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주체사상 무장해 생명과 사상, 육신과 재산 다 바치겠다” (구국전위가입선서)

한국 현대사의 종북 지하혁명조직史

  • 한기홍 |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paul@nknet.org

    입력2013-09-23 1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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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관 TNT 확보해 게릴라戰 준비한 남민전
    • 민혁당, RO 18개 갖추고 4000명에 영향력
    • 北 225국, 왕재산에 유류창고 파괴 준비 지시
    “주체사상 무장해 생명과 사상, 육신과 재산 다 바치겠다” (구국전위가입선서)

    주체사상탑

    통합진보당 의원 이석기가 포함된 RO(Revolutionary Organi-zation)가 비밀회합을 열어 유사시에 유류저장소와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총기와 폭탄을 준비하는 등의 모의를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60여 년 동안 한국 현대사에서 존재했던 종북 지하혁명조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보자.

    1960년 4·19혁명이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지 못한 상황을 지켜본 김일성은 1961년 조선노동당 4차 대회의 사업 총화에서 “남조선에서 혁명적 당을 내올 것”을 역설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과거 남로당 활동을 했던 좌익 인물 가운데 김종태를 포섭해 월북시킨 후 노동당에 입당시키고 자금 등 활동 내용을 지원했다. 남한으로 귀환한 김종태는 1964년 6월 중순경 조카 김질락과 김진환·이문규 등을 포섭해 월간지 ‘청맥’을 창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65년 11월 김질락·이문규 등과 함께 통일혁명당(통혁당)을 창당했다.

    통혁당 내란예비음모 처벌

    1968년 중앙정보부가 이들을 적발했고, 사법부는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하고 관련 피고인들도 중형에 처했다. 통혁당 사건 이후 북한은 관련자들을 영웅으로 대우하면서 대남 공세를 전면적으로 진행했고 이후에도 통혁당이 재건됐다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통혁당은 나중에 ‘한국민족민주전선’, 2005년 이후에는 ‘반제민전’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대남 선전기관 노릇을 했다.

    북한이 남파간첩을 통해 통혁당을 준비하던 시점에 일군의 인텔리들은 별도로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하는 지하조직 건설을 준비한다. 김배영, 도예종 등이 발기한 인민혁명당(인혁당)이 그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1차 인혁당 사건’이라고 불렀다. 일부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북한과 연계를 시도한 정황은 있으나, 이들은 통혁당과 달리 상당한 자생성을 가졌다.



    인혁당 사건을 둘러싸고 조작 논란이 있었지만, 훗날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조직은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중한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반국가단체조직 혐의로 중앙상무위원장인 도예종이 징역 3년형을 받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1974년 발표된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인 인혁당재건위원회 관련자들은 대규모 봉기를 준비하고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당시 재판부로부터 중형이 선고됐다.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다음 날 새벽에 사형이 집행됐다. 2007년 이후 이뤄진 재심에서는 원심 재판부가 인정한 국가변란 도모 혐의에 대해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위험성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며 관련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주체사상 무장해 생명과 사상, 육신과 재산 다 바치겠다” (구국전위가입선서)

    통일혁명당은 1965년 결성돼 1968년 적발됐다.

    게릴라식 봉기 준비한 남민전

    “주체사상 무장해 생명과 사상, 육신과 재산 다 바치겠다” (구국전위가입선서)

    1980년 1월 열린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재판.

    1976년 2월 29일 서울 중구 청계천 3가의 태성장이라는 중국음식점에 모인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남민전은 변혁운동을 지도하는 지하당을 자임하고 공개적인 반(反)유신 민주화 투쟁을 위해 산하에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와 민주구국학생연합(민학련)을 설치했다. 남민전은 광복 전후 남로당 활동에 뿌리가 닿아 있는 구(舊)좌익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청학련 세대가 응집한 지하당이다. 이들은 1978년 8월 28일 서울 시내에 뿌린 유신체제 타도 유인물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면서 본거지가 적발된 1979년 9월까지 3년 넘게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 활동했다.

    남민전은 투쟁자금 조달을 위해 ‘혜성대’라는 이름의 무장행동대를 조직해 종로1가 소재 금은방과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자택 등에 침입해 상해를 가하고 금품을 절취하는 등 강도 행각을 벌였다. 또한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왔을 때를 대비한 무장봉기를 위해 총기와 탄약을 은밀히 탈취해 보관했다. 이외에도 TNT와 뇌관 등을 불법 입수해 보관하는 등 무장 게릴라 방식 봉기를 차근히 준비하고 있었다. 또 남한에서 혁명이 성공할 경우 중앙청에 게시하기 위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기(旗)를 제작해 보관했다.

    치안본부는 1979년 10월 4일부터 17일까지 84명을 검거해 79명을 구속했다. 검거 당시부터 치안본부와 검찰은 일관되게 북한과 연계된 간첩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남민전 재판기록에 따르면 조직원을 일본에 보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접선하고 그를 월북시켜 북한과의 구체적인 연계 방안을 도모했으나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이전에 조직이 검거됐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1980년대 이후 대학가에 자생한 이른바 ‘주사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김영환이 북한과 연계된 이후 결성했다. 구(舊)좌익과 단절된 최초의 대규모 신(新)좌익 지하당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권을 장악했고, 나아가 사회운동에서 주류가 된 NL(민족해방) 계열 운동의 사상·이론·조직적 지도부를 맡았다고 볼 수 있다.

    민혁당은 중앙위원회 산하에 도당 격인 수도권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 등의 지역조직을 두고 당원만 100명에 달하는 대형 조직이었다. 또한 민혁당에는 RO(혁명 조직) 18개 조직, 400명의 조직원이 있었고, 산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관철할 수 있었던 사람만 3000~4000명에 달하는, 말 그대로 정전(停戰) 이후 남한 최대의 지하당이었다.

    NL 지도부 맡은 민혁당

    김영환이 주도한 1980년대 중반의 ‘주사파 운동’은 종북으로 귀결되면서 운동권의 주류가 됐다. 이는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주사파에 영향을 받은 친북좌파 10만 명이 사회에 진출”(구해우, ‘월간NKvison’ 2012년 7월호에서 인용)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민혁당을 주도했던 김영환과 전향 인사 일부는 1990년대 말부터 북한 정권 타도와 북한인민의 해방을 목표로 한 북한 민주화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반면 하영옥, 이석기 등 전향하지 않은 인물들은 김영환이 주도한 1997년 7월의 민혁당 자체 해산 결의를 인정하지 않고 조직을 수습해 지하당을 유지시키려 노력하다 1999년 8월 국가정보원에 적발됐다. 당시 이석기는 경기도 지역을 관할하는 경기남부위원회 위원장으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3년 광복절에 가석방됐다.

    이번에 문제가 된 RO는 이석기가 출소 후 과거 민혁당의 경기도 지역 조직을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석기는 이 조직을 기반으로 민주노동당과 그 후신 격인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장악했고, 마침내 지난해 4·11총선을 통해서 스스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국회를 고급 정보 획득과 혁명투쟁의 교두보로 삼으려 한 것처럼 보인다.

    황인오의 중부지역당

    중부지역당 사건은 북한의 최고위급 대남공작원 이선실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공작선(線)이 한편으로는 공개적 진보정당인 민중당 지도부에 접근해 당 대표인 김낙중을 포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 사북사태 주동자였던 황인오를 포섭해 함께 월북한 이후 노동당에 입당시키고 남으로 돌려보내 지하당 구축을 시도한 사건이다.

    황인오는 주사파 활동가인 최호경을 포섭함으로써 그가 1990년 12월에 학원과 노동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사파 운동가 241명을 묶어 결성한 ‘1995년 위원회’(1995년은 분단된 1945년으로부터 50년째가 되는 해로, 이때까지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의미다)를 장악해 조직망을 확산할 수 있었다. 중부지역당은 산하에 강원, 충북, 충남 등 3개의 도급 당 조직을 두고 학원과 노동계에 조직을 확산시켰다.

    이선실이 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2년 후인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는 이선실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을 수사하던 중 중부지역당 성원들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구속자 중에는 김대중 당시 대선후보의 비서인 이근희라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 1992년은 14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해였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대선용으로 조작된 간첩단 사건이 아니냐는 비난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선실과 이선실의 지휘를 받던 직파간첩 중 붙잡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자 논란이 더 커졌다.

    그러나 사법부는 중부지역당 관련자들의 진술과 확보된 증거를 통해 관련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또한 1997년 총책임자였던 황인오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란 제목의 옥중 수기를 내고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으면서 사건 조작 논란은 사실상 마무리됐다.

    “주체사상 무장해 생명과 사상, 육신과 재산 다 바치겠다” (구국전위가입선서)

    2011년 8월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브리핑실에서 열린 ‘왕재산 사건 수사 관련 검찰 브리핑’때 검찰이 공개한 왕재산 조직 체계도.

    구국전위는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는 안재구가 1980년대 대학가에서 자생한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을 중심으로 1991년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1994년 적발된 사건이다. 구국전위 가입자들은 안재구 앞에서 “김일성 수령님이 창시하고 김정일 장군님이 심화, 발전시킨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며, 김일성·김정일 유일사상 및 유일지도 밑에서 자신의 생명과 사상, 육신과 재산을 모두 다 바쳐 구국전위 조직의 강령을 실현하는 데 앞장선다”고 다짐했다.

    구국전위는 1991년 5월부터 1994년 3월까지 12회에 걸쳐 재일 공작지도부의 지령을 받았는데, 지령 내용에는 조직 결성 방법, 조직의 형태와 위상 등에 관한 것부터 국내 정세 보고와 구체적인 활동지침까지 포함됐다. 또한 1993년 6월 하순경 현대그룹 노동자 파업 현장에 개입해 노동운동을 배후 조종하려 했다. 노동운동 이외에도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하기 위해 전대협동우회에 대한 장악 사업을 진행했다.

    민노당 정보 北에 넘긴 일심회

    2006년 10월 24일 국정원은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회합통신 등)로 재미교포인 마이클 장(장민호), 조직원인 영어교육 사업가 이정훈, 모 학원장 손정목 등을 체포했다. 검찰과 국정원은 마이클 장 등이 2006년 3월 재야인사 2명과 함께 중국으로 출국해 북한 공작원을 만나 국내 정보 동향 및 특정 정당의 정보를 제공하고 각종 지령 및 공작금을 수수했다고 발표했다. 이정훈 전 중앙위원과 최기영 사무부총장이 연루된 민노당 등은 공안 분위기를 만들어 반북·반통일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국정원의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일심회 사건 관련자 전원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때까지 북한은 통혁당, 민혁당 등 남한 내에서 지하 영도조직 구축에 주안점을 뒀으나, 일심회 사건은 기존 정당의 핵심부서에 침투해 영향력 확대를 시도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들은 해외에 서버를 둔 e메일을 이용하거나 해외에서 공작원들을 접촉해 국내 정세 동향과 민노당 주요 당직자 신원 및 분석 자료를 넘겼다.

    2011년 7월 관련자들이 체포돼 지난 7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 판결이 난 왕재산 사건은 중앙대 82학번 주사파 운동권 출신 김덕용이 주도해 준비한 조직이다. 김덕용은 1993년 조직원을 북한에 보내 김일성의 접견교시를 받아 조직 활동을 진행하다 2001년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인천과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계, 학계, 재야 등에 조직을 구축하려 했다.

    특히 왕재산은 북한 대남 지하공작 부서인 225국으로부터 2014년까지 인천 지역의 유류창고, 방송국, 군부대에 조직 성원을 침투시키거나 파괴할 준비를 마치라는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 또한 북한으로부터 2011년 5월 진보대통합정당을 창당하라는 지령을 받고 정치권에도 관련자를 침투시켜 정보를 파악해 보고하는 등의 활동으로 북한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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