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알 낳는 거위’ 반도체, 수익 무분별하게 나눠선 안 돼
자본 투입량 많아야 이기는 반도체 산업, 호황이 오히려 위기
호황에 축적한 자본으로 불황서 시장 점유율 높인 기업만 살아남아
제2반도체 클러스터 등 ‘나눠 먹기’ 논의해선 ‘칩 워’에서 필패
6월 25일,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제2 반도체 클러스터’ 발표를 앞두고, 현재 가장 유력하게 언급되는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장성군 일대에만 ‘몰빵’하지 말고 전북에도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순수하게 경제 논리로만 본다면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한 논의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제 역할을 하는 경기 남부 반도체 벨트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과 청와대가 호남 반도체 벨트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켰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반도체 클러스터 전북 유치 범도민 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이 1월 28일 전북 전주시 전북특별자치도의회에서 ‘용인 반도체 전북 이전 촉구 및 대도민 호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이것은 인공지능(AI) 붐으로 인한 반도체 초호황의 진풍경 중 하나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합쳐서 ‘삼전닉스’의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며 코스피 전체를 견인했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빅테크에서 기존 가격의 몇 배가 넘는 액수를 불러가며 메모리 반도체를 주문하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실적이 이어졌다.
이렇게 막대한 부가 갑자기 유입되고 있으니 그 분배를 둘러싼 논란도 커질 수밖에 없다. 사상 최초로 총파업을 예고했던 삼성전자 노조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과 주주의 반발에 떠밀려 ‘적당한’ 성과급을 받는 선에서 노사분규를 마무리 지었다. 문제는 그 성과급의 규모가 수억 원대에 달한다는 것. 억대 성과급 요구는 반도체 회사를 넘어 카카오 등 IT 기업이나 현대자동차 등 온갖 대기업으로 번져나가는 모양새다.
정부와 정치권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반도체 기업들이 ‘초과 이익’을 누리고 있다며 그것을 협력사, 즉 하청업체 및 중소기업과 공유하는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기획재정부에서는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초과 세수로 기금을 조성하여 국민에게 배당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모든 논의에는 공통적인 전제가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 1, 2위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말하자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하늘에서 큰돈이 뚝 떨어졌으니 너도나도 달려들어서 배를 채우자는 식의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다소 지나친 표현일까.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호남 반도체 팹 건설 논란’ 또한 그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반으로 쪼개자, 혼자 먹지 말고 다리는 나를 달라, 이런 식의 논의일 뿐이다. 문제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위험천만하다는 데 있다. 반도체, 그중에서도 메모리 분야는, 잘 나간다고 방심하면 큰코다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 산업의 속성을 오판하면 한때 잘 나갔던 기업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반면, 반도체의 기술적 속성 따위 전혀 몰라도, 메모리 반도체 비즈니스의 본질을 간파하면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도 있다. 잠시 한국에서 벗어나, 미국을 대표하는 메모리 반도체 제조 회사인 마이크론의 창업과 발전의 역사를 살펴볼 때다.
쌍둥이 형제인 조 파킨슨과 워드 파킨슨은 열정 넘치는 사업가였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공부한 두 사람 중 조는 기업 변호사가 되었고 워드는 반도체 설계자가 되었다. 1978년 아이다호주의 주도이자 최대 도시인 보이시의 한 치과 진료소 지하실에서 반도체 제조업체 마이크론을 창업한 형제는 곧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모스텍이라는 제조사에 설계도를 공급하기로 했는데 모스텍이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형제는 스스로 칩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자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이다호 최고의 부자, 일명 ‘감자 사나이(Mr. Spud)’라 불리는 잭 심플롯을 찾아갔다. 심플롯은 중학교 2학년도 채 마치지 않았다. 자신이 투자한 회사에서 뭘 만드는지, 어떤 원리로 그 제품이 작동하는지 따위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고 이해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범용품(commodity) 시장에 대해서만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심플롯이 막대한 부를 일구어낼 수 있게 해준 감자가 바로 그런 범용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도체 칩과 감자, 상품 시장에서 경쟁한단 점 같아
감자는 감자다. 같은 지역의 비슷한 농장에서 수확한 감자는 대체로 품질도 엇비슷하다. 이렇듯 별반 차이가 없고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범용품을 사고파는 곳을 상품 시장(commodity market)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규칙은 간단하다. 낮은 가격으로 많은 제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이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격을 낮춰서 경쟁 상대에게 출혈을 강요하면서 버텨내는 사람이 이긴다. 돈 놓고 돈 먹기, ‘머니 게임’인 셈이다.심플롯은 반도체 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감자에 대해서라면, 포테이토 칩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 칩이나 저 칩이나 범용품이라는 점은 동일했고, 그래서 심플롯은 파킨슨 형제를 만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의 법칙을 이해했다.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지정학적 관점에서 살펴본, 미국의 젊은 역사학자 크리스 밀러의 저서 ‘칩 워(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의 한 장면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모든 실리콘밸리의 테크 거인들이 일본에 학살당해 D램 칩에서 손을 떼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워드와 조 파킨슨이 메모리 칩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점을 심플롯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감자 농부였던 그는 일본과의 경쟁으로 인해 D램 칩이 상품 시장의 품목이 됐다는 점을 알아챘다. 감자 농사를 오래 지어 왔던 그는 가격이 하락해 있고 다른 모든 경쟁자가 청산하고 있을 때야말로 상품 시장에 진입할 최고의 시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플롯은 마이크론에 1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그 후 수백만 달러를 더 쏟아부었다.”

미국 역사학자 크리스 밀러의 저서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부커 제공
그렇게 마이크론은 살아남았다. 파킨슨 형제의 사업가 정신과 경영도 있었지만, 그 성공의 배경에는 심플롯의 두둑한 배짱이 있었다. 포테이토 칩을 팔면서 배운 게임의 법칙이 메모리 칩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간파했기에 가능한 베팅이었다. 대부분의 미국 D램 생산자들이 1980년대 말이면 시장을 떠났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D램을 계속 생산했지만, 아무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사업부를 마이크론에 매각했다. 마이크론은 미국을 대표하는 D램 생산회사가 됐고 심플롯이 처음 투자한 100만 달러는 결국 수십억 달러가 넘게 커졌다.
역대급 호황, 지금이 역대급 위기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한국 반도체 산업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한국은 반도체의 힘으로 영원히 선진국 지위에 올라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 것이며, 초과 이익을 배분하고 초과 세수를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면 ‘일하지 않고도 행복한 나라’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그런 꿈과 희망이 가득한 분위기다.실상은 정반대다. 반도체 초호황으로 인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역대급 영업이익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반도체 산업이 맞닥뜨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내가 돈을 벌지만 남도 돈을 버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농업으로 비유를 해보면 이해가 쉽다. 메모리 반도체라는 분야에서 한국은 삼전닉스라는 두 명의 대농장주를 보유한 국가다. 이렇게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농사꾼에게, 흉년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흉년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가난한 소농이 굶주림에 지치다 못해 농사를 포기하고 논과 밭을 헐값에 내놓을 테니 말이다. 반면 곳간에 쌓아놓은 곡식이 많은 부농은 그렇게 나온 땅을 사들인 후, 풍년이 들 때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포커판과도 비슷하다. 많은 칩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은 칩을 벌 수 있다. 자기 손에 좋은 패가 들어올 때까지 조금씩 잃으면서 기다리다가, 확실한 패가 들어오면 상대가 따라붙지 못할 정도로 큰 베팅을 밀어붙이는 식이다. 카지노 칩, 포테이토 칩, 메모리 칩 모두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달리 작동한 적 없는 ‘칩의 법칙’이다.
역대급 반도체 호황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다. 역대급 실적에 따른 막대한 초과 이익은 삼전닉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도체와 제조 장비 수출 금지로 궁지에 몰렸던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를 맞아 기사회생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인공지능용 반도체를 생산하느라 챙기지 못하는 중저가 반도체 시장의 지분을 차지하며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
도시바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에서 출발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의 키옥시아도 한숨 돌리는 모양새다. 앞서 살펴본 마이크론 역시 마찬가지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3위 기업이지만 현지 시각으로 6월 24일 회계연도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매출이 4배 오르고 순익이 15배 상승했다고 밝혔다. 남이 안 되고 나만 잘돼야 하는 제로섬 게임 중간에, 모두의 손에 많은 칩이 쥐어지게 됐다.

일본 반도체업체 키옥시아가 미에현 요카이치시에 지은 반도체 공장. 키옥시아 제공
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통해 얻게 될 역대급 법인세는 미래를 향한 재원으로 활용돼야 한다. 하지만 현 정부의 정책 기조를 놓고 볼 때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현금 살포를 하고야 말 것이라는 우려를 지우기 어렵다. 막대한 양의 물과 전기, 에너지가 필요한 반도체 산업의 속성 따위 아랑곳없이 거론되는 제2 반도체 클러스터 논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을 넘어 경악이 나오게 되는 이유다.
반도체 칩을 팔아서 들어온 이 막대한 돈, 그것은 카지노 칩처럼 다음 판을 위해 최대한 전략적으로 투자해야 할 미래의 재원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오가는 논의에서 그런 긴장감을 엿보기란 어렵다. 그저 감자칩처럼 지금 당장 봉투를 뜯고 먹어 치워 버리자고 달려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칩 워’에서 승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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