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월요일 아침 교도관 발걸음 소리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거듭난 사람들의 심경 고백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입력2003-01-30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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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해가 저물던 지난 12월31일 정부는 수년째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사형수 네 명에게 특별감형조치를 단행했다. 덜컹대는 철문소리, 방문 앞에 멈춰서는 발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다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이들은 이날 새 삶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들 중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두 사람이 전하는 사형수로서의 삶, 그리고 새로 얻은 생명에 대한 감격.
    “월요일 아침 교도관 발걸음 소리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지난 1월6일, 멀리 청계산 자락이 건너다보이는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 정문을 지나서도 한참 올라가 교도관의 안내를 받으며 구치소 교무동 현관에 들어서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난다. 진눈깨비라도 내릴 듯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인지 복도는 평소와 달리 침침했지만 몇 달 만에 이 곳을 찾은 서울구치소교화협의회 이상혁(68·변호사) 회장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유리문을 통과해 계단에 오르자 강당이 있는 2층을 지나 3층 종교실의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종교별로 마련되어 있는 종교실 가운데 한 곳에 들어서자, 지난 12월31일 특별감형을 통해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신분이 바뀐 재소자 김정호(가명·37)씨가 이회장을 맞이했다.

    “다른 이들은 얼마나 낙심했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김씨의 얼굴에 빛이 넘친다. 그러고 보니 옷도 녹두색 사형수복에서 파란색 일반 재소자복으로 바뀌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도 사형수임을 알려주는 빨간색이 아닌 흰색이다. 반갑게 손을 잡는 이회장을 바라보는 김씨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맺혔지만 감정을 자제하려는 표정이 역력하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새로 얻은 삶에 대한 감격이 많이 사그러든 것일까.

    “그런 게 아닙니다. 처음 교도관님이 감형소식을 전해주던 날에는 차마 믿을 수 없어 ‘할렐루야!’를 목놓아 외쳤지요.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에 새벽길을 달려오신 어머니를 부여잡고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비로소 어머니 얼굴에 빛을 찾아드렸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뻤고요.



    그러나 문득 돌아보니 주위에 남은 사형수들이 보이더군요. ○○형을 비롯해 다른 스물세 명의 최고수(재소자들이 죽음을 연상시키는 ‘사형수’ 대신 사용하는 용어. ‘최고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편집자) 형제들의 표정도 아른거리고요. 그들은 얼마나 낙심했겠습니까.

    내가 잘나서 감형 받은 것이 아니고, 내가 잘해서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닌데 이렇게 내놓고 좋아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가슴을 치며 회개했지요.”

    2남1녀 가운데 첫째인 김씨는 어머니에게는 더없이 착한 아들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무랄 것 없는 모범생이었지만 그를 엇나가게 만든 것은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소년원을 드나들면서도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지만, 어머니의 머리를 흉기로 찍는 등 아버지의 폭행은 계속됐다. 1992년 가을, 결국 김씨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공기총으로 살해하고 사체를 한강에 유기하는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이듬해 존속살해 및 사체유기 혐의로 사형이 확정돼 수인번호 40XX번이 김씨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전국 56명의 미집행 사형수 가운데 최장기수이던 김씨는 아직 사형이 확정되기 전인 1992년 12월24일 구치소 내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이후 3개월마다 한 번씩(지난해 9월부터 6개월에 한 번으로 변경) 방을 옮길 때마다 같이 지내는 수감자 600여 명을 전도해 ‘작은 목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지난 2000년 말에는 어머니를 통해 모아두었던 영치금 100만원을 소년소녀가장에 전해달라고 내놓기도 했다.

    ‘사형연습’ 거치며 죽음 준비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화장실에서 밤새 눈물을 흘리던 날부터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교도관의 발걸음 소리가 제 방문 앞에서 멈출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으니까요.”

    외국영화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수에게 사형이 언제 집행되는지 본인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 같은 것은 없다. 어느날 아침 방문 앞에 교도관이 다가와 수인번호를 부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미리 고지할 경우 일반수와 한방에서 기거하는 사형수를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 공포감에 시달린 한 사형수가 ‘재판이 진행중일 때는 사형이 집행될 수 없다’는 데 착안해 같은 방 재소자를 폭행하려 했던 사례도 있다.

    형 집행은 보통 평일 오전에만 이뤄진다. 때문에 사형수들은 어서 아침이 지나가기를, 빨리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반대로 다시 평일이 다가오는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은 사형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이다. 사형수들만이 앓는 ‘월요병’인 셈이다.

    김씨가 서울구치소에 들어온 이후 있었던 사형집행은 모두 네 차례. 운동시간 등을 통해 서로 얼굴을 익힌 사형수들은 집행이 있을 때마다 이번에는 누가 죽었는지 확인하며 살아남았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미처 오후가 되기도 전에 구치소 곳곳에 소문이 퍼져 나간다는 것. 그 중에서도 김씨는 문민정부 집권 말기인 1997년 12월 스물세 명의 사형수를 무더기로 처형한 날을 잊지 못한다.

    “정권 말이라 다들 긴장은 했지요. 그렇지만 사형수 경험을 했던 김대중 후보가 새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올해는 집행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날 아침 일찍 ‘오늘 가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더군요. 사람이라는 게 영적인 동물이니까요. 준비를 해야겠다 싶어 찬물로 목욕을 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유서를 썼습니다. 방 형제들에게 뒤를 부탁하고 기다렸지요.

    아니나다를까 열시 반쯤 되었을 무렵 담당 교도관이 ‘사공XX 김정호 면회!’하고 부르더군요. 준비했던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섰습니다. 복도를 걸어나가면서 방마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사형장 쪽으로 가지 않고 접견장 쪽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서울구치소 담당 목사님이 충혈된 눈으로 서 계신 것을 보고 나서야 ‘아! 집행이 이미 끝났구나, 이번에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도관을 따라 면회실에 가보니 오늘 집행이 있는 줄도 모르고 오신 어머님이 깜짝 놀라시더군요.

    방으로 돌아오니 동료들이 ‘죽으러 간 사람이 살아왔다’며 환호성을 질렀지만 저는 이날 깊이 깨달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연습’을 시키신 거라고요. 한번 두번 사형집행이 있을 때마다 함께 지내던 이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지켜보며, 심경이 담담해졌습니다. 집행에 입회했던 직원 분들이 그들이 갈 때도 담담하고 아름답게 갔다고 전해주셨고요.”

    아버지 무덤 잔디에 거름이 되어

    지난 30년간 100여 명의 사형수들을 지켜본 이상혁 회장에 따르면 사형수는 대개 비슷한 심리적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우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기까지는 담장 밖에 있는 가족들을 다그친다. 더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것은 물론이고, 판사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자신을 구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다가 형이 확정되면 한달 가량은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한다는 것. 이후에는 멍하니 벽만 쳐다보며 두 달을 보낸다. 이 때는 구치소 종교위원의 면담도 거절하고 혹 만난다 해도 묵묵부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종교에 의지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젊은 시절 잠시 교회에 나갔던 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재심청구나 헌법소원을 위해 기록을 복사하는 등 분주했던 김씨도 목사인 집안 어른의 설득으로 기독교에 귀의하고 나서 “언제 집행이 있어도 달게 받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구치소 종교위원들과 면담하며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회장의 말이다.

    “감형된 사형수들이 주위 동료를 생각하며 감정을 자제할 수 있는 것도 이미 오래 전 죽음을 초월했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사형수는 교수대 앞에 서서도 ‘내 목이 강한지 저 밧줄이 강한지 나랑 내기하자’고 교도관에게 농담을 걸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생사를 초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공포에 깜짝깜짝 놀라거나 사고를 치는 등 불안한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수에 비해 징벌방에 갇히는 경우가 잦습니다. 구치소 입장에서도 사형수는 다루기 힘든 존재인 셈입니다.”

    사형수를 만날 때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질문이다. 1994년 1월부터 김씨를 만나온 이회장이지만 면담중에는 물론 편지를 통해서도 김씨가 살해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김씨가 보낸 편지 가운데서 아버지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번뿐. 죽으면 장기는 기증하고 남은 시신은 화장해 아버지 무덤에 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무덤 잔디에 거름이라도 되어 남은 가족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집까지 다니기 편한 곳으로 옮긴 김씨의 어머니 장희옥(가명·57)씨는 기자의 질문에 끝내 말을 아꼈다. 이제 막 시작된 아들의 무기징역 생활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엄청난 비극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 듯 했다.

    “월요일 아침 교도관 발걸음 소리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사형수들이 서울구치소 교화협의회에 보내온 편지들

    “석철아!”

    “권사님! 저 이번에 너무 큰 선물을 받았어요.”

    감형처분을 받은 또 한 명의 재소자인 김석철(가명·35)씨가 교도관의 안내를 받아 서울구치소 교무동 1층 예배실에 들어서자 그를 담당하고 있는 신복순 종교위원의 눈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1998년 김씨를 처음 만난 이래 매주 목요일 김씨를 방문해온 신위원은 김씨 이전에 담당했던 사형수가 1997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때문에 이번 감형은 더욱 감격스런 일이었다. 믿기지 않기는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혹시 꿈이면 어떡하나 싶어 언뜻 잠이 들었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더라고요.”

    지난 12월30일 저녁 교도관에게 처음 감형소식을 들은 김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TV 시청시간마다 거듭거듭 눈을 비벼가며 뉴스를 확인했다. 자신의 이름 석자가 또렷한 신문기사는 아예 오려두고 틈날 때마다 꺼내봤다.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에게 이런 큰 선물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요.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애쓴 것도 아니고, 큰 선행을 베푼 것도 아닌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죽더라도 언제 죽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지요. 교도관들이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는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신위원은 “삶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는 사형수들도 있지만 석철이는 이미 오래전에 체념한 상태였다”고 말한다. 1998년 4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기 이전부터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것. 그러나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김씨는 더욱 사심 없는 마음으로 주위사람을 대할 수 있었다.

    김씨는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덜고 편한 마음으로 저세상에 가겠다는 생각에 방문 앞에 놓인 밥그릇을 나르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반대하는 부모를 면회와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설득해 장기기증에 동의하게 만든 것도 속죄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신위원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씨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웃음이다. 감격스런 마음이 다소 진정되자 신위원의 새로운 걱정이 이어졌다.

    “그냥 좋다고만 생각하면 안돼.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동안 사형수였으니, 그것도 모범수 중에 모범수였으니 누구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장기수잖아. 새 교도소로 이감되면 다른 재소자들이 너를 우습게 볼 수도 있고 살인자라고 멸시할 수도 있어. 2002년 12월31일, 이 날이 이제부터 네 생일이야. 새로 태어났다는 마음가짐으로 말 한마디에도 조심해야 한다.”

    구치소측의 감형 연락을 받고 김씨의 부모에게 처음 소식을 알린 것도 신위원이다. 김씨의 부모는 신위원의 전화에 “석철이를 살려준 하나님을 나도 믿겠다”며 울먹였다. 순식간에 가족들이 얼싸안고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김씨의 수감 이후 손자들을 키우고 있는 김씨의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이내 구치소로 달려왔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구치소를 찾은 것은 이튿날인 1월1일 아침. 1회 면회자가 세 사람으로 제한돼 있어 면회실에 들어가지 못한 아버지는 구치소 담 밖에 서서도 연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아버지가 웃으시는 것을 보니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았어요. 잘 웃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 동안 말 그대로 불효가 막심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웃음을 찾으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가난한 형편에 사형수 아들까지 뒷바라지하느라 많이 힘드셨는데….”

    신위원의 손을 붙잡고 내내 놓을 줄 모르던 김씨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낸다. 감형이 되고 나서 썼다는 ‘선물’이라는 시였다. 지나간 세월이 김씨의 눈에 눈물이 되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열악한 가정에서 자라느라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김씨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공사장 인부와 가스 배달원을 전전하며 세월을 보냈다.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18년 전 아내와 만나 살림을 차렸고, 첫아이도 낳았다. 자식의 인생이 정규코스에서 멀어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부모도 그제서야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1996년 유흥비 마련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친구를 납치, 현금 수백만원을 빼앗고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것. 지난해 봄에는 6년 가까이 옥바라지를 해온 아내와도 이혼했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기초생활보장법 대상자가 되려면 보호자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선택한 고육책이다.

    김씨의 어머니는 “그 동안 사정을 정확히 모르던 아이들도 이제야 소식을 듣고 웃음꽃을 피웠다”고 전했다. 사형수는 형이 집행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구치소에 머물지만, 이제 무기수가 된 김씨는 1월중에 다른 교도소로 이감된다. 김씨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해 통신과정을 통해서라도 꼭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새 삶을 얻은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새 생명을 나눠주며 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2002년 현재 56명이었던 사형 미집행자는 이들의 감형으로 52명으로 줄었다. 지난 1999년과 2000년 광복절에도 각각 다섯 명과 두 명의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던 김대중 정부는 출범 이후 한번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이는 민주당 정대철 의원을 포함한 여야의원 154명이 2001년 10월30일 국회에 상정한 사형폐지 특별법안 등 그동안 이뤄졌던 사형폐지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관련 인권단체들의 분석이다.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는, 더욱이 완전한 격리인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지만 바깥 세상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권이 바뀌고 상황이 변하면 사형이 폐지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이들이 교화위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김영삼 정부의 ‘신한국 창조’ 구호가, 사형수 경험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이, 지난 12월의 대선 결과가 자신들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할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번에 감형된 두 사람도 정권말기마다 이뤄지는 ‘재고정리형’ 사형집행이 올해도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고 있었다.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형이 결정된 지 오래된 사형수를 한꺼번에 처형하는 관행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그나마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 12월 중순 “현 정부 임기중에 사형집행은 검토한 바 없으며, 적절치 않다고 본다”는 법무부 고위 관계자의 말이 일부 신문에 보도되면서. 이어 대선 결과가 민주당의 승리로 결론나자 싹쓸이식 집행은 없을 거라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번 특별감형으로 그 동안 만나온 두 명의 사형수를 잃지 않게 된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는 서울구치소 교정담당 문장식(66·상문교회) 목사의 말이다.

    사형수에게 가장 좋은 일

    “그들을 풀어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형만으로도 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형수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날마다 같은 날이 반복되어도 좋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전붑니다.

    보통 국제인권단체들은 법률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되지 않아도 10년 이상 집행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폐지한 것으로 봅니다. 이제 5년이 지났습니다. 남은 5년도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아침 창 밖에 날아와울어대는 까치오늘은 무슨 좋은소식 있으려나생각했는데변함없이 저녁 폐방나팔이 울린다.이렇게 아무 일 없는 하루가사형수에겐 좋은 일.

    (김정호씨가 2000년 7월23일 쓴 시 ‘좋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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