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美 연준 맞서 ‘마이 웨이’ 빈사의 EU 살리기 올인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3-08-20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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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출범 후 줄곧 유럽 경제의 양대 강국 독일과 프랑스 출신 인사가 좌우하던 유럽중앙은행(ECB)이 2011년 11월 마리오 드라기를 새 수장으로 맞았다. 부채가 많고 부패가 심한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는 장기대출 프로그램(LTRO), 단기국채 무제한매입(OMT) 등 이름조차 생소한 ‘비(非)전통적 통화정책’을 쏟아내며 남유럽 부도위기로 벼랑 끝에 몰린 유럽 경제를 진정시켰다.
    美 연준 맞서 ‘마이 웨이’ 빈사의 EU 살리기 올인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7월 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오랫동안 부양 기조를 유지할 것이다. (미국과 달리) 우리에겐 출구전략이 아직 먼 미래의 얘기다. 이에 따라 향후 상당기간 유로존 금리를 현 수준 또는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 유지할 것이다. 여기에는 마이너스 금리도 포함된다.”

    2013년 7월 4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이 말에 세계 주요국 주식시장이 급등했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FRB) 의장이 6월 19일 “미국 경제가 연준의 전망대로 간다면 올해 하반기 중에 자산 매입 축소를 검토하고 내년 중반쯤 자산 매입을 중단하겠다”며 양적완화 정책 중단을 시사한 지 약 2주 만이다. 버냉키 발언 후 주요국 주가가 하락하고 환율과 금리가 급등하는 등 이른바 ‘버냉키 쇼크’가 발생했지만, 드라기 총재의 발언에 시장은 환호로 답했다. 그는 2011년 11월부터 유럽 경제의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계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4대 중앙은행으로 미 연준, 유럽중앙은행, 일본은행(BOJ), 영란은행(BOE)을 꼽는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최근에는 중국 인민은행(PBOC)까지 포함해 5대 중앙은행을 거론하기도 한다. 다만 5대 중앙은행이라고는 해도 슈퍼 강대국 미국 경제의 위력 때문에 연준의 위상과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미국 중앙은행장인 연준 의장이‘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럼에도 드라기 총재는 최근 세계 금융시장에서 버냉키 연준 의장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신중하고 정제된 발언을 하는 일반적인 중앙은행장과 달리 그는 유럽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기 총재는 1990년대 이탈리아 재무장관으로 일할 때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이탈리아를 정부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등의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으로 구해내 ‘슈퍼마리오’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총리가 잇따라 교체되는 정치불안 속에서 국가부도 직전까지 내몰리는 위기 상황이었다. 드라기는 마치 폴짝폴짝 좌충우돌하면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닌텐도 게임 속의 슈퍼마리오처럼 난관을 극복해나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이런 그가 큰소리를 쳐댔으니 기대감이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세계경제가 드라기를 주시하는 이유다.



    MIT 박사 출신 테크노크라트

    드라기 총재는 1947년 9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사피엔자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6년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버냉키 연준 의장과 그는 MIT 경제학박사 출신의 정통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라는 공통점이 있다.

    MIT 시절 드라기의 스승은 두 명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다. 드라기처럼 이탈리아 출신으로 198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프랑코 모딜리아니 교수와 198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솔로 교수다.

    이 중 모딜리아니 교수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강력하게 반대하며 기업 가치는 부채와 자기자본비율이 아니라 수익률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이는 1980년대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대규모 인수합병(M·A)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드라기 역시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 재무장관 시절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세계적인 석학들을 사사하며 경제학계의 엘리트로 성장할 준비를 마친 드라기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잠시 교수 생활을 했다.

    드라기 총재가 본격적인 테크노크라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세계은행(WB)과 연을 맺으면서부터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세계은행의 이탈리아 이사로 재직한 그는 당시 사실상 세계은행의 2인자로 활동하며 관료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이탈리아보다 국력과 경제력이 강한 나라가 여럿임을 감안할 때 이탈리아 출신이 국제기구에서 이토록 두각을 드러낸 예가 없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는 1991년 마흔넷의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의 재무장관이 됐다. 그가 발탁됐을 때 아무도 그가 2001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재무장관을 지낼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 경제가 재정 파탄의 벼랑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취임하자마자 통신, 에너지, 금융 부문의 민영화를 주도하며 천문학적이던 재정적자를 줄였다. 당시 이 세 부문이 이탈리아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를 차지했고, 민영화에 따른 정치권 및 노동자 반발이 극심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뚝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슈퍼마리오’ 별명을 얻은 드라기는 2002년 골드만삭스의 국제 업무 담당 부회장으로 스카우트되어 3년간 ‘골드만맨’으로 근무하며 세계 금융계에 막강한 인맥을 구축했다. 골드만삭스는 미국 재무장관만 3명을 배출했을 정도로 세계 금융계의 첫째가는 파워 집단이다. 조지 부시(아들) 정권의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 클린턴 정권의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1960년대의 명재상 헨리 파울러 전 재무장관을 비록해 조슈아 볼턴 전 백악관 비서실장, 로버트 졸릭 전 세계은행 총재, 아서 레빗 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존 테인 전 메릴린치 최고경영자(CEO) 등이 미국 경제의 대표적인 골드만 인맥이다.

    막강한 국제금융계 인맥

    지난 7월 318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最古)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사상 첫 외국인 총재로 취임한 마크 카니 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도 13년간 골드만삭스에서 근무했다. 드라기는 내년 1월 임기가 종료되는 버냉키 연준 의장의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머스 전 장관은 드라기의 모교인 MIT 교수를 지낸 바 있다.

    2006년 1월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에 오른 드라기는 주요 20개국(G20) 산하 금융안정화포럼(FSF) 의장을 겸임하며 글로벌 금융안전망 확충에도 주력했다. 이때 3년간의 골드만 인맥이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중앙은행의 존립 이유인 물가 안정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인플레이션은 마치 토마토소스와 스파게티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탈리아의 인플레이션이 심했지만, 적절한 금리 인상으로 물가 상승 우려도 잠재웠다.

    2010년 4월 그리스의 구제금융 신청으로 유로존(EU 가입 28개국 중 유로화를 자국 통화로 사용하는 17개국) 재정위기가 처음 불거졌을 때도 드라기의 국제감각이 빛을 발했다. 유럽 제일의 경제대국은 당초 그리스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면 유럽 경제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며 독일 등 EU 주요국을 설득해 그리스 구제금융을 주도했다. 이때 그를 눈여겨본 많은 사람의 지지는 1년 후 ECB 총재 선임에 큰 힘이 됐다.

    드라기가 이처럼 워낙 쉴 새 없이 화려한 경력을 쌓아온 탓에 일부 이탈리아 언론은 그를 ‘미스터 어딘가 다른 곳에(Mr. somewhere else)’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항상 지금의 직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나려 한다는 점을 비꼰 별명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그만큼 화려한 학력, 풍부한 실무 및 정책 경험,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했으며 성공을 위해 강한 야망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드라기는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가 됐을 때부터 ECB의 수장 후보로 심심찮게 거론됐다. ECB 총재는 28개국(올해 7월 1일자로 가입한 크로아티아 포함), 인구 약 5억 명에 달하는 거대 공동체 유럽연합의 정책 금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할 뿐 아니라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에 대한 구제금융과 은행 유동성 위기 대처 등에서도 핵심적인 임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회원국의 경제 규모 격차가 워낙 크고 독일, 프랑스 등 역내 강대국 간의 경쟁이 치열해 어지간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버텨내기 힘든 자리다.

    난파 위기 ECB 구원투수

    美 연준 맞서 ‘마이 웨이’ 빈사의 EU 살리기 올인

    드라기 총재가 6월 27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 참석하러 가고 있다.

    드라기는 2011년 6월 ECB 총재로 뽑혔고 같은 해 11월 공식 취임했다. 당시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악셀 베버 총재가 유력했으나 베버 총재 본인이 공직보다는 민간 금융회사 취업을 선호해 무난히 총재로 선출됐다. 베버 총재는 현재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CB 일각에서는 드라기가 국가부채 비율이 높고 인플레이션 관리도 불안정한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그를 반대하기도 했으나 EU의 양대 강국인 독일과 프랑스가 그의 능력, 경험, 네트워크에 만족을 표시해 일찌감치 낙점됐다.

    당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드라기가 실무와 정책 경험을 모두 갖추고 있다며 “그의 경력과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고 호평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도 “드라기는 이탈리아 국적을 내세우지 않는다”며 “그가 이탈리아의 이익을 위해 유럽을 흔드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옹호했다. ECB 관계자들도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각자 이해가 다른 ECB 내 각국 대표들의 의견을 통합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라며 그를 반겼다.

    역설적으로 드라기의 ECB 총재 선출은 유럽 재정위기의 심각성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여진이 가시기도 전인 2010년 4월 그리스의 구제금융 신청으로 비롯된 유로존 재정위기, 즉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키프로스 등의 막대한 국가부채와 높은 실업률에 따른 혼란 상황은 3년이 지났는데도 갈수록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유럽 재정위기가 핵심 4개국인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일시적 위기에 그칠 것이라는 초기 전망과 달리 독일, 프랑스 등 EU 내 우등생 국가로도 서서히 번져갈 조짐을 보이며 세계경제 전체의 성장동력을 끌어내리고 있다.

    자신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듯 드라기 총재는 취임 한 달 만인 2011년 12월과 2012년 2월 2회에 걸쳐 무려 1조 유로의 3년 만기 장기대출 프로그램을 유로존 금융기관에 제공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국채 금리가 계속 치솟자(=채권가격 하락)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유로존 회원국이 구조조정 조건을 수용하면 이들의 국채를 무제한 매입해주겠다는 OMT(Outright Monetary Transac-tions)까지 발표했다. OMT 지원을 받은 국가는 아직 없다. ECB가 유로존 위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겠다고 발표하자 그 발표만으로도 금융시장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드라기의 진가가 확실하게 드러난 순간은 2012년 7월이다. 스페인의 구제금융 신청 루머 등으로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가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면서 유럽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던 때다. 드라기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강조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필요하다면 ECB가 직접 위기를 맞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채를 사들일 수도 있다. 나를 믿어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진정한 ‘게임 체인저’

    ECB 수장의 적극적인 경기부양 의지에 금융시장은 반색했다. 그의 발언 직후스페인과 이탈리아 증시가 5~6%씩 폭등했고, 유럽 주요국의 국채 가격도 올랐으며, 무엇보다 유로화 가치가 상승했다. 지난해 7월 1.2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유로/달러 환율은 드라기 발언 후 지난해 연말 1.31달러대까지 상승했다. 그러자 파이낸셜타임스는 ‘2012년 올해의 인물’로 드라기 총재를 선정하며 “그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유로를 구했다”며 “진정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어떤 일의 결과나 흐름, 판도를 뒤집을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라고 치켜세웠다.

    드라기 총재의 존재감과 위상은 올해 들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6월 19일 미 연준이 내년 중반까지 양적완화 정책을 중단하겠다는 소위 출구전략(Exit Strategy)를 언급하면서 회복 기미를 보이는 미국과 달리 아직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유럽 경제가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단 드라기 총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격적이고 과감한 발언으로 유럽 금융시장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다. 7월 4일 발언에서 보듯 ECB의 저금리 기조를 분명히 하면서 경기부양을 위해 추가 금리인하를 단행할 가능성도 내비쳤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실물경기 회복 조짐에 근거한 반면, 유럽은 아직 실물경기 회복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섣불리 미국의 출구전략을 따라 했다가는 경기회복이 더욱 어려워지고 심지어 새로운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조치다.

    유럽 경제의 어려운 상황은 경제지표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럽연합의 공식 통계기관인 유럽통계청(유로스타트)은 올해 5월 유로존의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 분기에 비해 0.2%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유로존 경제는 2011년 4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이후 6개 분기(1년 반)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나타냈다.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만 이어져도 ‘경기침체(recession)’로 평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유럽 경제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다. 지난해 4분기에 유로존 GDP가 0.6% 감소한 이후 올해 초 일부 경제지표가 회복되는 양상을 보여 경기가 바닥을 친 것 아니냐는 기대가 나오기도 했으나 1분기 통계를 보면 여전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완연하다.

    급한 불은 껐지만…

    지금까지는 드라기 총재가 성공적으로 ECB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지만 그가 직면한 어려움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우선 부동산시장 붕괴와 금융시스템 문제가 경제위기의 주원인인 미국에서는 경기부양을 위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실물경기 회복을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반면 각국 정부의 천문학적 재정적자로 불거진 유럽 경제위기는 통화정책으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뒤따라야 하지만 그리스 시위 사태, 1998년 외환위기 직후의 한국에서 보듯 이 방법은 국민의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기에 시행하기가 만만치 않다. 결국 이런 한계 때문에 재정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단일 국가, 단일 통화를 쓰는 미국과 달리 무려 28개국이 가입해 있고, 그중 17개국만 유로를 쓰는 EU의 복잡한 현실도 문제다. 다음의 농담은 이런 유럽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탈리아 사람, 포르투갈 사람, 그리스 사람이 술집에 갔다. 과연 술값은 누가 냈을까?” 정답은 ‘독일사람’이다.

    재정위기 발발 후 유럽 각국은 유로안정화기구(ESM),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이라는 구제기금을 마련해 부도 위기에 놓인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식으로 급한 불을 꺼왔다. 문제는 이 기금 마련이 독일, 프랑스 등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약 7500억 유로(1092조 원)에 달하는 두 기금의 최대 출연국인 독일에서는 “일도 안 하고 놀기만 하다 부도위기를 맞은 그리스 사람들을 위해 왜 우리 세금을 써야 하느냐”는 불만이 높다.

    유럽 재정위기의 또 다른 해결 수단으로 평가받는 ‘유로본드(유로존 국가가 공동 발행하는 국채)’에 대해 독일이 떨떠름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 규모와 정부 재정 상태가 판이한 독일과 그리스가 발행한 국채가 동일한 금리를 지닌다는 것은 경제학 논리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각 나라가 같이 유로본드를 발행해도 결국 궁극적인 상환 위험은 독일이 부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한 상황이다.

    금리 인하나 국채 매입과 같은 ECB의 통화정책 또한 물가 안정이 근본 임무인 중앙은행의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막대한 돈을 풀어 일시적인 시간을 벌어줄 뿐 본질적인 시스템 개혁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는 의미다. 땜질 처방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적인 처방을 내놓고 유럽 경제 시스템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지금, 드라기 총재가 슈퍼마리오라는 별명에 걸맞은 새로운 해법으로 유럽 경제를 구할 수 있을까. 드라기는 이제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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