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6일 검찰은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연희동의 전 씨 집을 압수수색했다.
칠흑같이 어두워 별을 빼고는 보이는 것이 없고, 물결 소리와 헉헉거리는 숨소리 말고는 들리는 것도 없어. 물은 목까지 차올라 찰랑거리고, 악어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뒤에 있는 팀원을 돌아볼 수도 없었어. 방향을 잘못 잡으면 넓고 넓은 스왐프 속을 뱅뱅 돌게 되니까, 건너편을 찾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야. 서로를 엮어놓은 줄이 팽팽해지지 않으니 동료들은 잘 따라오고 있다고 믿고 가는 것이지. 참 힘들더구먼.
안개가 깔린 새벽녘에 스왐프를 건너와 지친 몸을 누이게 됐는데, 갑자기 ‘빡!’ 하는 소리가 나면서 우리말 욕설이 터져나오는 거야. 무슨 일인가 달려갔더니 금마가 개머리판으로 미군 버디의 얼굴을 갈겨놓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어. 미군은 피범벅이 돼 쓰러져 있고. 금마를 붙잡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저놈이, 지휘관이 M-60은 한국군만 메야 한다고 했다면서 나만 M-60을 메게 했다’는 거야.
스왐프를 건너면서 보니까 앞의 짝들은 교대로 바꿔 메는데, 금마 짝은 M-60을 받을 생각을 안 하더라는 거야. 금마는 키가 작아서 종종 물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숨을 쉬려고 무거운 M-60을 멘 채 팔짝팔짝 뛰면서 스왐프를 건너왔다는 거야. 그래서 뭍으로 올라오자마자 태평하게 등을 붙이려는 미군 버디를 ‘너 같은 놈은 군인도 아니다’고 갈겼다는 거야.
동료 구타는 큰 죄니까, 금방 미군 중령이 헬기를 타고 날아와 조사를 하더군. 유죄판결을 받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훈련 도중 귀국한 군인은 바로 전역조치돼. 나는 팀장이라 금마를 변호하게 됐지. 잘하는 영어는 아니지만 ‘봐라, 우리 대원은 이렇게 키가 작은데 혼자 M-60을 메고 악어가 있다는 스왐프를 밤새 뛰면서 건너왔다. 우리 대원을 골탕 먹인 미군 버디가 더 나쁘다’라고 했어. 조사를 한 그들도 우리 얘기가 맞으니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더만. 금마는 귀국 조치를 당하지 않게 된 거지. 그런 금마를 박 대통령이 너무 믿었어. 각하도 말년에는 총기가 많이 흐려지셨어.”

5·16 직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선 박종규 소령, 박정희 소장, 차지철 대위(왼쪽부터). 차지철은 제1한강교 저지선 돌파에 공을 세워 박정희 측근이 됐다.
차지철은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전역해 공화당 국회의원을 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를 절명케 한 문세광 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나자 그의 뒤를 이어 새 경호실장이 됐다. 그리고 1976년 전두환 준장이 경호실장보다 두 단계 낮은 경호실 차장보에 임명됐다. 우습게 봤던 ‘금마’의 ‘밑에 밑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떠올린 기자가 “그때 차 실장의 위세가 대단했지요. 그런 차지철 밑에서 차장보를 했으니 무척 불편했겠네요”라고 물었다.
“금마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 나와는 1대 1로 대면하지 않고 회의 때만 봤지. 그런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깎아내리려고 했어. 김재규는 인성은 좋지만 똑똑하지는 못했어.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금방 대응책을 내놓지 못해. 하지만 각하와는 같은 고향(경북 선산)에 육사 2기 동기 아닌가. 그런 김재규가 청와대에 오면 차지철은 ‘어이, 김 부장~’하고 부르는 거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부장을 지휘봉을 흔들며 ‘어이~’ 하고 불러.
김 부장이 ‘예’ 하고 달려오면, 금마는 시국 상황을 물어보고, 김재규가 설명을 하려고 하면 다 듣지도 않고 ‘알았소. 잘 대처하시오’ 하고 보내는 거야. 그렇게 돌아서 나오는 김재규는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벌게져 있었지. 그래서 김재규가 금마부터 쏜 것이야. 각하께서 왜 그런 자를 중용하셨는지 몰라.”
1976년 김재규는 50세, 전두환은 45세, 차지철은 42세였다. 차지철은 가장 젊었지만 박정희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큰 위세를 부렸다. 경복궁 뒤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연병장에서 군 지휘관을 불러다 사열하는 등 최고사령관처럼 행세했다. ‘스왐프의 추억’이 있는 전두환에게 그런 그가 고와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 차지철을 총애한 박정희를 비판할 법도 한데, 전두환은 박정희를 거론할 때마다 꼬박꼬박 ‘대통령’ ‘각하’ ‘어른’이라고 지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