바닥을 차가운 이마나 뺨에 대 따뜻하게 녹여줬다. 나는 거기서 눈을 감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아주 푹 잤다.”
따뜻함과 세심함, 지력과 올곧음
[지호영 기자]
인터뷰를 하면서 최씨는 몇 번 무심코 ‘아빠’라는 단어를 입 밖에 냈다. 그러고는 곧 “제가 아직도 이런다”며 수줍게 웃다 살짝 목이 메었다. 큰 눈 가득 고인 눈물을 참느라 잠시 숨을 고르는 일도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으로 보였다. 최씨는 “나는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의 따뜻함과 세심함, 지력과 올곧음이 두루 좋았다”고 했다.
최씨는 20대 중반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두 딸을 낳아 키웠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어갔다. 서로의 집에 자주 오갔고, 전화통화도 많이 했다. 대작가는 딸을 만나면 늘 가볍게 안아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때로는 “몸이 차갑다, 얼른 녹여라” “살 좀 쪄야겠다, 왜 이리 말랐느냐” 같은 가벼운 걱정을 곁들였다. 그렇게 따스히 자신을 감싸주던 아버지의 손길을, 최씨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는 말했다.
“처음엔 그런 순간이 영영 잊히지 않을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우리 둘이 나눈 추억은 계속 내 안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달라지더라. 기억이 아무 경고도 없이 사라져갔다.”
최씨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더 많이 써둬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그는 2월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펜을 잡았고, 아버지 1주기를 맞아 그간 쓴 글을 모은 책 ‘회색인의 자장가’를 펴냈다. 이 책에는 작가 최인훈을 평가하거나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오직 최인훈의 딸만 알고 전할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최씨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아버지의 딸이라는 지위와 체험을 한껏 남용했다”며 웃음 지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는 최씨의 딸, 즉 최인훈의 손녀가 삽화를 그려 의미를 더했다.
최씨에 따르면 최인훈은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을 좋아했다. 최씨에게 “네가 나중에 만화가가 돼도 좋겠다”고 한 일도 있다. 최씨는 “내가 어릴 때는 아직 만화에 대한 편견이 적잖던 시절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회상했다.
“네 생각이 옳다”
최인훈은 권위의식도 없는 아버지였다. 그는 자식들에게 “내 아버지 세대 때는 ‘가장은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내 생각은 다르다. 가족이랑 잘 지내는 게 좋은 아버지”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최인훈의 집에서 집안일은 “엄마 몫”이 아니라 “누구든 먼저 보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최씨는 “아버지는 청소, 설거지 같은 일을 거리낌 없이 하셨다”고 전했다.가족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법도 없었다. 최인훈은 글을 쓰면 아내와 딸·아들 등 전체 식구에게 돌려 읽히며 의견을 구했다. 소설 ‘화두’를 쓸 때는 매일 새 원고가 가족들 손에 ‘배달’됐다. 최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가 전날 밤 쓴 원고를 들고 나오시길 기다렸다. 마치 연재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최인훈은 당시 이미 온 세상이 알아주는 소설가였다. 하지만 가족들이 내놓는 작은 의견도 무심히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 무렵에는 아버지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연극 팸플릿에 들어갈 글을 자주 쓰셨다. 그것들도 역시 식구들에게 읽어보도록 했다. 하루는 내가 ‘아빠, 이 문장 조사 ‘도’를 ‘만’으로 고치는 게 어때요?’ 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다. ‘아빠 이 글에서는 이 단락을 맨 앞으로 보내는 게 좋겠어요’ 했더니 정말 맨 앞으로 옮겨주신 일도 있다.”
최인훈은 자녀들과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회색인의 자장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봄에는 마당에서 봄꽃을 살피고 와서 책을 읽는 아버지가,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며 소파에서 책 읽는 아버지가, 가을에는 인삼차를 마시며 책 읽는 아버지가, 겨울에는 서재의 이불 안에서 엎드려 책 읽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린 시절 최씨 눈에 비친 풍경은 늘 이랬다. 최인훈은 외출을 꺼렸고, 교편을 잡고 있던 서울예대에 강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덕에 “아버지가 했던 말, 아버지의 표정, 아버지의 정서, 아버지의 논리”는 고스란히 최씨 삶의 한 부분이 됐다.
최씨는 “그런 아버지가 세상의 오해를 사는 걸 보면 답답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아버지 제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분들이 가끔 내 손을 잡고 주방 같은 데로 데려가서 몰래 이렇게 묻곤 하던 게 기억난다. ‘윤경아, 아버지 집에서도 많이 무서우시니?’ 어린 마음에도 ‘아닌데. 우리 아빠가 그렇게 무섭기만 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걸 나한테 물어볼까’ 생각하곤 했다.”
최씨가 이번 책을 통해 최인훈의 인간적 면모를 세상에 공개한 건 이런 오래전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딸
어린 시절 최인훈 작가 품에 안겨 있는 최윤경 씨.
“처음엔 많이 조심스러웠다. 온전한 내 얘기가 아니고 픽션도 아닌 글이라 걱정이 많았다. ‘아버지가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일단 쓰자. 용감하게 쓰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아는 우리 아버지라면 분명히 쓰라고 하셨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씨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인훈은 딸이 글 쓰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어렵고 복잡한 얘기는 아빠가 많이 했으니, 윤경이는 나중에 즐겁고 재미있는 글 쓰는 사람이 돼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딸이 ‘야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그가 일찌감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전업주부의 길을 걷게 됐을 때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최씨가 낳은 두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아이들이 웬만큼 자라고 나면 ‘내 딸’이 자기 일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만은 품고 살았다. 최씨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가 우리 집 서가를 둘러보고 ‘좋은 책이 많구나. 윤경이는 머릿속이 잘 정리돼 있어서 나중에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라고 하시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최씨가 펴낸 ‘회색인의 자장가’를 읽으면 최인훈이 왜 딸에 대해 오래도록 기대를 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묶어낸 이 책은 잔잔하면서도 흡인력이 있다. 최인훈의 작품을 사랑한 독자라면 대가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하는 기쁨이 클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자기 부모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공감할 만한 대목이 많다.
최씨는 이 글을 쓰며 앞으로 더 많은 책을 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가로 활동하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최씨는 “‘회색인의 자장가’가 출간되기 전날 꿈에 아버지가 나왔다. 나를 보고 계속 인자하게 웃으셨다. 그 모습에 힘을 얻었다. 아버지를 만난다면 ‘아빠, 저 책 썼어요. 이제 시작이에요.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