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SK 비자금 주역 손길승·이영로·최도술 3각 커넥션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3-11-25 17: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SK 비자금 주역 손길승·이영로·최도술 3각 커넥션
    부산 금정구 장전동 한 일식집. 추석 하루 전날인 9월10일 늦은 오후, 낯익은 60대 중반의 한 노인이 들어섰다.“추석이라고 술 한잔하는가?” 명절을 앞두고 손님도 없어, 건물 관리인 권씨와 주방장이 맥주 한잔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단골 어르신이라 얼른 일어나 반겼지만 노인은 조용히 한쪽 구석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노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매우 어두웠다. 말도 없이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노인은 혼자 앉아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동안 그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달 남짓 지나 궁금하던 차에 권씨는 TV와 신문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노인은 그 날 이후 나흘 만인 14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던 것이다. 권씨는 또 노인이 등산 중 넘어져 뇌진탕 증세가 있어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태였다는 것도 가족을 통해 나중에 전해들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 이영로(李永魯·63)씨. 그가 쓰러진 것은 SK 비자금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망이 자신을 향해 조여오자, 강한 압박과 정신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강금실(康錦實) 법무부 장관은 이씨가 입원하던 무렵인 9월 중순께 노대통령에게 SK 비자금 사건의 정황을 보고했다고 국회에서 밝혔다. 이씨는 그 파장을 예상했던 것일까.

    이씨와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최도술(崔導術)씨가 연루된 SK 비자금 11억원 수수사건은 대통령 ‘재신임 폭탄선언’에 이은 검찰의 대대적인 대선 비자금 수사로 확대되면서 정·재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단일 사건으로 이처럼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킨 경우는 거의 드물다.

    검찰 수사결과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은 최씨가 대선 직후인 2002년 12월25일 노대통령 장남 결혼식 당일 저녁, 부산상고 선배인 이씨의 중개로 서울 P호텔 일식당에서 손길승(孫吉丞) SK회장으로부터 1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11장(11억원 상당)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최씨는 이 CD를 다시 이씨에게 전달했으며, 이씨는 부산 신라대 교수인 자신의 부인 배모씨 계좌로 입금시켰다고 한다.



    검찰에 따르면 이후 11억원은 현금 3억원, 수표 8억원으로 인출돼 이씨에게 2억원, 최씨에게 3억9000만원, 그리고 전 장수천 대표 선봉술씨에게 2억3000만원이 건너간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확인된 8억200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2억8000만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현재 검찰이 추적중이다.

    그렇다면 손회장에서 출발한 11억원이 이씨를 거쳐 그 중 일부가 최씨와 선씨 등에게 건너간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당사자들은 모든 원인과 책임을 이씨에게 떠넘기고 있는 모습이다.

    검찰에 따르면 구속된 최씨는 “이씨로부터 3억9000만원을 받았는데 민주당 부산선대본부가 (대선 때) 진 빚을 갚는 데 쓰라는 뜻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3억9000만원 가운데 차명계좌에 입금된 1억원을 확인하는 한편 최씨가 별도로 보관 중이던 1억8000만원을 찾아내 압수한 상태다. 최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나머지 1억원 정도는 대선 때 진 빚을 갚거나 일부 생활비로 사용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반면 손회장은 팀장급 간부들을 상대로 한 사내 비공개 연수교육에서 문제의 11억원과 관련해 “대선과 관계없다. 이영로씨가 이전부터 생명공학사업 연구개발 자금지원을 요청했는데 노대통령이 집권하고 보니 역시 안 줄 수 없었다. 근데 그게 어떻게 최도술씨에게 가 이렇게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손회장의 이같은 발언은 최근 ‘주간동아’의 보도를 통해 확인됐다.

    손회장과 최씨, 두 사람의 주장을 따져보면 모든 책임은 이씨에게 있다. 손회장은 이씨의 요청에 의해 줄 수밖에 없었고, 최씨는 이씨의 심부름을 해주고 손회장이 아닌 이씨로부터 별다른 대가성 없이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검찰도 수사 초기와는 달리 “최씨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진술이 불가능한 이씨에게 대부분 (책임을)미루고 있다”며 최씨에 대한 공소사실 유지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을 내비쳤다. 검찰은 최씨를 구속하면서 “최씨의 부탁을 받은 이씨가 대선 당일인 2003년 12월19일 부산 모 일식집에서 손회장을 만나 대선 부채문제를 거론하며 10억원을 먼저 요구했고, 손회장은 이를 수락하면서 향후 SK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포괄적 알선수재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동시에 적용한 바 있다.

    이영로, 필담 나눌 정도로 의식회복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든 이들의 관심은 이씨에게 쏠려 있다. 정치권 안팎엔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꾀병을 부리고 있다’거나 ‘최근에 이영로가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있다’ ‘얼마 전에 부산상고 동문들과 골프를 쳤다’는 등 그를 둘러싼 루머도 무성하다. 최돈웅의원의 100억원 수수와 관련,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은 이 같은 루머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노대통령 측근비리에 대한 검찰의 편파수사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과연 이씨의 ‘꾀병설’은 근거 있는 것일까. 또 이씨는 어떤 인물이고, 손회장과는 어떤 관계일까. ‘생명공학사업비’와 ‘대가성 없는 대선 빚 청산자금’으로 다소 엇갈린 손회장과 최씨의 진술 가운데 누구의 말이 사실일까. 기자는 몇 가지 의문에 대한 확인취재에 나섰다.

    지난 11월13일 이씨가 입원해 있는 부산대학병원 신경정신과병동 입원실 3층 3XX호. 상태가 약간 호전된 이씨는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다. ‘절대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가족을 제외한 일체의 면회가 금지된 상태다. 다른 병실과는 달리 문이 굳게 닫혀있고, 문 앞에는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보초’까지 지키고 있어 이씨의 병세를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기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믿을 만한 병원 관계자를 통해 이씨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는 수술을 하지 않은 채 일단 위기를 넘기고 의식도 어느 정도 돌아온 상태다. 호흡과 음식물 섭취를 위해 목에 호스를 꽂아 말은 못하지만 필담을 통해 의사소통은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부축을 받으면 조금씩 걸을 수도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는 두 달 만에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3층 복도를 오가며 바람을 쐬기도 했다. 정치권 안팎을 떠돌고 있는 루머는 ‘전혀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손회장이 이씨에게 11억원을 전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으로 오랜 지기다. 손회장이 부산에 내려올 때면 이씨는 손회장의 진주고 동기인 K사 최모 사장과 함께 장전동 D일식집에서 자주 만났다. 일식집과 같은 건물에 최사장의 K사 사무실이 있고, 이씨의 집도 이 곳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 세 사람은 어릴 적부터 절친했을 뿐 아니라 사업과 관련해서도 상당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사장이 운영하는 K사는 (주)SK, SK건설, S-OIL 등 SK 관계사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공사를 발주받은 상태다.

    손회장은 또 올해 6월28일 신라대 마린-바이오산업화 지원센터 기공식에 참석했는데, 이 센터의 소장이 바로 이씨의 부인 배씨다. 이 부분은 “이씨로부터 생명공학사업 연구개발 자금지원을 요청받아 준 것”이라는 손회장의 주장과 일맥 상통한다. 검찰도 11억원 가운데 1억원이 이씨의 부인 연구비로 지원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배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서 부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SK로부터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고 거듭 주장했다. 배씨는 그러나 더 이상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현재까지의 검찰 수사결과대로라면 손회장으로부터 건네받은 11억원의 최대 수혜자는 최도술씨와 선봉술씨다. 이씨는 CD를 현금과 수표로 바꿔주면서 일정한 자금세탁 역할을 했다.

    주변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씨(45회)는 노대통령(53회)의 부산상고 8년 대선배다. 이씨가 단순한 자금세탁 역할만 할 위치도 아니거니와, 검찰의 발표처럼 최씨 또는 선씨가 대선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직접 요청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오래 전부터 이씨를 알고 지낸다는 한 지인은 “노대통령도 대선 정국이 시작되기 전인 2001년 말까지는 장전동 D일식집으로 이씨를 자주 찾았다. 노대통령은 지난 해 선거 기간 중에도 이씨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상당한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안다. 사무장이었던 최씨 입장에서 이씨는 쉽게 대할 수 없는 어른이었다”고 말했다.

    주변 관계자들에 따르면 부산은행 국제금융부장 시절 이씨는 자금사정이 어려웠던 모 업체에 당시로서는 거액인 2억원을 대출해주고 그 일로 결국 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인연으로 이씨는 대출받은 업체의 계열사인 K사를 맡아 운영하다가 H금융 등 제2금융권에 진출했다고 한다.

    이후 이씨는 M&A에 눈을 떠 S금융을 인수 합병해 또 다른 H금융을 설립하고, 다시 이를 재일교포에게 매각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권뿐 아니라 부산지역 정·재계 인사들과도 상당한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해 3월까지 부산상공회의소(부산상의) 회장을 맡았던 (주)넥센 강병중 명예회장 등 부산상의 임원이나 회원사 대표들과도 식사 모임을 갖는 등 부산지역에서는 유력 인사로 통한다.

    이씨의 한 지인은 “그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씨는 기업 M&A에 능할 뿐 아니라 자금세탁에 일가견이 있다”면서 “다만 그동안 일부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엄청난 부를 축적해놓고도 가·차명으로 재산을 숨길 정도로 부도덕한 사람은 아니다. 없어서 못 주지 있으면 남에게 주는 사람이다”라고 대변했다.

    반면 최씨는 노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되지만 변호사 시절에는 사무장, 선거기간에는 총무국장 또는 지구당 사무국장 정도의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다만 오랜 사무장 경력으로 세무와 회계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노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부산지역 조세소송 건을 싹쓸이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넓은 인맥도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씨의 인맥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지난 대선에서 두 사람의 역할이다. 대선 당시 최씨는 노대통령의 부산선대본부 사무국장을 맡았었다.

    최도술의 배신인가 실수인가

    민주당 한 관계자는 “부산선대본부에서 일했던 민주당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 부산지역 공식, 비공식 대선자금을 최도술씨가 혼자 다 관리했다”며 “그 사람 이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최씨가 입을 열지 않는 한 부산선대본부로 흘러 들어간 대선자금은 검찰도 추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부산상고 총동창회 부회장 등을 맡았던 이씨는 부산지역 동창들과 평소 알고 지내던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대선자금을 동원하는 데 매우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전해들었다”며 “이번 SK 비자금 11억원을 대선 빚 청산을 위해 최씨에게 준 것도 부산선대본부 대선자금 내부 현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부산지역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이씨가 기업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세탁해주면 최씨는 나름의 전문성을 살려 ‘뒤끝 없는’ 확실한 회계처리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마무리가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평소 절친하던 손회장으로부터 받은 자금이라 이씨가 별탈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는 것. 실제로 평소의 관계를 상정하면 이 자금이 이씨 부인의 계좌에만 있었어도 이처럼 확대되지는 않을 사건이었다. 손회장의 푸념처럼 그 자금이 최씨와 선씨 등으로 건너갔던 것이 문제였다.

    한편 지역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최씨가 지난 대선을 전후해 김성철 현 부산상의 회장으로부터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김씨가 회장에 선출된 것은 올해 3월.

    부산상의 한 회원사 사장은 “부산상의는 회장 자리를 놓고 여러 계파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는데 김회장은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도전했다. 문제는 김회장이 운영하는 국제종합토건이 화의(和議)중인 회사라는 것이었다”며 “따라서 최씨가 김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면 그건 대가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이어 “부산상의 내부 계파싸움이 심해 선거가 끝나면 후유증이 심각하다”며 “그런데 회장직을 놓고 다퉜던 강병중 전 회장과 이영로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최씨가 김회장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뒤처리 미숙’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손회장에게 미안할 법한 이씨가 반대로 최씨에게는 상당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과연 이씨의 속내는 어떨까. 그의 입은 언제쯤 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