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을 가다④

  • 도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07-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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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넵콘 재팬 2023’에서 느낀 일본의 자신감

    • “전공정만큼 후공정도 중요한 시대 온다”

    • 일본이 소재 장비에 강한 이유, ‘장인 정신’

    • 한국이 반도체 강국 된 이유, ‘과감함’

    • “A부터 Z까지 모두 아우르는 나라 없다”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미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 산업 질서를 재구축하고, 게임의 룰(rule)을 바꾸려 한다. 동맹국에 보조금 당근을 내밀며 기술과 이익 공유까지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으로 외국 기업 공장을 유치하고 무엇보다 미국·대만과 똘똘 뭉쳐 협업 체계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들만큼 절박하게 뛰고 있는가.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의 목소리를 전문가 인터뷰를 중심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美·대만과 뭉쳐야 산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② 원스어게인? ‘일장기 반도체’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③ “삼성에 뒤처졌는데 도요타까지 현대차에 밀린다”
    ④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上
    ⑤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下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2023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한국 코엑스라고 할 수 있는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넵콘 재팬(NEPCON Japan) 2023’ 현장. 후공정 장비 재료 업체들만 참가하는 전시로 1400여 개 회사가 총출동했다. 올해로 37회를 맞은 이 전시는 아시아 최대 규모 전기 전자 설계 R&D 및 제조·패키징 기술 전시회다. 전시장은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후공정 분야만큼은 일본이 반도체 왕국이 돼야 한다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북적였다. [도쿄=허문명 기자]

    2023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한국 코엑스라고 할 수 있는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넵콘 재팬(NEPCON Japan) 2023’ 현장. 후공정 장비 재료 업체들만 참가하는 전시로 1400여 개 회사가 총출동했다. 올해로 37회를 맞은 이 전시는 아시아 최대 규모 전기 전자 설계 R&D 및 제조·패키징 기술 전시회다. 전시장은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후공정 분야만큼은 일본이 반도체 왕국이 돼야 한다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북적였다. [도쿄=허문명 기자]

    반도체칩을 만드는 원판인 웨이퍼를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장비 중에 ‘석영 도가니’라는 게 있다. ‘도가니’라고 하면 흔히 ‘도가니탕’이나 ‘흥분의 도가니’ 할 때 쓰는 말이 연상되는 데 ‘쇠붙이를 녹이는 우묵한 그릇’이라는 뜻도 있다.

    석영 도가니는 실리콘을 녹일 때 쓰는 용기다. 1500℃ 고온에서 실리콘을 녹이면 고순도 실리콘 용액이 만들어지는데 이걸 소시지처럼 둥근 막대 모양(잉곳·ingot)으로 식혀 균일한 두께로 썰면 웨이퍼가 된다. 석영 도가니 없이는 웨이퍼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장비 중 하나다.

    반도체칩을 만드는 원판인 웨이퍼를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장비인 ‘석영 도가니’. 실리콘을 녹일 때 쓰는 용기다. 일본의 신에츠 석영, 제이에스큐(JSQ) 같은 회사들이 독점적으로 세계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반도체칩을 만드는 원판인 웨이퍼를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장비인 ‘석영 도가니’. 실리콘을 녹일 때 쓰는 용기다. 일본의 신에츠 석영, 제이에스큐(JSQ) 같은 회사들이 독점적으로 세계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 장비를 만드는 데 최고 기술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2021년 관세청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석영 도가니 수입 물량의 전량이라고 할 수 있는 99%를 들여왔다. 신에츠 석영, 제이에스큐(JSQ) 같은 회사들이 독점적으로 세계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반도체산업이 커짐에 따라 수요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엑셀런트 인사이트(Xcellent Insights)는 2021년 기준 2억9532만 달러로 추산되는 석영 도가니 시장이 매년 3.11%씩 성장해 2027년에는 3억5489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치를 내놓았다.

    후공정 왕국의 힘 보여준 ‘넵콘 재팬 2023’

    기자는 2023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한국 코엑스라고 할 수 있는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전자부품 박람회 ‘넵콘 재팬(NEPCON Japan) 2023’ 현장에 다녀왔다.

    바로 한 달 전에 열린 ‘세미콘 재팬(SEMICON JAPAN 2022년 12월 14~16일)’이 반도체 전(前)공정, 후(後)공정에 들어가는 모든 장비와 재료를 아우르는 종합 전시회였다면 ‘넵콘 재팬’은 후공정 부분에 특화된 전시회였다.

    반도체 공정은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뉘는데 통상 반도체 공정은 전공정을 일컫는다. 웨이퍼에서 칩을 만드는 공정이다. D램은 물론 로직칩(시스템반도체)을 생산하는 파운드리는 모두 전공정이다.

    후공정은 ‘패키징’ 공정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포장’이다. 초코파이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포장을 하지 않으면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듯 반도체칩도 마찬가지다. 흔히 포장이라고 하면 상자나 봉투에 담아 밀봉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는데 반도체 포장은 매우 특별하고 복잡하다.

    전공정을 마친 한 장의 웨이퍼 위에는 수백 수천 개의 칩이 새겨진다. 이걸 쪼개면 개별 칩이 완성된다. 이 칩은 그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외부에 노출되면 물과 빛, 충격 등에 손상될 수 있고 칩들을 스마트폰이나 PC, 서버(대형 컴퓨터) 같은 최종 전자제품에 쓰려면 해당 제품의 규격에 맞게 전기신호가 오갈 수 있도록 별도 배선도 만들어줘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패키지 공정이다.

    반도체칩 경쟁이 얼마나 ‘더, 더, 더’ 작게 만드느냐 하는 ‘미세화 경쟁’으로 가면서 한동안 기술에 대한 관심은 전공정에 집중돼 왔다. 후공정은 상대적으로 기술 진입 장벽이 낮고 투자 필요성이 적은 영역으로 인식됐다.

    요즘에는 칩 성능이 발전함에 따라 후공정에서도 높은 기술력이 요구된다. 이제는 칩의 성능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영역이 됐다. 칩의 다양화와 함께 다양한 패키지 기술이 요구되고, 미세화가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칩 자체 성능을 개선시키기보다 완성된 여러 개의 칩을 잘 이어 붙이거나 쌓아서 성능을 개선시키는 패키징 공정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기요시 일본반도체기기협회ISEAJ) 전무. [도쿄=허문명 기자]

    와타나베 기요시 일본반도체기기협회ISEAJ) 전무. [도쿄=허문명 기자]

    전공정을 통해 이뤄졌던 칩 성능 향상이 패키징 다양화를 통해 이뤄지면서 후공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관련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후공정 중요성이 전공정 못지않게 커진 것이다. 사단법인 일본반도체기기협회(SEAJ) 와타나베 기요시 전무도 기자와 만나 “반도체칩의 초미세화는 이제 한계가 오고 있다. 앞으로 3~4년 내에는 전공정 못지않게 후공정이 중요한 기술로 대두할 수 있기에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올 초 기자가 찾은 ‘넵콘 재팬 2023’은 후공정 장비 재료 업체들만이 참가하는 전시로 1400여 개 회사가 총출동했다. 올해로 37회를 맞은 이 전시는 아시아 최대 규모 전기 전자 설계 R&D 및 제조·패키징 기술 전시회다.

    전시장은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후공정 분야만큼은 일본이 반도체 왕국이 돼야 한다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북적였다. 실제로 일본은 반도체 전공정에선 한국·대만에 참패했지만, 후공정 분야는 세계 최고 기업이 많다. 대표적으로 이비덴, 신코, 레조나크, 아지노모토 같은 회사들이다.

    일본에는 세계적 소재 부품 장비 회사가 많은데 칩을 기판에 얹는 첨단 기판을 만드는 이비덴도 그중 하나. 사진은 올해 1월 경북 포항에 공장을 증설한 이비덴 한국 공장 모습. 일본은 소부장 사태 이후 아예 한국에 공장을 짓는 사례가 늘었다. 일본 기후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비덴은 1912년 설립 이래 세라믹과 전자 관련 사업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으며, 특수탄소(흑연), 자동차 배기부품, 전자부품 기판, 프린트 배선판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비덴 홈페이지]

    일본에는 세계적 소재 부품 장비 회사가 많은데 칩을 기판에 얹는 첨단 기판을 만드는 이비덴도 그중 하나. 사진은 올해 1월 경북 포항에 공장을 증설한 이비덴 한국 공장 모습. 일본은 소부장 사태 이후 아예 한국에 공장을 짓는 사례가 늘었다. 일본 기후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비덴은 1912년 설립 이래 세라믹과 전자 관련 사업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으며, 특수탄소(흑연), 자동차 배기부품, 전자부품 기판, 프린트 배선판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비덴 홈페이지]

    이비덴과 신코는 칩을 기판에 얹는 첨단 기판 분야에서 세계 1, 2위다. 중저가 기판들은 중국 업체들이 잠식했지만, 서버용 최첨단 기판은 두 회사가 거의 독과점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 회사들은 칩들을 옆으로, 또는 위로 20층 이상 쌓아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어내는 분야에서 경쟁력이 가장 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지노모토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조미료 회사인데 기판에서 반도체를 쌓아 올릴 때 쓰는 필름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한층 한층 쌓을 때마다 중간에 ABF(아지노모토 빌드업 필름)라는 필름을 끼워 넣는데 대체재가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어드밴스트와 후지필름은 각각 반도체 검사 장비와 후공정 연마제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디스코(DISCO)라는 회사는 웨이퍼에서 칩을 잘라내는 ‘다이서’나 웨이퍼를 얇게 깎는 ‘그라인더’를 만드는 데 독보적 회사다.

    노광 과정에 꼭 필요한 포토레지스트(감광액)에서 독보적인 제이에스아르(JSR)나 티오케이(TOK) 같은 기업들도 있다. 이런 회사들이 없다면 인텔도, 삼성도, TSMC도 고부가가치 하이엔드(High-End) 칩을 만들지 못한다.

    ‘넵콘 재팬 2023’에는 이러한 독보적 반도체 장비 재료 업체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방 산업단지들이 10여 개 지방 중소기업을 모아 출전한 경우도 있었는데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에 기반한 이런 인력들이 장비 산업의 기반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전시회에 동행한 한국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장비 재료 업체를 탄탄하게 떠받치는 일본 중소 업체들을 보면 스포츠 분야에서 엘리트 체육 위주의 한국과 선수층이 두터운 일본 체육 환경이 겹쳐진다”며 “일본 정부는 일류 기업 밑에 작은 중소기업들에서 오로지 하나의 기술에만 매진하는 장인들을 엮어 컨소시엄까지 만들어주고 있다. 매우 세심하게 산업 기반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장인 정신이 빚은 소재 강국의 힘

    이즈미야 와타루 산교타임스 대표. [도쿄=허문명 기자]

    이즈미야 와타루 산교타임스 대표. [도쿄=허문명 기자]

    3편에 소개한 이즈미야 와타루 산교타임스 대표는 일본 반도체업계 소재 장비 분야에 대한 책인 ‘전자재료 왕국 일본의 역습’을 낸 바 있다.

    그는 반도체 전문 기자로서 제이에스아르(JSR 포토레지스트), 신에츠(웨이퍼), 후지필름(광학 필름), 닛폰 고도지 공업(콘덴서), 아사히 글라스(평판 디스플레이 기판), 교리츠 공업(액정 프레임 접착제) 등 수많은 업체를 탐방했다. 1년여 집중 취재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소재·장비업체들의 기업 철학, 생존 전략 및 성공 비결을 객관적 자료를 기반으로 파헤쳤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2019년 11월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술학회 초대로 방한해 ‘왜 일본 소재 산업은 강한가’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한 그를 도쿄 그의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그에게 “일본이 왜 소재 장비에 강한가”라고 묻자 자신의 집안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우리 집안은 메이지 시대부터 140여 년간 국숫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릴 적 우리 집 근처 공장에서 일하시던 어르신들이 한잔하러 오셔서 큰 소리를 치고 울고 웃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일본에는 우리 집안처럼 100년 이상 된 기업이 매우 많다. 일정 규모 이상 회사만 해도 1만5000여 곳 될 것이다. 전통 제과점·메밀국숫집 같은 소규모 자영업까지 합하면 10만 곳이 넘는다. 5000년 역사를 가진 중국에서도 100년 넘는 기업은 1000여 곳에 불과하다. 기술을 물려받고 사람을 물려받고 역사를 물려받는 나라, 이것이 일본의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일본제철만 해도 1901년 설립됐으니 올해 122년 됐다. 언젠가 이 회사 간부와 대화를 나누던 중 ‘10년, 20년 갖고 승부를 내는 건 시시하다. 100년을 걸고 하자!’라는 말을 들었다. 신일본제철은 한때 철강 분야 세계 1위였고, 현재도 자동차 강판 등의 첨단 제품에서 세계 제일의 기술력으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수출 규제에 맞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국산화를 국가 과제로 추진했는데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 정부 때부터 소부장 국산화를 내걸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품목마다 40~50년이 걸려도 좋으니 죽을 각오로 국산화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그는 일본이 소재에 강한 첫 번째 이유를 ‘잇쇼 겐메이’로 꼽으며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었다.

    “반도체 후공정이자 구리가 주원료인 리드 프레임(칩과 외부 회로 간 전기신호를 전달하고 외부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함) 분야에서 세계 1위인 스미토모 금속 광산은 1590년 설립된 이후 420여 년 동안 구리 정련과 세공에만 매달렸다.

    또 반도체용 다결정 실리콘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30%로 1위인 도쿠야마가 설립된 것도 1918년이다. 최근 수출 규제 품목이던 EUV(극자외선) 공정에 쓰는 포토레지스트(PR)를 만드는 JSR(1957)이나 신예츠케미칼(1926)도 각각 회사 역사가 60년, 90년이 넘는다.”

    그는 그러면서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후지필름에서 만난 사사키 이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소재 업체는 긴 개발 시간과 상품화하기까지의 시행착오 기간을 감수해야만 한다. 짧은 시간에 승부를 보려는 회사들은 소재 사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도 개발에 전력을 다했지만 몇 년간 전혀 성과가 없었다. 중소기업이었던 우리에게 매년 1억 엔의 개발비는 참으로 버거웠다’.

    사사키 이사의 말처럼 부품 소재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단순한 인내가 아닌 기업이 생존의 위협까지 가는 상황도 감수해야 한다. 소재 산업은 인내의 산업이다. 개발에서 상품화까지 10∼15년 걸리는 일이 다반사다.

    일본의 정보 전자 분야 소재 기업들은 100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며 오늘의 소재 강국을 이뤄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실험과 세세한 데이터를 철저하게 검사하고 기록하는 섬세한 감성, 품질에 대한 철저한 집착, 오로지 한 가지에만 매진하는 느림의 철학이 커다란 무기로 작용했다.

    탄소섬유를 개발한 도레이도 마찬가지다. 탄소섬유가 돈이 되기 시작한 건 투자한 지 41년째부터였다. 수익이 없어도 무려 40년이 넘도록 투자를 멈추지 않았고 개발자는 장인 정신으로 한 우물만 팠다.”

    한국의 소부장 국산화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반도체가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면 국산화를 추진하는 건 당연하다. 삼성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부장만 한해 약 2조 엔(약 20조 원) 정도 될 것이다. 반도체가 잘되면 대일 무역적자가 더 커지니 국산화 정책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돌다리도 두드리기 VS 썩은 다리라도 건너기

    ‘신중하게’라면 어떻게 하는 걸 말하나.

    “품목을 잘 선정해야 할 것이다. 국산화에 매진한다고 미세화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산업 자체 경쟁력이 손상받아선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7나노 이하 반도체를 만드는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PR)의 경우 반도체 업체마다, 업체 공정마다 최적화돼 있는 제품을 쓴다.

    2년 내 국산화를 한다고 해도 공정별로 장비별로 최적화하는 데 3년이나 5년을 잡아먹으면 결국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EUV 공정 경쟁력 자체가 떨어질 것이다.

    정치인들은 이걸 모르는 것 같다. 한국이 국산화를 하는 시간 동안 일본 업체들이 가만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은 더 멀리 가 있을 것이다. 일본이 소부장에 강하다고 분노하지 말고, 한국은 자신들이 더 잘하는 디바이스에 투자하는 게 지혜롭지 않을까.

    D램의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시장의 73%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 1위다. 이렇게 자신들이 가진 경쟁력을 고도화하는 데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중국의 굴기,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중국 시장의 침체에 대비해야 한다. 힘을 합쳐도 모자란데 싸울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일 간에 상호 보완과 협력이 중요하다.”

    이즈미야 대표는 이어 “지금을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기반이 되는 한국과 일본 기업이 만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일본 소재 업체들은 삼성전자·LG·인텔과 같은 세계 최고 기업들이 없었다면 성장하지 못했다. 일본 내 업체에만 의존했다면 사업 규모를 확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으로 얽힌 분업과 협업의 세계경제 체제에서 에이(A)부터 제트(Z)까지 모든 걸 아우르는 나라는 없다.

    삼성전자는 최고의 반도체 생산 기술을 끊임없이 개척해 갔고, 그 뒤를 받쳐준 것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준 일본의 소재·장비업체들이다. 일본의 소재 산업 성공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신중함의 산물이고, 한국의 반도체 강국 성공은 ‘썩은 다리도 건너본다’는 과감함이 낳은 결실이다. 일본의 강점인 소재 산업과 한국의 강점인 반도체산업이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屈起)에 대응해야 하는 게 상호 이익이다.”

    일본 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일본이 반도체 분야에서 참패했다 해서 일본이 진 것은 아니다. 지금 일본이 가는 방향은 로봇, 센서, 소재다. 반도체산업은 50년간 연 10%씩 성장했다. 앞으로 펼쳐지는 사물인터넷(IOT), 게임산업, 자율주행차 시대에 반도체산업과 소재 산업은 계속 확장할 것이다. 일본은 정보기술(IT)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사물인터넷(IoT) 혁명으로 기사회생을 노리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은 1300조 엔(1경3000조 원)인 에너지이고, 그다음 의료 560조 엔, 식료품 400조 엔, 자동차 300조 엔이다. 앞으로 열릴 사물인터넷 시장은 360조 엔 규모로 자동차보다 크다. 그만큼 충격도 클 것이다. 사물인터넷 세상에서는 45조 개 센서가 필요한데, 일본 업체가 현재 세계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일본이 비록 정보기술 분야에서는 구글, 아마존을 못 이기고 반도체에서는 삼성을 못 이긴다 해도 센서 분야와 세계시장의 60%를 차지하는 로봇에서는 경쟁력이 강하다.”

    *9월호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下’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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