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팝아트’의 본류는 미국이지만, 북유럽 스웨덴에서도 팝아트 등 컨템퍼러리 아트에 정통한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은 훌텐이라는 탁월한 인물 덕분에 피카소, 달리, 몬드리안 등에 일찌감치 투자해 정상급 미술관의 반열에 올랐다. 근처에서 스톡홀름 부두를 조망할 수 있어 여행 포인트로도 제격이다.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스톡홀롬 현대미술관 제공]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입구에 놓인 조각 작품들.[최정표]
新進 등용문이자 大家의 공연장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은 동시대 작가의 기획전을 끊임없이 개최해온 미술관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가는 거의 모두 이 미술관에서 기획전을 열었고, 이 미술관을 거쳐 간 작가는 거의 모두 세계적 대가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신진 작가의 등용문이요, 대가들의 공연장인 셈이다.이 미술관은 섬에 자리하지만, 섬이 시내에서 멀지 않고 다리로도 연결돼 있어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다. 시내 부둣가에 있는 스웨덴국립미술관에서는 더 가깝다. 이 미술관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부두와 항구의 경치를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스톡홀름 관광의 명소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입구부터가 심상치 않다.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의 화려한 조각 작품 여러 점이 마치 마을 입구의 어귀처럼 관람객을 맞이한다. 건물은 화물창고처럼 밋밋하지만, 정원은 예술의 멋을 한껏 풍긴다. 생팔과 팅글리(Jean Tinguely)의 합작품인 ‘환상적인 천국(The Fantastic Paradise·1966)’이 화려한 옷가지를 걸쳐 입은 허수아비 모습으로 입구에서 관람객을 반긴다.
생팔은 프랑스 태생이지만 미국에서 교육받은 여성화가다. 팅글리는 스위스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두 사람은 1967년 열린 몬트리올 세계박람회를 위해 함께 만든 조각 작품을 이 미술관에 기증했다. 둘은 1971년 결혼했다.
미술관의 겉모양은 소박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시실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대가의 작품도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피카소, 달리, 뒤상, 루이스 부르주아, 마티스, 라우센버그 등을 꼽을 수 있다. 20세기 쟁쟁한 작가부터 현재 한창 두각을 나타내는 동시대 작가들이다. 스칸디나비아 최고의 현대미술관이라 자랑할 만하다.
미술관에는 연간 5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2009년에는 스웨덴 남부의 말뫼에 분관을 설치했다. 1년 내내 기획전시를 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볼거리가 넘친다.
정체 모를 구두 작품
메레 오펜하이머,‘My Nurse’, 1936
여성의 하이힐 한 켤레를 끈으로 꼭꼭 묶어서 은쟁반 위에 얹어놓은 작품. 오펜하이머(Meret Oppenheimer·1913~1985)의 ‘나의 간호사(My Nurse)’다. 구두 바닥이 많이 닳은 것에서 짐작하건대 실제 신고 다니던 구두임에 틀림없다. 1913년에 마르셀 뒤샹이 남성 변기통을 뜯어 작품이라며 전시한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은 1936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뒤샹의 변기보다 23년 뒤에 나왔다. 여기 전시된 것은 이 미술관이 그녀의 첫 회고전을 개최한 1967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독일 태생의 스위스 여성작가다. 11세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아버지가 군의관으로 입대해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외갓집으로 가서 자랐다. 스위스 시절부터 예술에 눈뜬 오펜하이머는 18세 때 프랑스 파리로 가서 예술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운동의 일원이 되었고, 장 아르프(Hans Arp)와 알베트로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로부터 초현실주의 전시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후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어울리며 고유의 예술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1937년 스위스 바젤로 돌아와 돈을 벌 목적으로 수익사업에 참여했다가 예술 인생에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1954년까지 장기간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줄였고 작품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에 와서야 다시 활기 있게 작품 활동을 개시했고, 1960년대 들어서는 스위스 베른, 이탈리아 카로나, 프랑스 파리 등에 작업실을 두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첫 회고전은 1967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1970년대 들어서는 여권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데, 스스로는 여권운동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1996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미국의 주요 미술관 중 처음으로 그녀의 전시회가 열렸다.
‘나의 간호사’와 더불어 뉴욕 MoMA가 소장한 ‘오브제, 모피로 된 아침식사(Object, Fur Breakfast)’ 등이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찻잔에 모피를 입힌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이상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런 작품들이 앞으로 100년 후에도 명작으로 계속 인정받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이 이런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이 미술관이 얼마나 첨단을 달리는지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스웨덴국립미술관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늘어나는 소장품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새롭게 수집되는 동시대 작품은 전시할 공간도, 보관할 공간도 부족했다. 이에 1908년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이 소원은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40년 넘는 세월이 흐른 1950년, 스콜드(Otte Skold)가 국립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로 부임하면서 새 미술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게르니카’가 가져다 준 기회
스콜드는 1953년 결성된 후원회(Friends of Moderna Museet) 및 여러 관련 단체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새 미술관 설립을 밀어붙였다. 그는 20세기에 수집된 작품은 국립미술관과 분리된 별도의 미술관이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8년 드디어 현대미술관이 따로 설립됐다. 스콜드를 설립자라고 할 수 있는 셈인데, 아쉽게도 그는 미술관이 개관하고 몇 달 뒤 사망했다.현대미술관이 건립되는 데는 1956년 개최된 한 전시회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1937)’와 이 작품을 위해 연습한 93점의 스케치를 현재 미술관 자리에 있던 체육관에 전시한 것이다. 이 전시는 대성공을 거뒀다. 스웨덴 사람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감동한 동시에 이러한 훌륭한 동시대 작품을 체육관에서 관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후 새 미술관 설립 운동은 날개를 단 듯했다.
게르니카 전시를 기획한 인물은 훌텐(Pontus Hulten·1924~2006)으로, 그는 1960년부터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관장을 맡아 미술관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드높이는 데 일조했다. 체육관을 개조한 것에 불과한 미술관에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고, 당시 명성을 얻어가는 세계적 작가들의 기획전을 거듭해 개최했다.
1963년 겨울 훌텐은 정부로부터 일시에 500만 크로나(약 6억6000만 원)의 예산을 확보해 루드비히 키르히너,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피에트 몬드리안, 파블로 피카소 등 당시 ‘유망’ 작가들의 작품을 대량 확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당대 최고의 미술가로 등극했고, 덕분에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은 서유럽 최고 명문 미술관 반열에 오르게 됐다. 예술계의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훌텐은 동시대 거물들의 작품을 계속해서 구입했다. 독지가의 기부와 기증도 줄을 이었다. 작품 값이 아직 비싸지 않을 때 많은 작품을 수집한 훌텐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스웨덴 국립미술관은 1971년부터 사진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했는데, 1973년 이 업무가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으로 넘어왔다. 또한 아카이브와 서적도 수집해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이 미술관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갔다. 설립 10여 년 만에 스웨덴을 넘어 전 세계의 ‘미술 운동장’이 되었다.
명작에 미리 투자한 훌텐의 先見之明
13년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낸 폰투스 훌텐.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은 폰투스 훌텐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설립 초기에 훌텐과 같이 뛰어난 관장이 있었기에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는 이 미술관 경영에 청춘을 불살랐을 뿐만 아니라, 말년(2005)에는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현대 작품 700여 점과 아카이브, 서적 등을 모두 미술관에 기증했다.
훌텐은 스톡홀름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컬렉터이자 미술관 경영자로 활동했다. 1973년까지 13년간 관장을 맡으며 미국 예술, 유럽 예술, 스웨덴 예술을 연결하고 조화시키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반 고흐, 폴 클레, 르네 마그리트, 잭슨 폴록, 칸딘스키 등의 전시회를 유치하며 스웨덴 작가들의 전시도 함께 열었다. 그는 미국의 팝아트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팝아트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뉴욕 MoMA는 1968년 그를 초빙해 MoMA에서 전시회를 기획하도록 했다. 훌텐은 1968년 앤디 워홀의 첫 회고전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 유치하기도 했다. 까다로운 비평가들조차 훌텐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대표 작품 중 하나인 파블로 피카소의 ‘The Spring’(1921).
체육관으로 쓰던 낡은 건물을 미술관으로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은 1974년 10월부터 1년간 문을 닫고 개보수를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한계에 봉착했다. 스웨덴 정부는 새 건물을 짓기로 하고 1990년 건물 설계를 공모했는데, 무려 211개 작품이 접수됐다.
최종 채택된 설계안은 스페인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의 작품. 이때 미술관에 ‘폰투스 훌텐 갤러리’도 만들기로 했는데, 이 갤러리는 이탈리아의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를 맡았다.
새 건물 신축을 추진하는 와중에 미술관에서는 엽기적인 미술품 도난 사건이 일어난다. 1993년 피카소 작품 여섯 점과 브라크(Georges Braque) 작품 두 점을 도난당한 것이다. 시가로는 6000만 달러(700억 원)에 달했다. 범인들은 한밤중에 지붕을 뚫고 들어왔다. 영화 같은 얘기인데, 미술관이 얼마나 낡았는지 입증한 셈이다. 나중에 피카소 작품 석 점은 회수됐으나 나머지는 현재도 오리무중이다.
1998년 설립 40주년에 맞춰 새 건물 입주식이 열려 국왕 칼 16세(Carl XVI)와 왕비 실비아(Silvia)가 참석했다. 스톡홀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새 건물의 식당은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입주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새 건물에 여러 하자가 발생했다. 비가 오는 날엔 직원과 작품이 피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02년 보수를 거쳐 2004년 드디어 오늘날의 미술관 모습이 갖춰지게 됐다.
라우센버그와의 인연
로버트 라우센버그,‘Monogram’, 1959
1998년 열린 새 건물입주식에 참석한 스웨덴 국앙 칼 16세와 왕비 실비아.[스톡홀롬 현대미술관 제공]
이를 위해 라우센버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사진, 천 쪼가리, 종이 쪽지 등 온갖 잡스러운 물건들을 붙였다. 좋은 그림을 망가뜨려놓은 것 같은 작품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의 생활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작품 장르를 라우센버그는 온갖 것이 합해져 이뤄진 것이란 뜻에서 ‘결합(combines)’이라고 불렀다. 모노그램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작품으로 꼽힌다.
훌텐 관장은 1962년 ‘네 명의 미국인(4 Americans)’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기획해 크게 성공시켰는데, 모노그램은 이때 출품된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이런 염소의 모습에 당황했다. 동물 학대라는 비판도 있었다. 인간은 간사하다. 작품에 익숙해지자 사람들은 이 염소의 선하고 우수에 젖은 눈매에 매료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모노그램은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1956년 개최된 ‘게르니카’ 전시를 보러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자리에 있었던 체육관으로 몰려든 사람들.[스톡홀롬 현대미술관 제공]
어쨌든 라우센버그는 미국 정부로부터도, 예술계로부터도, 시장으로부터도 확실히 인정받은 작가다. 1993년에는 미 정부로부터 국립예술메달(National Medal of Arts)을, 예술계로부터는 레오나르도다빈치국제예술상(Leonardo da Vinci World Award of Arts)을 받았다. 라우센버그의 작품 한 점이 201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100만 달러(약 120억 원)에 거래된 바 있다.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의 스웨덴어 이름인 ‘Moderna Museet’를 멋지게 휘갈겨 쓴 미술관 로고도 라우센버그가 만들었다.
최정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前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