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국 여배우 열전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엄앵란-이영옥-강수연 이은 청춘영화 막내 헤로인

  • 오승욱 │영화감독 dookb@naver.com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2/4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태현은 전철 플랫폼의 맨 끝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술에 떡이 된 그녀, 바로 전지현이다. 순간 차태현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저 여자 위험한데’가 아니라 ‘앗! 나의 이상형’이다. 그러곤 ‘아무리 이상형이라도 술에 떡이 되어 비틀거리는 여자는 싫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 먹는다.

복학생 차태현의 모든 촉수는 오로지 하나에 꽂혀 있다. 긴 생머리에 늘씬한 키, 여배우 같은 얼굴의 ‘이상형’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형 외모를 지녔다고 해도 조건이 하나 있다. 한국적인 현모양처형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이야긴가.

전철 플랫폼 끝에서 차태현이 안쪽으로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술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추한 모습에 게슴츠레 술에 취한 눈으로 차태현을 바라보던 ‘긴 생머리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는 전철이 오자 휘청거리며 올라탄다. 여자는 전철 손잡이 기둥에 매달린 채 인사불성이다. 쇠기둥에 퉁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부딪히기를 반복하다 잠깐씩 정신을 차리는데, 그때마다 술주정을 부린다.

일단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자기 또래의 청년에게 시비를 건다. 분홍 형광색 티셔츠를 입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청년 앞에는 할아버지가 서 있다. 잠깐 정신이 든 사이 두 사람을 번갈아본 여자는 대뜸 반말로 “노인네가 서 있는데 안 일어나!”라고 소리친다. 청년이 무시하자 여자는 청년의 뒤통수를 퍽! 소리가 나도록 때린다. 이 여자, 정말 겁도 없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청년이 항의하려 하자 여자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다. 다행히도 청년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술 취한 여자를 피해 다른 칸으로 가버리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청년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한다. “야, 분홍색 옷 입지마.”

“너 죽을래?”



헛구역질을 하던 여자는 식도를 타고 역류한 음식물이 밖으로 분출되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미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음식물은 소 되새김질 하듯 씹어 삼킨다. 그러나 곧 다시 역류한 음식물이 자리를 양보 받은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 쏟아진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할아버지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전지현은 차태현 쪽으로 돌아서며 “자기야!” 하고는 쓰러진다.

고스란히 뒷감당을 하게 된 차태현, 그는 이제 전지현의 포로가 돼버렸다. 전지현은 할아버지가 토사물이 묻은 가발을 벗자마자 드러난 민머리 위에 확인사살을 하듯 또다시 토사물을 쏟아내고, 졸지에 전지현의 애인으로 오인받은 차태현은 자신의 분홍색 스웨터를 벗어 토사물을 닦아낸다. 이것도 끝이 아니다. 차태현은 뻗어버린 전지현을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밤거리를 걸어 여관을 찾아내 데리고 들어갔다가 치한으로 오인받아 파출소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음 날, 어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찾아온 전지현의 태도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다물고는 “너 죽을래?” 하면서 차태현을 질질 끌고 다닌다. 차태현, 아니 남성 수난사의 막이 오른다.

20대 초반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수많은 한국 영화 중 이렇게 황당한 만남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없었다. 10여 년 전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이규형 감독, 1987)에서 자기네 학교 농구팀이 경기를 잘 못하자 소주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농구팀 선수들에게 달려가 따귀를 올려붙인 강수연, 이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 박중훈이 강수연을 따라 버스에 타서는 잡상인 흉내를 내며 구애하던 첫 만남은 ‘엽기적인 그녀’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다.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1964)에서 건달 신성일이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하는 여대생 엄앵란을 구해주다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도 이 영화에 댈 게 아니다.

청춘영화의 당돌한 첫 만남

‘엽기적인 그녀’에 대적할 만큼은 아니지만, 1970년대 청춘영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서 남녀 주인공의 만남도 신선한 장면으로 꼽힌다.

주인공 병태는 여대 불어과 학생들과 미팅을 하는 자리에 나간다. 당시 불어과 여대생은 신부 후보감 일순위로 인기를 끈 ‘퀸카’였다. 양복을 빌려 입고 미팅 장소로 가던 병태가 장발 단속에 걸린다. 경찰에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육교 난간에 매달리는 아찔한 상황까지 연출하며 도망친 병태는 가까스로 미팅 장소에 도착한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파트너가 오지 않는다. “오늘 일진이 아주 안 좋군” 하고 중얼거리며 일어나는데 안내하는 아가씨가 “파트너가 밖에서 기다리니 가보라”고 말한다.

2/4
오승욱 │영화감독 dookb@naver.com
목록 닫기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댓글 창 닫기

2022/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