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의존이 불러온 치명적 결과 ‘디커플링’
美 ‘디리스킹’으로 선택적 디커플링 나서
캐논이 중국 철수? 여전히 핵심 생산기지
본질적 해결 불가능, 철저히 실리 따져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 14일(현지 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정상회담 직후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과의 신냉전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AP/뉴시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2000년대 초반 세계경제가 호시절을 누렸다는 의미에서 흔히 ‘골디락스 경제(goldilocks economy)’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 데 중국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은 많은 이가 동의하는 바다.
디커플링(decoupling)에서 디리스킹(derisking)으로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글로벌 경제 영향력 확대는 미국의 불만을 야기했다. 미국의 대(對)중국 무역적자는 2010년 이후 연간 약 3000억 달러 안팎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더구나 반도체, 인공지능(AI), 전기차 등으로 대표되는 미래 신(新)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도약하자 미국은 긴장했다. 이는 다양한 견제 조치를 낳는 결과로 이어졌다.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국이 세계의 공장 기능을 하지 못하자 글로벌 공급망은 붕괴됐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비상시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는 중국과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전략을 더욱 강하게 추진한 배경이다.
유념할 점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과의 디커플링 전략이 최근 들어 두 방향으로 나누어졌다는 점이다. 첨단산업을 대상으로 한 부문, 그 외 나머지 부문의 분리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 경제가 글로벌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 경제와 완전히 분리하기란 실행 가능하지 않다. 또 자국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디커플링 대신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과 ‘다양화(diversifying)’가 등장했다. 중국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디커플링 범위를 축소·집중하면서 중국 리스크를 관리하려는 취지다. 안보나 첨단기술 등에서만 선택적으로 디커플링하는 동시에, 공급망이나 에너지 전환은 중국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다변화하며 국내 산업을 육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 변화는 일부를 제외한 여타의 부문에서 중국과 교역 및 교류를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할 것임을 시사한다. 관세 부과 및 기술 수출 제한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대중 통상 압력이 수년째 지속됐는데도 2022년 양국 간 교역 규모는 전년 대비 5% 증가한 6906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대중국 수입액만 5000억 달러가 넘었다. 이는 중국 전체 수출 가운데 20%가 미국 수출이라는 의미다. 미국과 중국의 디커플링이 상당히 제한적인 부문에서만 이뤄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다.
中 ‘평판 경쟁력’ 무시 못해
6월 18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친강 중국 외교부장이 악수하고 있다. 회담 직후 블링컨 장관은 “미·중의 건전하고 강한 경제 교류는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된다”며 미국이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과 다양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밝혔다. [AP/뉴시스]
또 다른 예로 디지털 카메라 및 복사기 제조업체로 유명한 일본 기업 캐논(Canon)이 2022년 1월 중국 광둥성의 주하이(珠海) 지역에서 30여 년간 운영해 온 공장 문을 닫으며 수천 명의 직원을 해고한 일이 있다. 당시 한국 언론은 ‘주요 글로벌 기업들의 탈중국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캐논의 탈중국 현상이라기보다는 디지털 카메라 시장의 퇴조에 따른 경영 악화가 주원인이었다. 그러면 캐논은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했을까. 캐논은 2023년 7월 현재 광둥성, 랴오닝성 등 다섯 군데 공장에서 90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해 레이저 프린터 및 복합기 등을 생산하고 있다. 중국이 여전히 캐논의 핵심 생산기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글로벌 기업이 중국의 공급망을 통해 저렴하고 우수한 중간재를 생산 및 공급하는 상황에서 생산기지를 변경하는 것은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다. 중국과의 디커플링은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어렵고,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을 2019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수상자인 아브히지트 바네르지(Abhijit Banerjee)와 에스테르 뒤플로(Esther Duflo) 교수는 저서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Good Economics for Hard Times)’에서 ‘평판’의 역할을 들어 설명한 바 있다. 국제무역에서는 제품 가격, 좋은 아이디어, 낮은 관세장벽, 값싼 운송비뿐만 아니라 평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저렴하고 우수한 중간재 공급처로 중국의 평판 경쟁력이 매우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중국산 제품의 가격이 상당히 올라서 다른 나라의 가격경쟁력이 중국산 제품의 평판 경쟁력을 상쇄하지 않는 이상 다른 나라가 중국을 대체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대만 기업들의 사례에서도 이와 같은 이론은 잘 설명된다. 대만 기업들은 수출품의 절반 이상을 해외 생산기지에서 만드는데, 대부분의 공장이 중국에 있다. 2018년 기준 대만 해외 생산기지의 89.5%가 중국에 있었으나 2021년에는 82.2%로 7.3%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동남아시아 비중은 3.1%에서 6.2%로 두 배가량 증가했다. 대만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시도하고 있으나 그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핵심 원자재 중국에서 수입
한국은 주요 소재 및 원자재 등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문에서 대중국 수입 의존도가 높아 디커플링 전략을 추진하기 쉽지 않다. 현재 전기차 배터리용 흑연, 리튬, 니켈을 포함한 228개 핵심 수입품 가운데 약 80%를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달리 말하면 주력 제조업의 핵심 원자재 공급이 전적으로 중국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예를 들어 의료기기 및 반도체 생산에 활용되는 산화텅스텐, 2차전지 핵심소재인 수산화리튬, 전자제품의 소형화·경량화에 활용되는 네오디뮴 영구자석 등은 대중국 의존도가 75∼100%에 달한다. 2021년 하반기 중국에서 요소수 수입이 제한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일과 비슷한 사태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대중국 압력을 강화하면서 디커플링 전략을 밀어붙이는 부문이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첨단산업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한국·일본·대만에 제안한 ‘칩4(Chips4) 동맹’, 보조금이나 세액 공제를 받은 반도체 기업의 중국 내 공장에 대한 신규 투자 등을 엄격히 제한하는 ‘반도체 지원법’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기계, 철강, 의료용품, 비철금속 및 희토류 등과 상당수 생필품을 수입한다. 반면 반도체를 비롯해 전기전자 제품, 영상설비, 의료기기 등을 수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제안 혹은 압력은 주력 수출품에 대한 직접적 제한, 나아가 통제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중국의 시안 및 쑤저우에 반도체 공장이 있는 삼성전자나 다롄, 충칭, 우시에 공장이 있는 SK하이닉스 등은 중국 내 공장 설비 확장 등에 큰 제한을 받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이 같은 시도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중국은 미국이 형성하려는 반도체 포위망에 대항해 희토류뿐 아니라 반도체 설비와 전자기기에 필요한 첨단 부자재 공급 등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 반도체, 통신 제품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마그네슘, 게르마늄, 실리콘 메탈 등의 글로벌 공급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70∼90%로 거의 절대적 수준이다. 실제로 7월 3일 중국 상무부는 8월부터 반도체 웨이퍼 주요 생산 재료인 게르마늄과 갈륨의 수출을 통제할 것임을 발표했다. 미국의 제재 조치에 맞선 중국의 대응이 시작된 것이다.
변절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중국과의 디커플링, 즉 결별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한국에서 ‘중국 위협론’은 여전하다. 중국의 부상이 불러올 부정적 결과를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구체화되면 중국을 두려워하는 ‘차이나포비아(China-phobia)’, 중국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차이나 배싱(China Bashing)’ 등이 나타나게 된다. 이에 맞설 대중국 디커플링 전략에 관해 여러 주장을 할 수는 있지만 피상적 혹은 감정적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이런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한국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 미국과 중국이 단기간에 극단적 충돌 양상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앞으로 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의 블록화 경향이 강해질 것은 확실하다. 양 진영에서 추진하는 다양한 협력체와 기구에 중복 가입한 한국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변절자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슬기롭게 처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우선 미국이 실리적 이유에서 중국과의 디커플링 전략을 디리스킹 전략으로 바꾼 데 주목해야 한다. 일부 첨단산업을 제외한 부문에서 중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공존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신재생에너지 및 친환경 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장기적으로는 한국도 과거의 ‘All in China’ 혹은 ‘China+1’에서 벗어나 ‘n+China’ 혹은 ‘No China’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제다. 중국이 핵심 제조업 국가 및 소재·원료 공급 국가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담당하는 기능은 꽤 오랫동안 유지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확실하고 본질적인 해결 방법은 없다. 그나마 반도체산업 생태계에서 우리 기업들이 지닌 기술력과 위상을 배경으로 미국과 협상을 통해 법률 조항의 유예, 제한 예외 조치의 연장 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실질적 대응 방안의 하나라고 하겠다.
더 크고 시급한 문제는 반도체산업 공급망 통제 등 미국의 압력과 요구에 얼마나 잘 대응하느냐에 있다. 기술적 우위 여부가 국제정치의 패권을 좌우한다는 기정학(技政學·techno-politics)이란 용어도 등장한 상황에서 반도체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은 매우 복잡해졌다. 한국은 글로벌 반도체산업 구조상 생산에서는 미국의 기술이 필요한 동시에 수요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반도체 수출의 약 60%가 홍콩을 포함한 대중국 수출인 점을 고려할 때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잃을 경우 기업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미국의 요구에 불응할 경우 반도체 산업의 가치사슬에서 제외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 현실적 전략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