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개혁 없으면 21세기도 없다

  • 박세일

    입력2005-05-10 16:1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국가· 시장 · 시민사회 각각의 능력을 높이고 이 세가지 사이에 새로운 관계, 다시 말해 분업-협업, 균형- 견제의 올바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제2세대의 핵심이다.
    우리는 지금 5가지의 문명사적 변화가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첫째 변화는 세계화(globalization)다. 정보통신혁명, 냉전 종식, 바꿔 말하면 구 사회주의권의 시장경제 편입, 경제의 무국경화, 특히 국제금융의 세계화 등을 계기로 나타나는, 말 그대로 범세계적인 현상이다.

    둘째 변화는 민주화(democratization)다. 일찍이 사무엘 헌팅턴 교수가 지적했듯이,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 규모의 ‘제3차 민주화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들이 붕괴되고 선거 민주주의가 등장하고 있다.

    셋째 변화는 민족주의(nationalism)의 재등장이다. 세계적으로 인종주의, 종족주의 그리고 종교적 근본주의 등의 보편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넷째 변화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등장이다. 냉전시대의 이극체제가 붕괴하고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등장했다. 미국은 지금 군사적·경제적으로 세계 최강국이다.

    다섯째 변화는 신정신주의(new spiritualism)의 대두다. 산업화·정보화가 가져온 배금사상, 극단적 이기주의, 환경(자연환경과 역사환경) 파괴, 공동체(시간적·공간적 공동체) 상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정신주의 운동, 새로운 문화운동이 다양한 형태(환경생태주의, 공동체운동, 각종 주민운동, 명상운동, new age movement 등등)로 나타나고 있다.



    두 가지 모순구조

    그런데 위와 같은 5가지 큰 변화의 물결 속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모순 내지 갈등구조가 존재한다.

    첫째, 자유와 평등 간의 모순이다.

    세계화의 흐름과 미국 중심인 일극체제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자유·창의·효율·성장·개인주의·대외개방(초국가주의) 쪽으로 이끄는 힘이 되고 있다. 반면에 민주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신정신주의는 세계를 평등·전통·정의·분배·공동체주의·대내지향(국가주의) 쪽으로 움직여가는 힘이다.

    전자는 시장(market) 영역을 확대하고 그 시장의 힘을 강화하는 대신에 국가(state)의 역할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반면에 후자는 시장의 영역을 축소하고 제한하는 대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확대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서로 긴장하고 갈등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세계화와 시장의 승리는 오늘날 세계 최고 부자 200명의 자산 합계가 세계인구의 3분의 1에 속하는 저소득층 20억 명 전체의 1년 소득보다 크다는 불평등구조를 만들어냈다. 또한 10년 이상 호황을 누리는 미국에서도 최하위 20%의 가구소득은 지난 25년간 실질 가치로 15% 감소해왔다고 한다.

    이렇게 심화되는 불평등 구조를 평등·정의·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민족주의, 신정신주의의 흐름이 용납하고 수용하기는 도저히 어렵다. 따라서 불평등 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 시장에 대한 통제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여기서 자유와 평등, 시장과 국가간의 긴장과 갈등구조가 등장하게 된다.

    둘째, 정치와 경제 간의 모순이다.

    한 마디로 경제(세계경제)는 다국적기업, 초국적 국제금융 등을 중심으로 세계화, 무국경화하는 데 반해서 정치(국제정치)는 아직도 국민국가가 중심이 돼 세계이익이 아닌 국가이익의 추구를 목표로 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구조는 경제적으로는 세계적 통합, 상호의존의 연결구조(interlocking system) 속으로 편입돼가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독립된 개별 국민국가 단위로 분열돼 있다. 따라서 단일화돼가는 세계경제가 야기하는 문제를 분열돼 있는 국제정치가 해결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IMF 자료를 보면 1975~97년간 세계적으로 158건의 외환위기와 54건의 금융위기가 있었고, 양자가 결합된 형태의 위기는 32건 있었다. 이중 12건의 위기는 GDP의 10%를 사용하고 나서 극복이 가능했다.

    이렇게 주기적·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국제금융위기는 국제금융시장의 세계화·정보화로 인해 그 규모가 급속히 커졌고, 움직임이 대단히 빨라졌으며, 동시에 시장의 불안정성·불확실성이 구조적으로 크게 증대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제도적·정책적 대응이 범세계적 차원에서 시급하고 긴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개별 국가이익 중심의 국제정치구조로는 이 문제를 제대로 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경제적 통합과 정치적 분열 간의 모순과 갈등이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대안은 시민사회 뿐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가치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화시키려면 제3의 가치 내지는 덕목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박애(fraternity)다. 그리고 이 박애를 대변할 세력이 시민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장이 자유를 대변하고 국가가 평등을 대변한다면, 시민사회는 박애를 대변해야 한다. 그렇게 자유와 평등, 시장과 국가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조화시켜 나가는 일을 해낼 세력이 시민사회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는 다음의 세 가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첫째는 앞에서 본 신정신주의(환경운동·공동체운동 등)의 담당자 구실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이기적인 개인으로 파편화되어가는 현대사회 속에 자연이나 이웃과의 공간적 공동체(자연보호·이웃사랑)와 역사나 전통과의 시간적 공동체(민족·선조·후손)를 다시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둘째는 인간의 상품화가 아니라 시장의 인간화를 위해서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종래에는 국가가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담당해왔으나 세계화 과정에 이러한 국가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기능을 시민사회가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시장을 가능한 한 문명화(civil economy)해야 한다. 예컨대 소비자보호·소액주주운동·환경운동·여성 및 연소근로자 보호운동 등은 물론이고 시장과 별도의 시민적 교환의 장(소비협동조합·지역화폐·work collective 등)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셋째는 민주주의의 형식화 내지 형해화(形骸化)를 막기 위해서 시민사회가 시민참여, 주민감시의 강화에 노력해야 한다. 많은 나라들이 소위 선거 민주주의는 달성했다고 하지만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요원하고 대단히 험난하다. 민주주의의 내실화와 정착을 위한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관심과 감시가 필요하다.

    국가의 국정운영 파트너로서 시민사회의 비중과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관 주도보다는 민관합작이어야 더욱 공정하고 능률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회·경제 문제(예컨대 공적부조·환경정책·산재정책 등)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실패(government failure)를 줄이기 위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협조노력도 점차 중요해질 것이다. 요컨대 이제는 시민사회의 성숙 없이는 공동체의 유지도 어렵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성공도 어렵다.

    앞서 제시한 두 번째 모순, 즉 정치와 경제 간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새로운 세계 통치구조를 창출해야 한다. 오늘날 많이 논의되고 있는 신 국제통화질서(new financial architecture)구축도 이러한 세계 통치구조 창출의 문제 중 하나다.

    새로운 세계 통치구조를 창출하려면 개별 국가들이 세계이익을 위해 국가이익의 일부를 수정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주요 선진국의 양보와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미국이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세계지도국가(global leadership)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효율적이고 공정한 세계통치구조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는 사실상 미국이 그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세계경제가 제기하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앞에서 지적한대로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전성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바람직한 세계통치구조는 사실 케인스가 한때 주장했던 세계중앙은행과 세계화폐의 창출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 방향으로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오늘날 그 대안으로 IMF를 개혁하는 여러 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 우리도 적극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동시에 AMF(Asian Monetary Fund) 설립 등을 통해 외화준비금 공동사용, 통화안정기금 설치 등은 물론이고 나아가 효율적인 지역화폐권(optimum currency area)의 창설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단기자본의 이동에 대해 일정한 부담(penalty)을 지우는 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세계통치구조를 만들기 위한 국제간 혹은 국가 차원의 노력과 동시에 각국 시민사회가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들이 세계시민임을 자각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구적 공동선을 향한 공동 노력을 조직화해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구적 공동선에는 국제금융시장의 안정문제 뿐 아니라 지구환경보호, 국제범죄의 방지, 지역분쟁의 예방, 핵, 인종, 인권문제 등 그 내용과 범위가 대단히 넓다. 여하튼 이러한 지구적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차원의 국제연대 노력은 세계 단일 통치구조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모순의 해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과거 역대 정권이 추진해온 개혁을 제1세대 개혁이라고 부른다면, 제1세대 개혁의 중심은 경제사회 운용의 기본틀을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바꾸는 것이었다. 자유화·개방화·민영화·규제완화·공정경쟁·작은 정부 등이 제1세대 개혁의 기본 방향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중심은 경제구조 및 경제질서개혁과 정부조직 및 정부 기능개혁이 중심이었다.

    ‘제1세대 개혁’만으로는 안된다

    이 제1세대 개혁은 앞으로도 20∼30년간 지속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제1세대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신흥공업국이나 체제전환국(transition economies)들이 시장(근본)주의 내지 경제주의에 기초한 제1세대 개혁만으로는 소위 시스템 개혁에 성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에서 개혁이 점차 어려워지고 효과도 떨어지고 있다. 개혁 실패도 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시스템 속에는 시장과 경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정치, 역사와 전통, 의식과 문화 등이 함께 존재하면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국가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는 따로따로 발전·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상호의존과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예컨대 자유화·개방화·규제완화정책도 기존 규제를 무조건 푼다고 해서 바람직한 결과가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잘못된 구질서(구 행동패턴)를 대체할 바람직한 신질서(새로운 행동패턴)가 형성되려면 새로운 행위준칙이 반드시 형성돼야 한다. 이 새로운 행위준칙을 강제하는 새로운 차원의 감시·감독체제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바람직한 신질서가 형성된다.

    기존 규제를 혁파하는 것도 물론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한 새로운 차원의 감시·감독체제를 창조하는 것도 정부능력(예컨대 공무원의 전문성과 헌신성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 나라에 IMF 금융위기가 도래한 요인의 하나로 금융개방화에 반드시 따라야 할 고도의 금융감시·감독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규제를 풀었다고 해도 그 규제 완화의 결과는 그 나라 시민사회의 성숙도, 시장의 성숙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시민사회와 시장이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유화·개방화·규제완화가 오히려 경제의 천민화 내지 시장의 카지노화만을 부를 수 있다. 예컨대 토지규제 완화가 자연에 대한 무차별 파괴와 국토의 난개발을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와 같이 국가·시장·시민사회는 상호 연결돼 있고 상호 작용하고 있다.

    제1세대 개혁의 성공 여부는 시민사회가 성숙돼 그 사회에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정신, 공익을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자제하는 가치와 의식이 보편화돼 있느냐, 아니면 사회가 성숙되지 않아 사회가 이익집단들의 각축장이 돼 있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사실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시민사회에서는 자유화도 규제완화도 비교적 쉽게 성공할 수 있다. 자율과 자유의 영역이 커져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는 한 마디로 사회 구성원들의 도덕적 해이나 기회주의적 행태가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만 강조되는 사회에서 갑작스런 자유화·규제완화는 사회를 이익집단들의 무한경쟁·무한투쟁의 장으로 바꾸고, 그 결과 규제완화가 사회혼란을, 그리고 사회혼란이 규제의 재도입을 부르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물론 신뢰받는 정부, 실력 있는 정부 하에서는 제1세대 개혁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이런 정부는 시민사회로부터 협력과 신뢰를 쉽게 얻을 수 있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자유화와 규제완화 정책을 쉽게 성공시킬 수 있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상호신뢰가 있다면 민관합작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작은 정부 혹은 큰 정부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도덕적 정부인가 또는 언행일치의 유능한 정부인가가 중요하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국내시장이 경쟁적이냐 아니냐, 투명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지배하고 있느냐 아니냐, 부패구조가 얼마나 심각하냐 아니냐에 따라 제1세대 개혁의 성공 여부가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대외개방 이전에 대내개방(자유·공정·투명경쟁의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요컨대 능력있고 신뢰받는 정부, 성숙한 시민사회의 지지와 협조, 그리고 공정·투명·경쟁적인 시장경제가 전제되지 않으면 자유화·개방화·민영화·규제완화·작은 정부 등을 추구하는 제1세대 개혁의 성공은 대단히 어렵다는 결론이다.

    개혁은 결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개혁은 사회의 주요 영역인 국가·시장·시민사회 각자의 근본적인 자기혁신과 이들 3자간 관계를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제2세대 개혁’의 중심과제다.

    ‘제2세대 개혁’ 위한 5가지 국가능력

    이를 풀어 이야기하면 제2세대 개혁의 중심과제는 첫째 국가능력·시장능력·시민사회능력을 높이는 것이고, 둘째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관계를 상호 보완과 협력, 상호 균형과 견제의 새로운 선순환 관계로 재설정·재구축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위기를 맞은 이유는 국가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관치경제 관행 때문에 시장능력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시민사회능력도 이제 막 시작인데, 국가능력(협의로는 국정운영능력)이 소위 민주화 이후 크게 약화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 위기의 본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개혁이 부진했던 주된 이유도 약화되고 있는 국가능력, 공정하고 투명하지 못한 시장구조, 미성숙한 시민사회, 그리고 이들 3자간의 상호배타적·비협조적 관계, 그리고 견제와 균형이 깨진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국가능력이란 다음 5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제도 능력이다. 제도능력은 국가제도의 정당성·도덕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 정도가 결정한다. 예컨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있어야 검찰 제도가 능력을 가지게 되고 법의 지배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만일 공직에 부패가 만연하면 국가정책과 제도가 국민적 신뢰를 받을 수 없어 그만큼 제도능력이 떨어진다.

    둘째, 정책능력이다.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정책을 기획하고 수립할 수 있는 능력과, 한번 수립한 정책을 일관성 있게 집행하는 능력이 정책능력이다. 예컨대 국가정책이 단기적 성과주의 내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좌지우지되거나 혹은 정치적 편의에 의해 자주 바뀐다면 정책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사실 우리 나라 역대 정부가 시도했던 많은 개혁들은 개혁안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일관성있게 지속적으로 집행되지 않아서 실패한 예가 대부분이다.

    셋째, 행정능력이다. 이는 기초행정능력과 전문행정능력으로 나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방·치안·방범·소방·교통·분쟁해결·공적부조 등 기초행정분야에서는 공평성과 효율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국가의 기본 질서를 바로잡는 분야다. 동시에 시대가 점차 세계화·정보화하면서 국가경영에 고도의 전문행정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행정부도 그렇지만 입법부나 사법부의 국제화 정도는 우려할 수준이다.

    넷째, 위기관리능력이다. 세계화에 따라 국내와 국외의 구별이 엷어지면서 국가 경영을 둘러싼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가 급속해지고,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급격한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 종합기획능력, 현장장악력 등이 필요한 시대다.

    다섯째, 학습능력이다. 이는 국가가 지속적으로 자기개선을 하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자기개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하나의 학습조직이 돼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과거 국정운영의 경험, 개혁의 성공과 실패 경험, 그리고 교훈들이 제도적으로 전수돼야 한다는 점이다. 국정운영과 관련된 암묵지(暗默知·tacit knowledge)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전수하는 것을 반드시 제도화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국가경영에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정책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국가능력이 떨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이러한 5가지 국가능력을 어떻게 키워 나갈 것인가가 제2세대 개혁의 주요 과제다.

    시장능력(market maturity)이란 시장제도 능력과 시장문화 능력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시장제도 능력이란 한 마디로 시장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생산물 시장에서는 사적재산권의 엄정한 보호와 공정한 자유경쟁(해외 경쟁의 도입을 포함해서) 확보가 중심이 된다. 독과점 질서나 정경유착의 부패질서는 시장의 순기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생산요소시장(노동·금융·토지시장)의 경우에는 사적 재산권의 보호와 자유경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문에는 정교한 사회적 안전망의 확보가 꼭 필요하다.

    예컨대 토지는 공급이 제한돼 있는 재화이고 한번 사용하면 비가역성(非可逆性)이 크기 때문에 토지 사용에 대한 정교한 사회안전망(규제)이 없으면 자연파괴와 난개발이 일상화할 소지가 크다. 노동력이 거래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사회안전망(보호와 육성)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력 유실, 노사분규, 생산성 하락 등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의 경우는 소위 정보의 비대칭성, 집단심리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확실성이 크므로 정교한 사회안전망(감시와 감독)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기적·반복적으로 금융사고 금융위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생산물 시장에서는 사적 재산권의 보호와 공정자유 경쟁이 확보되지않았고, 생산요소시장에는 적절한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이 허약하다. 그 결과 투자의욕·근로의욕의 상실, 독과점의 횡포, 정경유착, 격렬한 노사분규, 반복적 금융사고 및 위기, 그리고 토지의 난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시장문화 능력은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철학과 공동선의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시장에서 투명성과 정직의 미덕이 얼마나 보편화돼 있는지 하는 문제다.

    구미에서는 소위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직업윤리에 근간을 이루어왔고, 일본에도 재가성불(在家成佛)사상·노동선(勞動禪) 사상 등을 통해 나름의 노동철학이 형성돼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정직과 성실의 노동철학, 소위 프로의식 내지 천직의식이 대단히 약한 편이다.

    시민운동이 가야 할 길

    다음, 시민사회능력은 ▲이웃에 대해 단순히 배려(예컨대 에티켓, 매너 등)하는 마음에서 시작해서 ▲이웃에 대한 적극적 관심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이웃 사람들의 삶을 조건짓는 제도(공동체)에 대한 관심, 나아가 그 제도의 개선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해간다.

    이러한 관심은 대화와 토론, 그리고 공동연구로 발전하고, 그 과정에 타인의 주장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개진하는 능력과 올바른 대안을 함께 찾아가는 능력이 함양된다. 한마디로 시민사회는 관용의 덕과 공동학습 능력이 함양되는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민사회에는 ‘신뢰’라는 사회자본이 형성되는 것이다.

    시민사회 능력을 높이는 제도 내지 운동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민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적 싱크탱크 운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적 싱크탱크 운동이란 대학교수·학자 등 이론전문가들과 기업인·정부관료 등 현장전문가들이 함께 국가이익의 창달과 공익 실현을 목표로 국가 정책과제를 공동연구·공동발표하는 정책운동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자는 역사가 깊지 않고, 후자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시민운동은 권위주의시대를 지나면서 중앙집권적이고 권익추구 내지 권익쟁취형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앞으로 민주화시대에는 지방분권적이고 공동체적 가치추구형으로 발전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박애를 실천하는 이웃들의 작은 모임들로, 좀 더 시민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 돼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시민의 일상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과정에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배우는 장, 동시에 민주 시민의 품성과 가치를 훈련하는 배움의 장이 돼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민운동의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 하부구조가 취약해서는 세계화시대에 시장의 횡포와 민주주의의 형해화를 막기 어렵다.

    독립적인 두뇌집단운동의 경우 우리 나라에는 정부연구소나 기업연구소는 있지만 특정 정파나 이익집단의 이해를 떠나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 독립해 국가의 장기 발전과 공익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가 운동은 아직 없다.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연구소운동이 바람직한 두뇌집단운동의 대표적인 예다.

    미국에서 이러한 운동은 다음과 같은 순기능을 한다. 첫째 국가정책 논의를 비정치화, 비정파화한다. 가급적 국가 전체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우선해 정책을 논의하는 풍토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이론가와 실무자가 함께 만나 공동연구를 함으로써 이론과 현장을 접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계와 정부를 연결하는 장이 된다.

    셋째, 과거의 정책 책임자와 현재의 정책 책임자가 만나 공동 토론을 함으로써 국정운영의 경험과 교훈이 전수된다. 이는 국가의 학습능력을 크게 높인다.

    넷째, 정치인·언론·시민사회의 정부정책에 대한 건강한 비판과 건설적 대안제시 능력을 높이는 데에 이들의 전문적 연구가 크게 이바지한다.

    다섯째, 문무를 겸한, 이론과 실무를 겸한 정책가형 인재를 육성하는 장이 된다. 사실 이 정책가형 인재의 부족도 우리나라가 당면한 큰 문제의 하나다. 나아갈 정책 방향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인재, 이론과 실무를 겸하고 거기에 헌신성까지 겸한 인재가 특히 부족하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독립된 두뇌집단 운동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운동이고 제도다.

    앞에서 본 국가·시장·시민사회 각각의 능력을 높이고 이들 세 가지 사이에 새로운 관계(새로운 분업과 협업의 관계, 균형과 견제의 관계)를 올바로 구축하는 것이 제2세대 개혁의 핵심 내용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제2세대 개혁의 큰 그림을 그리고, 그 구체적 실행전략을 만들어낼 정책세력(학자와 관료)이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계획을 정치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추진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개혁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할 사회세력이 있어야 한다.

    3자로 구성된 개혁적 미래세력이 활동하고 있는, 혹은 성장하고 있는 나라는 21세기의 세계화 도전을 성공적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21세기를 승리의 세기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21세기에 틀림없이 시장경제의 포기(세계화의 포기)와 민주화의 후퇴(권위주의 내지 전체주의 체제로의 회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제시한 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21세기에 세계화에 성공 대내적 조건일 뿐이다. 세계화 성공의 대외적 조건도 필요하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세계경제와 국제정치의 모순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세계적 통치구조를 성공적으로 창출해내는 문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야만 우리는 21세기를 승리의 세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