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신용하교수의 독도문제 100문 100답

  • 신용하교수

    입력2006-10-25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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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동해안 외딴 섬, 우리 땅 독도가 지난 4월8일 ‘독립’했다. 3월20일 경북 울릉군의회가 ‘울릉군 이(里)의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데 이어 4월8일 울릉군이 개정조례를 공포함으로써 독도는 지금까지의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서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행정구역상 지위와 주소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독도는 이제 더는 ‘외딴 섬’이 아니다. 독도 행정독립을 계기로 4월 현재 300명을 넘어선, 독도로 본적을 옮기는 국민들이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의 행정구역 독립을 계기로 신용하 교수(서울대·한국사회사)로부터 독도문제에 관한 100문 100답을 들어보았다.》
    Q 1 독도(獨島)는 어디에 위치한 섬인가?

    A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7도 14분 18초, 동경 131도 52분 22초 지점에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영토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 속해 있었으나 2000년 1월 시민단체들이 제기한 ‘독도리 신설 청원’을 계기로 지난 4월8일 리(里)로 행정 독립해 현재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행정구역상 지위와 주소가 바뀌었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는 동남쪽으로 약 92㎞(약 49해리) 지점에 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 오키도(隱岐島, 玉岐島)로부터는 서북쪽으로 약 160㎞(약 86해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본토에서 볼 때는, 동해안 울진군 죽변(竹邊)항으로부터 215㎞ 지점에, 일본의 시네마현 사카이고(境港)로부터는 220㎞, 에도모(惠曇)로부터는 212㎞ 지점에 있다.

    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라는 2개의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초(岩礁)로 구성된 작은 군도(群島)다. 동도와 서도 사이는 약 200m인데, 그 3분의 2까지는 수심이 2m가 채 안 되는 연결된 섬들이다. 독도의 총면적은 18만6121㎡(5만6301평 8홉)이고, 산꼭대기 높이는 서도가 174m, 동도가 99.4m이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울릉도와 함께 동해 한가운데 있는 섬이기 때문에, 암초를 중심으로 부근에 서식하는 어류들이 철따라 몰려들어 수산자원과 해저자원이 풍부하다고 외국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지정학상, 국토방위상 중요성은 더 논할 것도 없다.



    Q 2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A1952년 1월 일본이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52년 1월18일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통칭 평화선)을 발표했다. 일본은 열흘 뒤인 1952년 1월28일 평화선 안에 포함된 독도(獨島: 일본 호칭 다케시마·竹島)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내 왔다. 이것이 ‘독도 영유권 논쟁’의 시작이다.

    Q 3 한국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항의를 일축하고,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고유영토일 뿐만 아니라, 2차 대전후 1946년 1월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지령(SCAPIN) 제677호로서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판정하여 한국에 반환했으며, 또 연합국 사령부가 훈령 제1033호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거듭 재확인했음을 상기하라고 지적하였다.

    Q 4 그 후 ‘독도 영유권 논쟁’은 어떻게 되었는가?

    A한국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외교문서를 통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1953년 6월27일, 6월28일, 7월1일, 7월28일 일본 순시선에 관리 및 청년들을 태우고 와서 독도에 상륙시켰다.

    Q 5 한국측은 일본측의 이러한 행동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민간인과 정부가 함께 단호하게 대응하여 일본측의 도발을 물리쳤다. 민간인들은 울릉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독도 의용수비대(獨島 義勇守備隊·대장 홍순칠)’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독도에 건너가서 대항하였다. 또한 정부에서도 한국 해양경찰대를 파견하여 독도에 접근한 일본 선박들에게 영해를 불법 침입했다고 경고하고 울릉도경찰서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선박들이 불응하고 도망하자 한국 해양경찰대는 몇 발의 경고 발사를 하면서 이들을 쫓아버렸다.

    Q 6 그 후 일본측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A당시 한국정부는 평화선 안에 침입한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여 재판에 부치는 등 완강한 독도 수호 의지를 보였다. 이를 본 일본측은 외무성이 앞장서서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임을 증명하려고 다수 학자와 연구자들을 동원해서 문헌자료 조사를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Q 7 일본측 문헌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였다는 증거가 나왔는가?

    A현재까지는 명백한 문헌자료는 1건도 나오지 않았고, 도리어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문헌만 상당수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독도 영유권 논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Q 8 그러면 왜 최근에 ‘독도 영유권 논쟁’이 격화했는가?

    A1994년에 유엔에서 ‘신해양법’이 통과되면서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전관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약칭 EEZ)을 ‘영해’와 별반 다름없이 설정할 수 있게 된 사실과 관련된다고 본다. EEZ를 선포하려면 기점(base point, base line)을 자기 영토에서 잡아야 하는데, 독도를 기점으로 삼게 되면 200해리 영역이 훨씬 넓어진다. 이에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Q 9 일본정부는 ‘유엔 신해양법’과 관련해 ‘독도’에 대해 어떤 정책을 세웠는가?

    A일본은 1995년 총선거에서 여당측이 ‘독도(죽도) 침탈’에 ‘탈환’이라는 용어를 적용, 공약의 하나로 내세웠다. 또한 일본정부는 1996년 이케다(池田) 외상이 내외 언론기자들을 모아 놓고 성명을 발표하여 “독도(죽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 영토이니 한국은 독도에 주둔한 한국 해양경찰대를 즉각 철수하고 (독도에) 부착한 시설물을 철거하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 외상은 뒤이어 주일본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동일한 내용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일본정부는 1996년 2월20일 독도를 포함해서 200해리 배타적 전관수역을 채택하기로 의결하고, 국회에 송부했다. 일본 국회는 1996년 5월에 200해리 전관수역을 채택하기로 의결하고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으로 취한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양국의 200해리가 중첩되는 동해에서는 일본 EEZ 구획선을 울릉도와 독도(죽도) 사이에 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1997년도 ‘외교백서’에서 일본외교 10대 지침의 하나로 ‘독도 탈환(침탈) 외교’를 설정하였다.

    Q 10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이러한 공격적 외교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한국정부 수뇌는 1996년 전반기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측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단호하게 대응하였다. 아울러 한국정부도 1996년에 ‘유엔 신해양법’을 적용하여 200해리 EEZ를 선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국 EEZ의 기점을 잡는 문제와 관련해 한국 외무부가 독도를 기점으로 취하지 않고 울릉도를 기점으로 취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독도학회를 비롯해서 다수의 관심 있는 학자들은 당연히 ‘독도’를 기점으로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정부는 1997년 7월 말 ‘울릉도’를 한국 EEZ의 기점으로 취한다고 발표하고 양국 EEZ 구획선을 한국 울릉도와 일본 오키도(隱岐島)의 중간선을 제의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미 1996년 5월에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으로 취해 발표한 데 반해, 한국 외무부는 1년 2개월 후 한국 EEZ의 기점을 ‘독도’가 아닌 ‘울릉도’로 취한 것이다. 이에 국민과 학계는 경악하였고, 한국 외무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Q 11 99년 1월22일 체결된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는 어떻게 취급되었는가?

    A일본정부는 대한민국이 1997년 12월3일 IMF의 관리체제에 들어 경제가 취약해지자 이것을 기회로 1998년 1월 일방적으로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해버렸다. 이것은 국제관계에 전례가 없는 매우 비우호적인 조치였다. 한·일어업협정 규정에 따라 그 1년 후인 1999년 1월부터 협정 폐기가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한·일 두 나라가 어업협정을 맺고 고기잡이를 하려면 1999년 1월22일까지는 새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후는 국제법규에 따라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신한·일어업협정’ 체결을 촉구하면서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한·일 EEZ 구획 제한선인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어느 선을 좌변으로 하고 한국정부가 주장하는 한·일 EEZ 구획 제안선인 울릉도와 오키도 사이의 어느 선을 우변으로 해서 ‘독도’가 포함된 수역을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하였다. 한·일 양측 실무자 대표들의 회담 결과 울릉도 기점 35해리와 오키도 기점 35해리까지를 한·일 양국의 EEZ로 하고 그 중간에 있는 ‘독도’를 포함한 수역을 ‘중간수역’으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독도’는 ‘중간수역’ 에 포함됐다.

    Q 12 독도가 ‘중간수역’에 포함된 것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조금이라도 훼손한 것인가?

    A그렇다고 본다. 첫째,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가 모도(母島)인 울릉도의 수역(한국 EEZ 내의 수역)에서 ‘분리’되어 질적으로 다른 ‘중간수역’에 들어가버렸다. 대체로 침탈 대상을 우선 ‘모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일본의 오랜 전술이다. 둘째, 일본은 ‘중간수역’에 들어간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으로 잡았는데 한국은 자기 영토이면서도 한국 EEZ의 기점으로 잡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셋째, 불필요한 ‘중간수역’을 설정한 것인데 한국정부가 중간수역의 좌변을 울릉도 기점 35해리 선으로 잡은 것은 일본 EEE기점을 ‘독도’로 잡은 일본의 정책을 묵인한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넷째, 한국정부는 ‘중간수역’에 들어가 있는 ‘독도’와 그 영해(12해리)가 ‘한국 영토’임을 시사하는 표시를 전혀 못했는데, 일본은 ‘독도’와 그 영해(12해리)를 일본 영토와 일본 영해라고 세계에 계속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중간수역’의 성격에 대해 한국정부는 ‘공해(公海)’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데 반해, 일본정부는 ‘한·일 공동관리’ 수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공해적 성격’에 대한 합의가 없이 조인된 듯하다.

    Q 13 일본정부는 과연 ‘독도’를 침탈할 의사가 있는 것인가?

    A98년 11월 일본 해상자위대는 ‘이오지마’에서 ‘독도’를 무력 접수하는 해상훈련을 비밀리에 실시했음을 거의 1년 후인 99년에 일본 신문이 보도했다. 또한 99년에는 일본인들의 호적을 ‘독도(죽도)’에 옮겨 등재했는데, 이것을 호적대장에 등재해 준 것은 일본정부의 행정행위다.

    일본은 한국정부와 한국 국민의 독도 영유 수호의지가 약해져 돌파가 가능하면, 또는 절호의 기회가 오면, 독도를 침탈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97년 일본 외무성의 10대 외교지침에 ‘독도 탈환(침탈) 외교’가 설정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정부는 독도 침탈계획을 몇 단계로 설정하여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Q 14 일본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모르는 것인가? ‘독도’는 언제부터 한국 영토였는가?

    A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于山國)이 신라(新羅)에 병합된 때부터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두 곳(新羅本紀 지증왕 13년조와 烈傳 異斯夫 조)에 기록되어 있다.

    Q 15 혹시 ‘우산국’의 영토는 ‘울릉도’뿐이고 ‘독도’는 우산국의 영토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도 모두 우산국 영토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문헌이 있는가?

    A물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①‘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 ②‘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 ③‘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기타 여러 고문헌을 들 수 있다.

    Q 16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A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于山(우산)과 武陵(무릉·우릉)의 두 섬이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于山國이라 칭하였다.(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稱于山國.)”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를 2개의 섬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동해의 중요한 지리상 특징 중 하나는 바다 중앙에는 큰 섬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울릉도 주변에는 몇 개의 큰 바위섬이 있는데 이들은 가까워서 날씨가 청명하지 않아도 매우 잘 보인다. 오직 날씨가 청명한 경우에만 조그맣게 서로 보이는 섬은 동해에는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다.

    세종시대에는 울릉도를 ‘武陵島’(무릉도·우릉도, ‘武’의 중국음은 ‘우’)라고 불렀음이 ‘세종실록’에 매우 많이 나온다. 그리고 ‘독도’를 ‘于山島’라고 불렀다. 이 사실은 17세기부터 고지도에서 오늘날 ‘독도’의 정확한 위치에 있는, 울릉도 이외에 또 하나의 섬을 ‘우산도(于山島)’라고 부른 사실에서도 재확인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이러한 ‘울릉도’(武陵島)와 ‘독도’(于山島)를 ‘우산국’(于山國)이라고 칭했다고 기록해서,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한 해상 소왕국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산국’이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것은 영토상으로는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에 병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Q 17 날씨가 청명하면 과연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가?

    A물론 보인다.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는 92㎞(49해리)인데,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해변에서는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으나, 200m 이상의 울릉도 고지에서는 날씨가 청명하면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울릉도의 성인봉(높이 984m)에서는 독도가 뚜렷하게 보여서, 울릉도에서는 이를 관광자원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울릉도와 독도에서는 날씨가 청명하면 서로 보이기 때문에 울릉도에서 보이는 ‘독도’를 사진기로 촬영한 사람이 많다. 최근에도 울릉도의 김철환씨가 육안으로 독도가 보일 때 사진을 찍어서 ‘신경북일보’(1999년 12월 11일자)에 게재한 적이 있다(사진 참조).

    이 사진에서도 증명되는 바와 같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울릉도와 독도의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 것은 정확한 기록이고, 두 섬이 모두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었다는 기록도 정확한 것이었다.

    Q 18 다른 고문헌 자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A‘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있다. 이 책에서는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울릉도: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중략) (于山島·鬱陵島: 一云武陵 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下略))”고 기록하였다.

    조선왕조는 1481년(성종 12년)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고, 50년 후인 1531년(중종 26년)에는 이를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증보한 부분에는 표시하였다. 현재 ‘동국여지승람’은 전하지 않으나, 그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순한 관찬 지리서가 아니라, 조선왕조가 영유하는 영토에 대한 규정과 해설서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 수록된 지역이나 군·현과 섬들은 모두 조선왕조의 영토인 것이다.

    즉 조선왕조 조정은 ‘동국여지승람’(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조선왕조가 통치하는 영토 내용을 규정하고 그 영토들에 대한 내력과 지리적 해설을 정리하여 편찬 간행해서 국내외에 널리 반포함으로써 자기가 통치하는 영토를 세상에 명백히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신증 부분이 아닌 원래의 ‘동국여지승람’ 부분에 우산도(于山島: 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왕조의 영토임을 밝혀 놓았다. 이 자료는 독도가 조선왕조 영토임을 15세기에 명확하게 증명하여 세상에 천명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이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를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Q 19 그 밖에 독도가 우산국 영토로 이미 서기 512년 이래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 자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A예컨대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이 있다. 이 문헌에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는 모두 우산국 땅(영토)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송도: 마쓰시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자료에서 인용된 ‘여지지(輿地志)’라는 책은 현재 발견되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이를 인용한 ‘만기요람’ 군정편이라고 하는, 조선왕조 정부가 편찬한 책에 인용된 위의 기록은 두 단원에서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고 한국 고유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선 첫째 문장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모두(皆)’ 우산국 땅(영토)”이라고 해서, 울릉도뿐만 아니라 ‘우산도(독도)’도 ‘모두’(두 섬 모두) 옛날의 우산국 영토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둘째 문장에서는 “우산도(독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송도: 마쓰시마)다”라고 해서 우산도가 바로 오늘의 ‘독도’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오늘날과 달리 일본은 1870년대 말까지는 조선의 울릉도를 ‘竹島(죽도: 다케시마)’로 호칭하고 독도(우산도)를 ‘松島(송도: 마쓰시마)’로 호칭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모든 학자와 일본정부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위 자료의 둘째 문장에서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다”라고 한 것은 “우산도는 곧 (오늘의) 독도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기요람’ 군정편은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모두’ 옛 우산국 영토임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으며, 또한 ‘독도’가 1808년 이전에 한국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렸고, 한국 고유 영토였음을 명백히 증명해주는 것이다.

    Q 20 숙종시대에 안용복(安龍福)이라는 사람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는 데 큰일을 해냈다고 들었는데, 그때의 기록에는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기록이 없는가?

    A‘숙종실록(肅宗實錄)’에 있다. 안용복은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가기 직전인 1696년(숙종 22년) 봄에 일단의 어부를 이끌고 울릉도에 들어가서 이곳에 침입한 일본 어부들을 쫓아냈다. 이때 일본 어부들이 우리는 본래 ‘松島’에 사는데 고기를 잡으러 왔다고 말하자, 안용복은 “松島(송도)는 곧 于(子)山島(우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고 호통치고 쫓아냈다. 안용복 일행은 이튿날 새벽에 배를 저어 于(子)山島에 들어가 보니 일본 어부들이 솥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삶고 있었다. 그래서 막대기로 이를 두들겨 부수며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들은 그것을 거두어 배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 일행은 그 길로 일본 백기주(伯耆州)에 들어갔는데, 이때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와 대등해지려고 ‘鬱陵·于(子)山 兩島 監稅將(울릉도·우산도 양도 감세장)’이라는 직책을 칭하였고,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양도(울릉도와 우산도)가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후인데 혹시 다시 범월하는 자가 있거나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문서를 작성하여 역관과 함께 보내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실은 ‘숙종실록’ 숙종 22년(1696년) 9월 무인(25일) 조에 상세히 기록되어 우산도가 독도이며 일본에서는 ‘松島’(송도: 마쓰시마)로 호칭되고 있지만 조선 영토임을 잘 증명하고 있다.

    Q 21 그 밖에 ‘독도’가 옛 우산국 영토이며 한국 고유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A예컨대, 1908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간행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가 있다. 이 책은 조선왕조의 민족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책으로, 1792년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증보한 책이다. ‘증보문헌비고’에서도 ‘만기요람’ 군정편처럼 같은 자료를 인용해서,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영토)인데 우산은 곧 왜인이 말하는 松島(송도)다(輿地志云 鬱陵·于山 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라고 기록하였다. 즉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옛 우산국 영토인데, 이중에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松島(오늘날의 독도)’임을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인용하여 명백히 천명하고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독도’를 종래 다른 나라가 점유한 형적(形迹)이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1월28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며 일본 내각회의에서 결정하고 1906년 3월 말부터는 일본이 한국 영토인 ‘독도’를 침탈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대한제국 정부가 이 ‘증보문헌비고’를 간행한 것은 그 2년 후인 1908년의 일이다. 이때는 일제 통감부가 대한제국 정부를 지휘 감독하고 있던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정부는 ‘증보문헌비고’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가 아니라 우산국 때부터 한국 영토임을 기록하여 일제의 독도 침탈시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를 담았으며, 동시에 우산도(독도)가 우산국의 영토이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었다.

    Q 22 고문헌 이외에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옛 우산국(于山國)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는가?

    A우선 ‘독도’를 ‘우산도’라고 하여 ‘우산’이라는 나라 이름을 따서 부른 명칭 자체가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음을 증명해준다.

    한자가 신라에 들어오기 이전에 본래 우산국의 명칭은 ‘우르뫼’였는데, 이를 한자로 바꿀 때 ‘于山’국이라고 하였다. 우산국의 영토인 울릉도가 본도(本島)이고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한 속도(屬島)이므로, 원래는 ‘우르뫼’를 ‘우산도’라고 번역하여 울릉도(본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본도의 명칭이 울릉(鬱陵)·울릉(蔚陵)·무릉(武陵)·무릉(茂陵)·우릉(芋陵)·우릉(羽陵) 등으로 한자 번역되어 정착되자, 그 부속 섬인 독도(물론 당시에는 다른 명칭이었지만)가 ‘우산도’(于山島)의 명칭을 갖게 된 것이 명백하다. 독도가 한국에서 1882년까지 공식적으로 ‘우산도’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던 것은 바로 이 섬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음을 다시 한번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Q 23 그렇다면, 일본측에서 일본 고문헌에 ‘독도’가 최초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그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A일본정부가 1960년에 한국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 따르면, 1667년에 편찬된 ‘隱州視聽合記(은주시청합기)’라는 보고서가 일본 최초의 고문헌이다. 일본정부 외무성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출운(出雲)의 관리(蕃士) 사이토(齋藤豊仙)가 번주(藩主: 大名, 봉건영주)의 명을 받고 1667년(일본 寬文 7년) 가을에 은기도(隱岐島: 隱州)를 순시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松島’로, 울릉도를 ‘竹島’로 호칭하면서 언급했다고 하였다. 그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隱州(은주: 은기도)는 北海(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隱岐島라고 말한다. … 戌亥間(술해간: 서북방향)에 2日 1夜를 가면 松島(송도)가 있다. 또 1日 거리에 竹島(죽도)가 있다. ‘속언에 磯竹島(이소다케시마)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물개가 많다. 神書(신서)에 말한 소위 50猛일까.’ 이 두 섬(松島와 竹島)은 무인도인데, 高麗(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雲州(운주: 出雲國)에서 隱岐(은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乾] 경계지는 이 州(隱州: 隱岐島)로 그 限(한: 限界)을 삼는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 보고서는 항해거리 일수(日數)를 통하여 ‘독도’를 ‘松島(송도)’로, ‘울릉도’를 ‘竹島(죽도)’라고 호칭하면서 ‘독도’를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으면서, ‘독도’와 ‘울릉도’가 모두 조선 영토이고 일본 영토가 아님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Q 24 이 밖에 일본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기록한 고문헌은 없는가?

    A일본측이 현재까지 공개 발표한 고문헌들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록한 것은 없다. 도리어 지금까지 알려진 일본 고문헌들에서 ‘독도’를 기록한 고문헌들은 모두 이 섬이 울릉도의 부속도서(섬)로 조선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다. 혹시 일본측이 공개하지 않은 고문헌 자료에 그런 것이 있다. 그러나 한·일 간에 고문헌자료 조사를 통해 ‘독도’ 영유권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과정에 일본은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할 듯한 일본 고문헌들을 총동원하여 논쟁을 전개해온 사실을 고려하면, 비공개 일본 고문헌들 속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였다는 증명 자료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고,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증명자료가 다수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Q 25 일본정부는 최근에 ‘역사적’으로도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1600년 전후부터 약 80년간 일본이 면허장을 민간인에게 주어 ‘독도(竹島)’를 실효적으로 지배 점유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의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A일본정부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라고 드는 것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일본 어업가 오오다니(大谷甚吉)와 무라가와(村川市兵衛) 두 가문에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다. 이 두 개의 ‘도해면허(渡海免許)’는 얼핏 보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의 점유권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가졌던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보면 도리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는 자료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도해면허’는 ‘외국’에 건너갈 때 허가해 주는 ‘면허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쟁점이므로 그 자초지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1592∼98년) 전후에 울릉도는 일본군(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울릉도 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 즉 울릉도를 비워두고, 거기에 들어간 백성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직후 일본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라는 사람이 월후(越後)라는 곳을 다녀오다가 태풍을 만나 조난하여 ‘울릉도’에 표류해 닿았다. 오오다니가 울릉도(죽도)를 답사해 보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지만 수산 자원이 풍부한 보배로운 섬임을 알았다. 이에 오오다니는 이 섬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울릉도는 당시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울릉도(죽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부(幕府)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외국(外國)의 영토이므로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건너가 고기잡이를 해도 월경죄로 처벌받지 않으려면 막부의 공식 허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오다니는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운동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당시 백기주(白耆州) 태수(太守) 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Q 26 그러면 당시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일본인이나 ‘도해면허’에 관련된 자들은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섬)임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A물론이다. 오오다니(大谷) 가문과 무라가와(村川) 가문이 1661년 ‘송도도해면허’를 신청하기 직전에 그 신청을 논의하는 과정에 1660년 9월5일자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九山庄左衛門)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大屋九右衛門)에게 보낸 편지에 “장차 또 내년(1661년…인용자)부터 竹島之內 松島(울릉도 안의 독도)에 귀하의 배가 건너가게 되면”이라고 하여, ‘송도도해면허’를 막부에 신청한 근거가 이미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1618년에 받았으므로 “울릉도 안의 독도(竹島之內松島)”에 월경하여 건너가는 ‘송도(독도)도해면허’는 송도(독도)가 죽도(울릉도) 안에 속한 섬이므로 신청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또한 이 무렵 6월21일자로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에게 보낸 편지에 “竹島近邊松島(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에 도해(渡海)의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받은 두 가문은 ‘송도(독도)도해면허’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구산장좌위문이 1660년 9월8일자로 필사해서 무라가와 가문에 보낸 편지에는 독도(송도)를 “竹島近所之小島(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에 소선(小船)으로 도해(渡海)하는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 즉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지하였다.

    Q 27 일본측이 조선정부 몰래 일본 어민 두 가구에 울릉도와 독도에 국경을 넘어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해도 좋다고 허가하는 면허장을 내주고,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독도 근해에 출현해도 조선정부와 조선 어민들은 그대로 방관만 했는가?

    A조선정부는 처음에는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출어(出漁)나 ‘죽도도해면허’ ‘송도도해면허’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어민들과는 충돌했다.

    조선 조정이 울릉도에 대해 섬을 비워두고, 거기에 들어간 국민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공도·쇄환정책’을 실시했다 할지라도, 울릉도·독도 연해에는 수산자원이 풍부하므로 동해·남해안 조선 어부들이 조정 몰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1663년(숙종 19년) 봄 동래·울산 어부 약 40명이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일본 오오다니 가문에서 보낸 일단의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울릉도가 조선 영토였으므로 일본 어부들은 조선 어부대표를 보내면 협상하겠다고 대응하다가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이 대표로 나서자 이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일본 은기도(隱岐島)로 가버렸다.

    안용복은 은기도 도주(島主)에게 울릉도는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면서 “조선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가는데 왜 납치하여 구속하는가” 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그의 상관인 백기주(伯耆州) 태수(太守)에게 안용복 등을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고,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사람인 자기가 들어간 것은 일본이 관여할 일이 아니며, 앞으로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백기주 태수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도쿠가와 막부에서 오오다니 가문에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승인하여 국경을 넘어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것을 허가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에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을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의 막부 관백(關白: 執政官, 여기서는 장군)에게 이송하였다.

    그러나 안용복은 막부 관백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이므로 자기를 납치하여 구속한 것은 부당하며, 도리어 일본 어부들이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들어간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백기주 태수를 시켜서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厚待)한 후 조선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석방된 안용복이 귀국 길에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이르니 장기주 태수는 대마도 도주(島主)와 결탁하여 안용복을 다시 구속해서 대마도에 이송하였다.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니 대마도 도주는 백기주 태수가 막부 관백의 지시를 받고 써준 문서를 빼앗고, 도리어 안용복을 일본 영토 竹島(죽도: 울릉도)를 침범한 월경 죄인으로 취급하여 묶어서 1693년 11월 조선 동래부에 인계하면서 앞으로는 조선 어부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에서 고기잡이 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부터 울릉도를 ‘竹島(죽도)’라고 부르면서 이 기회에 울릉도(및 부속도서 독도)를 침탈하려는 대마도 도주의 외교활동이 시작되었다.

    Q 28 그렇다면 이때 대마도 도주는 도쿠가와 막부와 어떠한 관계였으며, 대마도 도주의 요구에 조선의 조정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A도주는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에 속해 있었으나 일본 중세의 특징인 봉건성으로 약간의 지방분권적 권리도 갖고 있었다. 조선 세종 이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외교 교섭은 대마도 도주만이 공식 창구로 공인되어 왔다. 이때 대마도 도주 종의륜(宗義倫)은 울릉도를 침탈해서 대마도 주민을 이주시키고자 하여 자기가 막부 정권을 대신한다고 전제하면서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을 사절로 임명해서 안용복·박어둔을 부산에 호송하는 길에 조선정부에 문서를 보내서, 마치 울릉도가 아니면서 그와 비슷한 별개의 일본 영토인 ‘竹島(죽도)’가 있는 것처럼 문구를 만들어서 이제 이후로는 竹島에 조선 선박이 출어(出漁)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터이니 귀국도 (조선 어민의 출어를) 엄격히 금지해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해온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을 가둔 채, 집권한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우의정 민암(閔) 일파의 온건 대응론과 남구만(南九萬)·유집일(兪集一)·홍중하(洪重夏) 등의 강경 대응론이 대립하였다. 당시 실세인 좌의정 목내선과 우의정 민암은 국왕 숙종에게 온건 대응론을 건의하였다. ‘숙종실록’(1693년 11월 丁已(18일)조에는 강경 대응론과 온건 대응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접위관 홍중하가 하직 인사를 하고, 좌의정 목래선·우의정 민암이 홍중하와 함께 청대하였다.

    홍중하가 아뢰기를 ‘왜인이 말하는 ‘竹島(죽도)’는 바로 우리나라의 ‘울릉도(鬱陵島)’입니다. 지금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버리신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리 명확히 판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 저들의 인민이 들어가서 살게 한다면 어찌 뒷날의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목내선·민암은 아뢰기를, ‘왜인들이 民戶(민호)를 옮겨서 들어간 사실은 이미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300년 동안 비워서 내버려둔 땅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흔단(端: 틈새의 발단)을 일으키고 우호를 상실하는 것은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민암 등의 말을 따랐다.”

    이에 목내선·민암 일파는 대마도 도주에게 예조를 시켜 다음과 같은 온건 대응의 회답서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동해안의 어민에게 외양(外洋)에 나갈 수 없도록 한 것은 비록 우리나라의 경지(境地)인 鬱陵島(울릉도)일지라도 역시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의 왕래를 허락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에 있어서랴. 이제 이 고깃배가 귀국의 경지인 竹島(죽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잡아보내오는 번잡함에 이르고 멀리 서찰까지 보내게 했으니, 이웃나라 사이의 친선의 우의에 감사하는 바이다. 바다백성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삼으니 물에 표류해 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만, 국경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혼잡하게 물고기를 잡는 것은 법률로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들을 법률에 의거해서 죄를 부과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서 규칙을 엄격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게 할 것이다.”

    조선 조정이 대마도 도주에게 보낸 이 회답문서는 온건대응에 매달린 나머지 일본측이 주장하는 ‘竹島’(죽도)가 곧 우리나라 영토인 ‘鬱陵島’(울릉도)인 줄을 잘 알면서도 모른 체해서 “귀국(일본)의 경지(境地) 竹島(죽도)” 운운하고 ‘죽도’에의 조선 어부들의 고기잡이 왕래를 엄격하게 다스려서 벌주어 그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회신한, 굴욕스러운 외교문서였다. 만일 “우리나라 경지 울릉도”라는 문구가 포함되지 않았더라면 울릉도를 ‘竹島’라고 부르면서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문서를 조선 조정이 외교문서로 승인하는 증거 문서가 되는 회답문서를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Q 29 당시 조선 조정은 그렇게 나약하고 국토 수호 의지도 없었는가? 온건 대응파의 결정을 비판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말인가?

    A그렇지 않다. 먼저 사관(史官)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관들은 “왜인들이 말하는 소위 竹島(죽도)는 곧 우리나라의 鬱陵島(울릉도)인 바 울릉도의 이름은 신라와 고려의 역사서적에도 보인다”고 지적하고, 울릉도와 죽도는 1島2名(한 섬의 두 이름)인데 왜인이 ‘울릉도’의 이름을 감추고 단지 ‘죽도(竹島)’만 내세운 것은 우리나라 회답서에서 ‘귀국(일본) 경지 죽도’ ‘죽도 어채’를 금단하겠다는 문구를 증거 삼아 뒷날 울릉도를 점거할 계책이라고 분석하면서, 자기 강토를 다른 나라에 주는 것은 불가하니 곧 명확하게 밝히고 판별하여 교활한 왜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울릉도 점거의 생심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하거늘, (온건 대응파) 일부 신하들이 두루 신중함이 지나쳐서 울릉도를 점거당할 근거 문서나 만들어 주고 울릉도에 들어간 죄 없는 바다백성들에게 죄를 주자는 말을 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무신들은 일본이 울릉도를 가지면 가까운 시기에 동해안에서 왜구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국왕에게 아뢰면서 온건 대응파를 비판했다.

    정계 원로인 남구만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역사서적들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면 울릉도는 신라시대부터 조선 영토이고 울릉도를 일본에서는 ‘竹島(죽도)’ ‘磯竹島(기죽도)’라고 했는데, 조상이 남겨준 우리 영토에 다른 나라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 되니, 지난번 대마도 도주에게 보낸 모호한 회답문서는 회수하고 새로운 회답서를 만들어 보내자고 간곡하게 건의하였다. 국왕 숙종은 거센 비판여론에 당황하여 남구만의 건의를 채택해서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지난번 회답문서는 취소하여 회수함과 동시에 새로운 회답문서를 작성하여 대마도에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1694년(숙종 20년) 음력 8월14일자로 새로 만들어 보낸 회답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섬이 있어 ‘울릉(鬱陵)’이라 이름하는데,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 우리나라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란 책에 기재되어 역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어서 일의 족적은 매우 명료하다. 이번에 우리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뜻밖에 귀국 사람들이 스스로 국경을 침범하여 넘어와서 서로 대치하여 마침내 도리어 우리나라 사람을 구집(拘執)해서 강호(江戶)에 넘겼다. 다행히 귀국의 대군(大君)이 사정을 밝게 살펴서 노자를 많이 주어 돌려보내 주었다. […]

    그러나 우리나라 백성들이 고기잡이한 땅은 본시 ‘울릉도(鬱陵島)’로서,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혹 ‘죽도(竹島)’라고도 칭하지만, 이것은 1島(하나의 섬)에 2名(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1島 2名은 비단 우리나라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귀주인 역시 모두 알고 있다. 이제 이번에 온 서찰 가운데 ‘죽도’를 귀국의 땅이라고 하고 바야흐로 우리나라 어선의 왕래를 금지해 줄 것을 바라면서, 귀국인이 우리나라의 경지(境地)를 침섭(侵涉)하고 우리나라 백성을 구집(拘執)한 실책은 논하지 않고 있다. 어찌 성실한 신뢰의 길에 결함이 있다고 아니할 것인가.

    장차 이 말의 뜻을 깊이 읽어서 동도(東都: 江戶: 지금의 도쿄로서 여기서는 막부 장군을 지칭)에 전하여 보고하고, 귀국 해변 사람들에게 신칙(申飭)해서 울릉도(鬱陵島)에 왕래하지 말게 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상호간의 우의에 더없이 다행일 것이다.”

    조선 조정과 강경 대응파가 작성하여 대마도에 보낸 이 새로운 회답문서는 ‘울릉도=죽도’의 1島2名임을 들고 ‘울릉도=죽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하게 천명함과 동시에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죽도’에의 왕래하는 것을 엄중히 금단해 줄 것을 요구한 당당한 외교문서였다.

    Q 30 일본의 조선에 대한 공식적 외교창구인 대마도 도주는 조선정부의 위와 같은 당당한 외교답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A그렇게 쉽게 원상태로 돌아가려 했겠는가? 대마도 도주는 조선에서 정권이 교체된 줄도 모르고 다시 귤진중(橘眞重)을 동래부에 보내 ‘우리나라 울릉도’라는 표현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귤진중은 강경 대응파의 새로운 회답문서를 받아 보고는 돌아가지 않고 또다시 새 회답문서를 고쳐 써달라고 조르면서 온갖 방법의 시위를 다하였다. 여기서는 번잡하여 그 주고받은 말과 문서를 다 소개하지 않지만, 1693년부터 1695년까지 3년간 치열한 외교논쟁이 전개되었다.

    대마도 도주 측은 조선에 대한 유일 합법의 일본 외교담당임을 자처하였고, 심지어 동래에 와 있던 귤진중은 끝까지 조선이 ‘竹島(죽도=울릉도)’를 조선 영토라고 고집하고 조선인의 일본 영토 ‘죽도’왕래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대병란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강경 대응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끝까지 의연하게 국토 수호의 의지를 명확히 천명해서 일본측의 무례한 도발을 강경하게 성토하고 훈계하였다.

    Q 31 그렇다면, 1693∼1695년 ‘울릉도=죽도’ 영유권을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외교논쟁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A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잘 해결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조선과 외교를 담당하던 대마도 도주 종의륜이 1695년에 죽고 그의 아우 종의진(宗義眞)이 도주가 되었다.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1693년에 안용복을 송환할 때 후대하면서 죽도(울릉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명백히 했다. 막부는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대마번의 번주 종의륜이 안용복을 송환하면서 죽도(울릉도) 획득의 공격외교를 행하는 것을 무리한 공격이라고 여겼는데, 조선측의 울릉도(죽도) 수호의지가 매우 강경하다는 것을 듣고 종의륜의 무리한 공격외교가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우호를 불필요하게 해치지 않을까 하여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때 마침 종의륜이 죽고 그의 아우 종의진이 도주가 되자, 종의진은 1696년 1월28일 도쿠가와 막부 장군에게 새해 인사 겸 새 도주 취임보고를 하러 에도에 올라가게 되었다. 막부 장군은 백기주(伯耆州) 태수 등 4명의 태수가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울릉도(죽도) 문제에 대하여 대마도 신주 종의진에게 조목조목 날카롭게 질문하였다. 종의진은 죽도(竹島)가 조선의 ‘울릉도’이고 그것이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막부 장군은 대마도 신주 종의진과의 질의·응답을 종합하여 참조한 후, 다음과 같은 명령하였다. 그 요지는 ①죽도(울릉도)는 일본 백기(伯耆)로부터 거리가 약 160리이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워 조선 영토로 보아야 하며 ②앞으로는 그 섬에 일본인들의 도해(渡海: 국경을 넘어 바다를 건너는 것)를 금지하며 ③이 뜻을 대마도 태수가 조선측에 전하게 하고 ④대마도 태수는 돌아가면 형부대보(刑部大輔: 대마도의 재판 담당관)를 조선에 파견하여 이 결정을 알리고 그 결과를 막부 장군(관백)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이 명령에 따라 울릉도(죽도)와 그 부속도서는 ‘조선 영토’로 일본측에 재확인되었고, 1618년의 ‘竹島渡海免許(죽도도해면허)’와 1661년의 ‘松島渡海免許(송도도해면허)’는 자동적으로 취소되었으며, 일본 어민들은 조선 영토인 울릉도(죽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우산도: 송도)에 건너가 고기잡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1696년 1월의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결정은 3년간 끌어온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을 일단 종결한 것이었다.

    Q 32 그러면 대마도 번주는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위의 결정과 명령을 즉각 수행하여 조선측에 통보했는가?

    A즉각 통보하지 않고 시일을 끌면서 그해 연말에야 통보하였다. 그 사이에 안용복이 즉각 활동을 재개하여 조선정부는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생각과 결정을 대마도의 공식 사절이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

    Q 33 안용복은 또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

    A안용복은 1696년 봄에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울릉도·독도를 수호하려고 하였다. 이때 안용복은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 독도가 조선 영토이고, 울릉도·독도에서 일본 어민의 고기잡이 도해(渡海)를 금지한 사실을 알고 행동했는지 모르고 행동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안용복은 이전부터 대마도 일본인들과 통교가 있던 인물이고 일본어도 능숙했으므로,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결정을 미리 알고 출발했을 가능성도 높다.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년) 봄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중 뇌헌(雷憲), 글을 잘하는 이인성(李仁成), 사공 유일부(劉日夫), 유봉석(劉奉石), 김길성(金吉成), 김순립(金順立)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에 들어갔다. 과연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해 있으므로, 앞서 쓴 바와 같이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를 모두 묶어 마땅하다”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松島(송도: 우산도, 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거짓말로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자 안용복은 앞서 쓴 바와 같이 다시 “송도(松島)는 곧 우산도(于山島)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松島卽子(于)山島 此亦我國也 汝敢往此島)”고 꾸짖고 이들을 쫓아냈다. 안용복 등이 이튿날 새벽 배를 타고 우산도(于山島: 독도)에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 어부들이 솥을 걸어 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 등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면서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갔다고, ‘숙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 등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隱岐島: 玉岐島)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큰 소리로,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 울릉도·우산도(독도) 등의 섬을 조선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가기에 이르렀는데, 일본은 정해진 격식이 없이 또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伯耆州)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에 안용복 등은 분격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네마 현)로 향하였다. 안용복 등은 스스로 ‘울릉·우산 양도 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고 칭하고 백기주 태수에게 사람을 보내 통고하니, 백기주 태수가 인마를 보내 맞이하였다. 안용복은 위의(威儀)를 갖추어 백기주 태수와 마루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간 계단에 앉았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니,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인용자)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 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백기주 태수가 이를 허락하으므로 안용복은 이인성에게 상소문을 지어 관백에게 정납케 하였다.

    당시 대마도 신·구 도주는 안용복의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죄를 감추고 있었다. 그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백기주 태수에게 명령하여 써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땅이라는 문서를 빼앗아 없애고 도리어 일본 땅 죽도(울릉도)에 조선 어부들의 침범을 엄금해 달라고 문서를 위조한 죄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역상 조선측이 막부에 보낸 물품의 도량형을 속인 것이다. 조선은 쌀 15두(斗: 말)를 1섬으로 한 것을 대마도 도주는 7두를 1섬으로 했고, 조선은 베(布) 30자(尺)를 1필로 보냈는데 대마도 도주는 20자를 1필로 했으며, 조선이 보낸 종이 1묶음(束)을 대마도 도주는 3묶음으로 나눠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이때 마침 대마도 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므로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울릉도·독도를 침범했다가 안용복에게 쫓겨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인용자)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대마도 도주…인용자)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兩島旣屬爾國之後 或有更爲犯越者 島主如或橫侵 竝作國書 定譯官入送 則當爲重處)”는 약속을 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에게 식량을 공급해주고, 파견수행원을 정하여 호송해 주었으며, 화폐도 가지고 가라고 주었으나 안용복·뇌헌 등은 완강히 사양하고 귀국하였다.

    Q 34 안용복이 제2차로 일본을 다녀온 후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정식 외교 교섭과 논쟁 종결의 문서 교환이 있었는가?

    A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장군)이 1696년 1월28일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 울릉도·독도에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이 재확인 결정을 대마도 도주가 대마도 형부대보(刑部大輔)를 조선에 보내 조선정부에 알리고 외교 교섭을 마친 후 그 결과를 막부 장군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하자, 대마도 도주는 돌아와 이 외교절차를 천천히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대마도 도주는 대마도에 돌아오자 곧바로 공식 외교사절을 파견하지 않고 대마도에 들어와 있는 동래부 조선역관에게 1696년 말에야 이 외교문서를 필사해 가도록 하면서, 먼저 막부 장군에게 조선정부가 보내는 감사의 서한을 대마도 도주를 경유하여 보내도록 권고하였다.

    조선 중앙정부가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인이 국경을 넘어 이 섬으로 고기잡이 가는 것을 엄금하겠다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외교문서(대마도 도주가 대리 작성)를 접수하여 읽은 것은 1년 후인 1697년 2월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측에 회답문서를 보낼 것인가 접수만 할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감사 서한은 보내지 않고 일본의 결정은 알았으니 우의를 돈독히 하자는 일반 외교서한만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예조참의 이선부(李善溥)와 일본 대마주 형부대보(刑部大輔) 평의진(平義眞) 사이에 두 차례 외교서한이 오고간 후에, 1699년 1월 일본측으로부터 조선측에 조선의 답서를 에도의 막부 장군에게 잘 전달했다는 최후의 확인 공한이 도착하여 외교 절차가 모두 종결되었다. 이로써 일본 대마도 도주가 장기주 태수와 결탁하여 조선의 울릉도·우산도를 탈취하려고 시작한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은 1696년(숙종 22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독도가 조선 영토이며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다는 재확인 결정에 따라 논쟁을 완전히 종결하였고, 이에 관한 외교문서의 교환도 1699년 1월 최종적으로 모두 끝냈던 것이다.

    Q 35 1696년 1월의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결정이 혹시 울릉도만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인가, 아니면 독도를 포함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인가?

    A물론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이다. 당시에는 조선측과 일본측 모두 울릉도와 독도의 가치를 오늘날보다 낮게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측도 울릉도 주민이 몇 번 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자 섬을 비워 사람들이 살지 않도록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일본측도 울릉도를 비옥하지 않은 작은 섬 정도로 저평가했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그보다 훨씬 더 작은 바위섬인 ‘독도’에 대해서는 울릉도에 포함하여 이름도 거론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1696년 1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는 결정과 명령을 내릴 때에도 간단한 기록에서는 ‘竹島(울릉도)’로만 기록되고 자세한 기록에서는 ‘죽도’와 ‘그 외 1島’라고 한 다음 ‘그 외 1도’는 ‘松島(송도: 독도)’라는 작은 섬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간단한 기록에서 이때 막부 장군의 결정을 ‘죽도’(울릉도)만 갖고 설명 기록하는 경우에도 그 부속도서인 ‘송도’(독도)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본 메이지 정부 내무성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재확인한 조선 영토는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Q 36 그렇다면 1696년 1월 이전의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측의 영유권 시비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조선 영토 재확인 결정으로 모두 소멸되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영토논쟁은 모두 종결되었나? 도쿠가와 막부에서 미자(米子)의 일본 어부 두 가문에 허가한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는 모두 취소된 것인가?

    A물론이다. ‘죽도도해면허’와 ‘송도도해면허’도 자동적으로 취소되었고, 막부 장군에 의해 조선 영토로 재확인된 울릉도와 독도에 국경을 넘어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오는 일본 어부들은 발각되면 처벌되었다.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한 결정에 따라 대마도 도주가 제기한 모든 영토논쟁은 완전히 종결된 것이었다.

    Q 37 그렇다면 오늘날 일본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가?

    A그렇다. 오늘날의 일본정부가 ‘역사적으로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에 토대를 둔 발언이나 주장이 아니다. 한국측이 진실에 근거하여 ‘독도는 역사적으로 서기 512년부터 한국의 고유영토’라고 지적하니까 이에 맞대응하기 위한 억지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측 고문헌들까지도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측 고문헌에도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증명하는 자료는 아직까지 단 1건도 없다.

    Q 38 안용복(安龍福)은 두 차례나 일본에 건너가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조정은 그에게 제대로 포상했는가?

    A포상은커녕 벌을 주려고 하여 대일 강경 대응파들이 간신히 그를 구해냈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渡日)은 일본의 오오다니(大谷) 가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간 것이니, 조선정부측으로서는 공도정책을 적용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한 울릉도에 들어간 가벼운 죄만 물으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의 제2차 도일은 문제가 단순하지 않았다. 우선 당시에 이미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반드시 대마도 도주의 창구와 조선측이 대마도 도주에게 새겨서 내려준 도장에 의거하도록 약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안용복이 대마도 창구를 무시한 채 직접 백기주 태수와 외교 교섭을 했고 일본측이 이를 처벌하라고 강경하게 항의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안용복의 제2차 도일은 납치됐거나 표류한 것이 아니라 안용복이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준비 후에 정부 허가 없이 일부러 국경을 넘어 일본에 건너간 것이었다.

    이 때문에 안용복이 귀국해서 강원도 양양에 정박하여 문서로 전후 사실을 보고하자, 조선 조정은 우선 안용복을 서울로 불러올려 가두었는데 이에 대신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좌의정 윤지선(尹址善)은 온건 대응파의 건의를 받고, 만일 안용복을 사형에 처하여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간사한 백성 중에 다른 나라에 들어가 일을 일으키는 자가 많아질 것이니 안용복에게 극형을 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헌부가 이에 동조하여 극형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지사 신여철(申汝哲)은 안용복의 공이 죄보다 크므로 그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되고, 즉시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영중추지사 남구만(南九萬)은 안용복을 죽이면 대마도 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지 나라의 약함을 보여 일본과의 외교에도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라며 극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은 남구만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쟁론 끝에 국왕이 남구만의 중간책을 채용해서 안용복을 사형에서 감형하여 귀양보냈고, 후에 강경 대응파가 그를 석방해주었다. 조선왕조 후기 실학파의 대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翼)은 안용복의 건에 대해 ‘성호사설(星湖僿說)’ 울릉도 조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생각건대 안용복은 곧 영웅호걸인 것이다. 미천한 일개 초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했으니, 부개자(傅介子)와 진탕(陳湯)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며,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성호 이익 이후에는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을 비롯하여 모든 실학자가 안용복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당시 조정 대신들의 단견과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Q 39 17세기 말 일본과의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이 잘 해결된 후 울릉도 ‘공도정책(空島政策)’은 폐기되었는가? 울릉도 ‘공도정책’은 언제 왜 시작되었으며, 17세기 말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 이후에도 공도정책이 계속되었다면 왜 그렇게 된 것인가?

    A왜구(倭寇)의 침략과 노략질 때문에 조선 태종(太宗)이 1417년(태종 17년)에 울릉도 ‘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을 확정하여 채택하였다.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는 왜구가 창궐하여 중국해안과 조선해안을 침노해서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들이 깊숙이 내륙 오지에까지 침입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여 새로이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반이 된 업적 중 하나가 전라도 지리산 아래 오지까지 침입한 왜구를 쳐부순 공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울릉도의 경우를 들면, 1379년(고려 우왕 5년) 7월에 왜구가 울릉도에 침입하여 주민을 살육하고 노략질을 자행한 후 약 15일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에 태종은 등극한 직후인 1403년(태종 3년) 8월11일에 강원도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에 들어가 살고 있는 백성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태종이 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불러와 섬이 빈 것을 알고, 대마도 도주 종정무(宗貞茂)가 1407년 3월16일 토산물과 그간 왜구가 잡아간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이사하여 거주하게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태종은 비록 섬이 비었다 할지라도 다른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서 살게 하여 분쟁의 씨앗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태종은 1417년(태종 17년) 정월에 김인우(金麟雨)를 안무사(按撫使)에 임명하여 울릉도에 들여보내서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을 모두 데리고 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김인우가 1417년 2월5일 귀환하여 올린 보고에 따르면 울릉도에 남녀 86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계속 울릉도에 살기를 청원하므로 대표격인 3명만 데려왔으며, 울릉도 부근에 부속도서로 우산도(于山島)라는 작은 섬이 있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이에 1417년 2월8일 우의정으로 하여금 정부 대신들을 모두 소집하여 대전회의를 개최해서 울릉도와 우산도의 관리정책을 논의하였다. 절대 다수의 대신들은 울릉도에 군사 진(鎭)을 설치하여 방어하면서 백성들을 계속 농사와 어업을 하며 거주케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조판서 황희(黃喜)는 이에 반대하면서 울릉도 거주민을 속히 육지로 쇄출(刷出: 데리고 나오는 것)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책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제안한 ‘쇄출정책’이 좋다고 채택하였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쇄출해오면 울릉도는 비게 되므로 이것을 ‘공도(空島)정책’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태종이 울릉도에 대해 ‘쇄출정책’, ‘공도정책’을 결정한 것은 1417년 2월8일이고, 독도에 대해 공식적으로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이 무렵(1417년 2월5∼8일)이었다. 태종은 1417년 2월8일 ‘쇄출·공도정책’을 채택함과 동시에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 于山·武陵等處按撫使 독도·울릉도 등 지역 안무사)에 임명하여 다시 울릉도에 들어가서 울릉도 주민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도록 하였다. 우산·무릉등처 안무사 김인우가 다시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거주민을 모두 쇄출해 나온 6개월 후, 1417년 8월6일 왜구가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에 또 침입하였다고 ‘태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울릉도 출신 백성들과 유민들은 조정의 감시를 피하여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 거주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우산도(독도)는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울릉도(무릉도)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왜구들은 또 울릉도를 침노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때 울릉도 거주민은 거의 살육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는 동해안 어민들은 울릉도에 상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절적으로 고기잡이를 나가거나 배를 만들 나무를 베러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 조치 직후에, 조선 조정은 울릉도에 대한 ‘쇄출·공도정책’은 그대로 지속하되, 1697년(숙종 23년) 4월13일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의 건의에 따라 ‘순시(巡視)제도’ ‘수토(授討)제도’를 채택하였다. ‘순시·수토제도’란 2년 간격(매 3년째에 1회)으로 동해안의 변방 무장(武將)으로 하여금 규칙적으로 순시선단을 편성하여 울릉도에 들어가서 순시·수토하고 돌아오는 제도다.

    Q 40 일본측은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 이후, 이 금령을 준수하고, 울릉도·독도에 대한 조선의 영유권을 존중했는가?

    A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여 존중하였고, 일본 어민들이 국경을 넘어 울릉도·독도에 들어가서 고기잡이하는 것도 비교적 잘 막았다. 그 결과는 여러 문헌과 고지도들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예컨대 일본 실학파의 최고 학자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는 1785년경에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이라는 책을 간행하면서 그 부록 지도 5장의 일부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와 ‘대일본지도(大日本地圖)’를 그렸다. 지도에서 국경과 영토를 명료하게 구분해서 나타내기 위해 나라별로 채색했는데, 조선은 황색으로 일본은 녹색으로 채색하였다.

    하야시 시헤이는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정확한 위치에다 그려넣었고,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색깔인 황색으로 채색하여 조선영토임을 명백하게 표시했다. 그렇게 해놓고서도 혹시 훗날 무지한 일본인들의 억지가 있을 것을 염려했는지, 이 지도들은 울릉도와 독도 두 섬 옆에다가 다시 ‘朝鮮ノ, 持ニ(조선의 것으로)’라고 문자를 적어 넣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거듭해서 강조하였다.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그린 지도들에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의 색깔로 채색하고 그 옆에 또 ‘朝鮮ノ, 持ニ(조선의 것으로)’라고 쓴 문자는, ‘독도’가 논쟁의 여지없이 조선 영토임을 일본측에서 증명하는 결정적 자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지도인 ‘총회도(總繪圖)’라는 지도도 국경과 영토를 명백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일본은 적색으로, 조선은 황색으로 채색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한 위치에 그려넣고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을 표시하는 색깔인 황색으로 채색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모두 조선 영토임을 명료하게 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지도도 울릉도와 독도 옆에 문자로 ‘朝鮮ノ, 持ニ(조선의 것으로)’라고 써넣어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거듭 명확하게 표시하였다.

    Q 41 근대에 들어오면서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는 울릉도와 독도를 계속 조선 영토로 간주했는가? 메이지 정부는 처음부터 ‘정한론(征韓論)’을 채택했는데, 그들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는가?

    A메이지 정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하였다. 그 증거로 1869∼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것이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들이 1868년 1월 정변을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중앙집권적 왕정을 다시 일으켜 메이지 정부를 수립했는데, 메이지 정부의 외무성은 신정부 수립 직후인 1869년 12월 조선국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하여 외무성 고위관리인 좌전백모(佐田白茅)·삼산무(森山茂)·재등영(齋藤榮) 등을 부산에 파견하였다. 이때 외무성은 정탐해올 14개 항목을 작성하여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太政官: 총리대신부)에 보내서 허가를 받았는데, 그 하나에는 ‘죽도(竹島: 울릉도)와 송도(松島: 독도)가 조선부속(朝鮮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해 오라는 지시사항이 있었다.

    메이지 정부 외무성과 태정관은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부속령으로 되어 있는 것’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좌전백모 등 일본 외무성 고위관리들이 부산 초량에 체류하여 정보와 자료를 입수하다가 이듬해 1870년 4월에 귀국하여 외무대신과 태정관에게 조사결과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 이른바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였다. 이 보고서는 보고항목의 하나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독도(송도)는 울릉도(죽도)의 인도(隣島, 이웃 섬)로 두 섬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라고 지적하고 많이 나는 물산의 이름을 들어 보고하였다.

    이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는 일본 외무성이 일제 강점기에 간행한 ‘일본외교문서’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이 외교문서를 간행한 시기는 일본제국이 패망할 줄 몰랐던 시기이고, 또 ‘일본외교문서’는 중요한 공문서이므로, 이 일본 공문서에서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부속령”임을 인지하여 기록하고 간행한 것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결정적인 일본측 자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주목할 것은 일본정부의 정한론자들이 한국침략·정복에 혈안이 되어 당시 무인도인 울릉도와 독도를 침탈하려는 야욕을 품고 비밀리에 정탐·정보 수집을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Q 42 일본영토 관리의 책임 부서인 일본 내무성도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영토라고 인지했는가?

    A일본 내무성도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영토라고 확실하게 인지하였다. 일본 내무성(내무대신 大久保利通)은 1876년(메이지 9년) 일본 국토의 지적(地籍)을 조사하고 근대적 지도를 편제하는 사업에 임하여 시마네현(島根縣)의 지리담당 책임자로부터 동해에 있는 죽도(竹島: 울릉도)와 송도(松島: 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 포함할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한 질의서를 1876년 10월16일자 공문으로 접수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약 5개월에 걸쳐 시마네현이 제출한 부속문서뿐 아니라 조선 숙종 연간(일본 元祿 연간)에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교섭한 관계문서를 모두 정밀하게 조사해본 후,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는 조선영토이고 일본과 관계없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 내무성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으나, 영토를 지도에 넣거나 빼는 것은 영유권에 관련된 중대 사안이므로 내무성 단독으로 최종 결정을 내릴 수는 없고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太政官: 총리대신부, 右大臣 岩倉具視)의 최종결정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1877년(메이지 10년) 3월17일 질품서(질문서)를 부속문서들과 함께 태정관에 올렸다.

    일본 내무대신대리가 태정관 우대신에게 제출한 질품서 요지는 ①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 도(一島)의 지적 편찬에 대하여 그 소속 관할문제로 시마네현으로부터 내무성으로 질품서가 왔는데 ②내무성이 시마네현에서 제출한 서류들과 또 1693년 조선인(安龍福… 인용자)이 일본에 들어온 이후 조선과 주고받은 왕복문서들을 조사해본 결과 ③ 내무성의 의견은 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도(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는 곳이라고(조선의 부속령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④지적(地籍)을 조사하여 일본국의 판도에 넣을까 뺄까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태정관의 최종결정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내무성은 이와 함께 조선 숙종 연간(일본 元祿 연간)에 조선과 왕복한 문서들을 첨부하면서 ‘죽도와 그 밖의 1도(竹島外一島)’의 1도가 바로 ‘松島(독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설명하는 문서를 첨부하였다.

    “다음에 一島가 있는데 松島(송도, 독도… 인용자)라고 부른다. 둘레의 주위는 30정보 정도이며, 竹島(죽도: 울릉도-인용자)와 동일선로에 있다. 隱岐(은기)로부터의 거리가 80리 정도다. 나무나 대는 드물다. 바다짐승이 난다.”

    즉 일본 내무성이 1696년 1월의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울릉도(죽도)·독도(송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여 결정할 때의 문서를 필사 정리하여 태정관에게 제출한 질품서 부속문서에서 “다음에 一島가 있는데 松島(송도, 독도)라고 부른다”고 하여 ‘그 밖의 一島’가 松島(독도)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내무성은 약 5개월간의 재조사 결과 ‘울릉도(竹島)와 그 밖의 一島인 독도(우산도: 松島)’는 일본과 관계없는 곳이고 조선 영토로 판단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영토에 대한 취사선택은 중대한 문제이므로 그 최종결정을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Q 43 그렇다면 당시 일본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 총리대신부)은 울릉도와 독도를 어느 나라 영토라고 판정했는가?

    A태정관에서는 이를 검토해보고 울릉도(竹島)와 그 밖의 1섬 독도(松島)는 내무성의 판단과 같이 역시 일본과 하등 관계가 없는 곳이고 조선 영토라고 판정하여 최종결정을 내렸다. 태정관(우대신 岩倉具視·이와쿠라 도모미)은 먼저 내무성의 질품서를 접수하여 검토한 후, 조사국장의 기안으로 1877년 3월20일 “품의한 취지의 竹島(죽도: 울릉도) 外 1島(松島, 독도)의 건에 대하여 본방(本邦: 일본…인용자)은 관계없다는 것을 심득(心得)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하여 이를 최종결정하였다.

    일본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은 최종 결정한 이 지령문을 1877년 3월29일 정식으로 내무성에 내려보내 지령 절차를 완료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이 지령문을 1877년 4월9일자로 시마네현에 내려보내 현지에서도 이 문제를 완전히 종결 짓게 되었다. 일본 메이지 정부의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은 1877년 3월29일자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는 곳이고 조선영토다”라고 최종 결정한 지령문을 재확인하여 공문서로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내려보낸 것이다.

    당시 울릉도·독도가 조선 영토이고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1877년 3월29일자의 일본 최고국가기관의 최종 결정은 그에 앞서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1696년 1월28일 내린 결정과 마찬가지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이 울릉도·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요지의 최종 결정을 내려서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공문서를 지령한 것은 “독도는 한국영토다”라는 진실을 일본측 자료가 재확인하는 결정적 자료이며, 오늘날 일본정부가 억지를 쓰는, 즉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의 허구성을 잘 증명해주는 결정적 일본 공문서라고 할 수 있다.

    Q 44 그렇다면 당시 일본 해군은 ‘독도’를 어느 나라 영토로 간주했는가?

    A물론 일본 군부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하였다.

    일본 육군성 참모국은 1875년(메이지 8년)에 ‘조선전도(朝鮮全圖)’를 편찬했는데, 울릉도(竹島)와 함께 독도(우산도: 松島)를 조선 영토로 표시하였다. 일본 육군의 이런 관점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예컨대 1936년 일본 육군참모본부(육지측량부)는 일본제국의 지배영토를 원래의 병탄(倂呑) 구역별로 나누어 표시한 ‘지도구역일람도(地圖區域一覽圖)’를 발행했는데, 이 지도에서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구역’에 넣어 표시하였다. 이 지도는 일제 패망(1945년) 후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일본제국을 해체하고 병탄된 영토를 원주인에게 돌려줄 때 독도가 한국에 반환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일본측 근거자료의 하나로 연합국 최고사령부에 의해 사용되었다.

    일본 해군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판단하였다.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 영국·러시아 등 서양 선박들이 조사·측량한 자료들을 번안·편집해서 1876년에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를 편찬했는데,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동해안’에 포함시켜 조선 영토로 표시하였다. 또한 러시아 군함이 ‘독도’를 3.5마일 정북(正北) 방향에서 그린 독도 그림, 북서 10도 방향 5마일 거리에서 그린 독도 그림, 북서 61도 방향 14마일 거리에서 그린 독도 그림을 ‘일본서북해안도’에 넣지 않고 억지로 공간을 넓혀가면서 ‘조선동해안도’에 넣어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백히 표시하였다. 일본 해군성은 그 후 1887년 ‘조선동해안도’의 재판을 낼 때도 동일 방식으로 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 그 후에도 판이 거듭되었는데, 일본 해군성의 ‘조선동해안도’의 모든 판본은 1905년까지 독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하였다.

    또한 일본 해군성은 1886년에 세계수로지인 ‘환영수로지(瀛水路誌)’를 편찬했는데, 독도를 ‘리앙쿠르드암(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동안(朝鮮東岸)’에 수록했다. 또한 일본 해군성은 1889년에 ‘환영수로지’ 편찬을 중단하고 이를 ‘일본수로지’ ‘조선수로지’ 등 국가 영토별로 분류하여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때 ‘독도(리앙쿠르드岩)’를 ‘일본수로지’와 ‘조선수로지’ 중 어느 쪽에 넣는가를 보면 일본 해군의 판단과 결정을 알 수 있다. 이때 해군성은 ‘독도(리앙쿠르드岩)’를 ‘조선수로지’에만 넣고 ‘일본수로지’에는 넣지 않음으로써, ‘독도(리앙쿠르드岩)’를 조선 영토로 표시하였다. 일본 해군은 명백하게 ‘독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하고 판정한 것이었다.

    Q 45 오늘날 일본정부는 ‘수로지’는 초국가적으로 ‘수로’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국가별 영토에 대한 의미는 없다고 반박한다는데, 이것은 사실인가? 아니면 ‘수로지’도 영토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가?

    A‘수로지’ 앞의 접두어에 ‘국가 명칭’이 있으면 영토 개념을 포함한다. 예컨대 일본 해군성 수로국은 조선이 독립국가였을 때에는 ‘조선수로지’를 따로 편찬해서 조선 영토의 수로는 이에 포함했다가, 조선이 1910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조선수로지’ 발행을 중단했다. 그리고 1911년부터는 ‘조선’을 따로 ‘일본수로지’ 제6권으로 편찬하면서 그 이유를 “이 책은 조선전안(朝鮮全岸)의 수로로서 메이지 43년(1910년…인용자) 조선을 우리 제국이 병합했기 때문에 ‘일본수로지’ 제6권이라고 제목을 하여 간행한다”고 서문에 썼다. 수로지가 국가별 영토 개념을 포함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해군성은 ‘독도(리앙쿠르드岩)’를 1905년 2월 이전까지는 항상 ‘조선 영토’로 간주하여 ‘조선수로지’에 넣고 ‘조선지도’에 넣었으며, ‘일본수로지’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본 해군성이 독도를 ‘일본수로지’에 처음 포함시킨 것은 일제가 1905년 2월 독도를 대한제국 정부 몰래 침탈하여 시마네현에 포함시킨 이후부터다. 일본 해군성은 1907년의 ‘일본수로지’ 제4권의 해도(海圖)에서 은기도 북방에 처음으로 작은 점을 그려 넣어 독도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조선수로지’에 독도를 포함한 것과 그 표시설명은 일본 해군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한 사실은 훌륭하게 증명한다.

    Q 46 일본 해군은 왜 이때 ‘독도(우산도)’를 ‘松島’라고 표시하지 않고 ‘리앙쿠르드岩’이라고 표시했는가? 왜 일본은 처음에는 ‘울릉도’를 ‘竹島’라고 부르다가, 독도를 ‘리앙쿠르드岩’이라고 표시할 때부터는 ‘울릉도’를 ‘松島’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竹島’라는 일본 호칭은 사라진 것인가?

    A일본에서는 1878∼1880년에 ‘울릉도’와 ‘독도’호칭에 대혼란과 변동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1876년에 무등(武藤平學)이란 사람이 동해 가운데 조선의 ‘울릉도’가 아니면서 자연자원이 풍부한 새 섬을 발견했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외무성에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 즉 송도 개척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조선의 울릉도를 ‘죽도(竹島)’, 조선의 ‘우산도(독도)’를 ‘송도(松島)’로 부르면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확인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송도(독도)’는 조선의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연조건이 풍부하고 사람이 수천 명이나 살 수 있는 새 섬을 발견했다며 ‘송도(松島) 개척’을 청원해오자 해군성에 그 실측조사를 의뢰하였다.

    일본 해군성은 ‘조·일수호조규’(1876년)에서 얻은 이권인 조선해안측량권에 의거하여 천성환(天城丸)이라는 군함을 파견해서 1878년 4월과 1880년 9월 ‘송도’의 실체를 두 차례나 실측 조사하였다. 그러나 새로 발견했다는 그 ‘송도’는 다름아닌 조선의 ‘울릉도’였다. 일본 해군은 ‘송도 개척’이란 명목으로 막대한 예산을 사용했고, 또 일본 해군 함정을 처음으로 ‘송도’ 실측 조사에 투입한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은 ‘송도’가 조선의 ‘울릉도’로 판명되어 무등(武藤)의 ‘송도개척지의’를 각하한 후에도, 조선의 ‘울릉도’를 새로이 ‘송도(松島)’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일본인들과 일본 해군은 조선의 우산도(독도)를 ‘송도(松島)’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松島’가 조선의 ‘울릉도’에 붙여지니, 조선의 ‘우산도(독도)’에는 새 이름이 필요해졌다. 이에 일본 해군은 조선의 ‘독도(우산도)’에 프랑스 포경선이 붙인 이름인 ‘Liancourt Rocks’를 취하여 독도(우산도)를 ‘리앙쿠르드岩’이라고 부르고 ‘조선수로지’에도 그렇게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해군성 수로국에 크게 의존하는 일본 어민들도 차츰 해군성의 호칭을 따르게 되어 1880년대부터는 일본에서는 조선의 ‘우산도(독도)’를 ‘리앙쿠르드岩’으로, ‘울릉도’를 ‘송도(松島)’로 호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어부들은 ‘리앙쿠르드島’가 길고 어려우므로 이를 ‘리앙꼬島’라고 약칭하였다. 종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붙인 ‘竹島’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는 조선의 ‘우산도(독도)’에 ‘竹島’라는 일본 호칭을 붙인 것이다.

    Q 47 일본이 군함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실측 조사하고 ‘죽도’니, ‘송도’니 ‘리앙쿠르드岩’이니 하는 이름을 멋대로 붙이며 해안과 영토를 넘보고 있을 때 조선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A조선 정부도 서서히 각성하고 있었다. 울릉도에 대한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울릉도에 국민 이주를 허가하여 울릉도 및 독도를 재개척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일본에서 1868년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붕괴되고 메이지 유신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한론’과 대외 팽창이 적극 고취되자, 도쿠가와 막부 시대 말까지 국경을 넘어 울릉도·독도에 건너가지 못하던 일본인 가운데 이제는 국경을 넘어 울릉도에 몰래 들어와서 목재를 베어가고 고기잡이를 하는 무리가 점차 늘어났다. 이 사실을 1881년 울릉도를 순시(巡視)·수토(搜討)하러 다녀온 조선 수토관들이 적발하여 강원도관찰사를 통해서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조선왕조가 개항한 후에 설치된 새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은 이 문제에 대해 ①일본정부에 항의문서를 보내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침입에 대한 금지령의 실시를 요구하고 ②울릉도 방위와 수호를 위해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鬱陵島檢察使)에 임명해서 자세한 현지조사를 실시한 후 그 보고를 검토해서 울릉도 ‘공도정책’의 폐기 여부와 ‘재개척’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여 이 대책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국왕도 통리기무아문의 건의를 윤허하여, 이규원을 1881년 5월23일 ‘울릉도 검찰사’에 임명하였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발령 후 출발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면 벌목철이 지나서 일본인들이 철수해버린 다음이 되므로, 출발 예정일을 다음해로 넘겼다. 그 결과 이규원이 울릉도 현지조사를 위하여 정작 서울을 출발한 것은 1882년 음력 4월10일이었다. 이규원은 출발에 앞서 4월7일 국왕을 알현하여 하직 인사를 올렸는데, 이 자리에서 국왕은 울릉도 동쪽 30리 정도에 ‘우산도(독도)’가 있고, 또 ‘송죽도(松竹島)’라는 섬도 있어서 섬이 세 개라는 설도 있으니 이것도 조사해 오도록 하고, 울릉도 현지조사 때에는 사람을 이주시켜 읍(邑)을 설치할 만한 후보지를 조사해 오라고 명령하여, 울릉도 ‘재개척’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냈다.

    Q 48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에 들어가 현지조사를 실행한 결과는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실제로 울릉도에 몰래 침입하여 벌목하고 있었는가?

    A일본인들과 본국인(조선인) 상당수가 몰래 들어와 목재를 벌채하기도 하고, 배를 만들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고 있었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배 세척에 102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현지조사단을 편성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1882년 음력 4월29일 3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강원도 평해(平海) 구산포(邱山浦)에서 출발하여 4월30일 울릉도 서면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에 도착하였다. 5월1일부터 만 6일간 도보로 울릉도 안을 현지답사하면서 조사했으며, 다음에는 또 2일간 배편으로 울릉도 해안을 한 바퀴 돌면서 해안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이 과정에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바위섬 죽서도(竹嶼島: 혹은 竹島라고 통칭)를 찾아내 관찰했으나, 울릉도로부터 49해리나 떨어진 우산도(于山島: 독도)는 울릉도 체류자들로부터 있다는 얘기만 듣고 현지조사는 풍랑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출발 당시부터 풍랑에 겁을 먹었고, 울릉도에 도착한 후에는 새벽마다 풍랑을 재워달라고 산신제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규원 일행은 고대 우산국의 터전이 울릉도(鬱陵島)·죽서도(竹嶼島)·우산도(于山島: 독도) 세 섬으로 구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인식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돌아왔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 일행이 울릉도 현지조사에서 검찰한 내용 가운데, 울릉도·독도 재개척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그의 일기와 보고서에서 간추리면 다음 사실이 특히 눈길을 끈다.

    (1) 울릉도에 들어가 있는 본국인(조선인)은 모두 140명인데, 출신도별로 보면 전라도가 115명(전체의 82%), 강원도(평해)가 14명(10%), 경상도가 10명(7%), 경기도(파주)가 1명이었다. 전라도 출신들은 남해안 섬이나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한 배에 13∼24명씩 태우고 들어와서 집단별로 막사를 치고 체류하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있었다.

    (2) 본국인(조선인)이 하고 있던 작업을 보면, 나무를 베어 배(선박)를 만드는 사람이 129명(전체의 92.2%), 인삼 등 약초를 캐는 사람이 9명(6.4%), 대나무를 베는 사람이 2명(1.4%) 등이었다. 전라도(115명)와 강원도(14명)에서 온 사람들은 13∼24명이 한 집단을 이루어 막사를 치고 살면서 재목을 베어 배(선박)를 만들고 때때로 미역 뜯기와 고기잡이를 하다가 배(선박)가 다 만들어지면 이 새 배에 미역과 물고기를 싣고 돌아갔다. 경상도 경주에서 온 7명과 함양에서 온 1명(全錫奎: 士族), 경기도 파주에서 온 1명은 산삼과 약초를 캤고, 경상도 연일에서 온 나머지 2명은 대나무를 베고 있었다.

    (3) 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은 모두 78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재목을 베어 실어가려고 들어왔으며, 해안에 나무를 다듬어 판재(板材)를 만드는 곳이 18개소 있었다. 일본인들과 필담을 해보니, 그 응답의 요지는 ①일본의 동해도(東海島)·남해도(南海島)·산양도(山陽島) 사람 78명이 올해 4월에 울릉도에 들어와서 막사를 치고 벌목을 하고 있으며 ②올해 8월에 일본에서 선박이 오면 목재와 판재를 싣고 돌아갈 예정이고 ③조선정부가 울릉도 재목의 벌채를 금지하고 있음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④울릉도가 ‘일본제국지도(日本帝國地圖)’에 ‘松島(송도)’라고 표시되어 일본 영토로 알고 있다고 응답한 일본인도 있으며 ⑤2년 전에도 울릉도에 들어와 재목을 벌채해 실어 갔고 ⑥울릉도 남포(南浦)에는 울릉도를 ‘일본국 송도(松島)’라고 쓴 푯말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4) 검찰사 일행이 울릉도의 장작지포(長斫之浦)에 도달해 보니 해변의 돌길 위에 길이 6척, 너비 1척의 표목(標木)이 세워져 있었다. 그 표목 앞면에는 ‘대일본제국 송도 규곡(大日本帝國 松島 槻谷)’이라고 씌어 있고, 좌변에는 ‘메이지 2년 2월23일 기암충조 건립(明治二年二月二十三日 崎岩忠照 建立)’이라고 씌어 있었다. 일본인이 1869년에 울릉도에 들어와서 일본국의 ‘松島(송도)’라는 표목을 세우고 간 것이었다.

    (5) 울릉도를 재개척하여 읍(邑)을 세우는 경우에 주거지로는 나리동(羅里洞)이 길이가 10여 리요 둘레가 40여 리로 몇 천 호를 거주시킬 수 있고, 이 밖에도 100∼200호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이 6∼7처가 있음을 조사하였다. 또한 포구(浦口)는 14개처가 있으며, 물산은 비교적 풍부한데 대표적 물산으로 43종을 들어 보고하였다.

    조선의 중앙정부는 이 현지 조사보고에 따라 1882년 5월 울릉도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Q 49 그러면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은 이때 어떻게 대응했는가? 울릉도 ‘공도정책’과 ‘수토정책’을 폐기하고 ‘재개척 정책’을 채택하여 시행했는가?

    A조선조정은 먼저 주조선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항의문서를 보내고, 이어 종래의 울릉도 ‘공도정책’을 폐기함과 동시에 울릉도 ‘재개척 정책’을 채택하였다.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1882년 음력 6월5일 국왕에게 복명서를 바치고 알현하는 자리에서, 일본인이 울릉도에 ‘일본국 松島(송도)’ 운운한 나무 푯말을 세운 일에 대해 주조선 일본공사 하나부사와 일본 외무성에 항의문서를 발송할 것을 건의하였다. 국왕은 이를 채택하여 정부로 하여금 즉각 일본공사와 일본 외무성에 항의문서를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모든 정책이 일시 정지되었다. ‘임오군란’이 일단 수습되자,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은 울릉도 ‘재개척’이 시급하다면서 1882년 음력 8월20일 울릉도 재개척 방법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그 요지는 ①울릉도는 바다 가운데 외로이 떨어져 있어도 토지가 비옥하니 우선 자원하는 백성들을 모집하여 농경지를 개간케 하고 ②개간한 농경지에 대해서는 5년간 면세하는 특혜를 주면 점차 백성들이 모여들어 취락을 이룰 것이며 ③영남과 호남의 조운선(漕運船: 세곡을 실어 나르는 배)은 울릉도에 들어가 재목을 베어 만들도록 공적으로 허락하고 ④울릉도 관리인으로 검찰사 이규원에게 천거받아서 근실한 사람으로 도장(島長)을 임명하여 이주민들의 규율과 질서를 만들어 세우도록 하며 ⑤먼저 설읍(設邑: 읍을 세우는 일)한 다음에는 뒷날 설진(設鎭: 군사주둔지를 세우는 일)할 뜻을 미리 강론하여 강원도관찰사에게 분부해서 이주민을 보호하도록 준비시킨다는 것이었다. 국왕은 즉각 이 건의를 윤허하였다.

    그리하여 1882년 음력 8월20일 울릉도 ‘공도정책’은 폐기되고 역사적인 울릉도 ‘재개척 정책’이 채택되었다. 조선조정은 이규원의 천거를 받아 함양에서 산삼과 약재를 구하러 일찍이 울릉도에 출입한 전석규(全錫奎)를 도장(島長)에 임명하고, 울릉도 재개척 사업을 준비케 했다.

    Q 50 언제 어떻게 울릉도 ‘재개척 사업’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는가?

    A울릉도 ‘재개척 정책’이 채택된 음력 8월20일은 이미 가을이어서 재개척 사업에는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리하여 1883년 음력 3월부터 본격적으로 울릉도 ‘재개척’ 사업을 시작하였다. 국왕은 우선 1883년(고종 20년) 음력 3월16일 통리기무아문 참의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에 임명하고, 임지로 떠날 때 일일이 웃어른들에게 인사하는 절차를 면제하니, 편리한 대로 왕래하면서 왕에게 직접 결과를 보고하게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옥균을 ‘울릉도개척사’에 임명하지 않고 ‘동남제도개척사’에 임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국왕이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을 파견할 때와 보고받을 때 울릉도(옛 우산국)가 ①울릉도 ②죽서도(죽도: 울릉도 바로 옆의 작은 바위섬) ③우산도(독도)의 3도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김옥균의 직책은 ‘울릉도’ 재개척과 함께 ‘죽서도’와 ‘독도(우산도)’ 재개척도 과업이 되어 동남 여러 섬(울릉도·죽서도·독도=우산도)의 재개척 사신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즉 김옥균의 직책은 ①울릉도를 재개척할 뿐 아니라 ②울릉도 바로 옆의 작은 바위섬 죽서도(죽도)와 ③우산도(독도)도 재개척하며 ④울릉도·독도 일대의 ‘고래잡이’도 관장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었다. 당시 동해는 세계적인 고래잡이 어장이었다. 김옥균의 ‘동남제도개척사’ 직책에 ‘독도=우산도’ 재개척과 관리가 이미 1883년 3월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옥균이 모집한 최초의 이주민 자원자는 모두 16호 54명이었다. 이에 1883년 음력 4월 최초의 이주민 16호 54명이 수백년간 비워두었던 울릉도에 도착하여 마을을 만들면서 농경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Q 51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 김옥균은 울릉도·독도 재개척에 성공했는가?

    A김옥균 등 개화당은 ‘근대국가’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울릉도·죽서도·독도에 일본인들이 들이닥칠 것을 염려하여 재개척 사업에 열정적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정부 주도하에 강원도·경상도·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주민 지원자를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시키고 적극 후원했다. 그 결과 이주민 수가 1883∼84년에는 급속히 증가했다.

    (2) 정부와 개척사가 일본측에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침입에 강경하게 항의하여 울릉도에 들어온 일본인을 모두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 내무성은 1883년 9월 관리와 순경 등 31명을 태운 월후환(越後丸)이란 배를 울릉도에 파견하여 그 동안 울릉도에 불법 침입해서 거주하던 일본인 254명을 모두 태워 철수시켰다. 그 결과 울릉도에는 일본인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개척사 김옥균의 울릉도·독도 재개척사업의 큰 성과였다.

    (3) 개척사 김옥균은 정부의 허락도 없이 미곡을 받고 일본 선적 천수환(天壽丸) 선장에게 울릉도 삼림 벌채 허가장을 발급한 울릉도 도장(島長) 김석규(金錫奎)를 파면하고 처벌했다. 김옥균은 울릉도 삼림을 국가가 외화를 벌 수 있는 중요한 자원으로 간주했다.

    (4) 개척사 김옥균은 조선정부가 울릉도 삼림을 벌채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개화당 백춘배(白春培)를 1884년 8월 일본에 파견해 일본 배 만리환(萬里丸) 선장과 판매계약을 체약했다. 김옥균은 울릉도 삼림 벌채와 임업·어업 개발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울릉도 삼림을 담보로 차관 도입을 교섭했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 등이 일본에 망명하자 개화당의 울릉도·독도 재개척 사업은 장벽에 부딪혔다.

    Q 52 갑신정변 후에 울릉도·독도 재개척 사업은 어떤 장벽에 부딪혔는가?

    A중단되지는 않았으나 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민비 정부는 울릉도에 전임(專任) 도장(島長)을 두지 않고, 개항 이전 수토(搜討)제도 때와 같이 평해(平海)군의 월송포(越松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울릉도를 겸임으로 관리하게 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정부의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그 열의가 식었지만, 일반 백성 사이에는 남해안 다도해 지방에서 울릉도로 이주하는 백성이 꾸준히 증가했다.

    1894년에 온건 개화파가 집권하자 1894년 12월 울릉도 수토(搜討)제도를 폐지하고 다시 전임 도장을 두었다가, 1895년 8월에는 도장(島長)을 도감(島監)으로 바꾸어 판임관(判任官) 직급으로 격상하고, 초대도감에 배계주(裵季周)를 임명했다. 이로서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독립신문’에 1897년 3월 현재 울릉도 재개척 사업 통계가 실려 있는데, 조성한 마을이 12개 동리, 호수가 397호, 인구가 1134명(남자 662명, 여자 472명), 개간한 농경지가 모두 4775두락이었다.

    Q 53 일본인들은 울릉도에서 철수한 뒤 다시 들어오려는 기도는 없었는가?

    A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95년 후반기부터 일본인들이 다시 울릉도에 불법 침입하여 목재를 공공연히 도벌하여 일본으로 싣고 가는 일이 급증했다.

    Q 54 울릉도의 목재를 일본측에서 탐냈다면 경제적 가치가 컸기 때문일 텐데, 조선정부는 왜 이를 벌채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정책을 수립하지 않았는가?

    A청·일전쟁 후 일본은 1895년 양력 10월8일 경복궁을 야습하여 민비(명성황후) 시해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국왕 고종은 일본의 독수(毒手)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6년 2월11일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들어가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다.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 안에서 신정부를 조직하고 정사(政事)를 보자, 러시아측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신정부는 친러 수구파 정부로 조직되고, 국왕 고종도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의 이권 침탈요구를 받았다. 이때 러시아는 고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1896년 9월 “두만강·압록강 유역 대안 산림과 울릉도 삼림의 벌채권”을 러시아 회사(대표 J. I. Briner)에 ‘이권(利權)’으로 25년간 양여하게 했다. 그러므로 울릉도·독도는 조선(대한제국)의 영토지만, 울릉도의 재목은 1896년부터 25년간 제정 러시아가 ‘벌채권’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1896년 9월 이후에는 조선정부는 울릉도의 나무를 벌채하여 외국에 수출할 수 없게 됐다.

    Q 55 대한제국 정부가 러시아에게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을 넘겨주었는데, 일본인이 침입해서 울릉도 삼림을 불법 벌채해가서 3국 사이에 국제분쟁은 발생하지 않았는가?

    A발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주한 러시아 공사가 여러 차례 항의문을 보내왔다. 특히 1899년에는 러시아측이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울릉도에 들어와서 삼림을 벌채해 실어가고 있으니 이를 금지해 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해왔다.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측의 항의는 물론, 무엇보다 개항장이 아닌 한국 영토에 일본인이 불법 침입하여 함부로 삼림을 벌채해간다는 데 놀라서 이를 중지시키고, 울릉도 이주민에 대한 행정관리를 위해 1899년 5월 배계주를 울릉도 도감(島監)으로 재임명하여 파견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측과 일본측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배계주와 함께 부산항 세무사(稅務司)로 근무하고 있는 외국인 세무사를 동행케 해서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실태를 관찰하여 보고하게 했다.

    Q 56 재부임한 울릉도 도감 배계주(裵季周)와 부산항 외국인 세무사의 울릉도 실태 보고는 어떠했는가?

    A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1899년 5∼6월 현재 울릉도에는 일본인 수백명이 떼를 지어 불법 침투해서 촌락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었으며, 선박을 운행하면서 삼림을 계속 벌채해 일본으로 운반해가고 곡식과 물화(物貨)를 밀무역하고 있었다. 울릉도에 이주해온 한국인이 조금이라도 이를 말리면 일본인들은 칼을 빼들고 휘둘러대면서 폭동을 일으켜 한국인 이주민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안도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아울러 울릉도 도감 배계주는 울릉도에 불법으로 들어온 일본인들과 그들의 행패가 결코 가볍지 않으므로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엄격하게 단속하지 않으면 울릉도에 이주해온 한국인들이 이산하고 말겠기에 이를 급히 보고하니 중앙정부가 적극 조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실태를 알게 된 대한제국 정부는 외부(外部)대신이 주한 일본공사에게 공문을 보내, 울릉도에 불법 밀입도(密入島)한 일본인들을 기한을 정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개항장이 아닌 항구에서 밀무역한 죄에 대해서는 ‘조·일수호조규’(1876년) 약정에 의거해서 조사·징벌하여 후일의 폐단을 영구히 근절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9년 9월15일자로 대한제국 외부대신에게 공문을 보내 울릉도에 불법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삼림을 벌채해가고 행패를 부리고 있으므로 일본 공사관에 요구하여 개항장이 아닌 울릉도에 불법 밀입도한 일본인들을 쇄환(刷還)해 가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Q 57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인들의 불법 입도와 삼림벌채 및 불법 행태를 금지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온 러시아측의 압력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대한제국 정부는 처음에는 주한 일본공사관을 통하여 일본인들을 철수시키라고 일본공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공사의 답장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만일 일본인들의 범법행위가 있으면 한국 관헌이 체포하여 가까운 일본영사에게 넘기도록 ‘조·일수호조규’에 규정되어 있으니 한국 관헌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제국 내부(內部)는 근본 대책 수립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12월에 내무관리 우용정(禹用鼎)을 울릉도 시찰위원으로 임명하여 일본측과 제3국 외국인을 포함한 조사단을 파견해서 일본인의 불법 침입과 삼림 불법 벌채 실태를 조사하고, 그 후 울릉도·독도의 행정관제를 개정·격상해 그 행정관리를 강화하기로 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울릉도에 가장 가까운 일본영사관인 부산 일본영사관의 책임자를 동행시키고 일본측과 교섭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내무관리 우용정을 책임자로 하고 한국측의 부산감리서(釜山監理署) 주사 김면수(金冕秀)와 봉판(封辦) 김성원(金聲遠), 일본측 부산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 적총정조(赤塚正助)와 경부(경찰) 1명, 제3국인은 부산해관 세무사 영국인 라포트(E. Raporte, 羅保得) 등으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1900년 5월25일 울릉도로 출발하게 했다.

    Q 58 우용정 조사단 일행이 실제로 조사한 1900년 당시 울릉도의 실태는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밀입도하여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삼림을 벌채해가고 있었는가?

    A우용정 일행은 1900년 5월31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6월1일부터 5일간 울릉도 실태를 조사한 다음 귀경하여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그 요지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울릉도는 길이가 70리, 폭이 40리, 둘레가 140∼150리인 섬인데, 규목(槻木)·자단(紫檀)·백자(栢子)·감탕(甘湯) 등 귀한 나무들과 각종 수목이 울창하다. 도민들이 개간한 토양은 비옥하여 거름을 주지 않아도 곡식이 잘 자라서 대맥(大麥)·소맥(小麥)·황두(黃豆)·감저(甘藷) 등을 수확해 남은 것은 판매하고 있다. 그간 개간된 농경지 면적은 7700여 두락이며, 호수는 400여 호, 인구는 남녀 합하여 1700여 명이다. 면화(綿花)·마포(麻布)·지속(紙屬) 등도 외부에서 들여오지 않고 자급하고 있다. 흉년에는 학조(鶴鳥)라는 날짐승과 명이(茗夷)라는 식물이 구황(救荒)에 쓰이므로 기아를 면할 수 있다. 삼림이 울창한 데에도 맹수나 가시 돋친 수목의 해가 없다. 다만 지세의 경사가 심하여 수전(水田) 농업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2) 일본인 잠입 체류자는 57간(間)에 남녀 합하여 144명이며, 정박하고 있는 일본 선박은 11척인데, 내왕하는 성선은 일정하지 않아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다. 작년 이래 일본인들이 불법 도벌한 규목(槻木)은 71주이고, 그 밖에 향목(香木)과 잡목을 도벌한 것은 매거(枚擧)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또 지난 1년에 일본인들이 감탕목(甘湯木) 껍질을 벗겨 생즙을 내 실어간 것이 1000여 통이나 되니 그들이 수년만 더 살아도 산에 가득 찬 수목이 반드시 메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또 일본인들은 폭동과 행패가 매우 심하다. 그러나 도감(島監)은 단신 빈주먹이므로 비록 이를 금지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일본인이 울릉도에 1일 와서 머물면 1일의 해(害)가 있고 2일 머물면 2일의 해가 있다. 이번 조사 때 그들은 마지못해 퇴거하겠다고 답했는데, 원래 일본인들의 잠입이 조약 위반이니 일본공사에게 요구하여 철거시킨 연후에야 도민을 보호하고 삼림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본 조사위원이 순시하는 중에도 일본 상선 4척이 들어왔기에 이튿날 탐문해보니 도끼와 톱 등을 장비(裝備)하고 벌목 장인 40명과 그 밖에 공장(工匠) 등 모두 70여 명이 하륙(下陸)했다고 한다. 일본영사와 의논하여 일본인이 도벌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으나, 우리 배가 회선한 뒤 어떤 침략과 폭행을 자행할지 걱정이니 이제 모두 철귀(撤歸)시켜야 할 것이다.

    Q 59 우용정 조사단 일행의 보고서에 대해 일본측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A일본측은 일본인 철수 의사가 전혀 없었다. 서울의 일본공사관은 시찰위원 우용정의 보고서에 의거하여 일본인 철환문제를 논의하자는 대한제국 정부의 요청에 자기네 조사위원의 복명서가 제출되지 않았다고 시일을 지연하며 매우 무성의한 반응을 보였다. 울릉도민은 대한제국 내부(內部) 조사위원의 성원을 받고 합자하여 개운회사(開運會社)를 설치하고 개운환(開運丸)을 구입하여 운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공사관은 조사결과에 대해 토의하는 것조차 무성의했다.

    대한제국 정부의 울릉도 일본인 철환 요구에 대해 일본측 조사위원 적총정조(赤塚正助)의 보고서는 이미 6월15일자로 제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은 2개월 이상이나 회답을 끌다가, 1900년 9월 초순 회답문에서 ①일본인이 울릉도에 재류하기 시작한 것은 십수 년 이전의 일로서 울릉도 밀입도의 책임은 귀국의 도감이 비단 묵인했을 뿐 아니라 종용했기 때문이고 ②도벌 운운은 도감의 의뢰나 합의매매이며 ③울릉도 도민과 일본인의 상업무역은 도민의 희망에 따른 것이고 도감이 장차 수출입세를 징수할 예정인 것으로 알며 ④울릉도민은 본토와의 교통에서 일본인 거류자 때문에 그 편리함을 얻고 있은즉, 일본인 거류는 울릉도민의 불가결의 요건이라는 등 전혀 사리에 닿지 않는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일본인 철환(撤還)을 사실상 거부했다.

    이에 대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①울릉도 도감이 일본인의 거류를 묵인 또는 종용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리에 닿지 않고 사실이 아니며 ②도벌이 합의매매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③도감이 징수하는 세는 수출입세가 아니며 ④울릉도민이 일본인 때문에 곤란이 심한데 도리어 편의를 얻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일본공사는 울릉도에 내거하는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철환시키지 말아달라고 요청해왔으나, 대한제국 외부(外部)는 불통상항구(不通商港口)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조·일수호조규 위반임을 지적하고 일본인의 철환을 거듭 강력하게 요구했다.

    Q 60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측의 무성의와 방자한 반응에 어떻게 대응 조처했는가?

    A대한제국 정부는 울릉도·죽서도·독도를 묶어서 하나의 ‘군(郡)’을 만들어 지방행정상 격상시키고, 울릉도에는 ‘군수’를 상주시켜서 섬의 수호와 행정관리를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는 1900년 10월22일 울릉도·죽서도·독도를 묶어서 ‘울도군(鬱島郡)’을 설치하고 도감 대신 ‘군수’를 두는 지방제도 개정안을 의정부에 제출했다. 개정안은 1900년 10월24일 의정부회의(議政府會議: 내각회의)에서 8 대 0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황제의 재가를 받았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10월25일자 칙령 제41호로 전문이 6조로 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관보(官報)’에 게재하고 공포했다.

    대한제국의 이 칙령에 따라 울릉도는 울진군수(때로는 평해군)의 행정을 받다가 이제 강원도의 독립된 군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울릉도의 초대 군수로는 도감으로 있던 배계주가 주임관(奏任官) 6등으로 임명되었으며, 뒤이어 사무관으로 최성린(崔聖麟)이 임명되어 파송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제2조의 울도군의 ‘구역은 鬱陵全島와 竹島 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한 부분이다. 여기서 죽도(竹島)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규원(李奎遠)의 ‘울릉도검찰일기’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석도(石島)는 독도(獨島)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당시 울릉도 주민 대다수는 전라도 출신 어민들이었는데, 전라도 방언으로는 ‘돌’을 ‘독’이라고 하고 ‘돌섬’을 ‘독섬’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독섬’을 음역(意譯)하여 ‘석도(石島)’라고 한 것이다. 울릉도 초기 이주민들의 민간 호칭인 ‘독섬’ ‘독도’를, 뜻을 취해 한자로 표기하면 ‘石島’가 되고, 발음을 취하여 표기하면 ‘獨島’가 되는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1900년에 칙령으로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울도군(鬱島郡)을 설치하면서 울도군수(鬱島郡守)의 통치 행정지역에 울릉도·죽서도와 함께 ‘石島’(돌섬=독섬)라는 명칭으로 독도(獨島)에 대한 행정지배권을 거듭 명백히 공포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Q 61 왜 ‘울도군’을 설치할 때 구통치구역인 ‘독도’의 명칭을 이전처럼 ‘于山島’라고 하지 않고 ‘石島’라고 표시했는가?

    A울릉도 재개척 이후 울릉도에 이주한 남해안 어민들이 종래의 ‘于山島’를 바위섬, 즉 ‘돌섬’이라는 뜻으로 ‘독섬’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해안 사투리, 특히 울릉도 이주민의 다수를 형성한 호남지방 남해안 어민들의 사투리로는 ‘돌(石)’을 ‘독’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1900년 당시에 울릉도 거주민들은 ‘우산도’를 ‘독섬’이라고 호칭했고, 이를 한자로 번역할 경우 뜻을 취한 ‘의역’일 때는 ‘石島’라 하고, 발음을 취한 ‘음역’일 때에는 ‘獨島’라 표기했다.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에서는 바로 뜻을 취하여 ‘石島’라고 표기했다.

    Q 62 그러면 이 무렵에 우산도를 ‘獨島’라고 표기한 기록도 발견되는가?

    A발견된다. 일본 해군이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기 위한 사전 준비로 군함 신고호(新高號)를 울릉도와 독도에 파견했는데, 먼저 울릉도에 들러서 주민들에게 청취조사를 하게 했다. ‘군함신고호행동일지(軍艦新高號行動日誌)’ 1904년 9월25일조에는 “松島(울릉도…인용자)에서 리앙코르드岩 실견자(實見者)에게 청취한 정보. 리앙코르드암(岩)을 한국인은 ‘獨島’라고 쓰고 본방(일본…인용자) 어부들은 ‘리앙코도(島)’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일본에서는 ‘우산도’(독도)를 1882년 이전까지는 ‘松島’라고 부르다가 일본 해군성이 ‘울릉도’를 ‘松島’라고 옮겨 호칭하고 표기한 1882년 이후에는 ‘우산도’의 일본 호칭이 없어졌으므로 ‘리앙코르드島’ ‘리앙코島’라고 호칭했음은 앞에서 밝힌 적이 있다.

    위의 일본군함 신고호의 보고는 바로 ‘우산도’, ‘리앙코島’라고 일본 어부들이 부르는 그 섬을 한국인은 ‘獨島’라고 쓴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于山島=獨島=리앙코島’임이 명백하다. 더구나 이 행동일지의 기록일자는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기 이전인 1904년의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Q 63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공포는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고 제도화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닌가?

    A그렇다. 대한제국이 1900년 칙령 제41호로써 울도군의 행정구역 안에 독도(獨島, 石島)를 명확히 표시한 것은 당시의 만국공법(국제공법) 체계 안에서 대외교섭을 하던 대한제국이 종래의 고유영토인 ‘독도’에 대하여 다시 근대 국제법 체계로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더구나 칙령 제41호는 ‘관보(官報)’에 게재되어 전세계에 공표되었다.

    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공표는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려고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소위 영토편입을 결정하기 약 5년 전의 일이다. 오늘날 일본정부가 1905년 일본 내각회의 결정이 당시 국제법상 하자가 없었다는 억지 주장은 바로 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그것의 전세계 공표에 의해서 완전히 거짓임이 명백해진다. 한국 고유영토인 독도(우산도)에 대하여 대한제국은 근대 국제법 체계를 갖춘 칙령 제41호로써 1900년 ‘독도’가 ‘울도군수’의 행정관리하에 있는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거듭 확인한 것이었다.

    Q 64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일 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도 1900년 대한제국이 근대 국제공법 체계 속에서 울도군에 속한 한국 영토임을 재확인하는 칙령 제41호를 ‘관보’에도 공표했다. 그런데 왜 일본은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하려 했는가? 일본이 독도를 침탈해 ‘영토편입’을 시도한 데는 특수한 목적이 있었는가?

    A일제의 ‘러·일전쟁’ 도발과 관련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정한(征韓)’을 실현하기 위한 대작업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러시아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1904년 2월8일 인천항과 여수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두 척을 선제 기습공격하여 격침시키고, 이틀 후인 2월10일에는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했다. 일제는 이와 동시에 대규모 일본군을 한국정부의 동의도 없이 한반도에 상륙시키고, 서울에 침입하여 대한제국 수도 서울을 군사 점령했다. 일제는 1904년 2월23일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조인케 했다. 6개조로 된 이 협정에는 일본군이 러·일전쟁 기간에 한국의 토지를 일시 수용하여 군용지로 사용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 해군은 1904년 2월8일 선제 기습공격 때에는 러시아 군함 4척을 격침시켜 기선을 잡았으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남하하여 1904년 6월15일 쓰시마해협에서 일본 군함 두 척을 격침시켜 러시아측이 동해에서 기선을 잡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은 서둘러 모든 군함에 무선전신을 설치하고 동시에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 한국 동해안의 울진군 죽변(竹邊)을 비롯하여 20개소에 해군 망루(望樓) 감시탑을 설치했다. 그 가운데 두 개는 울릉도, 한 개는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종래 가치 없는 바위섬으로 간주되던 독도가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군사상 매우 중요한 섬으로 부상한 것이다. 일본 해군은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면서 독도 주위에 해저전선을 깔아 한반도 북부―울릉도―독도―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전선망 가설 작업을 적극 진행했다. 이때 일본인 어업가 나카이 이에사브로(中井養三郞)라는 자가 독도에서 해마(海馬; 바다코끼리)잡이 독점권을 한국정부에 청원하려고 교섭활동을 시작하자, 이 기회에 군사전략상 가치가 높아진 ‘독도’를 아예 일본영토로 탈취해서 여기에 해군 망루를 설치하려는 공작이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Q 65 나카이(中井養三郞)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목적으로 ‘독도’의 어업독점권을 가지려고 했는가?

    A나카이는 학교교육도 받았으며 1890년부터 외국 영해에 나가 잠수기 어업에 종사한 기업적 어업가였다. 1891∼92년에는 러시아령 부근에서 잠수기를 사용한 해마잡이 어업에 종사했고, 1893년에는 조선의 경상도·전라도 연안에서 역시 잠수기를 사용한 물개·생선잡이 어업에 종사했다. 나카이는 1903년 독도에서 해마잡이를 했는데, 수익이 매우 크자 다른 일본어부들이 알고 경쟁적으로 남획하는 것을 방지하고 수익을 독점하기 위해 독도의 소유자인 대한제국 정부에게 어업 독점권을 이권으로 획득하려고 도쿄로 갔다. 왜냐하면 독도가 한국영토여서 한국정부와 직접 교섭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정부의 알선을 받아 한국정부에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Q 66 그렇다면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나카이가 인지했다는 문헌상의 증거자료가 있는가?

    A물론 증거자료가 여러 점 있다. 나카이는 1910년에 쓴 ‘이력서’와 ‘사업경영 개요’에서 “독도가 울릉도에 부속한 한국의 소령(所領)이라고 생각했다”고 명확히 쓰고 있다. 1906년 나카이가 한 설명을 인용해서 1907년 나온 오원복시(奧原福市)의 ‘죽도급 울릉도(竹島及 鬱陵島, 1907)’라는 책과 1906년에 나온 ‘역사지리(歷史地理)’ 제8권 제6호에 수록된 나카이의 증언에서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생각하고 상경하여 농상무성을 통해 한국정부에 ‘대하청원(貸下請願; 차용 청원)’을 내려 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1923년에 나온 ‘시마네(島根)현지(縣誌)’(島根縣敎育會 편)에서도 “나카이 이에사브로는 이 섬(독도…인용자)을 ‘조선영토(朝鮮領土)’라고 생각해 상경하여 농상무성에 말해서 동정부(同政府; 한국정부…인용자)에 대하청원(貸下請願)하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Q 67 그러면 나카이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지하고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신청하려던 계획을 일본정부는 어떻게 바꾸었는가?

    A나카이는 한국정부에 독도의 어업독점권을 신청하기 위해 먼저 어업 관장 부처인 농상무성 수산국장을 방문하여 교섭했다. 농상무성 수산국장은 해군성 수로국장과 연락해본 뒤 독도가 한국영토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하면서 나카이를 해군성 수로국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일본 해군성 수로국장(해군 제독) 간부(肝付)는 독도가 ‘무주지(無主地)’라고 단정하면서,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얻으려면 한국정부에 ‘대하원(貸下願)’을 신청할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독도(리앙코島)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하라고 독려했다.

    1904년 9월29일 나카이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서 자기에게 대부해 달라는 ‘리앙코島(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일본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 세 대신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이때도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무부처인 내무성과 농상무성뿐만 아니라 외무성에도 이 청원서를 제출하여 한국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일본 내무성은 나카이의 청원서를 받고 처음에는 이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러·일전쟁이 전개되는 이 시국에 한국영토로 생각되는 불모의 암초를 갖는 것이 일본의 동태를 주목하는 여러 외국에게 일본이 한국 병탄의 야심을 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는 등 이익이 적은 반면, 한국이 항의라도 하면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으리라는 것 때문이었다. 내무성은 따라서 나카이의 ‘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각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내무성과는 달리 독도의 ‘영토편입’을 적극 지지했다. 외무성 정무국장은 나카이에게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여 무선전신 또는 해저전신을 설치하면 적의 군함을 감시하는 데 매우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하는 일이 긴급히 요구된다고 추동했다. 외무성 정무국장은 나카이에게 내무성이 우려하는 외교상 문제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확언하면서, 속히 청원서를 외무성에 회부하라고 적극 독려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카이가 청원서를 제출한 뒤 4개월여 동안에 일본정부 내부에서 독도 침탈 문제를 놓고 이론(異論)이 전개되나, 결국 일본 내무성도 독도를 침탈하는 데 가담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에 대해서는 나카이 자신이 쓴 ‘사업경영개요’에 잘 기록되어 있다.

    Q 68 일본정부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한국영토인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는가? 이때 ‘한국영토 독도’를 어떤 구실을 만들어 지우려고 했는가?

    A일본정부는 내무대신으로 하여금 나카이의 청원서를 수용하여 1905년 1월10일자로 일본 내각회의의 결정을 요청하게 했다. 이 요청을 받아서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다고 결정했다. 이때 내각회의 결정 원문은 중요하므로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 38년 1월28일 각의결정(閣議決定).

    별지 내무대신 청의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심사해보니,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은기도(隱岐島)를 거(距)하기 서북으로 85리에 있는 이 무인도는 타국이 이를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形迹)이 없다. 지난 (메이지) 36년 우리나라 사람 나카이 이에사브로(中井養三郞)란 자가 어사(漁舍)를 만들고, 인부를 데리고 가 엽구(獵具)를 갖추어서 해려(海驢) 잡이에 착수하고, 이번에 영토편입 및 대하(貸下)를 출원한바, 이때에 소속 및 도명을 확정할 필요가 있으므로, 해도(該島)를 죽도(竹島)라고 이름하고 이제부터는 시마네(島根)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所管)으로 하려고 하는 데 있다. 이를 심사하니 메이지 36년 이래 나카이란 자가 해도(該島)에 이주하고 어업에 종사한 것은 관계서류에 의하여 밝혀지며,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여 이를 본방(本邦 ; 일본…인용자) 소속으로 하고 시마네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함이 무리 없는 건이라 사고하여 청의(請議)대로 각의 결정이 성립되었음을 인정한다.”

    이 내각회의 결정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근거가 된 것은 ‘독도(리앙코島)’는 “다른 나라가 이 섬을 점유했다고 인정할 형적이 없다”고 하여 독도가 임자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즉 ‘한국영토인 독도’에서 ‘한국영토’를 ‘무주지’로 만들어서 지우려 한 것이었다. 독도를 ‘무주지’라고 주장한 것은 나카이의 청원서에는 없는 것으로, 일본 내무성과 내각회의가 만들어넣은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무주지’인 ‘독도(리앙코島)’는 나카이라는 일본인이 1903년 이래 이 섬에 들어가서 어업에 종사한 일이 있기 때문에 국제법상 일본인이 ‘무주지’를 선점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하여 이를 일본영토로 ‘편입’한다는 ‘무주지 선점’에 의한 영토편입이라는 당시의 국제공법 규정에 맞추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 이전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 영토’임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의거한 일본 내각회의의 결정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이 신라에 통일된 이래 계속하여 한국영토로 존속해왔으므로, 역사적 진실은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섬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동안 한국의 자료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본정부 공문서들 속에서도 독도는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섬이라는 사실이 다수 나온다.

    결국 독도를 ‘무주지’라고 주장하면서 ‘무주지 선점론’에 의거하여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1905년 1월28일의 일본 내각회의 결정은 불법이며, 완전 무효이며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즉 독도가 ‘무주지’이기 때문에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지적해둘 것은 최근 일본정부가 1905년 1월 이전에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토’라는 사실이 많은 증거자료에 의해 실증되자, 이번에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대 이래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 허구에 불과하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고유 영토였다는 증거는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일 일본정부의 주장대로 독도가 고대 이래 일본의 고유 영토라면, 일본정부는 1905년 1월에 와서야 그 이전에는 독도가 ‘무주지’였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점유한 형적이 없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일본에 ‘영토편입’한다고 내각회의 결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Q 69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결정을 해놓고 한국정부에 이를 사전 또는 사후에 조회, 통보했는가? 일본정부는 어떤 방법으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는가?

    A설령 그것이 ‘무주지’라고 할지라도 국제법상 그 ‘무주지’를 영토편입할 때는 그곳이 면한 나라들에 사전 조회하는 것이 요청되고 또 국제관례이기도 했다. 예컨대 일본정부는 1876년 태평양 쪽의 오가사하라섬(小笠原島)을 ‘영토편입’할 때에는 이 섬과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본 영국·미국 등과 몇 차례 절충하고 구미 12개 국가들에 대하여 ‘오가사하라섬’에 대한 일본의 관리통치를 통고했다.

    따라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고 한국의 우산도(독도, 석도)로서, ‘영토편입’을 형식상 청원한 나카이와 내무성도 처음부터 이를 한국영토로 인지했으므로, 일본정부는 당연히 한국정부에 이를 사전 조회해야 했고 또 사후 통보했어야 하는데 이러한 절차를 전혀 밟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내각회의 결정을 한 뒤, 내무대신이 1905년 2월15일 훈령으로 시마네(島根)현 지사에게 이 사실을 고시하라고 지시했으며, 시마네현 지사는 1905년 2월22일자의 ‘다케시마(竹島)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고시문을 시마네현 ‘현보(縣報)’에 조그맣게 게재했으며, 이 고시 사실 내용을 지방신문인 ‘산음신문(山陰新聞, 1905년 2월24일자)’이 조그맣게 보도했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고시(告示) 방법은 일본이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결정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에 사실상 비밀사항이었고 세계에도 알리지 않은 조처였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 수도 도쿄에는 주일본 한국공사관도 있고 한국인들도 있었으나, 시마네현에는 시마네현청에서 발행하는 ‘현보’나 그곳 지방신문인 ‘산음신문’을 즉각 면밀하게 읽고 독도를 일본이 ‘영토편입’을 결정한 사실을 알아내 서울의 한국정부에 보고할 만한 한국인이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Q 70 왜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사실을 한국정부와 세계 각국에게 ‘사실상의 비밀사항’으로 해두려고 그처럼 구차한 고시방법을 택했는가?

    A‘독도’가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토’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도의 일본 ‘영토편입’을 형식상 신청한 나카이도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해군성도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무주지’라고 주장했고, 외무성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를 설치하여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내무성은 ‘독도’는 ‘한국영토’인데 이 불모의 섬을 러·일전쟁 도중에 일본에 ‘영토편입’했다가 한국정부가 이를 알고 항의해오거나 또 세계 각국이 이를 알게 되면 일본은 한국영토를 침탈하기 위한 야욕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게 되어 득보다 손실이 클 것이라고 반대했던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무주지’라고 해서 일본에 ‘영토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도록 결정한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나 한국민들이 알게 되면, 이것은 한국 부속령을 ‘침탈’한 것이므로, 아무리 서울과 한반도가 일본군의 군사 점령하에 있다고 할지라도 항의문을 내거나 항의 외교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아직도 한국의 수도 서울에 각국 공사관이 주재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한국과 분쟁이 일어나면 서양 각국이 일본의 한국영토 침탈을 비판하게 되고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 침탈에 대한 의심을 강화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은 ‘독도’의 ‘영토편입’ 결정 사실을 숨기려 한 것이다.

    Q 71 ‘독도’를 일본에서 ‘다케시마(竹島)’라고 호칭한 것은 1905년 1, 2월부터인가?

    A그렇다. 독도를 임진왜란 후에는 ‘송도(松島)’라고 불렀으나, 해군성이 1882년경부터 울릉도에 ‘송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독도를 ‘리앙코르드島’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들은 ‘리앙코島’라고 약칭하여 부르다가, 1905년 2월부터 ‘다케시마’라는 호칭을 갖게 된 것이다. 원래 일본인들은 1880년 이전까지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는데, 1905년 2월 이후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호칭하도록 일본정부가 훈령했다.

    Q 72 일본정부는 그 후 러·일전쟁 도중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를 실제로 설치했는가?

    A설치했다. 일본 해군성은 ‘독도’ 망루 설치 작업을 1905년 7월25일 기공하고, 동년 8월19일 준공하여 준공한 날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독도 망루에 배치된 인원은 요원 4명과 고용인 2명 등 정원이 모두 6명이었다. 일본 해군은 또한 독도와 울릉도를 연결하는 해저전선을 1905년 10월8일 독도망루와 울릉도 망루 사이에 부설하였고, 독도와 일본 출운(出雲) 지역 송강(松江) 사이의 해저전선을 1905년 11월9일 설치 완료했다. 그 결과 일본 해군은 한국 동해안 죽변(竹邊)-울릉도-독도-일본 출운(出雲) 송강(松江)을 연결하는 해저통신망과 해상 감시망루를 설치했다.

    일본 해군은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조인되고 10월15일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전되어 해군 감시 망루가 필요없어지자, 10월24일 독도 망루를 철거했다.

    Q 73 일제가 해군성 주도로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한다는 내각회의 결정을 하여 침탈을 시도하고,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를 철거하는 등의 작업을 한 사실을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가?

    A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대한제국정부에 그런 사실을 조회 또는 통고하지 않았고, 일본 ‘관보’나 중앙 신문에도 보도하지 않았다. 일본은 겨우 시마네현의 관리용 ‘현보’와 지방신문에 고시하는 형식만 취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실효적 비밀조처’를 취했으니,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인들은 이를 알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이 한반도에 불법 상륙하여 한반도를 사실상 군사 점령하고 있었고, 모든 일을 군사상의 비밀로 처리했으므로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가 설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독도’ 주변에 일본 해저전선이 깔린 사실을 당시 대한제국 정부나 한국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점은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이나 국민은 1905년 말까지는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하는 내각회의 결정을 몰랐다. 그러므로 1905년에 나온 지도와 출판물에는 ‘독도’를 한국영토로 분류하여 기록한 것이 여러 점 나왔다. 예컨대 일본 도쿄의 최대 출판사 중 하나인 박문관(博文館)은 1905년 6월20일 ‘일로전쟁실기(日露戰爭實記)’라는 방대한 러·일전쟁 승전 기록문집을 냈는데, 그 제76편의 부록으로 1905년 6월 현재의 ‘한국전도(韓國全圖, 34.5×48㎝)’를 부록으로 내면서 ‘독도’를 한국영토로 분류하여 수록했다.

    Q 74 그러면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려고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한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A한국측이 일본정부의 ‘독도’ 침탈과 일본에 소위 ‘영토편입’한 사실을 처음 안 것은 1906년 3월28일이었다. 알게 된 과정은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정부에 조회해오거나 통보해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시마네현 은기도사(隱岐島司) 일행이 ‘독도(竹島)’를 시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서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자신들이 ‘독도’를 일본에 새로이 ‘영토편입’했고 그 관리자가 은기도사이기 때문에 새 영토를 시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울도군수를 방문하였다고 간접적으로 알려온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간접적으로 알린 그 방식과 시기다. 일본정부는 한국영토인 ‘독도’를 침탈하여 일본에 ‘영토편입’해버린 중대한 사실을 1905년 2월 당시에 조회 또는 통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06년 말에도 아직 엄연히 그 이름이 남아 있는 대한제국 중앙정부에 통보하지 않았고, 시마네현 은기도의 말단 지방관리의 간접적인 말을 통해 울도군수가 알도록 한 것이다. 일본정부의 이런 방식은 대한제국정부 영토(독도) 침탈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사건으로 처리하게 하고, 또 현지 지방관이 항의하는 경우에도 이를 일제 통감부가 사소한 일로 처리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대한제국 중앙정부에 알리는 것을 극력 회피했던 탓으로 해석된다.

    Q 75 일본측은 왜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사실을 구태여 1906년 3월 말을 택하여 대한제국 지방관이 알도록 누출했는가? 그 일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A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1906년 3월 말을 택한 것이다. 일제는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러·일전쟁을 10월15일 일본의 승리로 종결하자, 바로 무력으로 조선 궁궐을 에워싸고 위협하여 1905년 11월17일 그들이 초안한 ‘을사5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 조약 내용의 요점은 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이 한국 외교권을 행하고 ② 일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여 한국의 정치 일반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통감부가 한국 정치 일반을 감독한다는 것은 한국의 내정을 지휘 감독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한제국의 조약 체결권자인 황제 고종이 ‘을사조약’의 승인과 서명 날인을 끝까지 거절하여 국제법상 이 조약은 성립되지 않은 것인데도 일제는 무력으로 이를 강제 집행했다. 일제는 1905년 12월20일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했다. 이어서 대한제국 외부(외무부)가 1906년 1월17일 완전히 폐지되었다. 1906년 2월1일에는 서울에 일제 통감부가 실제로 설치되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고 사무를 시작했다. 이제 대한제국은 1906년 1월17일 외무기관마저 폐쇄되어 국제적 항의를 담당할 기관이 없어진 채, 1906년 2월1일부터는 내정도 일제 통감부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일본측은 이상과 같은 조처를 한 뒤 이런 시간표에 맞추어 1906년 3월28일 시마네현 은기도사라는 지방관을 통하여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사실을 누출하게 했다. 만일 울도군수 심흥택이 이것을 중앙정부에 보고하더라도 당시 대한제국 중앙정부는 일본 통감부의 지배하에 있고, 외부(외무부)는 완전 폐지되어 대한제국이 일본정부에 외교적 항의를 할 수 없었으므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진 일제 통감부가 일본정부에 항의해야 하는 상태였다. 이처럼 일본은 대한제국이 항의서조차 제출할 수 없도록 완전히 준비를 갖춘 뒤에, 1906년 3월 말을 택하여 일본이 독도를 침탈했다는 사실의 정보를 누출시킨 것이다.

    Q 76 울도군수 심흥택은 1906년 3월28일 울도군청을 방문한 일본 시마네현 은기도사 일행에게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했다는 정보를 듣자 어떻게 대응했는가?

    A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그들이 떠난 이튿날인 1906년 3월29일(음력 3월5일) 그의 직속 상관인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를 올렸다.

    심흥택의 보고에서 주목할 것은 “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 외양 백여리허에 있삽더니…”라고 하여 독도가 자기의 통치군(본군)인 울도군 소속임을 명확히 밝혀 항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심흥택은 ‘독도’가 ‘울도군’ 소속임을 명확히 하여 ‘대한제국 영토’이자 자기의 행정 책임군인 울도군에 속한 영토임을 천명한 것이다.

    심흥택은 그 다음에 일본인 관리 일행이 자기 관사를 찾아와서 “자운 독도가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고 하여 ‘자운(自云)’이라는 표현을 써서 ‘독도가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은 일본측의 일방적인 ‘억지주장’이라는 뜻을 담아서 그가 승복하지 않음을 명확히 나타냈다.

    Q 77 강원도관찰사는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받고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A강원도관찰사는 당시 공석이고 춘천군수 이명래(李明來)가 강원도관찰사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직속 상관인 내부대신과 의정부참정대신에게 심흥택의 보고를 논평 없이 충실하게 옮겨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다. 당시 강원도관찰사가 공석이어서 관찰사서리를 겸무한 춘천군수에게 보고가 도달되는 데 시간이 걸렸는지, 이명래가 내부대신과 의정부참정대신에게 보고서를 올린 일자는 1개월이 지난 1906년 4월29일이었다.

    Q 78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내부대신은 강원도관찰사서리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당시 대한제국 내부대신은 강원도관찰사서리에게서 일본이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유람하는 길에 토지면적과 인구를 기록해가는 것은 괴이함이 없다고 용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독도가 일본 속지라고 칭하여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이제 보고받은 바가 매우 아연실색할 일이다(遊覽道次에 地界戶口之錄去는 容或無怪어니와 獨島之稱云日本屬地는 必無其理니 今此所報가 甚涉訝然이라)”는 지령문을 써보내, 독도를 일본 속지라고 칭하여 운운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말이라고 단호히 부정하고 항의의 뜻을 명백히 표시했다.

    대한제국 내부대신의 지령문에 나타난 반응은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일본의 무리한 침섭에 경악해서 항론을 지령문으로 지시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항론으로 지령했다. 친일파 내부대신조차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 결정에는 단호히 ‘전혀 이치가 없는 일’이라고 항론을 편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Q 79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참정대신은 강원도관찰사서리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대한제국 참정대신도 일본이 한국영토인 독도를 이제는 일본 영지로 편입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올라온 보고를 다 읽었고 독도가 일본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에 속하나,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다시 조사하여 보고할 것(來報는 閱悉이고 獨島領地之說은 全屬無根하나 該島 형편과 日人 여하행동을 更爲査報할사)”이라고 지령했다.

    당시 대한제국 참정대신은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이었는데, 박제순도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일본정부의 주장과 조처에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전적으로 근거 없는 일에 속한 것”이라고 항론을 펴고,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의 그 후의 동태를 다시 조사 보고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Q 80 당시 여론은 어떠했는가? 당시 신문들은 일본의 독도 침탈, ‘영토편입’을 어떻게 보도하고 논평했는가?

    A당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대사령부와 통감부는 한국 신문에 대한 사전·사후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를 보도하고 논평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대표적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일본의 독도 침탈에 항의하고 이를 비판 보도했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1일자 잡보란에서 ‘無變不有’(變없지 아니하다; 變이 있다는 뜻)라는 제목으로 울도군수 심흥택이 내부에 보고한 보고서를 인용보도하면서 일본의 독도 침탈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선 “變이 있다”고 한 제목이다. 국민(독자)에게 ‘變’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 관원 일행이 본군(울도군)에 와서 본군에 소속해 있는 독도는 일본속지라고 자칭”했다는 대목이다.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인용하면서 “울도군 소속 한국속지인 독도를 일본 관원 일행이 일본속지로 자칭”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서 울도군에 속한 섬인데 일본관리가 일본 영토라고 자의로 칭했다고 비판 보도하여 항의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이어서 “독도를 일본속지라고 칭하여 말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어서 이번 보고한 바가 참으로 아연실색할 뿐이다”고 한 내부(내무부)의 지령문을 인용 보도하는 방법으로, 독도를 일본영토로 ‘영토편입’을 칭하여 운운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아연실색할 일이라고 일본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편 ‘황성신문’은 1906년 5월9일자 잡보란에서 제목의 활자 크기를 처음으로 평소보다 4배나 크게 해 보도함으로써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를 단호하게 부정하고 비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선 ‘울도군수가 내부에 보고’라는 관례적인 제목 크기의 4배에 달하는 특호(特號) 활자 크기다. 독자들이 갑작스러운 특호 활자 크기에 주목하여 먼저 읽게 해서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에는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인용하여 “본군(울도군) 소속 독도가 외양 백여리 밖에 있사온대 본월 4일에 일본인 관인 일행이 관사에 와서 자의로 말하기를 독도가 이제는 일본영지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한 부분을 비판한 사실이다.

    여기서 ‘황성신문’은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에 있는 ‘본군(울도군) 소속 독도’를 주목하게 해서 독도가 울도군에 속해 울도군수 심흥택의 행정을 받고 있는 ‘대한제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이어서 ‘황성신문’은 일본 관리 일행이 울도군수 관사를 찾아와서 “자의로 말하기를(自云) 독도가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한 부분을 보도하여 일본이 이제 막 독도를 침탈해서 일본영토로 만들고 있다고 폭로하고, ‘자의로 말하기를(自云)’이란 보고서 설명을 인용하여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의 부당성을 지적·비판했다. 결국 당시 일본군 헌병대사령부와 통감부의 삼엄한 검열제도 속에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를 간접적 방법으로 비판하고 항의한 것이다.

    Q 81 당시 대한제국 국민과 지식인들은 이 보도를 읽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1906년 당시에는 일제의 ‘을사5조약’ 강제집행과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국민이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이므로, 국민은 물론 일제의 독도 침탈 사건을 국권 침탈 시도에 대한 저항운동에 포함하여 전개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영토 침탈은 국권 침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기록에 나와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오하기문(梧下記聞)’과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들 수 있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울릉도 100리 밖에 한 속도(屬島)가 있어 독도라고 부르는데, 왜인이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다고 심사(審査)하여 갔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울릉도 100리 밖에 한 속도가 있어 독도라고 부르는데”라고 하여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임을 명확히 해서 한국 영토임을 밝히고, 이어서 “왜인이 이제 일본영지가 되었다고 조사해 갔다”고 기록해서 지금 막 일본측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고 있음을 폭로하고 비판한 것이다.

    황현은 또 ‘매천야록’에서 “울릉도의 바다에서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舊屬)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도가 그때까지는 울릉도에 구속한(예부터 속한) 섬”이라고 하여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확히 밝힌 점과, 이어서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했다고 하여 독도를 일본인들이 일본영토라고 ‘늑칭’했다고 비판한 점이다. ‘늑칭’은 ‘강제로 칭했다’, ‘억지로 칭했다’, ‘거짓으로 칭했다’ ‘부당하게 칭했다’ 등의 뜻이 모두 들어 있는 용어다. 즉 독도는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울릉도에 부속해온 한국 영토임이 명확하고, 독도를 이제 일본 영토라고 칭하는 것은 부당한 주장, 억지주장임을 황현은 명백하게 밝혀 기록한 것이다.

    Q 82 그러면 1906년 이후와 일제 강점하에서 ‘독도’는 어떠했는가?

    A대한제국 정부와 당시 한국 국민은, 대한제국 외부(외무부)가 1906년 1월17일에 이미 폐지되어버렸고, 일제 통감부가 한국 외교와 내정을 지휘 감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독도 침탈에 대하여 항의와 항론을 폈을 뿐 항의 외교문서를 일본정부와 국제사회에 제출할 통로와 기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강점하려 하고 있었고, 독도 침탈은 그 첫 작업이었다. 독도가 한국영토이지만 동쪽으로 일본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가장 먼저 침탈당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한반도 전체가 침탈당하는 위험을 대처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독도를 돌보지 못했다.

    Q 83 일제 강점기에 독도는 완전히 일본 시마네현의 부속 도서로 분류되었는가?

    A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명명하면서 형식상으로는 시마네현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그렇지 않아 조선 울릉도에 부속한 섬임을 알고 있는 일본인들은 독도를 실질적으로 조선에 부속한 섬으로 취급하거나, 또는 형식과 실제 모두에서 조선 부속령으로 취급한 경우가 더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도를 조선에 부속한 섬으로 형식과 실제 모두에서 취급한 문헌의 대표적 예로는 ①‘일본수로지’(일본 해군성 수로부, 1911년) 제6권 ②‘일본수로지’(일본 해국성 수로부, 1920년) 제10권의 상권 ③‘역사지리’(제55권 제6호)에 게재된 통세설호(桶細雪湖)의 논문 ‘일본해에 있는 죽도의 일선(日鮮)관계에 대하여’(1930년) ④지갈성(芝葛盛)의 ‘신편일본역사지도(新編日本歷史地圖)’(1930년) ⑤석미춘잉(釋尾春芿)의 ‘조선과 만주안내’(案內, 1935) ⑥‘지도구역일람도’(地圖區域一覽圖, 일본 육군참모본부, 1936)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자료들은 일본제국이 멸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한국이 일본의 영원한 식민지라고 생각했는지, 독도를 ‘죽도’라고 호칭하면서도 형식과 내용 설명에서 모두 조선 부속으로 기록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극성한 시기인 1936년에 간행된 일본 육군참모본부 육지측량부의 ‘지도구역일람도’ (1)는 주목을 요하는 지도다. 이 지도의 목적은 소위 ‘대일본제국’을 일본본주, 조선, 대만, 관동주, 화태(사할린), 천도열도, 남서제도, 소립원(小笠原)군도 등으로 원래의 지역별로 집단 분류한 것이다. 이 ‘지도구역일람도’에서는 ‘독도’(죽도)를 ‘조선’과 ‘일본본주’의 어느 쪽에 분류해 넣었는지가 매우 중요한데,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지도상에 ‘독도’를 일본본주에 넣을 공간이 매우 넓은데도 불구하고, 울릉도와 ‘독도’(죽도)를 함께 묶어서 조선구역에 분류해 넣고 독도의 우측에다 ‘조선구역’과 ‘일본본주 구역’을 구분하는 굵은 선을 그었다.

    이 ‘지도구역일람도’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제국이 영속하리라고 생각하던 1936년에 일본 육군성이 공식 발행한 지도이기 때문에 일제가 군사력으로 강제 병탄한 지역의 원래 주인을 판별하는 데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 자료다. 이 자료에서 ‘독도’가 ‘조선구역’에 분류되어 포함되면,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독도’의 원래 주인은 ‘조선’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육군성의 이 일본제국 지역구분지도는 ‘독도’(죽도)를 ‘조선구역’에 포함시켜 분류해서 ‘독도’의 원주인이 ‘조선’이었음을 극명하게 밝힌 것이다. 만일 ‘대일본제국’이 해체되어 일본 제국주의가 침탈한 지역이 원주인에 돌아가도록 판정하는 일이 외부에서 주어진다면, ‘독도’는 당연히 원주인인 ‘조선’에 반환되어야 함을 이 지도는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독도’의 원주인은 한국(조선)임을 알았고, 또 그렇게 표명한 것이다.

    Q 84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일본이 패전하면 침탈한 영토를 원주인에게 반환시키고 일본은 원래의 일본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할 정책을 갖고 있었는가?

    A그러한 정책을 갖고 있었다. 우선 1943년 11월20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영국 수상 처칠(Winston S. Churchill), 중국 총통 장개석(蔣介石) 등이 회합한 카이로 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카이로 선언’을 합의 발표했다.

    “각국 사절단은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작전을 협정했다. 3대 연합국은 해로·육로·공로(空路)에서 야만적인 적군에 대하여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했다. 이 압력은 이미 증대되고 있다.

    3대 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징벌하기 위하여 현재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바다. 위 연합국은 자국을 위해서 이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토확장의 의도도 없다.

    위 연합국의 목적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일본이 장악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박탈할 것과 아울러 만주·대만·팽호도(澎湖島) 등 일본이 중국인에게서 절취한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掠取)한 모든 다른 지역에서도 축출될 것이다.

    위의 3대국은 조선 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로워지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했다.

    이런 목적으로 위의 3대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중인 여러 연합국과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엄중하고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카이로선언’은 일본에게 반환받고 일본을 축출해야 할 지역으로 ①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일본이 장악 또는 점령한 태평양 안에 있는 모든 섬 ②1894∼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중국에게 절취한 만주·대만·팽호도 등 ③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모든 다른 지역 등이었다. 그리고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여기서 한국 영토는 ③의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모든 다른 지역”에 해당한다. 또한 그 시기의 상한은, 1894∼95년 청·일전쟁 때 일본이 중국에게서 절취한 영토를 반환 대상에 포함시킨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이 대한제국으로부터 1905년 2월 독도를 약취한 시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독도’도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취한 섬”으로서 한국에 반환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 것이다.

    Q 85 그러면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일본이 약취한 한반도와 ‘독도’는 연합국에 의해 어떻게 한국에 반환되었는가?

    A일본이 1945년 9월2일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 도쿄에 연합국 최고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 약칭 GHQ)가 설치되어 일본 통치를 담당하게 되자,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포츠담선언의 규정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연합국측은 즉각 한반도는 한국(주한 미군정)으로 이관했다. 문제는 일본영토로 규정한 “본주·북해도·구주·사국과 우리(연합국-인용자)가 결정하는 작은 섬들” 중에 인접국가들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을 원래의 다른 나라 주인의 것과 일본의 것을 구분하는 일에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드디어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수개월의 조사 뒤에 1946년 1월29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SCAPIN : Supreme Command Allied Powers Instruction) 제677호’로서 ‘약간의 주변 지역을 정치·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관한 각서’를 발표하고 집행했다. 이 SCAPIN 제677호의 제3조에서 ‘독도’(Liancourt Rocks, 竹島)는 일본영토에서 분리 제외되었는데 그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지령의 목적을 위하여 일본은 일본의 4개 本島(北海島·本州·九州·四國)와 약 1000개의 더 작은 인접 섬들을 포함한다고 정의된다.(1000개의 작은 인접 섬들에) 포함되는 것은 對馬島 및 북위 30도 이북의 琉球(南西)諸島다. 그리고 제외되는 것은 ①鬱陵島·리앙코르드岩(Liancourt Rocks ; 獨島, 竹島)·濟州島, ②북위 30도 이남의 琉球(南西)諸島(口之島 포함)·伊豆·南方·小笠原 및 火山(琉黃)群島와 大東諸島·鳥島·南鳥島·中之鳥島를 포함한 기타 모든 외부 태평양제도, ③쿠릴(千島)列島·齒舞群島(小晶·勇留·秋勇留·志癸·多樂島 등 포함)·色丹島 등이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이 SCAPIN 제677호를 ‘일본의 정의(the definition of Japan)’라고 표현했다.

    SCAPIN 제677호 제3조에서 주목할 것은 그 ①②③의 집단 분류다. ①집단에는 울릉도·독도·제주도를 순서대로 범주화해서 넣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분리되어 한국에 반환되는 섬들임은 울릉도와 제주도에서 명백하다. 즉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29일 SCAPIN 제677호로서 ‘독도’(리앙코르드 섬, 죽도)를 원래의 주인인 한국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에서 분리한 것이다.

    이것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수개월간 조사한 뒤 결정하여 공표한 것이었고,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당시 국제법상의 합법적 기관이었으므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독도’를 원주인인 한국(당시 미군정)에 반환하여 한국영토로 결정한 것은 국제법상 효력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SCAPIN 제677호의 부속 지도에서도 극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미군정으로부터 한반도와 독도 등을 인수받아 이를 한국영토로 하였고, 한국의 독도 영유는 1946년 1월29일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재확인된 것이었으며, 1948년 8월15일부터 동시에 실효적 지배를 다시 하게 된 것이었다.

    Q 86 일본정부는 그 후 SCAPIN 제677호는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최종결정이 아니므로 이때 ‘독도’(죽도)를 일본에서 최종 분리했거나 한국에 최종 반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항의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A일본정부는 ‘독도 영유권 논쟁’을 일으킨 직후인 1952년 4월25일자로 한국정부에 보내온 일본측 구술서에서, SCAPIN 제677호 제6조에 “이 지령 가운데 어떠한 것도 포츠담선언 제8조에 언급된 여러 작은 섬들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시한 것은 아니다”고 한 조항을 들어서 이것이 일본 영토를 최종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SCAPIN 제677호에서 강조된 것은 각각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복잡 미묘한 연합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다른 연합국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것이 ‘최종적 결정’이 아니라 앞으로 필요하면 수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필요한 수정을 가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SCAPIN 제677호 제5조에서 “이 지령에 포함된 ‘일본의 정의(the definition of Japan)’는 그에 관하여 다른 특정한 지령이 없는 한, 또한 본 연합국 최고사령부에서 발하는 다른 모든 지령·각서·명령에 적용된다”고 하여, SCAPIN 제677호의 일본 영토 정의에 수정을 가할 때에는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반드시 특정한 다른 번호의 SCAPIN(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을 발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한 SCAPIN 제677호의 규정은 ‘일본의 정의’가 미래에도 적용됨을 명백히 밝혔다.

    즉 SCAPIN 제677호 규정을 ‘독도’에 적용하면, 제3조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분리하여 한국영토로 울릉도와 제주도와 함께 반환하되, 제5조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분리해 한국영토로 반환하는 데 수정을 가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다른 번호의 특정한 지령을 발해야 수정할 수 있다고 하고, 제6조에서는 이러한 (제5조의) 전제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분리해 한국으로 반환하는 것은 연합국 정책의 ‘최종적 결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독도’를 일본정부의 주장처럼 일본영토로 편입하려면 반드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다른 특정한 (따라서 다른 번호의) SCAPIN을 발표하여 “한국에 반환했던 독도를 이번에는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요지의 지령문이 발표되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Q 87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그 후 SCAPIN 제677호를 수정하여 한국영토로 반환한 ‘독도’를 일본 영토로 반환한다는 식의 다른 특정한 SCAPIN을 발표했는가?

    A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29일 SCAPIN 제677호를 발표하여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정치·행정상 분리해서 한국에 반환한 이후 1952년 해체될 때까지 ‘독도’를 일본영토로 귀속시킨다는 내용의 다른 특정한 SCAPIN을 발표한 일이 없다. 따라서 독도는 국제법상으로 1946년 1월29일 SCAPIN 제677호에 의해 한국 영토로 재확인되어, 오늘날까지 국제법상의 합법적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독도’에 관련하여 발표한 SCAPIN이 하나 더 있는데, 그 내용은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를 더욱 보장하는 것이었다.

    Q 88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를 더욱 보장하는 또 하나의 SCAPIN은 어떤 것인가? 또 그것과 SCAPIN 제677호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ASCAPIN(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1033호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SCAPIN 제1033호 제3조에서 ‘일본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 구역’(통칭 맥아더 라인)을 설정했는데, 그 b항에서 “일본인의 선박 및 승무원은 금후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있는 리앙코르드岩(독도, 죽도…인용자)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하며, 또한 동도(同島)에 어떠한 접근도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여, 일본인의 독도 접근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것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독도’와 그 영해, 근접수역을 한국(당시 미군정)의 영토와 영해로 재확인하고 일본인이 독도에게 접근하는 것은 물론이요, 독도 주변 12해리 영해와 근접수역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금지하여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거듭 명확히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제법상의 합법기관으로서의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SCAPIN 제677호와 제1033호에 의하여 ‘독도’가 한국(당시 미군정) 영토이고 일본영토가 아님을 명확히 결정하고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이 미군정으로부터 독도를 다른 한반도 영토와 함께 인수, 접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는 SCAPIN 제677호와 SCAPIN 제1033호에 의하여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한국영토’임을 명확하게 재확인받은 것이었다.

    Q 89 이 무렵에 미군이 ‘독도’를 미 공군의 연습장으로 사용했다가 울릉도 어부를 다수 폭사시킨 일이 있었고, 일본측은 미 공군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에 미공군 연습장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었는가?

    A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6월30일 미국 공군기가 독도 부근에서 폭격 연습을 실시했는데, 독도에 출어중이던 한국 어민 30여 명이 희생된 불상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독도를 포함한 한반도가 주한 미군정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했다는 방증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일본측 주장은 전혀 부당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후인 1950년 4월25일 미국 제5공군에 이를 조회하여 항의했다. 미국 제5공군에게서 같은해 5월4일자로 “당시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었으며, 또 독도는 극동 공군의 연습목표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요지의 회답을 받았다. 그 후 한국전쟁 기간에 독도가 미·일 합동위원회에 의하여 미국 공군의 연습기지로 선정되었다는 정보가 한국에 입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미 공군에 항의했는데, 미국 공군사령관은 1953년 2월27일자로 ‘독도’는 미국 공군을 위한 연습기지에서 제외되었다는 공식 회답을 대한민국 정부에 보내왔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 이후 ‘독도’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해서 미국 공군사령부와 항의문서를 교환했으며, 미국 공군사령부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여 이에 회답하고 승복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Q 90 일본 정부는 1951년 9월8일 미국을 비롯한 48개 연합국과 일본이 서명한 ‘대(對)일본 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했는데, 이 표기 부문에 ‘독도’가 포함되어 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는데, 이 문제는 어떠한가? 일본 정부의 주장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A전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연합국측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1946년 1월29일 SCAPIN(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에 의해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여 한국에 반환하면서, 제5조에서 이 결정을 수정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연합국(최고사령부)이 다른 특정한 지령을 발해야 한다고 명백히 했다. 이를 ‘독도’의 경우에 적용하면, 만일 연합국이 SCAPIN 제677호의 결정을 수정해서 예컨대 “일본에서 제외하여 한국에 반환했던 독도를 수정하여 일본에 부속시킨다”는 ‘수정’을 가하고자 할 때는 연합국측이 다른 특정한 지령을 발하거나 그에 해당하는 명문 규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52년 해체되고 일본이 재독립할 때까지 다른 특정의 지령을 발표하지 않았으므로 ‘독도’는 여전히 연합국측도 한국 영토로 인정하여 국제법이 보장하는 한국 영토인 것이다. 일본측은 이를 잘 알고 1951년 ‘대일본강화조약’ 초안 작성 때 맹렬한 로비를 전개하여 한 때는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고 명문규정을 초안하는 데까지 성공했다가 최종단계에서 연합국측이 이를 삭제하여 다른 특정의 SCAPIN에 해당하는 연합국측의 명문 규정에 의한 ‘수정’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본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의 명문 규정이 없는 한 연합국측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한 것이며, 일본은 국제법상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1951년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의 조약문은 연합국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인정한 것이 아니며, 도리어 반사적으로 SCAPIN 제677호가 유효하여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계속 인정한 것이다.

    Q 91 연합국측은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SCAPIN 제677호로 ‘독도’를 한국영토로 판정했는데, 왜 1951년의 ‘대일본 강화조약’에서는 ‘독도’를 누락시켰는가?

    A처음에는 ‘독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이 주도하여 1947년 3월20일자로 성안한 제1차 초안에서는 “일본은 한국(한반도…인용자)의 제주도·거문도·울릉도·독도(리앙코르드岩, 죽도)를 포함하여 한국 연안의 모든 작은 섬에 대한 권리 및 권원을 포기한다”고 하여 ‘독도’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초안(1947년 8월5일 성안), 제3차 초안(1948년 1월2일 성안), 제4차 초안(1949년 10월13일 성안), 제5차 초안(1949년 11월2일 성안)까지는 ‘독도’가 명문으로 기록되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6차 초안(1949년 12월29일 성안)부터는 ‘독도’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Q 92 어떻게 해서 연합국측의 ‘대일본 강화조약’ 제5차 초안까지는 ‘독도’의 이름이 있다가 제6차 초안부터는 ‘독도’의 명칭이 빠진 것인가?

    A일본측의 맹렬한 로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측은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 제5차 초안의 정보를 입수하자 당시 일본정부 고문인 시볼트(Sebald)를 내세워 맹렬히 로비했다. ‘대일본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제외하고 일본영토에 포함시키도록 명문 규정을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연합국(최고사령부)이 1946년 1월29일 발한 SCAPIN(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의 ‘수정’을 요구한 로비였다.

    시볼트는 1949년 11월14일 미 국무부에 ‘리앙코르드岩(독도)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시볼트는 이어서 서면으로 다음과 같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일본이 전에 영유하고 있던 한국 쪽으로 위치한 섬들의 처리와 관련하여 리앙코르드岩(독도, 죽도)을 제3조에서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명시할 것을 건의한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 되었으며,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섬이 한국 연안에서 떨어진 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안보적 측면에서 이 섬에 기상과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 이익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위의 시볼트의 의견서에서 주목할 것은 독도를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 제3조에서 일본영토에 속하는 것으로 명기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을 뿐 아니라, 이를 관철하기 위해 교활하게도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시켜 주면 이 섬에 미군의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고 강조해서, 미국 정치가들이 중시하는 국가이익에 호소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일본인 로비스트들이 배후에서 교사한 교활성이라고 볼 수 있다.

    시볼트의 로비는 즉각 효과를 나타내, 미 국무부는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 제6차 초안(1949년 12월29일 성안) 제3조의 일본영토를 표시한 조항에다가 ‘독도’를 일본영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 주석에는 “독도(죽도)는 1905년 일본에 의하여 정식으로, 명백하게 한국으로부터 항의를 받음이 없이, 영토로 주장되고 시마네현의 오키지청(支廳) 관할하에 두었다”고 설명했다. 제7차 초안(1950년 8월9일 성안), 제8차 초안(1950년 9월14일 성안) 및 제9차 초안(1951년 3월23일 성안)에서는 독도(죽도)가 일본영토에 포함되어 표기되고, 한국영토 조항에서는 교묘한 방법으로 눈에 띄지 않게 지워졌다. 미국측을 향한 일본측 로비의 영향으로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에서 한국영토인 독도는 일본영토에 포함되어 표기될 절박한 위험에 처한 것이었다.

    Q 93 연합국의 ‘대(對)일본 강화조약’ 제 6∼9차 초안에서 ‘독도’를 일본영토에 포함하여 일본영토로 표시하려는 일본측의 활동과 이에 동조한 미국인들의 활동은 어떻게 저지되었는가? 당시 대한민국 외무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적극 활동했는가?

    A다른 연합국이 미국 ‘수정안’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로비로 ‘독도’를 일본영토에 넣어 표기하려는 미국(및 일본) 시도는 저지되었다.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은 미국만이 아니라 다른 연합국도 초안을 작성할 수 있으며, 연합국 48개국의 동의 서명을 받아야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 8차 초안(독도를 일본 영토로 ‘수정’ 표시)을 보고 호주 및 영국이 이에 대해 질문하자 미국은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해석한다”는 답변서를 보냈지만 두 나라는 미국의 ‘수정’에 동의하는 문서를 보내오지 않았다. 또 뉴질랜드와 영국은 독도를 한국영토로 보는 견해를 우회적으로 표시하면서 일본 주변에 있는 어떠한 섬도 주권 분쟁 소지를 남겨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미국의 ‘수정’ 제안과 설명에 동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독자적인 ‘대일본 강화조약’ 초안을 여러 차례 만들었다.

    그리하여 결국 미국과 영국의 합동초안(1951년 5월3일 성안)에서, 독도를 일본영토 조항에도 한국영토 조항에도 넣지 않으면서, ‘독도’라는 이름을 아예 연합국 ‘대일본 강화조약’ 모두에서 뺀 초안을 만들어 합의 서명한 것이다. 이 사이에 대한민국 외무부는 관련 정보를 얻지 못한 탓인지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활동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SCAPIN 제677조 제5항에 따라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수정’하여 명기해야만 문제가 발생한다. ‘독도’ 이름을 일본영토에 넣어 명기하지 못하면 국제법상으로 ‘독도’는 SCAPIN 제677조에 따라 여전히 한국영토로 재확인되는 것이다. 일본 로비가 실패하고 영국·호주·뉴질랜드가 미국 ‘수정안’에 대한 동의를 미룬 것은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에 반사 이익을 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독립국가가 되고 같은해 12월12일에는 국제연합(UN)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해, 이미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독도를 영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독도에 대한 외무부의 소극적 정책과 무능무위로 말미암아,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기록한 연합국측의 ‘대일본 강화조약’ 초안과 제1~5차 초안을 끝까지 수호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당시 외무부의 소극적 정책과 무능무위로 독도를 빼앗길 뻔했었다.

    Q 94 일본정부는 1951년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에 돌려준 영토는 1910년 8월 소위 ‘합병조약’ 때 점령한 영토이고 그 이전인 1905년에 영토편입한 곳은 포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데….

    A전혀 성립하지 않는 주장이다.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1894∼95년에 빼앗은 대만과 팽호도를 중국에 반환하고, ‘독도’보다 10개월 후인 1905년 11월에 빼앗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사할린을 러시아에 돌려주었음을 재확인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만일 1905년 2월 ‘독도’를 빼앗기 10년 전인 1895년에 일본이 “폭력과 야욕으로 약취한” 한국의 어느 섬이 있었다면 ‘독도’뿐만 아니라 1895년에 약취한 그 섬도 반환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1905년 2월에 일본이 “폭력과 야욕으로 약취한” 독도는 당연히 한국에 돌려주어야 하고, 그것은 1946년 1월29일 SCAPIN 제677호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Q 95 일본정부는 국제법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재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 1월28일 ‘독도’(죽도)는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영유권 논쟁’을 걸어왔다. 한국정부가 일본 주장을 일축하자, 일본정부는 1954년 9월 ‘독도문제’를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는데, 사실인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면 일본은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인가?

    A일본정부가 1952년 1월28일 ‘독도 영유권 논쟁’을 시작한 것은 일본정부가 대한민국 국민과 한국정부에 도전한 중대한 실책이었다.

    일본정부는 외교문서상의 논쟁을 계속해서 걸어오다가 한국정부에 보낸 1954년 9월25일자 구술서에서 ‘독도’(죽도) 문제는 국제법의 기본 원리 해석을 포함한 ‘영유권 분쟁’이므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그 최종결정을 위임하자고 제안해왔다. 물론 이때 일본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영유권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한국을 제소하여 위임했다.

    국제사법재판은 국내법과는 달리 상대국가가 위임을 승락하여 응소하지 않으면 안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4년 10월28일자로 일본정부에 보낸 구술서에서, 대한민국이 ‘독도 영유권’을 갖고 있음은 논란 여지가 없다면서 일본정부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여 응소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당시 일본정부가 마치 독도 영유권을 가진 것처럼 전제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독도 영유권 분쟁’을 만들어내 비록 잠시라도 한국과 대등한 입지에 서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는 ‘울릉도’ 부속도서로서 ‘울릉도’가 한국영토임과 같이 ‘독도’도 한국영토이며, 이 사실은 SCAPIN 제677호가 보장해 주었다고 판단했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해 오는 것은 ‘논쟁’을 위한 ‘독도 영유권 논쟁’이지, ‘독도 영유권(영토) 분쟁’은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한국정부의 이런 입장은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국제법상의 합법적 기구인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SCAPIN 제677호로 이미 1946년에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일본영토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에 반환했으므로, 국제법상으로 ‘독도’와 울릉도는 명백하게 한국영토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독도나 울릉도를 일본영토라고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도 한국은 이에 응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현재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15인 가운데 1인은 일본인 판사다. 일본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 운영비용의 큰 몫을 내고 있고, 로비 활동에 관한 한 세계 최강이라는 자신이 있다. 그러므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진실’이 대한민국 편에 있다고 할지라도, 최종 승리는 일본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것으로 관찰된다.

    Q 96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한국의 ‘독도’ 영유권은 손상받지 않았는가? 이때 ‘평화선’이 철폐되었는데….

    A1965년의 한·일 기본협정은 한국이 권리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채 체결된 의혹 투성이 조약이다. 앞으로 정밀하고 방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대해 확고부동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해 한·일회담에서 다루는 것조차 강력히 반대했고,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하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온갖 궤변들이 흘러나왔다.

    당시 동해의 어업 실태는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우월한 장비를 갖추어 동해를 휩쓸고 다녔으므로 ‘평화선’은 동쪽으로는 ‘독도’와 일본 ‘오키도’ 사이에 그어져 어족자원 보호에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또 대한민국 정부는 ‘평화선’을 넘어 오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여 처벌하고 있었으므로, ‘독도’와 일본 ‘오키도’ 사이에 그어진 평화선은 ‘독도’를 지키는데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65년 ‘평화선’ 철폐는 일본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형성했다. 장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 어선들은 한국영해인 연안 12마일 지점까지 들어와 고기잡이를 해가고 반면에 한국 어선들은 어장을 상실한 채 열악한 장비로 일본 어선들과 개방 경쟁을 했다. 이러한 상태는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어선 장비를 현대화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와 그 영해 12해리를 굳게 지키고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단호하게 반박하여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직 일본정부와 의회는 주기적으로 ‘독도 문제’를 꺼내어 의회가 정부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거론했다. 일본정부는 “죽도(독도)는 일본영토라는 일본정부의 입장엔 변함이 없다”고 응답하여 속기록에 기록하고,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정기적으로 일년에 1, 2회 독도 주위를 순시하여 돌아가서 보고서를 제출하여 다음을 위한 자료를 축적하고 있었다.

    Q 97 그러면 일본정부가 다시 독도 문제에 대해 공격적 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유엔 신(新)해양법’을 채택 적용한 1996년부터인가? 이때 왜 일본은 독도 침탈에 대해 강한 의지를 표시하고 공격적 외교정책과 해양정책을 벌였는가? 1998년의 한·일어업협정 일방적 폐기와 1999년의 신 한·일어업협정 체결에서 ‘독도문제’는 어떻게 취급되었는가?

    A유엔 신해양법은 1994년에 발효하게 되었는데, 그 특징은 이 신해양법을 채택하는 나라는 200해리 ‘배타적 경제전관 수역’(EEZ)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1995년에 이 유엔 신해양법 채택 의사를 분명히 발표하고 그해 총선거에서 1개 군소정당을 제외하고는 집권당을 비롯하여 대규모 보수정당들이 모두 ‘다케시마(독도) 탈환’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자민당과 자유당도 그러한 정당이었으며,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일본정부는 1996년 1월 유엔 신해양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여 동해쪽은 ‘독도’(죽도)를 일본 EEZ로 잡기로 한 뒤 국회로 넘겼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1996년 2월에도 일본 외상이 “독도(죽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은 독도에서 철수하고 부착한 시설물을 즉각 철수하라”고 내외신 기자들을 불러 성명하고, 주일본 한국대사를 외무성에 초처하여 이를 강경하게 요구했다. 일본 국회는 최종적으로 1996년 5월 유엔 신해양법을 채택하여 200해리 경제전관수역(EEZ)을 설정키로 결정했으며 동해 쪽의 일본 EEZ 기점을 ‘독도’(죽도)로 취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한국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EEZ의 기점으로 삼은 것이었다.

    또한 일본정부는 1997년 ‘10대 외교지침’의 하나로 ‘독도 탈환’을 설정하여 맹렬한 공격적 외교와 로비를 벌였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대한민국 외무부는 일본측이 한국영토 ‘독도’를 일본 EEZ 기점으로 삼은 1년2개월 후인 1997년 7월 말에 ‘독도’ 기점을 취하지 않고 한국 EEZ 기점을 ‘울릉도’로 삼는다고 발표하여 국민을 경악케 했다.

    일본정부는 이후 한국이 외환위기 때문에 1997년 12월3일 IMF 경제관리 체제에 들어가자,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한·일 어업협정’을 사전협의도 없이 1998년 1월23일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전시에 적대국가에 대해서나 하는 방자한 외교 만행을 우호국인 대한민국에 저지른 것이었다. 이로써 1년 후인 1999년 1월23일 이후에는 양국간의 어업협정 효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1999년 1월22일까지 신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거나 일반 국제법 하의 어업을 하거나 양자 택일을 해야 할 형편에 빠졌다.

    신 한·일어업협정을 위한 한·일 실무자 회의가 계속되고, 일본측은 ‘독도’ 포함한 ‘중간수역’(한·일 공동관리수역)을 만들자는 한 새 협정안을 내놓았다. 협의 끝에 양국 연안에서 35해리를 중간수역의 좌변과 우변으로 하는 ‘중간수역’을 설정하여 독도는 명칭 표시 없이 ‘중간수역’ 안에 포함시킨 안이 합의되어, 신 한·일어업협정이 1998년 11월28일 일본 가고시마에서 양국 외무장관 사이에 서명되었고 1999년 1월22일 양국 정부에 의해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신 한·일어업협정에서 울릉도는 한국 EEZ 안에 포함되었으나 울릉도의 부속도서 ‘독도’는 울릉도 수역(한국 EEZ)에서 떨어져 다른 수역인 ‘중간수역’(한·일 공동관리수역)에 ‘독도’란 표시 없이 포함된 것이었다.

    Q 98 신 한·일어업협정에서 한국측 관계자들은 신 한·일어업협정은 고기잡이에만 관련된 것이지 영토나 EEZ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독도영유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인가? 또 관계자들은 신 한·일어업협정은 제15조에서 한국 독도영유권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조항을 기록하여 넣었다는데, 사실인가? 신 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가 ‘중간수역’에 포함된 것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조금이라도 훼손한 것인가? 관련자들은 ‘중간수역’을 공해 성격이라고 해석하는데 일본측도 그렇게 보는가?

    A일반적으로 어업협정은 고기잡이에만 관련되고 영토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이번 1999년의 신 한·일어업협정은 제1조에서 “이 협정은 대한민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과 일본측의 배타적경제수역(이하 ‘협정수역’이라 한다)에 적용한다”고 규정하여 EEZ와 그를 통한 영토 문제에 영향을 끼치게 한 실책을 범했다. 이번 신 한·일어업협정은 고기잡이만이 아니라 EEZ의 기점·기선문제를 통해 영토 문제를 관련시킨 것이 실책이다. 협정 관계자들은 자기의 실책을 얼버무리기 위해 고기잡이에 국한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 한·일어업협정 제15조는 협정이 한국의 기존 독도 영유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어업에 관한 사항 이외의 국제법상 문제에 관한 각 체약국의 입장(밑줄--인용자)을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독도’에 적용하면, 일본 ‘입장’은 ‘독도’는 일본 영토이고 그 12해리는 일본 영해라는 입장인데, 이 어업협정은 이를 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 입장은 ‘독도’는 한국 영토이고 그 12해리는 한국영해라는 입장인데, 이 어업 협정은 이를 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 입장은 ‘진실’이고 일본 입장은 ‘주장’에 불과했던 것인데, 신 한·일어업협정이 이를 ‘동격’으로 존중한 것이다. 협정 한국측 관계자들은 일본 입장이 한국과 동등하게 올라와 일본 이익이 더 보장된 것임을 알아차려야 했는데, 일본 농간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엔 신해양법 121조 3항에서는 “인간이 거주할 수 없거나 독자적인 경제 활동을 유지할 수 없는 암석은 배타적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가지지 아니한다(Rocks which cannot sustain human habitation or economic life of their own shall have no exclusive zone or continental shelf.)”고 규정했다. 여기서는 동사(動詞)가 현재형(cannot sustain)이므로 ‘현재 또는 미래에’ 인간이 거주할 수 없거나 독자적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암석이 EEZ 기점이 될 수 없을 뿐이지 ‘현재 또는 미래에’ 인간이 살 수 있거나 독자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면 EEZ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측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태평양 쪽에서는 독도의 10분의 1도 안되는 작은 암초 위에도 철판을 깔고 작은 등대를 세운 뒤 일본 EEZ 기점으로 삼아 방대한 일본 EEZ를 설정했다. 1996년 5월 일본은 동해 쪽으로는 한국영토인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EEZ 기점으로 삼는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중차대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한국영토인 독도를 일본이 자국 EEZ 기점으로 취한 것을 즉각 비판하고, ‘독도’를 한국 EEZ 기점으로 선포하는 것이 당연했다. 국민과 전문가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무부는 우물거리더니 그로부터 1년2개월 후인 1997년 7월 말에 뜻밖에도 한국 EEZ 기점을 ‘울릉도’로 취한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한국영토인 ‘독도’를 일본이 EEZ 기점으로 취하고, 한국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한국 EEZ의 기점으로 삼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대한민국 외무부의 대실책이었다.

    한국이 외환위기로 1997년 12월3일 IMF관리체제에 들어가자 일본정부는 이 시기를 악용하여 1998년 1월23일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1년 후에는 파기 효력이 발생하므로, 한국과 일본은 신 한·일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실무회담을 시작했다. 일본측은 일본 EEZ 획정선 주장(울릉도와 독도 사이)을 서변으로 하고 한국 EEZ 획정선 주장(울릉도와 일본 오키도 사이)을 동변으로 하여 독도를 그 안에 넣은 ‘한·일 공동관리수역’(잠정조치수역)을 제의했다. 한국측은 이를 수정하여 해안으로부터 각각 35해리 이내를 각각 EEZ로 간주하여 서변은 동경 131도 40분, 동변은 동경 135도 30분을 구획 기준선으로 하고 ‘독도’를 그 안에 넣은 ‘중간수역’을 설정하자고 제안하여 합의되었다.

    신 한·일어업협정문에는 ‘중간수역’은 명칭없이 경도와 위도로 표시해, 그 안에 들어간 ‘독도’에는 어떠한 표시도 하지 않았다. 신 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를 한국영토라는 표시없이 ‘중간수역’에 넣은 결과는 처음 지적한 바와 같이 ①독도가 울릉도 수역에서 떨어져 질적으로 전혀 다른 ‘중간수역’으로 들어가 버렸고 ②중간수역 속의 ‘독도’를 일본은 자국 EEZ 기점으로 취했는데 한국은 자국 EEZ 기점으로 삼지 않았으며 ③불필요한 중간수역을 만들어서 그 좌변인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선에 합의해서 일본의 EEZ 주장선을 한국이 수용 반영한 것이 아닌지 오해 소지를 만들었고 ④중간수역에 들어가 있는 ‘독도’에 대해 한국 영유 표시도 하지 않아, 일본은 ‘독도’와 그 영해를 일본영토·영해라고 주장, 해석하고 한국은 변함없는 한국영토·영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⑤‘중간수역’에 대해 명칭과 성격 합의도 없이 경도·위도로만 표시한 뒤 한국 외무부는 국민에게 ‘중간수역’은 공해(公海) 성격을 가진 수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일본정부는 ‘한·일 공동관리수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뺏기지는 않았지만 크게 훼손당했다.

    Q 99 최근 일본정부는 일본국민 호적을 독도에 옮겨 등재해 주었고, 또 육·해·공군 자위대가 이오지마(硫黃島)에서 독도 상륙 접수 연습을 했다는 보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A국내외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측은 최근 일본인 호적을 ‘독도’에 옮겨주는 행정조치를 실행했다. 호적 이전 신청까지는 일본 민간인 행동이지만, 이것을 접수하여 등재한 행정행위는 일본정부의 행동이다. 이는 후에 일본의 독도 행정 증거 실례에 사용하려고 준비하는 행동으로, 대한민국의 독도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다. 또한 일본 육·해·공군 자위대가 최근 독도 접수 훈련을 비밀리에 이오지마에서 실행했다는 사실을 일본 신문이 특종으로 폭로 보도했는데, 이것은 일본정부가 독도를 ‘침탈’하려는 완강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일본은 최근 10여년간 한국 정부의 독도 수호 정책이 매우 소극적이라 보고 한국 외무부의 독도 관련 외교관을 접촉하며 독도 ‘침탈’에 자신감을 갖고 중장기 전략을 세워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측이 어떠한 공격적 정책을 실행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적절한 독도 수호 대책을 세워 실행하지 아니하면, 일본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될 때 일거에 ‘평화적’ 방법, 또는 ‘군사적’ 방법, 또는 두 방법을 섞어 ‘독도’를 ‘침탈’하려 노리고 있음은 명백하게 관측된다. 일본이 만일 독도에 호적을 옮긴 일본인을 본적지인 ‘독도’의 동·서 어느 섬에 상륙시키고, 일본 자위대가 이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들이 상륙한 ‘독도’의 한국경찰대가 없는 동·서 어느 섬에 상륙하면, ‘실효적 점유’도 양분되는 것이다. 한·일 양국이 무력 충돌이라도 하게 되면 두 우호국가의 무력 충돌을 원하지 않는 미국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판결받으라고 압력을 넣을 것이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는 일본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또한 무력 사용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1998년에 미·일방위조약 40개 가이드라인에 합의하여 ‘한반도 유사시’에는 한반도의 동해·남해·서해·동중국해에서 미 해군을 도와 일본 해군이 해상경찰권을 갖고 작전할 수 있도록 미국측 동의를 얻었다. 일본은 어쩌면 이때를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여 ‘독도’를 무력으로 ‘접수’(침탈)하려고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일본은 공격 외교에 한국 외무부가 후퇴하는 공간을 모두 확보하여 기정사실화해서 국제사회에 일본의 강렬한 ‘독도 영유 국가의지’를 알리고, 한국 외무부의 소극적 대응이나 무능무책을 마치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문제가 있어서 대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알리려고 획책하고 있다.

    Q 100 그러면 대한민국은 자기의 영토인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어떠한 대책을 세워 집행해야 하는가? 우선 신 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영유권을 훼손당한 부분은 어떻게 복원해야 하는가? 앞으로 ‘독도’를 수호·보전하기 위하여 어떤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 실행해야 하는가?

    A신 한·일어업협정은 3년간 유효한 것으로서 1999년 1월23일부터 발효하여 2002년 1월22일에 끝난다. 한국은 2002년 1월23일자로 이를 파기하거나 재개정을 선언할 수 있다. 신 한·일어업협정을 다시 개정하기 위한 준비를 올해부터는 모든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다음 사항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의 EEZ 기점이 ‘독도’라고 시급히 선언해야 한다. 독도는 과거에 우리나라 사람 세 가구가 상주한 역사가 있고, 현재와 미래에 얼마든지 사람이 거주할 수 있으며, 독자적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작은 섬(ilets)이다. 독도는 200해리 배타적 경제전관수역의 기점이 되기에 충분한 섬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새로이 한국 EEZ 기점을 ‘독도’라고 선포하고, ‘울릉도’ 기점은 취소해야 한다. 그리하여 ‘독도’가 생산하는 200해리 전관수역의 생산력을 인정하고 ‘독도’를 수호·보전하는 적극적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머지않아 중간수역을 부인하고 EEZ를 획정하기 위한 한국·일본·북한·러시아 관계국 회담이 열릴 터인데, 대한민국 정부가 ‘독도’를 한국 EEZ 기점으로 선포하는 것은 가장 시급한 일이다.

    둘째, ‘중간수역’을 하루속히 폐기 수정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 외무부는 ‘중간수역’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이를 ‘공해(公海)적 성격’의 수역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측은 이를 ‘잠정조치수역’이라 부르고 ‘한·일 공동관리’ 성격 수역이라고 설명한다. ‘잠정조치수역’이란 국제법상으로 그 수역안에 ‘영토분쟁’이 있어서 EEZ 획정이 어려울 때 잠정적으로 설정하는 수역이라고 되어 있다. 정작 신 한·일어업협정의 원문에는 이 중간 수역 명칭도 없고 성격 규정도 없으며, 경도와 위도 상 위치만 표시되어 있다. ‘독도’를 이러한 상태의 ‘중간수역’에 넣어 놓고서도 한국영토임을 내비치는 어떠한 표시도 없이, 한국측은 ‘독도’와 그 12해리 영해는 한국영토와 영해라고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중간수역’을 ‘공해적 성격’으로 고수해야 하고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굳혀서는 안되며, 만일 힘겨우면 러시아·북한·미국·중국 등 인접 국가들도 들어올 수 있는 ‘공해’로 만드는 것이 차라리 ‘독도’에 대해 안전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셋째, 제대로 된 한국과 일본의 EEZ 획정선은 ‘독도’와 ‘오키도’의 중간선임을 잘 인식하고 이를 정책으로 입안해서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당장 해결 안되면, 국력이 커지는 후대에 이를 넘기고, 당대에 합의 안되는 부분은 일반국제법 규제 하에서 활동하는 ‘공해’ 상태로 두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넷째, 독도를 굳게 지키기 위해서는 독도를 개발하여 10∼20호의 주민을 상주시켜서 새 동리 또는 새 해양 소도시를 만들어서 국민의 일상 생활권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독도의 동도와 서도 사이는 약 200m 거리인데, 이 사이의 3분의 2는 수심 2m도 채 안된다. 동도와 서도 사이에 철교를 놓고, 동도와 서도 사이에 흩어져 있는 암초 위에 인공 지반을 만들어 해상의 유스호스텔과 현대 건물을 건립하고, 용출수를 개발하고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설비 및 발전 시설(풍력 화력 등)과 각종 현대적 시설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독도를 ①울릉도와 한국 연안 어업 전진기지로 ②독도와 울릉도를 묶어서 하나의 국내·국제적 관광지구로 ③해양기상관측소, 해양수산연구소 등 연구실험기관 설치지구 및 해양수산관계 국제회의 행사 지역으로 ④한국의 초·중·고·대학교 학생들의 훈련장·야영장·교육장으로 개발하면 독도를 수호하고 보전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최근 울릉도 의회가 독도의 행정구역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로부터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번지로 개칭·개편하려고 제의한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독도를 개발하면 10∼20호가 독도의 소득만으로도 독자적 경제생활을 부유하게 할 수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국 외무부는 일본측의 항의가 두려워 독도 개발을 반대한다. 이는 무사안일만 추구하는 퇴행외교라고 본다. 독도는 한국영토다. 지금 미 제5군과 제7함대가 이 지역에서 경찰 역할을 하면서 일본의 독도 무력침공을 근본적으로 규제하고 한·일 무력충돌을 막고 있다. 국제적 관심과 조사를 지금 진행하는 것이 한국에 유리하다. 만일 미군이 이 지역에서 철수하거나, 일본 해군이 미 해군과 함께 이 지역 해상 경찰권을 갖는 시기가 온다면 한국은 더 불리해지고 독도를 일본에 침탈당할 위험이 커진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독도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독도를 수호하고 보전하는데 매우 유익한 정책이다.

    다섯째, 한국 외무부 구성과 정책을 개혁해야 한다. 외무부 일부 관계자는 국제법이 규정해주고 보장한 한국영토 ‘독도’의 ‘실효적 점유’만 내세우며 무사안일주의적 소극정책만 되밟고 있다. 일본의 공격외교에 밀려 후퇴만 거듭하다가 오늘날 ‘독도’를 ‘중간수역’에 넣고 ‘독도’를 한국 EEZ 기점으로 삼지도 못한 이 외교력으로는 ‘독도’를 수호·보전하는 데 참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여섯째, 해군력과 해양경찰대를 독도를 지키기 충분할 만큼 증강해야 할 것이다. 해군을 증강하고 해양 순시선을 증강하고 첨단화하는 것은 시급히 실시해야 할 과제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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