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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간직한 명품의 쌍둥이 ‘로스’의 세계

구호·오브제·타임 등 국내 명품 브랜드 백화점가 40~60%로 유혹하는 전문점 늘어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출생의 비밀 간직한 명품의 쌍둥이 ‘로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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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태어나자마자 사라진 신상 정품 로스는 정품의 일란성 쌍둥이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사기꾼일 뿐인가?

“없어서 못 판다”는 내셔널 브랜드의 정품 로스 가방을 보면 질문에 답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가방은 로고와 라벨이 보이지 않는 옷과는 다르다. 명품 소비에서 가방은 옷보다 더 대중적인 상품이다. 상품의 품질보다 상징물만 보고 구매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가방에서 브랜드 로고는 매우 중요하다. 가방에 커다란 금속플레이트 로고를 붙이거나 가방 전체에 로고를 무늬처럼 새기는 ‘로고플레이’가 많다. 로고의 유무는 진품과 가짜를 가르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가짜에 붙은 로고는 범죄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S동의 로스 전문점에 있는 정품 로스의 ‘정품’을 찾으러 백화점으로 갔다. D브랜드의 정품 로스인 40만 원대 가방은 백화점에서 89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 정품에 붙은 금속 로고는 정품 로스 사장님이 별도로 준다고 했다. 그 외의 차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T브랜드의 가방 하나는 신상 매장에서 찾을 수 없었지만 같은 브랜드의 다른 가방은 정품 로스와 정품의 외모가 완전히 똑같았다. 색, 디자인은 물론이고, 쇠 장식에 새겨진 작은 로고도 똑같았다. 정품은 82만5000원, 정품 로스는 41만 원이었다.

사장은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건(정품 로스) 당연히 진품이에요. 가짜에 로고를 새겨 넣은 것이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패션기업 내부 관계자도 “같은 사람이 100개 만들 재료로 110개 만든 거니 진품이긴 한데…”라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한 공장에서, 정품과 똑같은 소재, 같은 직원의 손길로 태어났지만 줄을 선 순서대로 납품용 박스에 들어간 것을 정품이라 하고, 로스 유통업자의 차 트렁크로 들어간 것을 정품 로스라 하는 것일까.

정품 로스도 인기가 높은 한 브랜드의 신세계백화점 매장 매니저는 간혹 정품 로스를 사서 정품인지 확인하러 오는 ‘대담한’ 손님들이 있다고 말한다.

“정품 로스를 샀다며 백화점 매장에서 확인하려는 손님은 그 제품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산 게 아니라 브랜드와 로고가 좋아서 산 거겠죠. 잡지에서 봤다거나 주변 사람 누가 들었다는 이유로 사는 거예요. 재미있는 건 그런 손님들이 가진 정품 로스가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가짜라는 거예요. 가짜라고 말씀드리면 흥분하죠. 정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싸게 샀는데도 속았다고 해요.”

명품이되 명품이지 않은

정품 로스를 산 사람이 가진 것은 가방이고, 그가 사지 못한 것은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는 순간의 마약 같은 경험이다. 구매자는 명품을 살 때 브랜드의 가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화려한 로고가 쌓아온 역사와 그것이 상징하는 라이프스타일, 대리석이 깔린 백화점의 분위기, 매장 직원의 극진한 환대도 담아가기를 바란다. 정품 로스 구매자도 마찬가지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번거로운 인터넷 구매나 변두리 창고 사무실에서의 찜찜한 쇼핑, 싸구려 짝퉁과 정품 로스가 섞여 있는 진열대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명품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진 건조한 가방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품 로스를 가짜라고 부를 수 있다.

정품 로스는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명품의 쌍둥이다. ‘타임’을 ‘타임’이라 부르지 못하고 ‘랑방’을 ‘랑방’이라 부르지 못하는 운명의 정품 로스는 소비자가 명품의 로고와 명품 쇼핑의 경험에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썽꾸러기다.

각 브랜드가 정품 로스를 빼돌린 하도급 업체를 퇴출하고, 작게는 빼돌린 물량에 백화점 판매가의 10배, 많게는 그 시즌에 하도급 생산한 옷의 판매가 전체를 물어내도록 하는 것, 심지어 제조 현장에서 분쇄해버리는 건, 그것이 신의를 저버리고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범법 행위이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소비자가 럭셔리 명품에 숨은 비밀을 알아채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럭셔리 산업의 성패가 브랜드의 로고와 아우라를 얼마나 비싸게 팔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음을 일찌감치, 가장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세계 최대의 럭셔리브랜드그룹 LVMH(루이비통, 디올 등 포함)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었다. 그는 남용에 가깝게 로고를 이용해 LVMH를 오늘날의 규모로 키웠고 자신은 세계 4위의 갑부가 됐지만 바로 그 로고 때문에 끊임없이 가짜의 역습을 받고 있다. 가짜가 로고를 이용해 게릴라처럼 생존해 진화하는 것이다. 명품의 하도급 공장이 더 싼 재료와 노동력을 찾아 전 세계로 아웃소싱되면서, 정품의 수보다 빠르게 늘고 있는 로스는 지금까지 만난 가짜들 중 가장 위협적일 것이다.

신동아 201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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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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