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타협 모르는 원칙주의자 母性 앞에 무너지다

‘정치인’ 이희호 영광과 좌절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4-09-07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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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 정권 지분 40%는 이여사 몫”
    • 자금관리·정세분석·연설문 감수까지
    • 원칙주의 vs 온정주의의 모순된 캐릭터
    • 화려한 학벌, 노래·연기·언변 뛰어나
    • 매운 시집살이…홍걸에겐 오히려 냉담
    • “홍일·홍걸 부탁 무엇이든 들어줘”
    • 중정요원도 혀 내두른 보안의식
    • “고집 위한 고집 부리는 홍걸이…”
    • ‘兩甲’ 대결과 ‘李心’
    1977년 정월 삭풍이 몰아치던 어느날 밤. 이웃들도 지나길 꺼리는 재야정치인 김대중씨의 동교동 집 앞 골목으로 지친 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있었다. 김씨의 아내 이희호 여사와 비서 김형국씨였다. 두 사람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3·1구국선언문’ 사건 관련자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투옥된 인사 중에는 김대중씨도 있었다. 1년 가까운 석방투쟁과 정치 활동, 가장으로서의 책무와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짓눌린 55세의 이여사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키 172㎝에 몸무게 43㎏.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도지는 관절염은 꼬챙이처럼 마른 다리를 쉬 펴지도 굽히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기도회는 무섭도록 추운 날씨 때문에 일찍 끝났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들어선 집에 온기라곤 없었다. 1950년대 말 미국 국제개발처(AID) 자금으로 수재민을 위해 급조한 집은 바람만 세게 불어도 흔들릴 정도로 부실했다. 그러나 이여사는 “홍걸이 아빠가 온기 하나 없는 감방에서 고생하는데 나만 편할 수 있냐”며 한사코 불 때기를 거부했다.

    집에는 따뜻한 물 한 잔 끓여줄 손이 없었다. 집안일을 돕던 혜숙이 모녀는 월급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집을 나간 지 오래였다. 저녁을 굶을 참인 듯한 이씨를 대신해 김비서가 쌀을 씻고 안쳤다. 소반에 밥 한 공기와 젓갈, 생멸치, 고추장과 더운 물 한 사발을 얹어 방으로 가져갔다.

    “형국씨도 같이 먹어요.”

    이여사의 말에 김비서도 밥 한 그릇을 가져와 마주앉았다. 이여사는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그 뿐. 이여사는 수저를 손에 쥔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김비서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이여사는 서둘러 감정을 수습했다. 눈물을 닦고 뜨거운 물에 밥 한 술을 꾹꾹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밥맛이… 좋네요.”

    칼바람이 뼛속을 헤집는, 지독히도 추운 겨울밤이었다.



    “이 정권 지분 40%는 영부인 것”


    그리고 2002년 5월. 그 겨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 영부인이 된 81세의 이희호 여사는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다시 눈물 섞인 밥을 먹고 있다. 몰아치는 북풍 때문도, 생활고나 독재정권에 대한 뿌리깊은 분노 때문도 아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서도 목숨처럼 아끼며 보듬어 온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뿐인가. ‘자식 잘못 가르친 죄’는 너무도 크고 무거워, 대통령 부처를 향한 여론과 야당의 호통은 추상같기만 하다. 이제 이여사 본인마저 ‘비리의 배후’ 혹은 ‘협력자’라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팔십 평생 이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는가.

    표면적으로 볼 때 이여사의 청와대 생활은 역대 영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용히 물러앉아 사회봉사에 힘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여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보통 안방마님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여사는 그 스스로 뛰어난 정치인이자, 역량 있는 사회운동가이며, 타협을 모르는 민주 투사였다. ‘평생동지’ 김대중 대통령 곁에서 쓴소리도 마다 않는 최측근 역할을 해왔다.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대통령은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이여사의 인맥과 조언, 격려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교동 구파가 쇠락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긴 요즘에는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동교동계 인사나 재야 원로들은 김대통령의 집권에 이여사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이여사의 정치적 역량과 집념 어린 노력이 오늘의 김대중 대통령을 만들었다. 김대통령의 ‘정치적 방학’이 15년 이상이나 됨에도 일선에 복귀할 때마다 큰 단절 없이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여사 덕분”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만 해도 DJ 연설문의 최종 검토자는 이여사였다는 게 측근들의 이야기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 정권 지분의 40%는 이여사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오히려 낮은 평가여서, 동교동계 모 인사는 “60%는 족히 될 것”이라며 다소 과장된 주장을 펴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여사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케 하는 발언들이다.

    또한 이여사는 오랜 감옥생활과 정치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던 남편을 대신해 집안 대소사 처리와 세 아들 양육을 도맡다시피 했다. 이것은 끊임없는 인고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장남 홍일(54·민주당 의원)과 차남 홍업(52·아태재단 부이사장)은 김대통령의 사별한 첫 부인 차용애 여사 소생이다. 이여사는 이들이 자신의 친자인 홍걸(40)의 존재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했다.

    첫째, 둘째 아들에 대한 이여사의 관심과 사랑은 대단했다. 1970년대를 동교동에서 보낸 한 인사는 “(이여사가) 장남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애썼다. 오히려 막내가 안됐다 싶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사정으로 인해 숫기 없고 맘 여린 막내에 대한 어미로서의 애틋함 또한 더욱 깊어갔던 듯하다.

    이희호 여사의 삶과 김대통령가(家)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의 ‘총체적 친인척 비리 사태’를 이해하는 열쇠다. ‘권노갑(이인제)은 지고 한화갑(노무현)은 뜨는’ 여당의 복잡한 권력투쟁 상황을 가늠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취재중 만난 한 동교동 인사에게 “이희호 여사의 삶에는 ‘소리없이 강한 힘’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한마디 덧붙여달라”고 했다. ‘희생과 봉사로 살아온 DJ 지킴이’.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은 김대통령도, 권노갑 전 고문도, 김홍걸씨도 아닌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다.

    이희호 여사는 1922년 9월, 서울 수송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부친 이용기씨는 우리나라 의사면허 4호로, 남원도립병원장과 포천도립병원장을 지냈다. 이여사는 그의 6남2녀 중 넷째다. 외가는 수표동 근처에서 대대로 한의원을 운영했다. 어머니 이순이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로 인해 이여사는 모태신앙인이 됐다.

    1936년 이화고녀에 입학했다. 이여사와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한 수필가 이규임씨는 한 글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친구 중에는 이상한 냄새가 나든지, 이를 몹시 갈아 한 방 쓰기를 꺼려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도 그녀는 묵묵히 감싸주고 말없이 한 방을 써 주었다.”

    어려서부터 이여사는 신앙심이 남달랐다. 1940년 졸업 때는 학교에서 주는 ‘종교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1992)에서, 여러 경력과 활동 중 여고 졸업 때 받은 ‘종교상’과 1972년부터 계속해 온 창천교회 주일학교 교사직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고백하고 있다.

    1942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화여전 동기인 김봉자 씨는 당시의 이여사에 대해 “보기 좋게 살이 투실투실 오른 미끈한 몸매의 처녀였다. 살결은 실크처럼 부드럽고 단단해 보였으며 건강미가 넘쳐흘러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해방 후 집안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여사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946년 9월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적을 옮겼다.

    이여사는 인기가 좋았다. 그보다 두세 살 나이많은 남학생들도 그를 ‘누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호국단 부대장으로 사범대생 800명 앞에서 호령을 하기도 했다. 총학생회에서는 사범대 대표를 맡았다.

    ‘내가 만난 이희호’(1997)라는 책에는 이여사의 대학 시절에 대한 서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인상기가 나온다. 서총재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48년 여름. 우이동에서 한 달 간 진행된 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제2기 여성반 훈련을 통해서였다.

    “특별히 인상 깊었던 것은, 훈련생들이 큰 밤나무 밑에 가설 무대를 만들어 놓고 ‘이수일과 심순애’ 연극 공연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이수일 역을 이희호씨가 맡았었는데 그 대사, 연기력이 놀라울 만큼 뛰어났었다 …알고보니 대본을 이희호씨가 손수 썼고, 그 활발명쾌했던 연기는 프로를 능가하는 것이어서 모두를 감탄케 하였다.”

    강원룡 목사도 같은 책에서 “어느 대학에서 강연 후 학생들과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그의 차례가 되자 “히히호호” 하며 크게 웃는 것으로 ‘희호’라는 이름을 소개해 신선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이여사는 재기발랄하고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글쓰기와 연설에 능했고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노래 솜씨가 뛰어나 찬송가를 부르면 앙코르 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결혼 후 고난을 겪으면서 그의 성격은 차분하게 변해갔다. 이에 대해 서영훈 총재는 위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나름의 해석을 달아놓았다.

    “…그렇게 볼 때 중년 후에도 계속 활동을 했으면 사회적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냈을 터인데 풍상을 겪는 동안 성격이 변했나싶어 참으로 아깝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를 좀 쌀쌀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것은 이 여사가 정서적으로나 처세상 너절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며, 인생의 감고풍상(甘苦風霜)과 사회의 염량세태(炎凉世態)를 겪으면서 다소 냉소적인 면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 김남조씨는 “이여사는 옷은 물론 머리 손질도 직접 했다. 헤어드라이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재료를 사다 파마도 직접 했다”고 회고했다.

    김형국 전 한전기공 사장도 “오랜 세월 이여사를 가까이서 모셨지만 백화점이나 미장원을 찾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김홍일 의원의 결혼식 날에도 직접 머리손질을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P 전의원의 부인 K씨는 “이여사가 백화점에서 고가의 명품 브랜드 옷을 사는 걸 직접 목격했다”며 “이전에는 몰라도 청와대 안주인이 된 후에는 사치한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옷로비 이후 공격의 화살이 다시 이여사 쪽을 향한 사건은 ‘이용호게이트’였다. 이 사건에는 이여사의 조카인 이형택씨가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한나라당은 “보물섬 사업에 참여했던 조모씨 등이 ‘이희호 여사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이형택씨에게서 들었다는데 이에 대해 해명하라”고 치고 나왔다.

    그리고 4개월, 이여사는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여사가 유상부 포스코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홍걸씨를 만나달라고 요청했다는 것. 의혹은 유병창 전 포스코 홍보담당 전무가 ‘이여사 요청→청와대 연락→최규선 주선’으로 계속 말을 바꾸면서 더욱 커져만 갔다.

    말 바꾸기 공방이 한창일 즈음 만난 유 전전무는 아직도 ‘설화(舌禍)’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유 전전무는 “유상부 회장과 홍걸씨 만남의 ‘순수성’을 설명하는 데 몰두하느라 이여사 요청설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경영 홍보만 해봐 이여사 개입 여부의 정치적 상징성을 가늠하지 못한 것도 뼈아픈 실수다. 유회장과의 커뮤니케이션에도 문제가 있었다. 아무래도 마가 낀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꼬일 수 있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유 전전무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 해도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유 전전무야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해 실수할 수 있다지만, 유상부 회장마저 ‘이희호’라는 세 글자가 튀어나오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쉬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 영부인-유상부-김홍걸-최규선을 한 두릅에 엮는 취재가 진행중임을 알면서도 3, 4일이 지나도록 회사 내 관련자들 사이에 아무런 ‘커뮤니케이션’이 없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희호 요청설’에 대한 주변 인사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이여사는 그럴 분이 아니에요. 다른 걸 다 떠나서 이여사는 보안 의식이 생활화된 어른입니다. 설사 부탁할 일이 있다 한들 직접 전화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걸 다 떠나서 이여사는 그런 청탁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청와대에 들어간 후로 수많은 동지들이 섭섭하다, 챙겨달라, 원망도 하고 투정도 부렸지만 ‘나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며 조용히 인내해 오셨어요. 저도 농담 삼아 ‘왕비파’란 얘기를 할 정도로 이여사와 가까웠지만 지금 어떻습니까. 그저 어쩌다 안부 전화를 드릴 뿐입니다.”

    안순덕 민주당 여성국 상근부위원장은 이렇게 울분을 터뜨렸다.

    세 아들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다. 대체로 “옛날 모습으로 봐선 절대 그럴 친구들이 아닌데 지금은 모르겠다. 솔직히 우리도 지금은 뭐가 진실인지 헷갈린다”는 반응이었다.

    “1998년 가을이었어요. 서교호텔 사우나에 갔는데 거기서 홍걸이를 만났어요. ‘아저씨, 친구가 오자고 해서 따라왔어요. 저 이런 데 자주 다니지 않아요’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왠지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던 친구가 이렇게 큰 사고를 쳤다니 아직도 전 믿어지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한테 속았다고밖에 할 수 없어요.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김형국 전 한전기공 사장의 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교동계 사이에서도 ‘홍걸이가 변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영식님, 영식님” 하며 쫓아다니는 의심스런 무리들이 결국 홍걸씨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 동서인 서재희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은 “어느날 홍일이네 집에 갔더니 ‘오늘 아버지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며 ‘조용히 있으라는데 이보다 어떻게 더 조용히 있느냐’며 속상해 하더라. 대통령이 아들들 단속을 단단히 하려 애쓴 것은 사실이다. 홍일이한테 청탁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둔 지금, 한나라당은 각종 부정비리의 핵심으로 김대통령 일가를 정조준하고 있다. 대통령과 영부인도 예외가 아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나는 지난 4월부터 대통령 가족게이트가 터질 것이라고 예견해 왔다. 지금 단계에서 몸통이 누구라고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화려한 젊은 날을 뒤로한 채 가진 것은 꿈과 신념뿐인 정치인의 아내가 된 지 40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꿈의 자리’에 올랐지만, 팔순의 이여사에게 2002년 5월의 찬란한 햇살은 차라리 고통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밤, 이여사의 어지러운 꿈자리엔 아직도 아기 같기만 한 막내아들의 외로운 뒷모습이 내내 밟힐 지도 모를 일이다.

    이여사가 서울대를 졸업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피난살이의 와중에도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1950), 여성문제연구원(1952) 등을 잇따라 창설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54년, 미공군에 근무하던 감리교 크로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램버스대학(1954~1956)에서 사회학사를, 스카렛대학 대학원(1956~58)에서는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귀국 후에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에서 강사 생활을 하는 한편,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 일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도 겸했다. 화려한 학벌과 왕성한 사회활동을 통해 형성된 이여사의 재야·여성·학계·기독교계 인맥은 김대통령의 정치활동에 큰 힘이 됐다. 유학 시절 갈고 닦은 영어실력과 영문타자 솜씨, 서구식 매너 또한 당시로서는 쉽게 갖출 수 없는 자질이었다. 이여사는 김대통령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세계 각지, 특히 미국의 유력인사들에게 유려하고 호소력 짙은 편지를 보내 활발한 구명운동을 폈다. 김대통령의 미국 망명 생활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음은 물론이다.



    뛰어난 연설 실력, 자금관리도 맡아


    1961년 초겨울. 바쁜 일상을 보내던 이여사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장래의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길에서 우연히 ‘재회’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1997)에서 ‘지금껏 내 반려가 되어주고 또 정치적 동지며 친구이기도 한’ 이여사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부산에 이주해 살고 있을 때(1951) 독서 서클에서 만나 알게 된 여성이기도 했다 …내게는 참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모두와 흉허물없이 지냈지만 특히 그녀와는 의견 일치가 되는 때가 많아서 더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 더러는 얘기에 취해서 시골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지금도 부산 교외였던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걷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다.”

    재회할 당시 김대통령은 5·16으로 인해 낭인생활을 하고 있었다. 1954년 민의원 선거에 첫 도전해 연달아 3번의 고배를 마시고,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드디어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5·16으로 인해 선서조차 못한 채 오히려 감옥 생활을 경험한 다음이었다. 첫 부인 차용애 여사와는 1959년 8월 사별했다. 차여사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로 목포에서 이름난 미인이었다. 김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여름날 하얀 원피스에 꽃무늬 양산을 든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열렬했던 두 사람의 사랑은 그러나 차여사가 거듭되는 남편의 고난과 힘겨운 생활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놓아버림으로써 비극적 결말을 맺고 만다. 김대통령에게는 좁은 셋집과 칠순 노모, 심장판막증을 앓는 누이동생과 어린 두 아들이 남겨졌다.

    이런 처지였던 만큼 이여사의 결혼 결심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그의 ‘여성지도자로서의 미래에 상당한 기대를 가졌던’ 인사들은 결혼으로 인해 ‘그가 나오기 힘든 어려운 환경에 빠지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이여사는 결혼을 강행했다. 1962년 5월10일, 두 사람은 이여사의 외삼촌 이원순 옹(전국경제인연합 창립멤버)의 체부동 한옥 대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대통령이 40세, 이여사가 41세 때였다(김대통령의 호적은 1925년 생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1923년 생이다).

    이여사는 후에 측근들에게 김대통령과 결혼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저 사람을 붙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두 번째는 저렇게 야심찬 사람이니 내가 도우면 큰 지도자가 되겠다는 판단을 한 거지요.”

    결혼 이듬해인 1963년 11월12일 셋째아들 홍걸이 태어났다. 같은 달 하순 김대통령은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967년에는 재선의원이 됐다. 1970년, 마침내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됨으로써 한국 정치사에 파란을 일으켰다.

    1971년 4월27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결과는 패배. 그리고 같은 해 10월17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10월 유신’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기간중 이희호 여사는 눈부신 활약을 했다.

    “보통 대통령 후보 부인들은 유권자들에게 ‘제 남편을 뽑아주세요’ 하고 부탁하잖아요. 근데 이여사는 그렇지 않았어요. 김대중 후보의 정치역량과 신념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기초해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에 호소하는 유세를 펼쳤어요. ‘김대중 후보가 민주주의를 저버리고 독재를 한다면 누구보다도 제가 먼저 청와대로 쳐들어가 그 정권을 물러나게 할 겁니다…’, 그런 강력한 메시지 전달도 주저하지 않았어요. 호응이 대단했지요.”

    안순덕 민주당 여성국 상임부위원장의 증언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역할은 자금 모금이었다. 이여사는 측근들에게 “당시 사돈의 팔촌, 동창들 곗돈까지 다 긁어모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비단 선거기간뿐 아니라 이여사는 동교동 자금 관리에 오래도록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연금 또는 수감 생활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남편을 대신해 후원금 모금, 계파 운영비 지출, 자금 입출금 등을 담당했다.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후원금을 받고 또 비용을 지출한 이야기들이 자주 나온다. 이여사의 한 측근은 “적어도 1982년 미국 망명 전까지의 자금 조달에는 이여사가 큰 몫을 한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여사의 자금 관리에는 큰오빠 이강호씨의 둘째아들 형택씨의 도움이 컸다. 이강호씨는 한국증권업협회장과 한신증권 사장을 지냈다.

    “대문 밖만 나서면 기관원들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때였어요. 차에 이여사를 모시고 종로 해장국집 골목 같은 데로 가는 거예요. 좁은 골목에 차를 세우고는 재빨리 앞뒷문이 따로 달려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요. 그렇게 요원들을 따돌리고는 형택씨를 만나곤 했지요. 형택씨와 이여사는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의논을 했어요.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때는 매사가 다 그렇게 살얼음판이었지요.” 동교동 1세대 비서 중 한 명인 A씨의 증언이다.

    1997년 10월, 신한국당은 형택씨가 김대통령의 평민당 총재 시절 비자금 수백억원을 관리하고 있다며 검찰에 고발했다. 김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후인 1998년 2월, 검찰은 형택씨가 23개 계좌를 통해 55억7900만원의 정치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밝혔다. 동화은행 영업본부장이었던 그는 김대통령 취임 다음날 이사대우로 승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4개월 뒤 동화은행 퇴출과 함께 실직했던 그는 1999년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금융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올 1월, ‘이용호 게이트’에 깊숙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구속되고 말았다.

    이여사의 친정 피붙이들은 김대통령의 정치 행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했다. 큰오빠 이강호씨의 필동 집과 여동생 이영호씨의 당산동 집은 이여사가 외부 인사들과 비밀 연락을 주고받고 후원금을 전달받는 주요 통로였다. 이영호씨는 후에 목동으로 이사했는데 1992년 이후 김대통령이 이 집을 자주 사용하면서 ‘목동 안가’로 불리게 됐다. 다시 A씨의 말.

    “예를 들어 필동에서 ‘한복 다 됐다’는 전화를 걸어와요. 그럼 이여사는 지체없이 그 곳으로 향했죠. 저까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차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들어가더라도 이여사가 밀담을 나누는 사이 거실에 앉아 기다리는 정도였죠. 이여사의 보안의식은 철두철미했는데, 그래서 동교동 집에서의 웬만한 대화는 다 필담으로 이루어졌어요. 전화통화도 무슨 암호 부르듯 했죠. ‘간다’ 그러면 오는 거고, ‘김씨’ 하면 사실은 안씨인 식으로. 도청은 물론 이웃 안가에서 망원카메라로 거실에 펴놓은 자료 사진까지 찍어다 추궁할 정도였으니 말 해 뭣하겠어요.”

    도청이 일상화되다보니 이여사는 전화가 걸려오면 일단 “이름 대지 마세요”라는 얘기부터 했다. 나중에는 중앙정보부원 ‘머리 위에서 노는’ 수준의 보안의식과 기법을 터득하게 됐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결혼 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기까지 이여사는 외형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속사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결혼 당시 김대통령은 칠순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1972년 작고할 때까지 흰머리가 나지 않았다는 노모는 엄격하고 사리분별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여사의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그가 “매운 시집살이를 했다”고 증언한다.

    “시중 들 사람을 불렀을 때 며느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뛰어오면 역정을 내요. 매사 까다로웠고 시댁 식구나 가족 챙기기에 소홀함은 없는지 눈여겨봤죠. 바쁜 며느리 대신 집안일을 맡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그런 만큼 꾸지람도 잦았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안방에 머무르셨어요.”

    또 한 가지 어려움은 홍일, 홍업 형제와의 화합이었다. 아버지의 재혼 당시 이미 15세, 13세였던 형제는 친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안타까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형제에게 명실상부한 ‘어머니’로 인정받기까지 이여사는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홍걸이가 한두 살이나 됐을 때예요. 이여사가 그러시더라구요. 혹시 위의 두 아이가 아기에게 싫은 내색을 해도 절대 불쾌한 낯을 보이거나 꾸짖지 말라고요. 홍일, 홍업이의 상을 볼 땐 그 정성이 임금님 수라 차리는 것 같았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면 다소 무리한 일이라도 다 들어주려 애썼지요. 친엄마도 저렇게는 못할 거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이여사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에 혀를 내두르곤 했습니다.”

    1960~1970년대에 동교동과 친하게 지낸 한 여성인사의 말이다.

    이여사는 차용애씨 집안 사람들에게도 정성을 다했다. 행사가 있어 동교동 집을 방문해 보면 큰방에는 차씨 집안 사람들이 있고 이여사 친정 식구들은 오히려 뒤로 물러서 있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서재희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은 차여사의 동생 차은경씨의 남편이다.

    “이여사는 우리 처가에 정성을 다했어요. 어쩌다 장모님(차여사 모친)이 동교동 집을 찾으면 없는 살림에도 외식을 시켜드리고 허바허바사장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어 드리곤 했죠. 제 아내도 살갑게 대해, 아내는 이여사를 언니라고 부릅니다. 대통령 취임 후 얼마 안돼 이여사가 다리 골절상을 입었는데 마침 청와대로 인사를 갔더니 지팡이까지 짚은 불편한 몸으로 넓은 건물 이곳저곳을 손수 안내해 주시는 거예요. 깊고 커다란 욕조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커서야 물 낭비가 엄청날 테니 쓸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게 생각나네요.”

    서 전원장의 이야기다.

    반면 홍걸씨에 대한 이여사의 태도는 일견 냉정해 보일 정도였다. 1981년까지 동교동 비서로 일한 김형국 전 한전기공 사장은 “이여사가 홍걸이를 살갑게 대하는 걸 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껴안아주거나 드러내놓고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소풍을 간다 해도 저녁때 과일 몇 가지 사 들고 가는 정도였죠. 예절이나 학업과 관련, 엄격하게 대했고 야단도 많이 쳤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홍걸씨는 혼자 있기를 즐겼다. 건평 18평에 거실이 5평이었던 조그만 집에서 홍걸씨 방 역시 의자를 치워야만 이불을 깔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학교에 갔다오면 홍걸씨는 철제책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그 방에 틀어박혀, 누가 갖다주지 않으면 식사를 거를 정도로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했다. 뜰에서 노는 일도 드물었고 친구도 거의 없었다. 얼마나 숫기가 없던지 설날 동교동 집에 들른 인사 중 홍걸씨에게 세뱃돈을 주는 데 성공하는 이는 박수를 받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선천적인 대인기피증은 아니어서, 또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곳에 가면 비로소 제 나이다운 쾌활함을 되찾곤 했다. 홍걸씨 관련 비리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그에 대해 ‘자폐증’ 운운하는 평판도 나오고 있지만, 그보다는 초등학생 때부터 미행을 당해야 했던 맘 여린 소년의 자기보호본능의 발로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다행히 3형제는 이여사의 진심을 받아들여 곧 친모자간 이상의 관계를 형성했다. 청년 시절 김홍일 의원은 취한 상태에서 “친어머니가 살아 계셨던들 우리 어머니처럼 해주셨겠나, 존경한다”는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형제 간 우애도 좋은 편이었다.

    홍일, 홍업 형제는 이여사 생일은 못 챙겨도 동생 생일 선물은 빼놓지 않고 마련했다. 동생이 설핏 웃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답고 따뜻한 성품의 홍업씨는 방에 갇혀 사는 동생을 끌어내 눈싸움도 걸고 장난도 치며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김대통령은 정 많고 눈물 많은 아버지였다. 김대통령이 수감 생활 중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질책은 전혀 없고 칭찬과 격려만이 가득함을 알 수 있다. 늦게 얻은 막내아들을 귀여워해, 어쩌다 고향 목포에서 홍어가 올라오면 밤늦은 시간이라도 막내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한 점이라도 먹이려 애를 썼다. 그래도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장남이었다.

    유신체제 발동으로 정국이 얼어붙으면서 동교동에도 한파가 몰아닥쳤다. 1973년, 김대중납치사건이 터진 것이다. 유신체제 발동 전 외국에 나갔던 김대통령은 덕분에 미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납치사건이 발생하기 3개월 전, 이여사에게 이용택 당시 정보부 6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 귀국을 종용하라”는 것이었다. 이여사는 “마침 미국 사는 올케가 와 있는데 곧 돌아가니 그 편에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다.

    기실 귀국을 권할 뜻이 없던 이여사는 올케 손에는 거짓 편지를 들려 보내고 외신기자를 통해 ‘진짜 편지’를 써보냈다. 올케편에 보내는 편지는 믿지 말 것과, 곧 여권 기한이 만료되니 국제적십자사가 발급하는 여권으로 바꾸라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이여사는 남편이 감옥에 있건 해외에 있건 뛰어난 정세 판단과 기지, 대담성으로 적절한 조언과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이여사는 뛰어난 예측력을 갖고 있었다. 누구도 쉬 예상치 못하던 10월 유신을 정확히 예견했다. 김대중납치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이여사는 김경인 의원이 일본에 간다며 인사를 오자, 마침 남편도 7월이면 일본에 있을 것이나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김대통령에게도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혹 김의원 일행이 연락을 하더라도 만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자신이 보내는 편지는 호텔방 서랍에 두지 말고, 휴지통에 넣는 것도 주의하라는 내용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여사의 뜻을 어기고 회동을 약속했고, 김의원의 뒤를 밟으면 김대통령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으리란 정보부 요원들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면서 결국 납치가 자행되고 말았다. 이후 김대통령은 이여사의 정세 판단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6년 3·1구국선언문 사건이 터졌다. 3월1일, 일단의 민주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민주구국 선언을 발표한 것. 연금 상태라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김대통령은 서명만 했는데 주모자로 몰려 3월8일 새벽 전격 연행됐다. 당시 함께 연행된 인사들은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이태영 부부, 안병무, 문익환-동환 형제, 함세웅, 이우정 등 18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대통령 등 11명이 구속되고 7명이 불구속됐다.

    이여사의 옥바라지는 3년간 계속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여사는 관련 인사 가족과 재야 인맥을 총동원해 열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보라색 한복이나 원피스를 맞춰 입고 구호가 적힌 우산을 일시에 펼쳐든다던가, 입에 십자 모양 테이프를 붙이고 침묵시위를 벌이는 등 갖가지 방법을 짜냈다.

    한편으로는 대책회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부지런히 뜨개질을 했다. 보라색 숄을 짜 국내외에 판매해 부족한 투쟁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복역중인 남편에게는 매일이다시피 편지를 썼고 끊임없이 책을 차입했다. 비서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동교동 비서로 일하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됐던 김형국 전 한전기공 사장은 “수감된 1년 동안 이여사가 181권이나 책을 넣어 줘 원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78년 12월, 김대통령이 석방됐다. 다음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 ‘서울의 봄’이 온 것이다. 그러나 환희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79년 5월17일, 30여 명의 군인들이 동교동으로 들이닥쳤다.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시작이었다. 끌려가는 남편에게 이여사는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외쳤다.



    “고집 위한 고집 부리는 홍걸이…”


    다시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이 이어졌다. 이여사는 남편과 맏아들, 비서진과 관련자들의 옥바라지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생활을 이어갔다.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가정사 외에 철학적·신학적 논쟁거리, 남편의 투쟁에 대한 격려 등이 담겨 있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남편이 요구한 책 외에 자신이 직접 고른 서적 1~2권을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정사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걱정말라, 잘 돼 간다”는 것이었다. 특히 위의 두 아들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다.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더라도 남편 귀에 들어가 심기를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도록 자제한 결과일까. 그러나 막내는 달랐다. 1981년 홍걸씨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당시 이여사의 편지에는 대학 입시를 앞둔 아들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그때 홍걸씨는 아버지에 대한 사형 선고에 큰 충격을 받아 공부는 뒷전인 채 스포츠와 음악 감상에 빠져 있었다. 이여사는 “어려운 때 등교한다는 자체만도 고마워 차마 야단도 못 쳤다”고 적고 있다. 3월24일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말하면 싫어하는 것만 아니고 누가 말을 거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에 감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 교육이 잘못된 것을 후회하나 이미 연령으로 봐서 잔소리가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요새는 음악감상에 너무 열중해요. 그냥 감상하는 것이 아니고 책으로 연구하면서. 여하튼 홍걸이는 제가 좋은 것은 철저히 파고드니까요.”

    홍걸씨의 마니아적 기질은 유명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1년 남짓 홍걸씨를 데리고 있었던 이여사의 조카 이영작 한양대 교수는 홍걸씨가 ‘못 말리는 독서광’이었다고 했다.

    “한 분야 책을 잡으면 무섭게 파고드는 거예요. 그때는 아메리칸 풋볼에 관심이 많았는데 가까운 친구 얘기를 들으니 거의 해설가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홍걸이는 골프도 책을 보고 배웠어요. 좋아하는 일에는 그만큼 몰입하는 거지요.”

    이후에도 이여사의 편지에는 홍걸씨에 대한 염려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당신이 홍걸이가 피한다고 하여 야단치셨는데, 요즘 계속 나나 홍업이도 피하고 혼자 있으려고 하고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아요.” “언제나 학교와 집 외에는 가는 곳이 없고, 용돈은 책 사는 데와 음악감상을 위한 테이프 구입에만 써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고집이 강한데 요즘 보면 그 고집은 고집을 위한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아서 퍽 염려스러워요.”

    이처럼 가족과 일정부분 단절돼 있고 외곬인 성격은 홍걸씨가 부모 형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규선이란 ‘처세의 달인’에게 푹 빠져 좌충우돌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늠케 한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그는 가족에게 ‘자기 일에만 빠진, 고집 세고 말 안 듣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 만큼 자신의 생각에 무조건적인 동의를 표하며, 형처럼 엄마처럼 갖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최규선씨는 홍걸씨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홍업씨는 운동에 능하고 소탈한 성격이었다. 동교동계의 한 인사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구석이 있었다.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신 순하고 낙천적이어서 인기가 좋았다”고 회상했다.

    김홍일 의원은 야망이 큰 청년이었다고 한다. 장남의식도 강했다. 한때 술을 즐겼고 아버지를 닮아 고집이 셌다. 젊은 시절부터 정치인을 꿈꿔 국회의원이 되길 강력히 희망했다.

    “1970년대는 통금이 있을 땐데 밤 11시30분이면 예비 사이렌이 울려요. 그렇게 늦은 시간에도 전화벨이 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어느 날 밤에는 이여사가 전화를 끊고 나더니 집안에 상주하는 경찰에게 순찰차 좀 얻어 탈 수 있냐고 사정하더라고요. 알고보니 홍일씨가 술값이 떨어졌으니 가지고 오라는 전화를 한 거였어요. 그렇게 경찰차를 타고 가서 홍일씨를 데려온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동교동 비서 출신 A씨의 이야기다. 이렇듯 3형제에게 어머니 이여사는 ‘영원한 해결사’였다. 여기 더해 시댁 식구, 동료들까지 챙기느라 이여사는 늘 피로와 생활고에 시달렸다.

    김대통령 부부는 세 아들에 대해 남다른 부채의식과 안쓰러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장남은 1980년 김대통령과 함께 구속돼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언어장애와 신체장애를 얻었다. 차남은 야당 정치인의 자제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성과 두 번이나 헤어져야 했다. 사업가를 꿈꿨지만 이 또한 불가능했다.

    막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관원에 미행 당하는 상황, 늘 무거운 집안 분위기로 인해 외곬의 내성적인 성격이 됐다. 김대통령 부부가 자식의 말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평소의 치밀함과는 전혀 대조되는 성향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15년에 이르는 김대통령의 ‘정치 방학’ 동안 이여사는 외부와 동교동을 잇는 끈 역할을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을 주도한 것은 기독교, 천주교계 인사들이었는데 이여사는 이들과 젊은 시절부터 맺어온 끈끈한 유대를 바탕 삼아 김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연대 투쟁 플랜을 짜는 데 일조했다.

    “1978년에서 1982년까지, 또 미국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1985년 이후에도 (이여사와)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김대통령이 연금 상태에 있던 1970년대 말에는 필동에 있는 이여사 친정집이나 우이동 박영숙 선생 집에서 만나 정치적 견해를 주고받고 중요 사항을 결정하기도 했지요. 이여사는 대단한 여걸이었어요. 현모양처를 떠나 정치인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남편의 의견을 대변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지요. 우리 중 이여사를 그저 모모씨의 아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 봤지요.”

    재야정치인 예춘호씨의 말이다.

    이여사는 김대통령과 재야의 관계가 위태롭거나 새로운 상황 정립이 필요할 때, 그 가운데 뛰어들어 직접 조율을 하고 필요하다면 남편에게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예씨도 “이여사는 남편 앞에서 바른말을 잘했다. 좀 거북하다 싶은 일도 조곤조곤 따지고 들어갔다. 사실 김대통령 주변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이여사가 그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해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요즘의 이여사를 보면 문득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구설의 주인공이 되고 있으니….”

    더 이상은 말하기 거북하다는 듯 예씨는 그쯤에서 입을 닫아 버렸다.

    이여사는 기본적으로 원칙주의자였다. 지금도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한 인사는 “DJ는 아무래도 현실 정치인이라 꾀를 쓸 때도 있고 원칙을 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여사는 그렇지 않았다. 감추는 것, 술수 쓰는 것을 지독히 싫어했다.”고 말했다.

    동교동 1세대인 모 인사는 “김대통령이 독재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여사의 조언과 쓴소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이여사가 의외로 정에 약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때 정권 주변에는 ‘영부인 인사’라는 말이 유행했다. 실제로 크고 작은 공기업 대표·이사·감사 중에는 이여사와의 인연을 내세워 자리를 얻은 듯해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이여사 외의 여권 인사들과도 친분을 나눠 온 사이라 꼭 이여사의 ‘입김’ 때문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 정권에서 중용된 인물로 이여사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이상주 교육부총리, 서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 임창열 경기지사, 이우정 민주당 상임고문, 김상근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위원장,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서재희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황용배 전 한국마사회 상임감사 등이다.

    황씨는 서울 창천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이 교회를 다니던 이여사를 알게 돼 아태재단 후원회 사무처장이 됐다. 이후 그는 김대통령의 일산 자택 근처로 이사갈 만큼 대통령 부부에게 정성을 쏟았다. 지난해 12월, 황씨는 주가조작 혐의가 있는 한 기업으로부터 해결청탁금으로 2억5000만원을 받고 군정보사 직원을 동원해 청부폭력까지 사주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형택씨와 황용배씨는 ‘영부인 인사’의 대표적 실패사례로 꼽힌다.

    솔직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여사는, 그래서 동교동 가신 중에서도 한화갑 민주당 대표를 각별히 아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대표는 이여사의 서울대 후배이기도 하다. 영어가 가능해 오랜 세월 동교동의 해외 창구 역할을 했고, 그런 점에서도 이여사와는 공유점이 있었다. 반면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과는 뜻이 잘 맞지 않았다. 특히 1990년대 중반 들어서 두 사람의 갈등은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항간에는 목포 지구당을 김홍일 의원에게 물려달라는 이여사의 부탁에 권 전고문이 선뜻 응하지 않는 바람에 사이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권 전고문의 측근이 여기저기에 이여사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고 다닌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동교동 구파의 사정을 잘 아는 B씨는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이야 뭐라 하든 노갑이 형은 지구당 물려주기에 흔쾌히 동의한 걸로 압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보면 이여사와 노갑이 형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머리가 좋고 입이 무겁고 김대중 선생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지요. 하지만 일을 풀어 가는 스타일은 전혀 달라요. 이여사는 무엇이든 투명하게, 솔직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 반면, 노갑이 형은 비밀이 많고 정치적 판단에도 능했지요. 이여사가 그 부분을 못마땅해한 걸로 알고 있어요.”

    또 한가지는 ‘정치적 배려’에 대한 이견이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이여사는 재야 인사들을 우선 생각한 데 비해, 권 전고문은 그 동안 고생 많이 한 사람, 김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사들을 주로 고려했다. 온정주의와 실용주의의 충돌이었다.

    어쨌거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홍일, 홍업 형제와 권 전고문의 사이는 서먹해져 버렸다. 권 전고문의 한 측근은 그 시점을 “권 전고문이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999년 말경”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 B씨는 이런 주장도 폈다.

    “동교동에서는 구주류가 신주류에 밀리게 된 이유 중 하나로, 한대표에 대한 이여사의 남다른 신뢰를 꼽고 있어요. 한대표야말로 이여사의 ‘가려운 곳’을 누구보다 잘 찾아 긁어주는 측근이란 뜻이죠.”

    꽤 오래 전부터 당 주변에는 한대표가 대통령 아들들과 유난히 잘 지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지난해 11월에는 김홍업씨로부터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가 탔던 다이너스티 방탄차량을 넘겨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한대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처로 출장갈 때면 홍걸씨를 불러내 안부를 챙기는 등 살뜰한 마음씀씀이를 보여줬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여사가 많이 고마워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한대표의 측근은 “모시는 분의 자제가 있는 곳이니 안부쯤 물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이여사가 (한대표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다면 나쁠 것 없지만, 그렇다고 한대표의 정치적 위상까지 그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무엇보다 한대표는 경선을 통해 선출된 명실상부한 당의 대표 정치인”이라며 항간의 소문을 일축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이른바 ‘양갑(兩甲)’ 갈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2000년 2월, 4·13 총선을 위한 공천 작업 때다. 한대표 주도로 이뤄진 공천 작업이 선거 막바지에 권 전고문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한대표 계보로 분류됐던 장성민 전 의원의 공천을 두고 두 사람은 심각하게 대립했다. 장 전의원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권 전고문과 김옥두 총장은 절대 장 전의원을 공천할 수 없다고 버텼다. 실제 공천발표 전날까지 장 전의원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그것이 한의원에 의해 밤사이 뒤집혀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장 전의원은 1997년 대선 레이스 중 홍걸씨가 운영한 대선팀 4인방의 일원이었다. 홍걸씨와는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다. 결국 한대표는 권 전고문과의 ‘일전’을 무릅쓰고 홍걸씨 측근인 장 전의원을 공천한 셈이다. 선거법을 위반해 의원직을 상실한 장 전의원은 현재 미국에 유학중이다.

    이여사의 이름이 호사가들 사이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첫 사건은 ‘옷로비 파문’이다. 로비의 최종 대상이 이여사였던 걸로 알려지면서 말 그대로 이여사의 ‘옷’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일각에서는 “이여사가 입는 옷이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이다, 티파니 보석을 좋아한다”는 등의 악소문이 번졌다. 그러나 이여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청와대 입성 전 이여사는 고급 의상실은커녕 백화점도 잘 찾지 않던 소박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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