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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동부엔 MoMA 서부엔 MOCA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동부엔 MoMA 서부엔 M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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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시대 작품(contemporary arts)을 다루던 파사데나 미술관이 대재벌 노튼 사이먼의 개인 미술관으로 바뀌자, LA의 거물들이 의기투합해 세운 컨템퍼러리 미술관이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이다.
  • MOCA는 짧은 시간 내에 동시대 작가 등용문으로 위상을 높였지만 오늘날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
미국 대도시 대부분에는 ‘컨템퍼러리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s)’이 있다. 컨템퍼러리란 동시대, 즉 ‘지금 이 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컨템퍼러리 미술관’은 우리말로 번역할 마땅한 용어가 없다. ‘동시대 작품 미술관’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서 그냥 컨템퍼러리 미술관, 또는 현대미술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에는 ‘현대미술관’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다. 뉴욕의 MoMA가 그렇다. MoMA는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의 약자다. 이 미술관은 1929년 세워졌는데, 당시는 ‘동시대(contemporary)’ 작품이 바로 ‘현대(modern)’ 작품이었기에 동시대와 현대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동시대 작품과 현대 작품이 구분된다. 동시대 작품은 ‘지금, 이 시대’의 작가 작품이다. 반면 현대 작품은 인상파 이후의 작품부터 이 시대보다 앞선 작품을 가리킨다.  이 기준으로 보면 현대 작품이 출현한 지도 100년이 훨씬 지났다. 현대 작품이 이제는 고전 작품이 된 셈이다.
컨템퍼러리 미술관은 지금, 이 시대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그래서 일반 미술관과는 구분돼 운영된다. 로스앤젤레스의 컨템퍼러리 미술관은 매우 유명한데, 여기서는 편의상 ‘LA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s, LA MOCA)’이라고 번역한다. MOCA는 불과 40여 년 전인 1979년 세워졌다. 1940년 이후 작품만 취급한다.



노튼 남매의 미술관들

MOCA는 LA 시내 세 군데에 흩어져 있다. 다운타운의 그랜드 애비뉴(Grand Avenue), 리틀도쿄 지역(Little Tokyo district), 그리고 웨스트 할리우드(West Hollywood)에 각각 전시관이 있다.
LA 지역의 유일한 현대미술관이던 파사데나 미술관이 1974년 LA의 최대 재벌이자 최고의 컬렉터인 노튼 사이먼에게 인수되면서 이 미술관은 그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전통 미술관으로 바뀌어버렸다. LA 지역에 현대미술관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그 공백을 아쉬워하며 새로운 현대미술관을 간절히 원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 1979년 비벌리힐스 호텔에서 열린 정치자금 모금 행사에서 우연하게도 LA 거물 3명이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이 테이블에선 현대미술관 건립이 주요 화제가 됐다. 세 사람은 LA 시장과 시의회 의원, 그리고 마르샤 사이먼 와이스먼(Marcia Simon Weisman)이라는 여인. 이들은 동시대 작품(contemporary arts)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설립하자며 의기투합했다.
현대미술관 설립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마르샤 사이먼 와이스먼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는 파사데나 미술관을 인수한 노튼 사이먼의 누이다. 마르샤는 자신의 돈과 작품을 내놨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기부자를 끌어모았다. 한 남매 덕분에 LA 지역에 두 개의 훌륭한 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마르샤는 미네소타 출신의 사업가 프레데릭 와이스먼과 결혼했다. 부부 둘 다 대단한 그림 컬렉터로, 1940년대 이후의 동시대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하지만 부부는 1979년 이혼했고, 수집품도 반으로 나눠 가졌다. 마르샤는 자기 몫을 모두 MOCA에 기증했다.



1940년 이후 美·유럽 작품 전시

마르샤와 더불어 미술관 설립 초기의 큰 공로자는 당시 LA 재벌이자 큰손 컬렉터 엘리 브로드, 맥스 팔레브스키(Max Palevsky)다. 브로드는 미술관 설립위원장을, 팔레브스키는 건물확보위원장을 맡았다. 이들의 헌신으로 첫해에 1000만 달러나 되는 기금이 모였고, 유명 컬렉터들로부터 6000점 넘는 작품을 기증 받았다.
MOCA는 컨템퍼러리 미술관 중에서 소장품이 많은 편에 속한다. LA 지역 부자들이 좋은 작품을 많이 기증해준 덕분이다. 유명 작가들까지 나서서 자신의 작품이나, 다른 작가에게서 선물받은 작품을 기증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유명 컨템퍼러리 작가 샘 프랜시스는 설립 당시부터 미술관 이사로 참여하면서 자신의 대표작들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오늘날의 MOCA는 대표적인 컨템퍼러리 작가들의 작품을 거의 다 소장할 정도로 위상이 높다. 그리고 유명 작가 및 신인 작가의 전시회를 수시로 개최한다. MOCA에서 전시회를 열면 미국 전역과 유럽에서 주저 없이 초청하는 작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관람객은 2010년 24만 명에 달했는데, 60% 정도만 LA 지역 주민이고 나머지는 외지 관람객이다. MOCA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LA 현대미술관의 본관 노릇을 하는 전시관은 그랜드 애비뉴에 있고, 리틀도쿄의 게펜 미술관(Geffen Contemporary at MOCA)이 두 번째, 웨스트 할리우드의 퍼시픽 디자인 센터(MOCA at Pacific Design Center)가 세 번째 미술관이다. 세 곳 모두 1940년 이후 미국 및 유럽 작품을 전시한다.
본관 격인 그랜드 애비뉴 미술관(MOCA Grand Avenue)은 LA의 유명 공연장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Walt Disney Concert Hall)과 함께 그랜드 애비뉴에 자리 잡았다. 일본인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가 설계한 건물로 1986년 준공됐다. 1940~1980년 작품 5000여 점을 소장하며 중요 작가 회고전을 자주 마련한다.




기부 문화 퇴색하며 자금난

게펜 미술관은 그랜드 애비뉴 미술관을 건축하는 동안 1983년 가을부터 임시 전시장으로 사용되다가 정식 전시관으로 편입됐다. 리틀도쿄 입구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1940년대에 창고로 쓰던 건물로, MOCA가 1년에 1달러의 임차료를 내고 LA시로부터 빌려 사용하고 있다. 1996년 데이비드 게펜 재단(David Geffen Foundation)으로부터 500만 달러를 기부받은 것을 기념해 이름을 게펜 미술관으로 바꿨다. MOCA의 3개 미술관 중 규모가 가장 커 대규모 현대 작품을 전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신인 작가의 최근작을 주로 전시한다. 퍼시픽 디자인센터는 2000년 개관했으며 디자인과 건축에 중점을 둔다.  
MOCA는 정부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 민간 미술관이다. 연간 2000만 달러의 예산이 소요되는데, 그중 80%가량을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미술관 이사들도 후원금을 낸다. 이사는 취임과 동시에 15만~25만 달러를 내고, 매년 7만5000달러의 회비를 낸다. 이사라는 명예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기부 문화는 점점 퇴색해가고 있다.
MOCA는 현재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 정기적인 수입원이 없는 데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미술관이 소유한 주식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미술관 측은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위반되는 것을 알면서도 경영난 때문에 5000만 달러의 수익자산 중 4400만 달러를 써버렸다. 그리고 매년 300만 달러씩 적자가 나고 있다.
미술관은 최대 2400만 달러에 달하던 연간 예산을 2011년부터 1600만 달러로 축소해 긴축 운영을 시작했고, MOCA 설립을 주도한 LA 재벌 중 한 명인 브로드가 4500만 달러를 내놓아 운영난을 버텨내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유명 작가들이 MOCA를 돕기 위해 자기 작품을 소더비 경매에 내놓아 2250만 달러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개혁 작업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의 장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최근에는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LACMA)과의 합병 얘기까지 나온다. 자본의 땅, 미국에서도 미술관 운영은 이렇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인기가 그리 많지 않은 최첨단 미술 작품만 다루는 현대미술관의 사정은 더 나쁠 수 있다.



‘낙서’와 ‘예술’

동시대 작품은 난해하다는 것이 주요 특징 중 하나다. 기상천외한 작품이 많다 보니 왜 이런 것이 그림이고 예술인지 받아들이기 곤란할 정도다. 아마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이런 작품에 대한 검증과 평가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 미술사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인상파 작품들도 당시에는 이단아로 취급받았으니까.
MOCA가 소장한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여섯 명의 공범(Six Crimee)’도 ‘낙서’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그림은 LA의 영화제작자이자 현대미술품 컬렉터 스콧 스피겔이 1991년 MOCA에 기증한 여러 작품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세 쪽의 패널이 연결돼 있다. 각 패널에 두 사람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각 머리에 눈을 크게 그려 넣었는데, 작가와 친구들을 나타낸다고 한다. 바탕에는 옅은 초록색이 칠해졌고, 머리 아래에는 문자와 숫자가 적혔다. 여러 형태의 선들도 있다. 매우 어지럽지만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동안 아무도 이런 게 그림이라고 생각하지도, 그리지도 않았다. 이것을 그림으로 고안한 것이 바스키아의 독창성이다. 이러한 독창성이 바스키아를 유명 화가로 만들었다.
바스키아는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이티,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그는 거리를 방황하며 자랐다. 하지만 그는 조숙한 천재 흑인소년이었다. 열한 살 때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일찍부터 예술가적 소양을 보여 어머니가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8세 때 길에서 놀다가 차에 치여 크게 다쳤고, 그해 부모가 이혼했다. 아버지와 살다가 푸에르토리코로 건너가 2년 살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가출해 공원 벤치에서 잠자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학교를 그만둬 아버지에게서 쫓겨났고, 길거리에서 티셔츠 등을 팔며 간신히 살아나갔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맨해튼 남쪽 지역에서 건물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했다. 그것으로 새로운 예술 영역을 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바스키아는 케이블TV 등에 출연하면서 점차 유명 인사가 돼갔다. 20세 때 독립영화에 출연했고, 앤디 워홀과도 친분을 쌓았다. 점차 뉴욕을 넘어 LA와 유럽에도 알려지면서 26세 때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소개되어 일약 유명 화가로 등극했다.
하지만 이후 마약에 빠져들었고, 대인관계도 나빠지다가 1987년 앤디 워홀이 사망한 뒤로는 더욱 고립된 처지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28세의 나이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마약 과용으로 숨지고 말았다.
4년 후 199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바스키아 회고전이 개최됐다. 이 전시는 이후 2년여에 걸쳐 미국 전역으로 이어졌다. 2005년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전시도 LA, 휴스턴 등으로 옮겨가며 2006년까지 계속됐다. 이제 바스키아 작품은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2002년 이전까지는 그의 최고 작품 가격이 330만 달러였지만, 현재 최고가는 1460만 달러나 된다.
MOCA가 소장한 신표현주의(Neo expressionist) 작가 줄리안 슈나벨(Julian Schnabel)의 ‘Corine Near Armenia’라는 작품도 감상해볼 만하다. 여자를 그린 것은 틀림없지만, 그림을 전체적으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슈나벨은 바스키아와 더불어 미국 신표현주의를 주도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신표현주의 선두주자

슈나벨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텍사스의 휴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8세인 1979년에 연 첫 개인전에서다. 이듬해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미국 신표현주의 운동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바스키아와도 친밀했다.


슈나벨은 영화감독(filmmaker)이기도 하다. 사실 화가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바스키아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1996년 ‘바스키아’라는 제목의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슈나벨의 작품은 전 세계 유명 미술관이 많이 소장하고 있다. MOCA뿐만 아니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oMA, 휘트니 미술관,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 등에서 슈나벨 작품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컨템퍼러리 미술 작품은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고전 작품이 될 것이다. 그때쯤 MOCA는 어떤 위상을 가진 미술관이 돼 있을까. 지금의 자금난을 극복하고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전통 미술관이 될 수 있을지, MOCA의 앞날이 궁금하다.




최 정 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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