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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⑭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왕 선덕여왕

남자 후보 제치고 일찌감치 낙점, 여성의 당당한 승리!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왕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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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하고, 한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른 전쟁터로 달려가는 등 충성심과 용맹심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을 철저하게 지지하고 보호하려 애썼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한 말에는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의 이치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우리 역사의 여왕들’에서 재인용)

김유신은 여왕이 통치를 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비담에 대해 군신관계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명분을 들었다. 일부 귀족들이 여자를 비하하는 것에 대한 반대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여성의 승리

역사상 첫 여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시대상황마다, 왕마다 서로 달랐다. 당과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후 다시 당의 공격을 받은 문무왕 때는 당에 대해 당당했던 여왕을 향한 추모 분위기가 일었다. 당시 문무왕은 선덕여왕이 세운 영묘사를 성전사원으로 관리하고 자신도 이 영묘사 앞에서 열병행사를 할 정도였다.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구층탑을 중수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에서도 여왕이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 속에서 국가를 수호하는 위업을 닦았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이르러 헌안왕은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 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 된다. 사위(경문왕)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을 가지고 있다.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면 반드시 선조로부터 이어온 훌륭한 왕업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삼국사기’ 권11 헌안왕 5년 봄 정월) 그가 이 말을 한 30년 뒤에 경문왕의 딸인 신라 세 번째 여왕, 진성여왕이 즉위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덕여왕은 재위 5년째인 636년부터 병이 나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종욱 교수는 여왕의 말년을 이렇게 기술했다. ‘선덕여왕은 636년 3월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는 고칠 수 없어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기도 했다. 어떤 병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으니 그 후 10년간 병에 시달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647년 1월8일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 열흘 후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비담)의 목이 떨어졌다.’(‘춘추’)

이 교수는 ‘신라의 역사’라는 책에서 신라시대 여성의 지위가 딱히 높지는 않았다고 밝힌다. 부계제 사회였기 때문에 혼인을 하면 여자는 남자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원칙이었다. 다만 여자 집안의 신분이 높으면 남자가 여자 거처로 옮겨 여러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라는 신분의 지배가 ‘부계’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왕이 나왔다고는 해도 다른 관직에 여성이 임명된 예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여자들도 권력게임에 합류했다. 7세에 왕이 된 진흥왕의 뒤에서 섭정한 지소태후나 진평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사도왕후와 미실 등이 진지왕을 즉위시킨 과정에서 왕실 여성들의 역할이 막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독특하게 여성들 중 왕비를 공급하는 가계(인통)가 있었다고 한다. 지배세력의 부인들을 배출하며 세력을 유지하는 독특한 가계(진골정통 대원신통)였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라의 독특한 제도’(이종욱 ‘춘추’)라고 한다.

이처럼 신라를 움직이는 사회 시스템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철저한 신분제(골품·骨品)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다시 선덕여왕이 소설 드라마 같은 문화 아이콘으로 등장한 이유로는 뭐니뭐니해도 여성의 지위 향상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달라졌음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성들보다 뛰어난 힘을 가졌다거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남성들과 비교해볼 때 여러 측면에서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등극이 이뤄진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조범환)

신동아 200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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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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