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어용에서 투사로! 재향군인회의 전쟁

이명박, 김장수, 김관진을 돌려놓은 ‘힘’

  •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3-09-25 11:5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노무현 정부와 갈등하며 야전성 회복
    • ‘좌파’ 노무현, ‘약골’ 이명박…박근혜는?
    • 전작권 환수 무기 연기 여론 이끌어내
    • “다음 과제는 국방개혁법 폐지”
    어용에서 투사로! 재향군인회의 전쟁
    ‘갈팡질팡’.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과 관련해 국방부가 보인 행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노무현 정부 때는 “가져와야 한다”고 했고,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당한 이명박 정부 때는 “환수 시기를 연장만 하면 된다”고 하더니, 박근혜 정부에서는 “가져오지 말아야 한다”라고 한다. 안보는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작전 통제는 국방의 핵심인데, 일관된 국론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이렇게 줏대 없는 태도는 국방부가 권력에 쉽게 예속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군이 지켜야 할 원칙에는 대통령의 통제를 수용해야 한다는 ‘문민 통제’만 있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국방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국방을 그르치는 길로 간다면 이를 가로막는 군인이 나와야 하는데, 지난 15년 동안 그런 모습을 보여준 ‘별’은 없었다.

    전작권을 가져와야 하는지, 가져오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신’이다. 절대 다수의 장성들은 “갖고 오지 않는 게 낫다”고 하면서도 진급과 출세를 위해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한 때 ‘늙은 군인’들이 소신을 밝혔다. 현역 시절, 그들도 얽히고설킨 관계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겠지만 현역을 대신해 바른 소리를 내려고 했다. 총 대신 태극기를 들고 태양이 작열하는 광장과 매서운 추위 속으로 뛰어나왔다. ‘편승 안보’ ‘위탁 안보’로 보일 수도 있다는 부담을 무릅쓰고 성조기를 흔들었다. 그 ‘노병군’의 중심에 ‘향군(鄕軍)’으로 약칭되는 재향군인회가 있다.

    오랫동안 향군은 만만한 ‘어용(御用)기관’으로 분류됐다. 청와대가 동쪽을 가리키면 동쪽으로 뛰었고, 구름을 가리키면 하늘로 점프했다. 그래야 정부 보조금을 받고 향군에서 운영하는 기업들이 특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역 때부터 몸에 밴 ‘정권(국가가 아닌)에 대한 충성심’이 표출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김영삼 정부 때까지는 이러한 기조가 유지됐다.



    권력과 향군의 결별은 김대중(DJ) 정부 때시작됐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온 DJ가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하면서부터 향군은 정권과 멀어졌다. 그러나 권력은 ‘자기 사람’을 앉히는 형태로 향군을 계속 부리려 했다. 오랫동안 권력의 손을 탄 ‘경주마’도 권력이 제공하는 ‘당근’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경주마에서 야생마로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윤광웅 국방부 장관을 앞세워 전작권 환수를 추진했는데, 전작권을 환수하면 한국 방어의 근간인 연합사가 해체된다. 군은 어느 집단보다도 동맹과 연합군의 가치를 잘 알기에 반대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국민은 노무현 정부가 내건 ‘자주’라는 구호에 매혹됐다. 권력은 ‘어용단체’인 향군도 따라올 것을 요구했다.

    2006년 5월 29일 노 대통령은 경주마를 어루만져주기 위해선지 박세직 회장 등 재향군인회 신임 회장단을 청와대로 불렀다. 고려대 정외과(59학번)를 졸업하고 학군(1기)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장(육군 2군사령관)에 올랐고 국회의원을 두 번 지낸 박세환 부회장도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박 부회장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국방담당 비서관을 한 적이 있어 습관적으로 ‘그 말씀’을 메모했다. 자리가 끝난 뒤 기자들이 “어떤 이야기가 있었느냐”고 묻자 개략적인 설명을 해줬다. 다음 날 언론은 “노 대통령이 또 ‘북핵은 방어용’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청와대는 경주마의 반발에 짜증을 냈다. 사실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대통령과 향군 회장단 간의 대화는 비공개 사안이라 구체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 부분적으로 내용이 잘못 전해졌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메모를 한 박 부회장을 발설자로 지목했으나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향군도 “(일부 언론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 향군 측 관계자가 전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내용 자체도 전혀 아는 바 없다”고 발뺌했다.

    어용에서 투사로! 재향군인회의 전쟁

    향군을 어용 단체에서 투사로 바꿔놓은 박세환 회장. 그는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향군은 한 달 뒤 노 대통령에게 ‘작통권(전작권) 단독 행사의 문제점과 유보 필요성’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길들인 경주마에서 제 길 가는 야생마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바른말’을 할 것이냐, 계속 어용으로 남을 것이냐. 향군은 많은 고민을 하다, 야전 출신답게 ‘야전성’을 회복해갔다.

    자유총연맹, 성우회, 한국기독교총연합 등 보수 성향 단체들과 전작권 환수를 막기 위한 500만 범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 이들은 2006년 9월 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 ‘전작권 환수 반대 9·2 국민대회’라는 정치성 짙은 행사를 열었다. 정권의 눈은 날카로워져갔다. 9월 12일에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500만 명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을 치렀는데, 이 행사엔 갑자기 건강이 나빠진 박세직 회장을 대신해 박세환 부회장이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말았다.

    “국민의 뜻과 달리 (전작권) 단독 행사(환수를 뜻함) 추진이 이뤄지더라도 내년에 재협상을 공약하는 대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해, 기필코 차기 정권이 재협상을 하도록 할 것이다. (…) 서명운동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 우리 국민이 전시작전통제권과 한미연합사에 대한 실상을 잘 알 수 있도록 소책자 발간, 만화 제작 배포 등 홍보활동을 적극 전개하겠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우리 국민이 운동본부에 성금을 보내줄 것을 호소하고자 한다. 성금을 보낼 계좌는 우리은행 ∼이다.”

    당연히 바로 태클이 들어왔다. 9월 15일 국회 정무위원회는 박유철 보훈처 장관을 불러 “박 부회장의 언동이 향군법에서 금한 정치활동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퍼부었다. 박 장관은 “그렇다”며 “어떻게 제재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답했다.

    얼마 후 정무위에는 향군법 폐지 법안, 여러 개의 재향군인회 설립을 인정하는 법안, 향군회장 선출 방식을 변경하는 법안 등 3건의 법안이 상정됐다.

    그리고 그 전해에 만들어진 평화재향군인회와 여당의 협조가 강화됐다. 평화향군은 창설할 때부터 열린우리당과 관계가 있었다.

    좌파 언론과 여당의 비난이 계속되자 향군은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거명하지 않고 대선 후보 지지를 표명한 것은 정치활동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국가안보의 기본을 흔드는 행위는 좌시하지 않을 것” “범국민 서명운동은 적극 시행할 것”이라고 저항했다.

    권력은 감사권을 행사했다. ‘돈 조사’ 앞에는 당해낼 장사가 없기에 박세환 부회장은 9월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그것으로 ‘향군 죽이기’는 일단락됐지만 정권의 옭죄기는 멈추지 않았다. 12월 12일 국가보훈처는 보훈처장관 명의로‘재향군인회의 정치성 활동에 대한 엄중 경고 및 재발방지 촉구’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왔다.

    향군은 이를 법무법인 KCL로 보내 ‘국가보훈처의 지침은 향군의 자율적인 활동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의견을 받아냈다. 이러한 의견이 ‘방패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향군은 물러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1000만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기로 했다. 정권과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셈이었다. 2007년 2월 21일 이들은 250여만 명의 서명을 받은 것을 자축하는 경과보고를 하면서 “16대 대통령에 취임한 노무현 씨는 2003년 5월 1일 취임 기념 TV 토론에 출연해 ‘군사작전통제권이야말로 자주국방의 핵심요소’라고 한미연합사 전시작통권에 대해 최초로 언급했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을 ‘씨’로 부르며 강한 거부감을 표출한 것이다.

    권력도 ‘마이웨이’를 걸었다. 미국을 방문한 김장수 국방부장관이 2월 23일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을 만나 ‘2012년 4월 17일 전작권을 환수한다’고 합의한 것.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인데, 칼자루를 쥔 것은 권력이었다.

    권력은 박세직 회장이 박세환 부회장의 사표를 처리하지 않은 것을 알고 “왜 수리하지 않느냐”며 압박을 가했다. 박 회장은 어렵게 버텨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치른 17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자, 박 회장은 사표를 반려해 그를 부회장으로 ‘컴백’시켰다.

    MB의 어정쩡한 합의

    그러나 ‘기대했던’ 이명박 정부는 전작권 환수 포기를 추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만 챙기는 ‘반쪽 보수’였다. 그래도 명색은 보수라 향군의 운동을 방해하진 않았다. 맥이 빠진 터라 1000만 명 서명은 어려울 듯했다.

    2009년 7월 박세직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해 박세환 부회장이 후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미국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보고, 11월 신임 회장단과 함께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고 전역한 에릭 신세키 미국 보훈처 장관 등을 만나 1000만 명 서명운동과 전작권 전환 연기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운명의 2010년 3월 26일이 다가왔다. 그날은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64회 생일이었다. 이 대통령은 김 여사에게 64송이의 빨간 장미와 함께 ‘사랑하는 윤옥에게’로 시작해 ‘명박으로부터’로 끝나는 편지를 전했다. 그리고는 자녀들이 차려준 부인 생일상을 받다가 백령도 해역에서 천안함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 벙커로 달려갔다. 천안함은 격침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도 국군통수권자인 그는 꼼짝하지 못했다. 미국에 의존하는 모습만 보였다.

    천안함 사건 직후 미국은 한국이 군사력을 동원해 보복에 나서 정전(停戰) 체제가 깨지는 게 아닐까 염려했는데, 이 대통령이 그렇게 나오자, 안심하고 항모를 보내주는 등 ‘MB 끌어안기’에 나섰다. 미국과의 공조로 현장조사를 하던 해군이 북한이 쏜 어뢰 잔해를 찾아내자 이 대통령은 비로소 북한 소행임을 확신하고 국민 앞에 나타나 5·24 선언을 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한국군이 5·24 조치의 일환으로 대북방송을 재개하면 조준 격파사격을 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하자 바로 후퇴했다. 이명박 정권이 ‘약골’임이 밝혀지면서 향군이 주도해온 1000만 명 서명운동에 다시 불이 붙었다. MB를 믿고는 안보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 힘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한미연합군으로라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보태졌기에 향군 멤버들은 언론에 나가고 대회에 참석하는 등 총력을 다해 전작권 환수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제야 국민은 ‘미군이 있어야 “나”를 지킬 수 있다. 자주가 전부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덕분에 5월 19일 1000만 명 서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것이 ‘힘’이 되어, G20정상회의를 위해 캐나다 토론토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6월 26일 오바마 미 대통령을 만나 2015년 12월 1일로 전작권 환수 시기를 연장한다는 합의를 했다. ‘약골’ 대통령은 체면 때문인지 그의 임기 이후로만 환수 시기를 연장했다. 어정쩡한 합의였지만 향군은 일단 환영했다.

    김장수와의 갈등

    하지만 그해 11월 23일 북한군이 연평도 포격전을 도발하면서 과연 2015년에 전작권을 환수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체면을 중시한 ‘약골’ 정부는 이 의문을 못 들은 척 했다.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서 여당의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다. 향군엔 그가 어떤 안보정책을 펼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박 당선인은 예상을 깨고 인수위의 외교국방통일분과 간사에 김장수 전 국방장관을 임명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과 전작권 환수에 합의한 장본인이다.

    그런 김 간사가 예정대로 2015년 전작권을 환수한다는 의견을 밝히자 향군은 들끓었다. 향군의 분노는 박 대통령이 김 간사를 안보정책의 컨트롤타워인 대통령 안보실장에 임명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도 마찬가지였다. 성우회에서는 김장수 실장을 회원에서 제명하려는 논의까지 했다. 그때 박 당선인이 안보관이 확고한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국방장관 내정자로 지명했다. 그러자 뚜렷한 근거도 없이 김 전 사령관을 로비스트로 모는 역풍이 일었다. 향군은 ‘김병관은 죽이고, 김장수는 살리려는 수상한 세력이 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최대의 보수단체인 향군의 여론이 나빠지자 2월 15일 김장수 안보실장 내정자가 향군을 방문했다. 박 당선인의 스태프를 자처한 그는 향군의 뜻을 당선인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다. 향군 대 당선인 간의 긴장은 일단락됐다.

    향군은 입장을 분명히 하기로 했다. 전작권을 2015년에 돌려받지 말고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무기 연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공론화하는 운동에 들어간 것. 그러나 김관진 국방장관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명박-오바마 합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방부도 미군과 연합군 체제를 이루지 않고는 한국 방어를 자신할 수 없었기에 전작권은 환수하되 한국군이 사령관을 맡고 미군이 부사령관을 맡는 변형된 연합사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명분도 얻고 실리도 챙기자고 한 것이다.

    남의 나라를 도와주러 간 미군이 그 나라 군의 지휘를 받은 사례는 없다. 한국군도 베트남이나 이라크에 파병됐을 땐 베트남군이나 자유이라크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미국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참 후 국방부와 김장수 실장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여론을 받아들여 전작권 환수를 무기 연기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드디어 한국군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합의로 ‘회군’을 결정한 것이다.

    어용에서 투사로! 재향군인회의 전쟁

    2월 15일 향군을 찾아온 김장수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 간사(왼쪽. 현 안보실장)를 만난 박세환 향군회장. 이 만남 이후 김장수 씨는 전작권 환수 무기 연기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안정될 때까지’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답이 없다. ‘우익이 극성한다’는 이유로 일본과 멀어지는 대신 중국과 가까워지는 양상을 보이는 한국을, 미국은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미국에 편승해 안보를 꾀하고 있으면서도 방위비 분담을 피하려 한다는 시각도 갖고 있어, 전작권 환수 무기 연기에 선뜻 합의해주려 하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미국은 전작권 환수 무기 연기를 의제로 삼는 데 반대했다.

    미국을 돌려 세우려면 먼저 우리 국론부터 통일시켜야 했는데 다행히도 김장수 실장과 김관진 장관이 돌아섰다. 향군은 이명박에 이어 김장수·김관진을 돌려세우는 힘을 보여준 것이다. 현재 국방부는 10월에 열리는 한미연례안보장관회담(SCM)에서 전작전 환수 무기 연기를 핵심 의제로 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국방부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것이 향군이다. 국방부의 노력이 실패하면 향군이 나서서 미국 조야를 움직이는 민간 외교를 펼쳐야 할 것이다. 향군 측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다소 들어주더라도 전작권 환수 무기 연기를 관철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전작권 환수 연기에 대한 국론은 통일됐기에 향군은 다음 목표로 나아가고자 한다. 향군과 정부는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전작권 환수를 연기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데, 이를 ‘대한민국이 안정될 때까지’로 바꾸려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안정될 때’는 북한과 완전한 통일을 이룬 때를 의미한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북한의 김씨 왕조는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김씨 정권이 무너질 때 북한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외세가 개입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러한 개입을 막으면서 북한을 안정화해 한국과의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미국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연합사는 유엔사 기능을 겸하기에 유엔을 대신해 한반도 문제를 조율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 급변사태를 계기로 통일을 이룬 대한민국이 외세의 개입을 받지 않고 안정화할 때까지 전작권 전환을 늦추고 연합사 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박회장은 국방개혁법을 전작권 환수와 더불어 한국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양대 ‘말기 암’으로 보고 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이 법은 병사들의 복무 기한을 대폭 줄이고 병력을 축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국민의 환호 속에 만들어졌다. 정부가 ‘복무기한을 줄이면서도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탓이다.

    이 법은 50여 개인 육군 사단을 20개로 줄이려고 한다. 20개로 줄어든 사단 가운데 현역으로 편성되는 상비사단은 10개뿐이다. 전문가들은 급변사태 시 북한 지역을 안정화하려면 10개의 상비사단을 북한지역에 투입해야 한다고 본다.

    국방개혁법 폐지에 총력

    이 법 아래에서 북한 급변사태를 맞으면 한국은 전투력이 좋은 상비사단은 모두 북한으로 보내고 한국 방어는 예비군이 입소해야 완편되는 10개 향토·동원사단에 맡겨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매우 위험한 체제다. 이 체제는 북한이 급변사태로 가기 전에 일으킬 수 있는 도발에 대처하는 데도 취약하다.

    박세환 회장은 육군의 사단 수와 병력을 현재와 같이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21개월인 의무병의 복무기한을 24개월 정도로 늘려야 한다. 24개월로 해도 입영 장정이 부족해 병력이 줄어들 판인데, 국방개혁법은 18개월로 줄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국방부와 각군의 장성들은 병력 유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국민이 군 복무기간 연장을 환영하지 않을 터라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 “복무기한을 연장하면 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리까지 하고 있다. 복무기한 연장은 국방이 아닌 정무 차원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책임 방기가 아닐 수 없다.

    박회장은 또 한 번 인기 없는 투쟁에 나서려고 한다. ‘자주’라는 달콤한 말이 횡행하던 2006년 향군은 한미연합사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어렵사리 인식시켰다. 천안함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내 아들의 복무기한을 줄인다’는 것은 자주보다 더 달콤한 유혹이다. 국민을 이 유혹으로부터 어떻게 떼어낼 것인가.

    이명박 김장수 김관진을 돌려세운 의지와 투지를 국방개혁법 폐지에 투사하는 것이다. 북한은 3차 핵실험 후 유엔 제재가 강화되자 유화책을 쓰고 있다. 핵 보유국 굳히기를 하면서 돈벌이도 하자는 것인데, 북한의 이러한 전략이 국방개혁법 폐지 운동을 펼치는 데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한다.

    박회장은 어떻게 국방개혁법 폐지 운동을 일으킬 것인가. 향군은 일단 국민을 향해 “북한 급변사태 시 우리 병력이 부족하면 한반도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병력 축소는 통일의 기회를 놓치는 더 큰 손실”이라고 설득해볼 심산이다. 박세환 회장은 “진정한 어용은 정권이 아니라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