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화해를 읊는 ‘고통의 시인’ 신달자

“내 운명을 미워할 시간조차 없었다”

  • 안기석│출판국 기자 daum@donga.com│

    입력2010-05-18 16:5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백치애인’으로 유명한 시인 신달자씨가 최근 화해의 메시지를 담은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신씨는 노래와 시낭송을 곁들인 감동적인 강연으로 전국을 누비는 ‘명강사’로도 인기가 높다. 신씨를 만나 자신이 당한 불행을 어떻게 끌어안았으며 가족과 사회에서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들어보았다.
    화해를 읊는 ‘고통의 시인’ 신달자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의 시련’이나 그리스 음유시인 호머가 노래한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며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영원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아내의 모습은 남편에게 신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악처(욥의 아내)이거나 베틀을 짜며 남편을 기다리는 현모양처(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형이다.

    ‘백치애인’ ‘물위의 여자’ 등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시인 신달자(愼達子·67)씨는 불행한 운명을 온몸으로 헤쳐 나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욥이나 오디세우스에 가깝다. 결혼한 지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수발하다가 떠나보내고 낙상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9년간 모신 것도 모자라 본인마저 암에 걸려 투병해야 했던 기막힌 운명의 주인공이다.

    신씨는 그동안 종교단체, 지자체, 기업, 노조, 여성단체 등에서 수많은 강연을 했다. 요즘도 한 달에 10회 이상 강연을 하며 청중에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선사한다. “슬픈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려고 노래와 시낭송을 곁들인다”는 것. 연극인 손숙씨는 “신달자 시인의 강연은 공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씨의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 감동을 가족이나 친지들과 나누고 인터넷에 올리기도 한다.

    이 ‘고통의 시인’이 최근에 그동안 전국을 돌며 강연한 내용과 글들을 모아 에세이집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를 펴냈다. 자기 자신과 가족과 사회의 화해에 대한 체험담과 생각을 모은 것인데 특히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5월12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신씨를 만났다. 경남 창원시 성산아트홀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온 신씨는 왼쪽 볼이 약간 부어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강연 일정을 소화하느라 잇몸이 부었다”는 것.



    ▼ 그동안 몸과 마음을 혹사했는데 좀 쉬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 에세이집을 내고난 뒤 기자회견을 할 때 누구한테 제일 먼저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를 하고 싶으냐고 묻기에 저는 ‘나한테 가장 먼저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동안 저를 너무 혹사시켰어요. 너무 많이 울어서 제 몸은 눈물로 절었지요.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육체는 한계가 있어요. 강연 요청을 많이 받아도 이제는 힘들어 거절하지만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저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하면 청중이 모두 자기들의 이야기처럼 울고 웃어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만큼 모두 힘들다는 거지요.”

    ▼ 선생님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어떤 겁니까.

    “좀 모자라는 여자로 살아왔지요. 그런데 살아보니까 모자란 것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너무 영악하고 계산을 잘했으면 다치는 것도 있고 잃어버리는 것도 있었을 거예요. 비바람을 맞으며 모자라게 살았지만 거기에 대한 보상도 있었어요.”

    신씨는 자신의 인생을 ‘슬픔의 쓴잔을 마시고 불행의 질긴 갈비를 뜯듯’ 살아왔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 선생님이 받은 인생의 밥상에는 삼키기 어려운 쓰디쓴 음식만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코스요리에 비유하자면 다음 요리가 무엇이 나올지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나오는 대로 받아먹고 지금까지 살아왔지요. 그러나 그중에 단것도 있었을 겁니다. 딸아이들이 아무 탈 없이 자라준 것도 제 삶에 좋은 음식이었어요. 위로 둘은 일찍 출가해서 아이들도 있고 막내는 오는 8월에 혼례를 올립니다.”

    신씨는 자전적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에서 막내를 ‘기적의 비타민’으로 불렀는데 36년 동안 함께 ‘지지고 볶고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신씨의 딸 사랑은 각별하다.

    “제가 받아야 할 불행의 몫을 제가 받지 않고 피하면 절반이나 일부라도 우리 딸들한테 가지 않을까 염려했어요. 우리 딸들의 어깨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제가 다 받는다는 심정으로 살아왔어요.”

    ▼ 자전적 에세이를 내기 전까지는 딸들이라도 어머니의 속마음을 몰랐겠지요.

    “왜 몰랐겠어요. 아버지가 쓰러진 뒤 어머니가 너무 힘들게 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살았잖아요. 예전에 평화방송에서 인물에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제 얘기를 다뤘는데 프로그램 담당자가 저 몰래 큰딸에게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했어요. 인터뷰할 때 갑자기 그 편지를 보여줬는데 ‘엄마가 늦게 오면 왜 안 오지 걱정하면서도 그래 안 왔으면 좋겠다. 더 좋은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많이 울었어요.”

    석가와 예수의 탄생일에 태어난 사연

    큰딸조차 어머니를 포기하고 싶도록 만든 그 가혹한 운명을 신씨는 “한번도 비겁하게 피해가지 않았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신씨의 생일이다. 그는 1943년 경남 거창군에서 6녀1남 중 다섯째딸로 태어났는데 실제로 태어난 날은 음력으로 사월초파일이고 호적에 출생신고된 날은 크리스마스다. 고행과 고난을 겪었던 두 성인의 탄생일과 같으니 ‘고통을 잘 견뎌내는 달인’이 된 것일까.

    “강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저 낳았을 때 굉장히 실망하셨어요. 아들을 얻기 위해 계속 아이를 낳았는데 딸만 생기니 오죽했겠어요? 제 바로 밑이 남동생이었어요. 사월초파일에 저를 낳았지만 출생신고도 하지 않다가 군청에서 연말에 독촉하니까 12월25일에 출생한 것으로 신고한 겁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부유하게 자랐기 때문에 자존심은 셌지만 소심하고 상처를 잘 받는 편이었어요.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어려운 일을 당하다 보니까 어머니로서 견딘 거지요.”

    신씨의 부모에 대한 회상은 각별하다. 어머니는 신씨가 공부하러 떠날 때 “공부 많이 하고 돈 많이 벌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라”고 당부했는데 생전에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해 한이 맺혔다는 것. ‘백치애인’으로 인세가 많이 들어오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어머니 무덤이었는데 그곳에 수표를 묻고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화려한 사업가였지만 내면으로는 몹시 외로움을 타는 남자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늘 근사한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중학생 때 아버지 일기장을 몰래 봤는데 ‘외롭다, 울고 싶다’는 표현이 많아 당혹스러운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글 쓰는 힘을 길러준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여고 2학년 때 거창에서 부산으로 전학을 갔는데 당시 아버지는 정미소와 제재소를 경영하면서 돈을 많이 버셨어요. 아버지는 저보고 편지를 잘 써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면 용돈을 올려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버지전상서’라고 쓰고 나면 그 다음부터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남성여고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서점에서 명언집 3권을 사서 파스칼과 톨스토이 등의 명언들을 짜깁기를 해서 보내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똑똑한 줄 몰랐다’고 놀라시곤 했어요. 덕분에 용돈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경상남도 백일장 대회에서 시 부문 일등상을 받기도 했지요.”

    신씨는 1961년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뒤 활발한 문예활동을 하고 김남조, 서정주, 박목월 시인의 특강을 들으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 어머니의 당부대로 공부 많이 하려고 석사과정에 입학했는데 조교 생활을 하면서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이던 15년 연상의 심현성 교수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 신혼부터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인 9년 동안은 행복했습니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신혼여행 떠나는 날부터 남자가 빨간 가방을 들고 갈 수는 없다며 저보고 들게 했어요. 성격 차이도 있었지만 시어머니도 한집에 모시고 있었으니 남편과 단둘이 식사한 기억도 없어요.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팍팍한 남자였어요. 소통을 포기했죠. 가난한 집안 출신인 남편은 부잣집 출신인 저를 훈련시키려고 그랬는지 모르죠.”

    예를 들면 밖에서 자장면을 먹을 때에는 매번 “이 자장면 값이면 돼지고기를 사서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먹을 터인데…”라는 식으로 음식맛을 버려놓았다고 한다.

    詩 쓰는 것이 고통의 탈출구

    ▼ 1969년에 ‘현대문학’에 ‘발’ ‘처음 목소리’ 등의 시로 등단했는데 어떻게 시작을 하게 됐습니까.

    “그 당시 결혼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이유도 없이 서랍을 열고 뒤지곤 했어요. 어느 날 너무 견디기 힘들어 둘째아이를 재워놓고 집 안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종로로 무작정 나갔어요. 그때 우연히 박목월 선생님을 거리에서 만났어요. 발랄하고 멋 부리던 대학생 시절과 너무 달라진 부스스한 제 모습에 선생님은 직감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구나라고 느낀 거죠. 다방에서 커피를 한잔 사주시면서 ‘요즘도 글을 쓰나’ 하시는데 그 말이 제 가슴을 꽉 치는 거예요. 내가 찾아 헤매는 것이 글이었구나. 선생님이 시를 다시 쓰라며 봐주시겠다고 해서 힘을 내서 등단한 겁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인생을 거의 포기했는데 시에서 탈출구를 발견한 거죠.”

    화해를 읊는 ‘고통의 시인’ 신달자
    ▼ 남편이 쓰러진 후에도 글쓰기가 자신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됐습니까.

    “처음 쓰러졌을 때는 정신이 없었지요. 나중에는 남편의 병상에서도 글쓰기를 했습니다. 그때 나온 것이 ‘백치애인’입니다.”

    신씨는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진 23일 동안 굿에서부터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까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21일째 되던 날 당시 남편이 입원해 있던 우석대병원 근처의 혜화동성당에 홀로 들어갔다가 ‘예수의 고상(苦像)’과 마주친 후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 선생님의 남편은 23일 만에 기적처럼 의식이 깨어났지만 그 후부터 20여 년 동안 선생님은 자신만의 삶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자존심 때문일까요. 겉으로는 그런 표시를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집 안에 환자가 많으니까 나갈 때는 꼭 옷을 차려입고 향수를 뿌리고 다녔어요. 주위 사람들이 향수 냄새가 난다고 하면 좋았어요. 사람들은 제 책이 나오기 전에는 대학원 박사과정 다니고 멋 부리고 팔자 좋은 여자로 알았겠죠.”

    신씨는 의식은 찾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이 병든 남편의 재활을 위해 온몸의 진액을 짜냈다. 그 결과 남편은 다시 강단에 서게 되었다. 남편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관계까지 회복시켜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2000년 신씨의 남편은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결혼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신씨의 품속에서 숨을 거뒀다.

    ▼ 남편으로부터 생전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무엇입니까.

    “남편은 저에 대한 마지막 애정 표시로 그 말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너 힘들지’ 단 한마디였는데 한 번도 그 말을 한 적이 없어요.”

    ▼ 강연에서 화해 메시지의 핵심은 대화와 소통이라고 강조하시는데 우리나라 부부들의 대화법은 서툴기 짝이 없죠.

    “서울대나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가끔 부부특강을 하는데 제 결혼이야기를 하죠. 부부 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대화를 안 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화의 주제나 소재도 중요합니다. 가족이나 양측 집안이야기를 하면 거의 말다툼으로 발전하고 급기야 부부의 근본마저 흔들어버립니다. 화제는 밖에서 끌고 와야 합니다. 아내도 시사성 있는 화제에 대해 밝아야 해요. 그래야 자기 견해도 이야기하지요. 이 과정에서 서로 다투어도 좋죠. 근본적인 것은 아니니까. 재미있게 대화하는 훈련을 해야 나중에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지루하지 않게 보내요.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 탈 때부터 돌아앉거나 돌아올 때는 원수처럼 등 돌리며 돌아서지요. 대화를 잘하는 부부가 건강한 부부입니다. 취미를 나누면 더욱 좋고요. 속에서는 부글거리는데 대화를 하지 않고 각자 밖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더 커지죠.”

    신씨는 “남편이 생전에 나무 가꾸는 일을 좋아했는데 정원에서는 서로 싸우지 않다가 방에만 들어오면 자주 싸웠다”고 회상했다. 또한 신씨는 남편과 속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는 퇴근하는 남편을 밖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오는 길에 소주를 한잔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왜 접니까” 신께 항의하기도

    ▼ 강연 후에 반응이 들어옵니까.

    “이제는 강연 무대에 올라서기만 하면 청중이 무슨 말을 듣길 원하는지 느껴져요. 요즘 청중은 재미있고 유익하지 않으면 바로 눈길을 돌립니다. 90분 동안 딴생각을 못하도록 제가 노래와 시로 몰고 갑니다. 강연 후에도 문자메시지나 전화로 연락이 옵니다. 가능하면 일일이 응답을 해줬어요.”

    ▼ 인상적인 사례가 있었습니까.

    “자전적 에세이가 나온 지 1주일 후에 한 아주머니가 전화를 했어요. 자기 남편이 고려대의대부속병원에 입원했는데 쓰러진 지 한 달째 됐다. 도망가고 싶은데 내 책을 읽고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어요. 저도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못 도망갔다고 말해줬어요. 최선을 다해야 남편이 죽더라도 자신 있게 살 수 있다는 거지요. 내가 어리석기도 하지만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 운명의 비를 맞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신씨가 ‘운명의 비’를 맞은 후유증은 간단치 않았다. 2005년 2월에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숯불구이 하듯 자기를 달달 볶는’ 신께 “왜 접니까”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신씨는 당시 미국에 있던 둘째딸의 권유로 ‘성모 발현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프랑스의 루르드를 방문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 기업체에 가서도 강연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아는데 어떤 내용을 말씀합니까.

    “제가 기업경영 그 자체는 몰라도 경영의 문제가 곧 인간의 문제 아닙니까. 저처럼 인간의 명암을 다 겪은 사람은 드물 겁니다. 기업도 인간이 잘살자고 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IMF 사태가 났을 때 노조가 데모를 많이 하니까 기업체에서 강연 요청을 했어요. 울산 등지의 공단으로 30번은 내려갔습니다.”

    ▼ CEO들에게는 어떤 강연을 합니까.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의 자서전에 보면 자신이 일생에 가장 많이 한 말은 ‘너 힘들었지’였다는 겁니다. 카네기의 묘비명에는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이 여기 잠들다’라고 되어 있다고 해요. 이런 관점에서 기업을 경영하면 발전하는 거죠. 기업인들에게 ‘돈을 먼저 벌기보다 사람을 먼저 벌어라. 그러면 돈은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강조합니다. 직원들에게 회사는 내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줘야 돼요. 그러면 왜 일이 잘 안되겠습니까. 독서도 강조합니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지혜가 생기면 기업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내 일을 열심히 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고통의 긴 터널을 뚫고 나온’ 신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신씨는 현재 사회통합위원회, 예술위원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회 등지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연과 사회적 활동을 위해 신문의 모든 면을 매일 꼼꼼히 읽고 스크랩해둔다고 한다.

    정서적 허기 못 채우면 남자도 폐경기 겪어

    ▼ 최근 쓴 책에서 ‘정서적 허기’라든지 ‘남자의 폐경기’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나 사회가 많이 약해진 것을 방증하는 것일까요.

    “국가의 경쟁력은 가정의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통해서 사랑을 먹어야 개인의 힘이 길러지는 것이거든요. 가정에서 사랑을 못 느끼면 남자들도 정서적 허기를 느끼고 폐경기를 겪는 겁니다. 그래서 강연할 때마다 아내들에게 당신의 남편이 최고라고 말해주라고 해요. 그래야 아이들도 아빠를 좋아하게 되지요. 옛날 엄마들은 자식들이 속 썩이면 네 애비 닮았느냐고 그러지 않았어요? 지금의 아버지들은 나이 들면 갈 곳도 별로 없어요.”

    ▼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하는데 가족 간의 대화와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구체적으로 자살은 우울증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압축적으로 성장하고 잘살게 됐지만 정신적으로 뒷받침이 안돼 조금만 형편이 어려워져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미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칩거하는 사람이 위험합니다. 힘들 때는 거리로 나와 햇볕을 받으며 걸어야 삽니다.”

    ▼ 요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 결혼해도 곧바로 이혼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더구나 고령화사회로 들어서면서 황혼 이혼도 늘어나는 추세인데 해법이 있습니까.

    “이혼은 결혼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DNA는 슬플 때나 기쁠 때는 같이하는데 평소에는 잘 못합니다. 결혼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부부는 서로 속을 털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에 걸렸던 것은 소주 한잔하면서 털어놓거나 선물을 주면서 풀어야지요. 가족은 서로 피하면 헤어지기 때문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어요. 저는 시댁 식구들도 남편을 포기하라 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새벽부터 강연 일정으로 바빴던 신씨는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지만 피곤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제 그만 휴식을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신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남긴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제 운명을 미워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