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호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절제된 감정의 끝 보여준 ‘만추’의 여인

  • 오승욱 │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3-04-19 15: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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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객하지 않는 창녀. 윤리와 정욕 사이에서 고뇌하는 중년 여인. 천천히 길을 걷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삶의 고통과 절망이 배어난다. 닭똥 같은 눈물도 없는데 관객은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음습함에 전율한다. 문정숙의 연기에는 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다. ‘만추’ ‘검은 머리’ ‘귀로’가 명작으로 꼽히는 건 오로지 그녀의 연기 덕분이다. 얼굴과 몸매가 아닌, 배역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토록 관객을 사로잡은 여배우가 또 있을까.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연기력을 도외시하고 얼굴과 몸매로만 판단하는 것은 여배우를 모독하는 것이다.”

    1967년 8월 ‘서울신문’이 여배우의 얼굴과 몸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놓고 문화계 인사들에게 질문을 던지자 시인 김수영이 한 말이다. 여배우를 중심으로 한 영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작가 손소희는 “여배우의 이미지는 얼굴에 집약된다”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김지미, 문희를 예로 들었다.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있어 여배우의 얼굴 하나만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무용가 임성남과 화가 천경자는 “한국의 여배우들은 얼굴만 매만질 줄 알지 몸매를 위한 노력은 등한시한다”며 이제는 몸매의 밸런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게 된다고 혀를 찼다. 극작가 이용찬의 대답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뒷모습에서 여배우의 진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배우가 자기 역할을 잘 소화해서 표현하면 뒷모습에서조차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극작가다운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는 누구였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는 누구였을까.

    나는 이 질문에 단 한 명의 여배우를 떠올린다. 그녀는 첫눈에 관객의 눈을 확 잡아당길 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다. 그저 곱게 생긴 정도다. 그렇다고 몸매가 아름다운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뒷모습을 노출했을 때, 입이 험한 사람들은 “저런 몸매로 옷을 벗는 것은…”이라며 비웃었다.



    배우가 역을 잘 소화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영화 속에서 걷는 모습을 보면 된다. 주인공의 감정을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보여주지 않아도, 그저 뒷모습만으로 그 이상의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가 있다. 그녀는 당대의 어떤 여배우도 보여 주지 못한 감정의 깊이를 걸어가는 뒷모습만으로 보여줬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배역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표현한 여배우”라는 극찬이 따라 다니는 사람. 바로 문정숙(1927~2000)이다.

    1958년 초여름. 제1한강교를 건너 영등포를 지나 먼지를 날리며 신작로를 달리는 승용차가 있다. 새로 개장한, ‘한국 최초의 현대식 영화촬영소’라고 자랑하던 안양촬영소에서 찍는 영화 ‘생명’(이강천 감독)을 취재하러 가는 기자들이 타고 있었다. 촬영소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소방차 2대와 촬영소 주변 마을 사람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뒷모습만으로 보여준 감정

    드디어 촬영 개시. 건물에 불이 활활 타오르자 촬영 현장에서 10여 m 떨어진 안전한 곳에 있는데도 기자들의 얼굴은 확확 달아올랐다. 그때, 불이 활활 타는 건물에서 한 여인이 뛰쳐나온다. 그녀는 불이 몸을 휘감고 치맛자락에 옮겨 붙으려는 찰나까지 버티다가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녀의 연기를 본 순간, 기자들은 감탄한다. 컷 사인이 떨어지자 기자들은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달려간다. 불길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셔 불 때문에 목이 쉰 여배우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촬영장에만 오면 일할 맛이 난다”며 방긋 웃는다. 문정숙은 그런 배우였다.

    1959년 김소동 감독의 신작 ‘오 내 고향이여!’는 아시아 영화제 출품작으로 선정됐지만, 문교부의 개입으로 최종 탈락한다. 그 자리를 ‘종각’(양주남 감독, 1958)이 대신한다. 문교부는 ‘종각’이 동양적 사상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영화라서 추천한다고 둘러댔다. 사실 ‘종각’은 인간의 고통과 회한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제작자와 감독이 의기투합해 만든 꽤 괜찮은 영화였으나 문교부의 횡포 때문에 이미지를 구겼다.

    심사위원들과 제작자협회는 문교부의 선정을 못 받아들이겠다면서 ‘종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문교부 측 자문위원이던 문학평론가 백철은 ‘종각’의 장점을 조목조목 제시한 글을 ‘경향신문’에 발표해 문교부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 글에 대한 반박도 이어졌다. 갑론을박 끝에 결국 두 작품 모두 아시아 영화제 출품 후보작에서 제외됐다. 문교부와 제작자협회가 벌인 싸움 때문에 괜찮은 영화 두 편이 다 피해를 본 것이다.

    영화 ‘종각’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는 주연 여배우 문정숙이 있었다. 문정숙은 이 영화에서 1인 3역을 하며 열연을 펼쳤다. 그런데 이 영화를 아시아 영화제 출품작으로 추천한 쪽도, 낙선을 주장한 쪽도 자기들 주장의 근거로 문정숙의 연기를 내세웠다.

    종을 만드는 종쟁이 허장강이 일생 동안 만난 세 여인이 있다. 늙은 허장강과 한 지붕 밑에서 사는 젊은 처녀, 젊은 시절 허장강이 종쟁이가 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든 첫사랑, 허장강이 종쟁이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우연히 만나 같이 살게 된 여인. 문정숙은 이 세 여인을 모두 연기했다.

    ‘종각’을 비판한 영화인들은 문정숙이 연기한 세 여인의 캐릭터가 비슷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문정숙이 머리를 빗어 넘긴 모양새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각’ 옹호파는 영화의 내용상 너무나 닮은 여자 세 명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연출 면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주장했다.

    놀라운 1인 3역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영화 ‘검은 머리’의 한 장면.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 등장한 젊은 여인이 문정숙인지 몰랐다. 두 번째 여인이 등장했을 때에야 뺨 아래에 난 작은 점을 보고 문정숙임을 알아봤다. 내가 아는 문정숙은 모두 30대 후반의 역할이어서 20대의 문정숙을 몰라본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외모가 머릿속에 각인될 만큼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조용하고 다감한 연기에 빠져들었다. 내가 보기에, ‘종각’ 반대파들이 왜 이 영화를 낙선시켰는지 수긍할 만한 부분은 그녀의 연기가 아니라 시나리오와 연출상의 문제였다. 가령 허장강이 결혼을 약속한 첫 번째 여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 억지스러웠다. ‘종각’은 한 인간의 집념을 진지하게 그리기 위해 공을 들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정숙의 연기력 때문에 이 영화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미숙했지만, 허장강과 문정숙의 연기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고 차분해서 당대의 어느 영화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봤다. 문정숙의 연기에선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기품이 느껴졌다. 이 영화를 옹호한 평론가 백철은 이후 문정숙의 팬이 됐는데, “문정숙은 지성적이며 연기의 신축성이 넓어 여러 가지 배역을 맡아도 능히 감당한다”고 극찬한 바 있다.

    문정숙은 배우였던 언니 문정복의 공연을 보면서 연기자의 꿈을 품었다. 17세에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극단에 들어가 연기자가 됐고, 1952년 신상옥 감독의 ‘악야’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1956년 연극 연습을 하던 그녀를 주목한 사람은 당시 인기 절정의 신인 남자배우 최무룡이었다. 그는 유현목 감독과 함께 자신이 제작, 주연을 맡은 영화 ‘유전의 애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문정숙을 보고는 이 영화가 원하는 슬픈 느낌의 얼굴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유 감독에게 소개했다. 단역 신세였던 문정숙은 일약 주연으로 발탁됐다. 영화는 성공했고 사람들은 “이탈리아 여배우가 나왔다”며 문정숙의 연기를 칭찬했다. 1950년대를 풍미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속 여주인공의, 감정이 절제된 사실적인 연기를 문정숙에게서 본 게 아니었을까. 그후 문정숙은 최은희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주연과 조연으로 영화에 꾸준히 출연해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이만희 감독을 만나다

    그리고 그녀는 운명적으로 감독 이만희를 만난다. 이만희 감독은 군복무 시절 문정숙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보고 ‘제대한 뒤 꼭 문정숙을 여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만희는 제대 후 연출부 생활을 거쳐 능력을 인정받아 감독으로 데뷔한 후 세 번째 영화 ‘다이얼 112를 돌려라’(1962)를 만들며 문정숙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당시 인기와 연기력에서 최고의 여배우는 단연 최은희였다. 그렇다면 이만희 감독은 왜 최은희가 아니라 문정숙을 선택했을까. 최은희가 신상옥 감독의 프로덕션 소속이라 다른 영화사 작품에 출연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문정숙에게는 최은희가 갖지 못한 어두움과 우수의 이미지가 있었다. 최은희는 낮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에서도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의 고통을 표현한 양공주였을 뿐, 음습하고 우수에 찬 어둠의 고통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문정숙은 완벽한 밤의 여자였다. 그녀가 표현하는 고통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이만희 감독은 그것을 간파해 그녀를 악랄하고 더러운 세 남자의 흉계 속에서 고통받는 여주인공으로 선택했다. ‘다이얼 112를 돌려라’는 흥행에 성공했고, 김진규·최은희 콤비, 최무룡·김지미 콤비에 이어 장동휘·문정숙 콤비라는 말이 그때부터 나왔다.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2)에서 문정숙이 연기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남편과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깡패 시동생, 양공주가 되는 시누이 사이에 낀 지옥과도 같은 가난 속에서 끝내 비극적 최후를 맞는 김진규의 아내 역도 인상 깊지만, 문정숙이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연기자임을 증명한 영화는 역시 ‘검은 머리’(이만희 감독, 1964)였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문정숙

    창녀들이 비닐우산을 들고 서성이는, 비 내리는 어두운 뒷골목. 술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들이 욕정의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지나간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자신을 사줄 남자를 찾는 여자들의 맨 뒤, 어두운 골목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다른 창녀들처럼 호객행위도 하지 않고 조용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저래서 장사가 되겠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무리 술 취한 남자라 해도 어둠 속에 숨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 리 없다.

    어둠 속의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남자들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여자들을 뿌리치고 굳이 어둠 속의 여자에게 다가간다. 남자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여자의 얼굴엔 남자를 끌어들였다는 승리감에서 나온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미소는 사라지고 공포로 가득한 얼굴이 된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이 선택됐다는 뿌듯함 뒤에 나타난 공포의 정체는 뭘까.

    어둠 속의 매력

    여자는 과거 암흑가의 두목이던 장동휘의 아내였다. 그녀는 잠깐의 실수로 아편쟁이의 마수에 걸려 몸을 빼앗기고 그의 협박에 못 이겨 마약 살 돈과 몸을 바꾸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중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장동휘의 부하들에게 발각된 뒤 그녀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그들은 깨진 술병으로 그녀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고 쫓아낸다.

    이후 그녀는 거리의 여자로 살아간다. 그녀는 항상 끔찍한 흉터를 가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다. 그것이 어둠 속에서는 묘한 매력이 된다. 그러나 그녀를 사려고 다가온 남자들은 얼굴의 흉터를 발견한 뒤에는 발길을 돌리거나 속았다며 환불을 요구한다. 그녀를 때리는 남자도 있다. 남자를 끌어들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얼굴의 흉터를 본 남성들의 반응 때문에 그녀는 늘 두려움에 떤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문정숙이 최고의 연기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감독과 제작자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 이례적으로 문정숙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렸다. 남자주인공 장동휘의 이름은 그 밑에 있다. 지금도 영화 크레딧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는 것에 주연 배우들은 여간 예민한 게 아니다. 하물며 50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대배우 장동휘마저 문정숙의 존재감을 인정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영화 ‘만추’의 한 장면.

    다음 해인 1965년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승승장구하던 이만희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문정숙에게도 그 여파가 미쳤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칠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법정에 선 것이다. 감독은 실형을 살고, 영화는 압수되어 네거필름이 사라졌다. 난도질된 영화는 제목까지 ‘돌아온 여군’으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일주일간 상영된 뒤 소리 없이 자취를 감췄다. 암흑 시대였다.

    얼마 후 출감한 이 감독은 수감되느라 촬영이 중단됐던 ‘흑룡강’(1965)을 마무리하고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문정숙 주연의 영화 한 편을 만드는데 그것이 ‘시장’(1965)이다. 그는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던 고통을 영화로 표현하는데, 그건 문정숙만이 할 수 있는 연기였다. 시장바닥을 떠도는 미친 여자 문정숙을 통해 이만희는 정상이 아닌 미친 여자가 오히려 정상적이고, 정상적이라 생각되는 시장 상인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음모와 추잡스러운 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이 영화를 촬영하다가 이만희는 우연히 감방 동료를 만나게 된다. 이만희는 탈옥을 했나 싶어 깜짝 놀랐지만, 그는 모범수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휴가를 받아 나온 것이라며 이만희를 안심시킨다. 그때 이만희의 머리에 반짝하고 떠오른 게 있었다. 오랜 수감생활 도중 휴가를 나오는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그리고 문정숙을 쳐다봤다. 휴가를 나온 죄수는 여자다!

    ‘만추’, 전설이 되다

    그리하여 문정숙과 이만희의 최고작이며, 영원히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는 전설의 영화 ‘만추’(1966)가 탄생하게 된다. 이제는 영화의 줄거리와 트렌치코트를 입고 쓸쓸하게 낙엽이 뒹구는 창경원에 선 문정숙의 스틸 사진 몇 장으로만 남아 있는 영화 ‘만추’가 개봉하자 평론가와 관객 모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30대 후반의 원숙한 여인을 그려낸 문정숙의 연기는 당대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는 호평을 받았다. ‘만추’는 여러 나라에 수출됐는데, 충무로의 제작사는 프린트를 뜰 돈이 없어 별생각 없이 영화의 원본인 네거필름을 수출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렇게 해서 영화 ‘만추’의 프린트와 네거필름 모두 사라져버렸다. 원통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문정숙의 농익은 연기가 이만희 감독이 그 이듬해 만든 ‘귀로’(1967)에서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문정숙이 주연한 영화 중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 영화를 꼽으라면 영화인 대부분은 ‘귀로’와 ‘검은 머리’를 꼽는다.

    서울역사 지붕이 올려다보이는 서울역 지하로를 향해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인이 걸어온다. 흑백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놀랍게도 그녀의 우수에 찬 분위기에 감염돼버린다. 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울역 지하도를 나와 서소문의 건널목에 서서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여전히 뒷모습인 그녀는 기차가 지나가자 서소문의 신작로를 따라 걸어서 시청이 내려다보이는 덕수궁 앞의 육교를 건너고 신문사로 들어간다.

    남편 김진규는 소설가다. 그녀는 날마다 남편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전하기 위해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시청 앞의 신문사를 다녀간다. 그녀는 지나간 자국마다 독특한 페로몬을 남긴다. 우울의 페로몬. 신문사의 젊은 신입기자가 그녀에게 반해버린다. 중년 여성의 원숙함에 우울한 어둠이 더해졌으니 세상의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반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우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남편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사랑과 신념을 과신했다. 사랑으로 남편의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고, 내가 선택한 이 남자를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며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14년을 버텨냈다.

    하지만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오고 있다. 미친 듯 군가를 부르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남편.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며 쫓아다니는 젊고 잘생긴 청년. 자신이 선택한 신념, 그리고 육체가 원하는 정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문정숙의 감정은 쓸쓸하게 오가는 서울역 지하도와 서소문 건널목, 그리고 시청 앞 육교를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묵직하게 전해온다. 그녀는 영화 속 캐릭터가 가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적당한 고통의 무게만큼을 짊어지고 걷는다. 그리고 인상적인 명장면들이 등장한다.

    젊은 기자와 문정숙이 껴안고 서로의 살 냄새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키스를 하고 싶은 욕망과 선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신념.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적막 속에서 문정숙의 입술이 움찔거리지만 남자의 입술에 다가가지 못하는 극도의 긴장감.

    ‘영화’ 같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라스트. 안개가 낀 인천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문정숙의 뒷모습. 그녀는 젊은 남자와 하룻밤 정사(情事)를 벌인 후 남편을 떠나기로 하고 짐을 챙기러 온다. 집 안에는 그녀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시누이와 술에 취해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죽은 듯 자고 있는 남편이 있다. 자기 방으로 들어온 문정숙은 화장대에 앉아 천천히 립스틱을 다시 칠하고 눈썹에 마스카라를 바른다. 마스카라의 솔에 눈썹이 걸려 살짝 당겨진다. 아프다. 기차표를 사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향한 마음과, 자신이 세운 윤리가 허물어진 절망감을 그녀는 마스카라를 칠하는 손길과 눈썹으로 표현한다. 이 멋진 장면은 1980년 ‘애마부인’에서 표절되지만, 문정숙이 표현했던 갈등의 긴장감을 따라갈 순 없었다.

    현실에서도 그 시기 문정숙은 이만희 감독과의 사랑과 어머니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했고, 그녀는 결국 남편과 이혼한 후 이만희 감독과의 결혼도 포기하고 아들을 택한다. 그 후 이만희 감독이 새로 발굴한 젊은 여배우 문숙과 동거할 때 문숙은 우연히 국립극장 여배우 분장실에서 문정숙과 마주친다. 문숙이 문정숙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문정숙은 소리 내어 흐느꼈다. 문정숙과 이만희 콤비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만희 감독이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후인 1978년. 문정숙은 영화 속 콤비 장동휘의 아내로 영화 ‘경찰관’(이두용 감독, 1978)에 출연한다. 파출소장 장동휘가 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안방에서 문정숙이 나와 맞이하고 밥상을 차려낸다. 된장찌개를 떠먹는 장동휘를 말없이 바라보는 문정숙. 범죄자들에게 호랑이로 불리는 우락부락한 장동휘는 편안하고 곱게 나이 든 아내의 품에서 양처럼 순하게 변한다.

    나는 이 식사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남녀 배우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배려하며 관객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연기한다. 이런 게 최고의 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정숙은 2000년 세상을 떠난다. 떠나기 4년 전인 1996년까지 매해 한두 편의 영화에 크고 작은 역으로 출연했다.

    어떤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지는 한마디 말로 정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문정숙은 얼굴과 몸이 아니라 극중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연기한 배우라는 것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편안한 연기를 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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