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 추락, 오은영 탓하기 전에…
체벌, 훈육에 도움 되긴 하나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더니
교육 현장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공교육 황폐화, 사교육 비대화
시험이 학습 핵심 요소인 이유
7월 24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에 극단 선택으로 숨진 교사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붙어 있다. [뉴스1]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가 26일 공개된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앞서 18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내에서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아직 조사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 학생의 보호자가 과도한 민원을 제기해 교사들의 부담을 가중한 결과 벌어진 비극이라는 인식 하에 교사들을 중심으로 분노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그 와중에 채널A에서 ‘요즘 육아-금쪽같은 내 새끼’를 오랫동안 진행하면서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길러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왔던 오은영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아이들을 때리지 않아서 버릇이 안 잡혔고 그것이 교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오은영의 인터뷰는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이후 우리 사회의 논의 지형을 잘 보여준다. 학생의 인권 대 교사의 가르칠 권리, 이른바 ‘교권’이 대립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오전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학생인권조례 개정을 지시한 것 역시 그런 맥락에 자리한다.
7월 22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천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주최로 열린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교사 추모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추모 메시지를 적고 있다. [뉴스1]
과연 그럴까. 물론 벌어지는 현상만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교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교권 상실’보다 더 크고 심각하다. 말하자면 ‘교육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의 가르칠 권리 이전에,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자체가 거의 실종된 상태다. 특정한 이념 지향성을 지닌 정치 세력이 성급하게 교육을 뜯어고치면서 시작된 문제가 거의 한 세대를 거쳐 사회 문제로 비화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해찬 이데올로기’의 파탄이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교육이란 무엇인가. 1차적 의미는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에 기대하는 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머리에 남는 지식을 넘어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바람직한 태도를 익히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일정 수준의 훈육을 기대하는 것이다.학생인권조례 개정을 넘어 폐지를, 더 나아가 체벌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 교육의 훈육적 기능을 강조하는 태도다. 교사가 아이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허용하지 않으면 표류하는 한국의 교육을 다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체벌이 훈육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다. 교육학에서 확립된 정설에 따르면 체벌은 훈육에 전혀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하며 외려 부정적이다. 훈육이란 결국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자기 인식과 절제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양육자가 관심을 갖고 일관된 원칙을 고수하며 아이에게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훈육의 핵심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일관성’이다. 아동만큼이나 그 아동을 훈육하는 주체 역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성공적 훈육이 가능해진다. 체벌로는 그러한 일관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친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경우라고 해도 주변의 시선이나 압력, 아이에 대한 그날의 동정심 등 다양한 변수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아이 여럿을 훈육하는 경우라면 체벌의 무의미함은 더욱 커진다. 1980년대생인 필자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연배에 속하는 이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고 물으며 누구는 살살 때리고 누구는 세게 때리던 교사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폭력 교사의 폭력은 ‘무차별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않았다. 폭력 교사의 문제 행동은 충동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것은 훈육의 필수 요건인 일관성과 정반대에 자리했다.
체벌은 폭력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불평등하고 차별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곳이라는 인식만을 남긴다. 훈육을 통해 올바른 인격을 길러내는 일과 거리가 멀다. 학생이 교사를 인권 침해로 신고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만들어버린 현행 제도를 개선할 필요성에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체벌 부활 같은 역사적 퇴행으로 이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훈육에 대한 논의를 체벌 차원에서 멈출 필요는 없다. 그것은 교육받지 못한 인격의 ‘네거티브’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훈육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 ‘포지티브’한 성격도 길러야 하며,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이므로 훈육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말이 삐딱하게 달리지 않도록 채찍질하는 것만큼이나, 열심히 앞으로 달릴 수 있게끔 당근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스스로 원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계획을 세워, 결과를 이뤄내는 과정 자체를 배우고 익히는 것 역시 교육의 핵심 목표 중 하나다. 요컨대 ‘성취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목표지향적이며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게끔 하는 것이다. 이 역시 교육이 다룰 훈육의 내용에서 빠질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한 ‘이해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20여 년간의 교육은 학생들을 획일적 ‘줄 세우기 입시 지옥’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진행됐다. 굳이 분류하자면 ‘진보 교육’의 이념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 ‘보수 교육’을 압도한 시기였다. 우리가 오늘날 교권 상실을 넘어 공교육 상실의 시대를 살게 된 것은 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1998년 3월 3일 장관 취임식에 참석한 이해찬 교육부 장관. [동아DB]
‘무시험전형’이 야기한 아노미
1998년 10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은 ‘2002 무시험전형’ ‘교육비전 2002’ ‘교원 정년 단축’ 등 굵직한 교육정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암기 위주 학습과 지나친 학력 위주 경쟁을 지양하고 다양한 품성과 인성, 소질과 적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 각론으로 ‘새 학교문화 창조’안이 하달됐다. 학교가 똑같은 수업이 아닌 다양한 체험학습, 수행평가 등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한 급격한 입시정책의 변화는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는 구호가 돼 학교 현장으로 내려왔다.특히 ‘무시험전형’이라는 개념이 교육 현장을 아노미 상태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대학 입시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곳인데, 수학능력시험을 안 봐도 대학에 갈 수 있다면, 대체 학교는 뭘 하는 곳이란 말인가.
이 혼란은 예견된 것이었다. 발표 전에 의견을 수렴해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해찬이 고집을 부렸고, 교육 현장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2001년 11월 22일 발행된 ‘주간동아’ 310호의 커버스토리 ‘아이들을 얼마나 더 골탕 먹일 텐가’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1998년 교육부가 이 입시 개선안을 처음 여당에 보고하자 한 의원이 당시 이해찬 장관에게 ‘무시험전형이라는 용어가 교육참여자들에게 오해를 낳고, 학생들은 시험 자체를 안 보고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비교육적 발상’이라며 차라리 ‘대입전형방법의 다양화라고 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건의했으나 이 전 장관은 ‘무시험전형’이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그 말에서 뭔가 개혁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풍겼기 때문에 정치적 수사로는 그만한 게 없었다.”
이해찬이 주도한 급진적 교육 개혁, 차라리 교육 실험이라고 불러야 할 정책 변화는 막대한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그는 1999년 5월, 1년 6개월 만에 장관직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험 없는 학교’에 대한 집착은 그 혼자만의 것도, 단순한 정치적 수사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해찬 1세대’ 이후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일선 학교에서 점점 시험이 사라지고, 석차를 매기지 않고, 수업 과목을 줄이면서, 아이들의 학력이 저하되는 경향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늘날 초등학생들이 받아가는 생활통지표에는 학력 석차가 기재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등수를 파악할 수 있을만한 단서를 기재하는 일은 철저히 금지돼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학업 능력을 평가하되, ‘좋은 말’로 둥글려서 전달해야 한다. 실로 이상적인 교육관이 반영된 생활통지표 작성 지침이다. 아이들을 시험의 노예로 만들지 마라! 모든 아이는 서로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다! 자라나는 새싹들의 다양성을 키워라!
문제는 이것이 교육 현장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데 있다. 대한민국 부모는 대부분 자신의 자녀가 좋은 학교를 거쳐 번듯한 직장을 얻기를 바란다. 그러자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 문제는 생활통지표에 석차가 기재돼 있지 않으니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터무니없는 이상주의 정책에 학부모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책을 세웠다. 첫째, 통지표의 문언을 섬세하고 꼼꼼하게 읽어 내 아이의 수준을 파악한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우리 아이 생활통지표 이해하는 꿀팁’ 같은 게시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아이의 성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억지로라도 공부시키는 학원에 보내, 사교육의 힘으로 공교육의 불투명성을 해소한다.
이해찬 이데올로기가 낳은 역효과다. 모든 학생을 한 줄로 세워 대학에 보내는 입시 정책이 나쁘다며, 1998년 아무런 대책 없이 ‘무시험전형’이라는 말을 던져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생들의 평가와 성적을 비공개 처리해버렸다. 그러자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지, 우리 아이가 얼마나 잘하는지 알 수 없게 된 학부모들은 불안하고 답답해서 더욱 학원으로 몰려가게 됐다.
그 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공교육이 점점 더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는 가운데 사교육 업계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공교육의 일부가 ‘사교육 카르텔’과 결탁했다는 과격한 수사법을 빌자면, 그 잘못된 만남은 1998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석차 대신 미사여구 가득한 생활통지서
미적분이니 한문이니 제2외국어니 하는, 실생활에 쓸 일이 없어 보이는 지식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을 혼내고 시험 봐서 한 줄 세워 기죽이지 않는 학교. ‘이해찬 이데올로기’가 꿈꾸는 이상적 교육의 모습이다. 이러한 교육관은 20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육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시험 없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것은 애초부터 틀린 발상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성취감을 느껴 긍정적인 태도를 몸에 익히게 하는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시험은 교육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마치 스포츠에서 순위가 없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시험을 보지 않는 교육, 성적 순위가 나오지 않는 교육은, 교육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시험이 학습의 핵심 요소라는 점은 체벌이 훈육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만큼이나 확고한 교육학의 상식이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데, 적절한 주기로 시험을 봐서 알고 있던 내용을 상기시키고 잊어버린 것을 복습하면 단기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전환돼 머릿속에 지식이 오래도록 남는다.
시험을 통한 비교는 어떨까. ‘이해찬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시험을 치고 성적에 따라 등수를 매기는 건 ‘기분 나쁜 일’ ‘자존심 상하는 일’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보더라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학업 성취를 위해, 더 나아가 사회에서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경쟁심을 인식하고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물론 20세기 후반까지 전개돼온 기존 교육의 모든 점이 옳았다고 볼 수는 없다. 교육 현장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고, 학생들은 지나친 성적 경쟁 속에서 정서적으로 황폐화됐다. 하지만 그 반발로 등장한 ‘이해찬 이데올로기’는 더욱 파괴적이었다. 실체 없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숭배하며 시험을 악마화한 끝에, 공교육은 권위를 상실했고 사교육만 비정상적으로 성장해버렸다.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있어야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농담이 통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입시가 고등학생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면서 ‘가난해도 교육을 통해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학생과 학부모에게 교사의 권위가 점점 더 통하지 않는 이유의 근원도 결국 거기 있다. ‘이해찬 이데올로기’의 20년 지배가 낳은 결과다. 일선 교사들마저 모두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입시제도 앞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학원과 ‘입시 컨설턴트’에 의존해야 한다. 좋은 대학을 가고자 하는 수험생에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일찍부터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어린 학생에게, 임용고시 붙은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석차가 명시되지 않는 생활통지서에 미사여구를 잔뜩 심어주는 것밖에 없다. 이러고도 공교육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진보 교육’ 거물들의 위선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실에서 교권이 흔들린 것은 교육 자체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교육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어떤 목적의식 하에 어떤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는지, 목표 달성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이며 어떤 부작용을 고려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그저 ‘군사독재 시절의 교육’ ‘일제강점기 때부터 달라진 게 없는 교육’이라며 기존의 체계를 파괴해버린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교실 이데아’가 일갈했듯 “전국 900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한 줄로 세워버리던 지난 시대의 교육은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학력 저하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교육 철학, 시험과 성적의 공개를 피해야 할 일로만 여기는 그러한 관점의 한계도 분명하다. 문제는 ‘비판 이념’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이 20년이 넘도록 ‘지배 이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시험만으로 평가하는 세상이 문제라면 시험 그 자체를 형해화하는 대신 여러 개의 시험을 마련해야 한다. 책상머리 공부만으로 인생이 판가름 나는 게 잘못이라면 수많은 ‘공부’의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공교육이다. 이 단순한 결론을 실천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대신, 이른바 ‘진보 교육’의 거물들은 자기 자식들만은 사교육을 시키고 특목고에 보내며 결국 명문대 학위를 품에 안겼다.
필자는 1983년에 태어났지만 ‘빠른 년생’으로 ‘이해찬 1세대’가 되는 것을 가까스로 면한 사람으로서, 이들의 모순과 위선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이들이, 한국의 교육을 되찾아 와야 할 때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