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세대, 성별 아우르는 정서
사드 배치가 전환점은 맞지만…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야”
오래된 기억과 감정의 귀환
조선도 초기에 中과 안보 갈등
삼전도의 굴욕이 남긴 트라우마
‘中 절대 믿지 말라’던 김정일
韓 MZ와 中 MZ 간 충돌 이유
6월 19일(현지 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9차 중국공산당청년동맹 전국대표대회 개막식에 참석해 자리로 가고 있다. [베이징=AP 뉴시스]
2021년 6월 공개된 ‘시사인’ 717호에 실린 주변국 비호감도 여론조사 관련 기사 내용 일부다. 기사의 뉘앙스를 통해 일본보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게 나온 결과가 상당히 충격적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반중(反中)이 흡사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돼버린 2023년 지금은 이 조사 결과가 충격적이지도 놀랍지도 않다.
진영, 세대, 계층, 지역, 성별 등 온갖 영역에서 갈등과 분열로 찢긴 한국사회가 중국 관련 이슈만 터지면 거국적 국민통합을 이룬다. 가히 마법 같은 일인데, 그야말로 반중이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보편 상식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반중 정서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덮은 트렌드이긴 하지만, 2022년 퓨리서치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한국 내에서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는 80%를 넘을 정도로 독보적으로 높게 나오고 있다.
韓中 사이에 아주 짧았던 황금기
앞서 언급했듯 2년 전만 해도 달랐다. 일본보다 중국에 대한 반감이 크다고 하면 다소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반중 정서가 비교적 최근 발생한 트렌드라는 점을 의미한다.많은 사람은 반중 정서의 기원을 2016년 한·중관계를 강타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그에 뒤이은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 보복 조치를 꼽는다. 오늘날 반중 정서의 직접적 도화선이라는 면에서 타당한 의견이다. 그전만 하더라도 당시 집권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개인적 친분 등에 힘입어 한·중관계는 수교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또 양국 간 무역 및 경제 교류도 최고조에 달했던 만큼 사드 사태가 역사적 전환점이었던 건은 사실일 것이다.
사드 사태로 촉발된 한한령은 위대한 중화제국의 귀환을 내세운 시진핑 정권이 지역 패권국으로 나아가려는 야심과 축적된 국력을 한·중 수교 이래 한반도에 직접 투사한 거의 최초의 사례였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느끼는 충격은 매우 컸다. 그동안 무한 잠재력을 갖춘 거대 시장이자 수출을 통한 경제적 실익을 챙길 우호적 파트너 정도로만 여기던 중국이 힘을 통해 자국의 의지를 주권국가인 한국에 노골적으로 강요했으니 말이다. 한국이 몰랐다가 뒤늦게 깨달으며 경악한 중국의 대(對)한반도 인식은 2016년 당시 천하이 중국 외교부 아주국 국장의 발언에 요약돼 있다.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냐?”
만약 사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거나 시진핑 정권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한국 사회에 강력한 반중 정서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사람마다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설사 사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거나 시진핑 정권이 등장하지 않았다 해도 결국 언젠가 한국 사회에 반중 정서가 형성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한·중관계가 수교 이래 사드 사태 전까지 비교적 순탄했던 이유는 양국 간 이해관계가 일시적으로 일치한 데 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중국공산당의 지상과제는 경제발전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의 유훈 ‘도광양회’, 즉 ‘속내를 감추고 때가 될 때까지 조용히 힘을 기른다’는 방침에 충실한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가난하고 산업 발전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이 절실했던 중국에, 사업 기회를 보며 물밀듯 쏟아지는 한국 기업의 진출 행렬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며 노동시장의 인건비 상승 압박에 시달리던 한국 기업들 처지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저렴하고 질 좋은 노동력과 잠재력이 큰 거대 시장까지 제공하는 중국이 엘도라도였다. 한국과 중국은 수십 년간 상호보완적 국제분업 체계를 통해 막대한 혜택을 누리며 한·중관계 황금기를 보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중국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중국 스스로 자신들의 시대가 왔다고 확신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체제를 구축·운영하던 미국의 위상과 지위가 금융위기로 흔들리자 중국이 미국 패권에 도전하며 제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 중국이 일본, 동남아, 인도 등과 영토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 남중국해, 중국-인도 국경 지역 등에서 경제 보복 및 군사적 압박 등 상대를 거칠게 압박하며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다. 한·중관계 악화의 계기라는 사드 논란은 2016년 발생했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은 외려 중국이 변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고 볼 수 있다.
구한말 조선 엘리트의 경계심
초점을 확대해 보자. 한반도 역사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면 최근의 반중 정서는 오래된 기억과 감정의 귀환이라고 볼 수 있다. 100여 년 전 해양 세력을 등에 업고 동아시아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일본이 식민 지배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최대 안보 위협은 중원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대륙 세력이었다. 청일전쟁 패배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기 전만 해도 구한말 조선의 엘리트들과 애국지사들에게 조선 독립의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이 아니었다. 조선을 속국 취급하던 청나라였다. 독립협회가 서대문에 독립문을 지으면서 겨냥한 외세 역시 일본이 아니라 청나라였다. 이 사실은 일본의 침략이 임박한 구한말 시기에도 중국에 대한 경계심과 반중 정서가 얼마나 거셌는지 잘 보여준다.구한말 엘리트들이 갖고 있던 중국에 대한 경계심과 반중 정서는 단순하지 않다. 조선을 속국 취급하며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하던 청나라의 횡포와 조선 총독 행세를 하던 위안스카이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보면 임진왜란을 빼고는 안보 위협과 전쟁 위기가 항상 중국으로부터 왔으니 당연한 인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한무제의 침공과 뒤이은 한사군 건설로 멸망했고, 고구려는 수·당이라는 중국의 통일 제국에 연이어 침공당하면서 무너졌다.
당나라와 손잡았던 신라 또한 백제, 고구려 멸망 후 한반도 지배 야욕을 품은 당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다. 여기서 간신히 승리를 거둔 후에야 당나라를 한반도 밖으로 몰아내고 온전히 삼국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뒤이은 고려 또한 중국 북방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공에 시달렸다. 이후 29년간 이어진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고려는 사실상 몽골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고려는 국가 멸망으로 이어진 결정적 쇠퇴의 길에 접어들고 만다.
흔히 조선을 두고 중국에 대한 숭배로 대표되는 사대주의 외교 노선을 취했다고 한다. 그런 조선 역시 건국 초기에는 전쟁 직전 단계까지 갈 정도로 중국과 심각한 안보 갈등을 겪었다. 조선 건국 자체가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로 촉발됐는데, 이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뜻한 제2차 요동정벌 과정에서 불거졌다. 이후 신생국 조선에 대한 명 태조 주원장의 의심과 압박으로 인해 양국 간 긴장관계가 조성됐다. 이로 인해 제3차 요동정벌 계획이 본격화하기 전 터진 것이 우리에게 유명한 ‘왕자의 난’이다. 이 역시 또 다른 쿠데타 사건이었다.
“日은 백년의 적, 中은 천년의 적”
초기의 위기를 거친 후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던 한반도와 중국 간의 관계는 명·청 교체기에 접어들며 또다시 전쟁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만주에서 세력을 키워 성장한 신흥 강국 청나라는 기존 중화제국인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예방 전쟁 성격으로 조선을 두 차례나 침략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을 굴복시키고 명목상 신하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임금이 그간 오랑캐라 멸시한 여진족 황제에게 굴욕적 항복을 하게 되는 조선왕조 최대의 치욕, 즉 삼전도의 굴욕이 이때 터진다.삼전도의 굴욕은 조선의 집권 엘리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조선의 엘리트들에게 세계관 자체였던 성리학적 질서에 따르면, 오랑캐는 서열상 가장 낮고 문화적으로도 가장 열등한 존재다. 그런 그들에게 억지로 굴복하고 굴종을 강요당했다는 것은 너무나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일이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른바 북학파 지식인들이 실용적 관점에서 오랑캐에게도 배울 건 배우자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주류의 완고한 관점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되레 주류 엘리트들은 청나라에 더욱 불타오르는 적개심을 품게 됐다. 현실적 제약에 가로막힌 복수심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의 주류 엘리트들은 더욱더 관념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에 교조적으로 매달린다. 이렇게 현실에서 벗어나 더욱 폐쇄적이고 수구화된 길로 치닫던 조선은 결국 근대화의 시기를 놓치고 멸망의 길에 들어선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6·25전쟁을 거쳐 한국은 냉전 시기에 자유 진영에 속하게 된다. 그러면서 공산화한 중국 대륙과는 단절된 시기를 보냈다. 이 기간에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북한에 대한 적개심 때문인지 중국에 대한 과거의 불편한 기억과 강렬한 부정적 감정을 잊고 살게 됐다.
2019년 1월 10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김정은 당시 국무위원장(현 노동당 총비서)의 4차 방중 소식을 보도했다. 사진은 김 위원장이 그해 1월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노동신문=뉴스1]
현재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반중 정서는 시진핑이 소위 ‘중국몽(中國夢)’을 포기하지 않는 한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아니 되레 현재 시진핑 정권의 대외 노선을 고려하면 더 악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6월 19일(현지 시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에서 두 번째)과 만났다. 긴 테이블 한쪽에는 블링컨 장관을 포함한 미국 측 인사, 반대편에는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친강 외교부장(오른쪽) 등을 앉히고 자신이 상석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신화 [뉴시스]
한국은 오래전 조공 체계 벗어났다
중국은 자신들의 몰락이 시작된 아편전쟁 이전이 중국 역사의 ‘정상적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즉 동아시아의 종주국이자 유일 패권국으로 행세하던 수천 년의 시기 말이다. 해양 세력의 부상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 나타난 중국의 몰락과 침체는 장구한 역사의 시간표상에서 극히 일시적인 예외 시기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예외의 시기가 지나고 드디어 다시 역사를 ‘정상화’하기 위한 위대한 과정이 시작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중화민족을 위대한 부흥으로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올바른 지휘 아래 말이다.대한민국은 전근대 전통적 사대주의 관념과 중화제국의 조공 체계에서 벌써 오래전 벗어났다. 대신 서구의 근대적 세계관을 내면화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자유주의 시스템에 안착해 번영을 누려왔다. 그런 대한민국이 중국공산당이 재건하려는 시대착오적이고 위계적인 중화패권주의 질서를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미 한국인들은 글로벌 자유주의 시스템에서 한국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이룩한 놀라운 성취와 국제적 위상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누리고 있다. 자연히 성공한 주권국가로서 누리는 권리에도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힘을 통해 자신들의 패권적 지위를 한국에 강요할 경우 한국인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반중 정서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특히나 한국의 MZ세대는 장년 세대에 비해 일본에 대한 반감이 비교적 옅고 글로벌 마인드가 강한 편이다. 이들은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반중 여론을 주도할 개연성이 크다. MZ세대는 한국을 대하는 중국의 난폭하고 일방적인 행위뿐 아니라, 글로벌 자유주의 규범과 가치를 깨뜨리고 무시하는 중국의 행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중국에 동정적이었던 장년 세대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이는 한국의 MZ세대가 중국의 MZ세대와 온라인상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과 달리 중국의 MZ세대는 윗세대보다 더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