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탈북 기자 주성하의 ‘비교체험, 남과 북’

낡은 자전거로 먼지 나는 시골길 달리는 행복을 아십니까?

  • 주성하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05-09-28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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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 기자 주성하의 ‘비교체험, 남과 북’
    남한사람들은 탈북자에 대한 첫 인상으로 목에 꽃다발을 걸고 두 손을 흔들며 “자유를 찾아왔습네다” 하고 외치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탈북자는 목숨 걸고 도착한 이 땅이 진정 ‘자유의 땅’이라 믿는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는 6000명.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 또한 막연한 자유의 환상을 품고 이 땅에 정착한 탈북자다. 한국에서 보낸 38개월, 나는 아침마다 붐비는 서울 지하철에서 ‘불량주부일기’를 보며 출근한다. 퇴근한 뒤에는 집에서 TV를 보다가 잠드는 평범한 직장인이 됐다. 지금 나는 ‘과연’ 자유를 찾았는가.

    지금은 나도 최신 가요 몇 곡쯤은 부를 줄 안다. 한국에 온 지 1년쯤 됐을 때 가장 이국적인 느낌을 갖게 한 곳은 노래방이었다. 노래방에서 본 내 또래의 남한 사람은 귀에 낯선, 듣기조차 숨이 찬 노래를 열정적으로 불러댔다.

    타임머신 타고 2000년으로

    그럴 때면 구석에 가만히 앉아 ‘나는 이방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주로 트로트. 한번은 회식자리에서 노래를 하라기에 ‘바위섬’을 불렀더니 한 선배가 “입사 7년차 이후 처음 듣는 노래”라고 했다. 졸지에 옛 사람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북한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반응은 연령대에 따라 다르다. 40대 이하는 주로 흥미롭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40대 이상인 사람과 이야기하면 뭔가 통하는 것이 있다. “아, 우리도 1960년대 초반엔 장거리 전화하려고 우체국에 가던 시절이 있었지”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달걀은 도시락 반찬용이었어”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남한의 1960년대가 지금의 북한과 비슷한 것 같다.

    나는 1960년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대로 온 것인가. 몇십년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고 치자. 그런 내가 주위 상황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주위에서 부르는 노래도 다 낯선 것이고, 입고 다니는 옷도 새로운 패션일 것이고 건물도 분명 새로울 것이다.

    선군사상, 자폭정신, 수령 아버지

    나는 화성에서 날아온 외계인도 아니고 유럽에서 온 이방인도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얼마 전에 깨어나 혼돈을 겪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 누군가 우쭐한 얼굴로 “당신 이런 차 못 타봤지?”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이다. “그때는 이런 차가 없었으니 당신이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라고 해야 맞는 말이리라. 기분 상하게 “이런 것 못 먹어봤지?”가 아니라 “옛날에는 못살아서 이런 것을 먹기가 쉽지 않았죠?”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 처지에서 보자면 살면서 겪는 모순이 많다. 우리는 분명히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사건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건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보기를 강요받았다. 남한 사람이 밝다고 배울 때 나는 북한에서 어둡다고 배웠다. 남쪽에서 어둡다고 하면 나는 밝다고 말했을 것이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혼란을 겪으면서 나는 이 땅에 정착하고 있다.

    나는 그래도 조금 나은 축에 든다. 휴전선에 깔린 지뢰밭을 넘어 한달음에 이 땅에 발을 디딘 사람은 어땠겠는가. 나는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 잠시 체류했다. 중국이 한국보다 20년 뒤처져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1960년에서 1980년을 거쳐 2000년에 온 셈이다.

    내가 경험한 세 나라는 단지 빈부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한다. 북한은 교육과 사회복지 혜택에서는 사회주의 노선을 적용한다. 그러나 ‘선군사상’이니 ‘자폭정신’과 같은 구호에서 드러나듯 군국주의 사회와 흡사한 면도 많다. 여기에 성분을 따지는 간부선발 원칙과 수령을 아버지로 섬겨야 한다는 주체사상의 종착점, 남성 우월주의 생활환경 등의 봉건적·유교적 관습도 사회 곳곳에 넘쳐난다. 내가 태어나 살았던 북한은 이처럼 사회주의와 군국주의, 그리고 봉건주의가 공존하는, 설명하기 힘든 나라였다.

    그런 내가 잠시 들른 중국은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 마인드가 복합된 나라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TV를 켜면 뉴스 첫머리에 “장쩌민 동지의 3개 대표론에 따라” 하며 떠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북한 TV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뉴스 도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광고를 보면 사회주의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진다. 광고 얘기가 나왔기에 한 마디 더 하자. 지금 중국 광고를 떠올리면 길바닥에서 목청껏 소리치다 못해 꽹과리까지 두드리며 다니는 행상이 떠오른다. 한국의 광고가 소비자의 섬세한 감성을 자극한다면 중국 광고는 “사세요, 사세요∼”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댄다. 요란한 사회주의적 정치선동에 익숙해진 중국 소비자를 겨냥한, 광고주의 탁월한 전략이 아닌가 싶다.

    강제노동수용소 시절

    그런데 중국을 거쳐 도착한 남한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에 걸맞게 정치체제와 사고방식,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자본주의 국가였다. 과연 이곳이 같은 동족의 땅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북한과 달랐다. 사회주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복합, 자본주의. 이렇게 지구상에 현존하는 세 유형의 정치형태를 두루 경험하며 겪은 가치관의 혼돈은 참으로 컸다.

    사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처음엔 종이에 글을 쓰고 지웠다 하는 방식이 편했지만 이제는 이게 편하다. 언젠가는 북한 사람 모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남한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있는 사람보다 적어도 몇십년은 앞선 세상에 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의 몇십년 훗날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탈북자의 집에 찾아가 먹는 북한 음식이 더 맛있다. 길거리를 걸어가는 아가씨의 너덜너덜한 청바지나 가수의 열창에 “꺅” 하고 소리 지르는 10대 청소년은 아직도 보기 거북하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남한의 옛 사람인지 북한의 미래인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껏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도 지어보고, 어부도 해봤으며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군 생활을 마치고는 예비역 지휘관 증서도 받았다. 짐꾼, 홈쇼핑 배달원, 카드사 홍보사원, 중소기업 무역담당 대리, 주간지 기자였던 적도 있다. 폭풍에 배가 뒤집혀 육지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바다에서 3시간이나 파도와 사투를 벌인 적도 있고, 짐승 우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리는 깊은 산속에서 한겨울 눈구덩이를 파고 신문지를 덮은 채 며칠 밤을 새운 적도 있다.

    서울의 경찰서를 돌면서 용의자를 심문하듯 캐묻는 출입기자가 과거 중국과 북한의 7개 감옥에서 죄수로 지냈던 사람이라곤 어느 경찰관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노동단련대’라는 강제노동수용소에도 있었고, 보위부와 보안서 감옥에도 있었다. 심지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다.

    그 시절에 별의별 것을 다 먹어봤다. 어쩌다 밖에 강제노동이라도 나가면 간수의 눈을 피해 캐낸 감자를 대충 손으로 닦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삼킨 적도 많은데, 날것으로 가장 먹기 힘든 것이 감자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쩌다 날 옥수수를 몇 줌 얻으면 주머니에 넣고 한 알씩 입에서 이리저리 굴려가며 씹어 먹었다. 그 맛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불 덮고 자는 것은 죄다

    음울한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틈틈이 시를 써 공책 한 권을 다 채우던 문학소년이었다. 북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을 마쳤고 남에서 연세대를 다니기도 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미국의 소리 방송(VOA)에 나간 적도 있다. 북에서 주석궁을 발 밑에 내려다보며 6년을 지냈고, 지금은 청와대를 내려다보며 2년째 일하고 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내가 꽤 나이 들었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30세 젊은이다.

    탈북 기자 주성하의 ‘비교체험, 남과 북’

    한국은 북한보다 자유롭지만 서로 갈등을 겪다가 충돌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 운명은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다. 행운이 뚝 떨어져 본 일은 없지만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뒀다. 이것도 행운이 아니겠는가. 농촌에서 태어나 김일성대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이뤘고,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가겠다는 결심도 실행했다. 중국에 나왔을 때 한국 방송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간 탈북자가 1200명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00명이 되기 전에 남한 땅을 밟겠다고 목표를 잡았는데,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바람에 2200번째쯤으로 도착했긴 했지만 어쨌든 꿈을 이뤘다. 한국에 도착한 뒤엔 기자가 되고 싶었고, 몇백대 일의 경쟁을 뚫고 소원을 풀었다. 목표는 또 있다. 내가 태어나고 부모 형제 친구가 살고 있는 북한을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남은 생을 바치고 싶다. 기회가 되면 다른 세상도 여한 없이 돌아보고 싶다.

    잃은 것도 많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이다. 나는 가족을 남겨두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났다. 눈물 훔치며 집을 떠나던 그 순간이 영원한 이별의 순간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입국한 뒤 가족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중국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북한 감옥에서 1년을 넘게 지냈다.

    북한의 감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하다. 1년 동안 나는 산 목숨이 아니었다. 내 혈육은 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린 감옥에서 추위에 떨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이곳에서 난방을 틀고 잘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 11평 영구 임대아파트 내 집으로 돌아오면 이불을 덮고 자는 것조차 죄를 짓는 것 같아 냉 바닥에 웅크리고 눈물 속에 밤을 보냈다.

    그러나 또 아침이 밝아오면 태연하게 출근해서 웃으며 하루를 보냈다. 외로움과 고독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중 일부는 훌륭한 남한 여성을 만나기도 하고 좋은 양부모를 만나기도 한다. 사소한 도움도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소수일 뿐 탈북자 대다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혈육도 친지도 선후배도 없는 세상에서 새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 아무리 인간성 좋고 성실하다 해도 남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가난한 탈북자를 친구로 여기는 남한 사람은 드물다. 좀 생각해준다면 동정의 대상이라고나 할까. 나 자신, 무슨 죄를 짓고 남한에 온 몸이 아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이렇게 묻는다.

    “한국에 정말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단 생각이 들죠?”

    그러면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행복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글쎄요”다. 나는 얼마 전 탈북자 중에서 우수정착자로 선정돼 표창까지 받은 적이 있는데도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감정파

    한국에서 살아 보니 가까운 시일 내에 남과 북이 통일되는 것이 그리 바람직한 길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한 사람의 우쭐함과 북한 사람의 자존심은 섞일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 오기 전, 중국 지린성(吉林)성 옌지(延吉)시에서 1년 넘게 살았다. 옌지는 10여 년 전부터 한국 바람이 불어 노래방, 식당도 한국풍이다.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흡사 한국의 소도시에 온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 이들이 한국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을 엄청 깔본다는 것이다. “다 같은 사람인데 한국인 너희는 왜 중국 조선족 알기를 우습게 아는가” 하는 불만이 쌓여 있다. 옌지 시내에서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면 10명 중 1명은 한국에서 몇 년을 보낸 사람이다. 이런 도시가 중국 전역에서 한국인에 대한 반감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러면서도 너도나도 한국에 못 가서 안달이 난 데가 이곳이다.

    옌지에 들어와 사업하는 한국인 사장도 많다. 이들 중엔 손가락질을 받게끔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옌볜에 선교하기 위해 온 한국인 목사가 첩을 거느리고 산다는 소리도 들린다. 나도 이곳에서 한국인 몇 명을 만나봤는데 어떤 사람은 탈북자를 우습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격지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그렇게 느꼈다.

    北 주민 1만명 내려오면 한국 마비

    한국인은 조선족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선족이 이해되지 않았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들은 탈북자를 머슴처럼 부리고 여자를 팔아먹는 짐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들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면서도 왜 그렇게 한국을 욕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중국과 한국에서 여러 번 차별대우를 직접 받고서는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고 잊기 어려운 게 모욕과 차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통일이 이뤄져 남북 왕래가 이뤄진 후 드러날 남북의 대립이 어떤 양상일지 알고 싶으면 옌볜에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수십년 앙금이 쌓인 영·호남의 대립은 아무것도 아니다.

    남쪽에 살다 보면 “한국의 경제력으로 북한을 발전시키겠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을 많이 본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본주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돈이면 다 되는 것인가. 당신들이 보고 들은 것이 자본주의밖에 없으니 탓할 수는 없다. 앞으로 북한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으로 사회주의 마인드를 가진 북한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반드시 탈이 날 것이다.

    북에 가서 공연하고 평양시민이 감동했다고 호들갑떠는 사람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평양에서 살았던 나는 왜 한국에서도 그 공연이 감동적이지 않은 걸까. 평양에 교회를 세운다고? 평양시민은 ‘역시 당에서 가르쳐준 대로, 적들은 종교를 사회주의를 마비시키는 척후병으로 삼으려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며칠 전 일산 호수공원에 가서 ‘춤추는 분수’를 보다가 ‘교회보다 이런 것을 평양에 세워주면 북한 주민이 정말로 한국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나는 평소 탈북자 관련 인터넷 기사에 달린 리플을 꼼꼼히 보는 편이다. 탈북자 관련 기사에 가장 많이 붙는 리플은 ‘남쪽이 발전하는데 벽돌 한 장 보태주지 않은 당신들에게 우리 세금으로 3000만원이 넘는 정착금을 주는 것이 아깝다’는 것이다. 나 또한 정착금을 받은 사람이지만 이런 글을 볼 때면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고 한국을 떠나고 싶다. 다른 탈북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기껏 주고서도 사람을 이렇게 분노하게 만든다면 이런 통일은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통일은 아직 멀었다. 남북한의 10대가 50대를 넘어설 무렵이 되면 사고의 격차가 좀 좁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느끼는 이런 서러운 감정을 북한 사람에게 순간이나마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나는 솔직히 남한의 발전은 ‘조국을 위해 벽돌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진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밝혔듯이 모든 사람이 자기 이해관계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 남한이 이만큼 발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감상적 통일론은 버려라

    탈북자에게 나라를 위해 벽돌을 쌓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을까. 남한 사람에게 ‘북한을 위해 하루 30분만 더 일하자’고 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통일을 위해, 내 혈육을 위해 하루 1시간 더 일하기 운동이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정치선동 여부를 떠나 북한 주민은 순수한 심정으로 1시간을 남조선 동포를 위해 바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통일의 환상이 깨지고 원망이 쌓이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해보라.

    동남아까지 가서 섹스행각을 벌이는 남한 남성들아. 북한 여성에 열광하는 당신들이 북한에서 그런 추태를 보인다면 돈 때문에 사랑하는 혈육을 노리개로 바쳐야 하는 북한 남성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남한의 중소기업이 북한에 들어가 지금 이곳의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식으로 했다가는 전쟁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

    통일에 대한 남한 정부의 준비자세도 실망스러울 뿐이다. 2047년 국민연금이 고갈된다는 계산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3세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더 다급한 문제가 아닌가. 15~20년 후에 북한에 뭔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탕만 하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 주민 1만명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온다면 남한의 경제와 치안은 붕괴된다. 이들은 북한에 돌아갈 수 없는 탈북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북한 남성의 대부분은 10년을 극한 상황에서 군 복무를 하며 보냈다. 현재 북한이 준비하고 있는 특수부대 병력만 10만명이 넘는다. 제대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될지 상상해보라. 가난에 진저리 나 죽기 살기로 덤비는 사람을 남한의 치안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중국군이 북한에 진주하는 시나리오든 남한군이 북한에 진주하는 시나리오든 이러한 사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들을 총으로 쏴 죽이면 그로부터 야기되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그때도 국민연금이 노후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비좁은 땅에서 눈앞의 세금에 연연하는 사람에게 근시안적인 사고를 버리고 조금만 앞을 내다보라고 말하고 싶다. 바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비극적인 통일은 당신의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탈북 기자 주성하의 ‘비교체험, 남과 북’

    주성하 기자(왼쪽)와 북한 다큐멘터리 영화 ‘어떤 나라’를 찍은 대니얼 고든 감독이 환담하고 있다.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대비한다고 해도 모자란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국민의 공감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 않다. 정부는 북한 정권을 계속 존속시켜 이 같은 사태를 막으려 하지만, 사소한 것에서 재앙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 북한이 붕괴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대안이 있는가. 평양에 가서 눈물부터 흘리는 사람들이여, 형제끼리 합친다는 식의 감상적인 통일론을 버리라. 성경에 카인과 아벨은 한형제였지만 종말은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나의 아버지는 강화도가 고향이고 어머니는 중국이 고향이다. 나는 북에서 태어나 남에서 살고 있고, 나의 국적은 현재 북한에도 남한에도 존재한다. 나는 스스로 ‘한반도인’이라고 여긴다. 비극적인 통일로 남한 젊은이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원치 않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독일처럼 후퇴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은 나의 고향이요 혈육과 친구가 사는 땅이다.

    남한과 북한을 동시에 경험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북한 주민에게 해줄 말이 없냐고 물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자존심을 굽히고 빌어먹겠는가, 아니면 스스로 일어서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남한 주민에게는 “이익을 잘 따져보고 알아서 하세요”라고만 말하고 싶다. 남한의 교육 이념은 홍익인간을 만드는 것이고, 북한의 교육 이념은 주체형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 보니 사실 남한 사람이 더 주체형의 인간이다.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의 기본원리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자기 운명을 당의 지시에 맡겨놓고 사는 수동적인 삶이고 남한은 냉혹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스스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주동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은 남한 주민에게 정말로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한국 정착 초기에 이마트에서 삼성카드로 물건을 구입한 사람들에게 사은품을 나눠주는 일을 한 적이 있다. 일이 시작되기 전에 노란 바탕에 검은 줄이 그어진 사원복을 받았는데 일이 끝난 다음에도 돌려달라는 말이 없었다.

    한국 사정을 몰랐던 나는 사원복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 셔츠가 이마트 사원만 입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저 남한은 물질적으로 풍성한 사회니 이런 셔츠쯤은 공짜로 주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옷이 괜찮아 보였고, 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외출복도 변변치 않던 터라 자주 거리에 입고 나갔다. 이후 다른 회사에 취직해 사장이 “여기는 이마트가 아니야”라고 말했을 때까지.

    총살과 수용소가 北 전부 아니다

    말을 듣고 보니 거리에서 나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차림으로 사람을 만난 내가 창피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 후론 다시 그 옷을 입고 다닌 적이 없다. 추억이 담긴 옷이라 버리지는 않았다. 이따금 옷장을 열었다가 사원복이 눈에 띄면 그때 일이 생각나 웃는다. 그 옷을 공짜로 받았을 때 나는 행복했고 옷의 정체를 몰랐을 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 옷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살다가 문뜩 자기 자신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랐을 때 구름 아래 성냥곽처럼 보이는 아파트의 한 공간을 가지기 위해 일생을 아등바등 사는 인생이 참으로 불쌍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땅에 내리고 나면 나 또한 그런 인생을 살고 있음을 발견한다.

    남한 사람은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북한보다 발전된 국가에서 사는 자신이 다행스럽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행복을 아는가. 인간의 욕구가 행복해지는 데 있다면 나는 남이든 북이든 중국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북한이 사람 못 살 곳이라고? 천만에. 총살과 수용소가 북한의 전부는 아니다. 북한 주민도 주어진 가난한 삶 속에서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며 산다. 가능하다면 북한의 먼지 나는 시골길을 일제 중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의 만족감을 측정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남한에서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의 만족감에 못지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먼지 속에서 무거운 배낭을 지고 가는데 자전거를 탄 사람은 남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족하면 그게 행복이 아닐까.

    당 간부들이 타고 다니는 멋진 승용차를 한번 타보는 것이 어릴 적 소원이었고, 실제로 타봤을 때 행복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아무리 멋진 차를 타도 행복하진 않다. 승용차 숫자가 가구 수를 넘는 남한에서 차가 있다는 것이 무슨 행복이랴. 오히려 나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과 비교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홀로 명절을 보낼 때

    먹는 것도 그렇다. 남들이 다 죽을 먹는데 옥수수밥이라도 끼니마다 빠지지 않고 먹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나 바깥세상에서 늘 먹는 것이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행복감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정작 남한에 와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나는 잘 먹는다고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1998년에 런던정경대학(LSE)이 어느 나라 사람이 가장 행복해하는지 조사했는데 방글라데시, 아제르바이잔, 나이지리아가 1, 2, 3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후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과 인생상담사 코언이 만들어 2002년 발표한 행복지수에서도 방글라데시가 1위를 차지했다. 가난한 나라들이 행복지수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이유를 LSE 교수인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야드는 두 가지 요인으로 보았다.

    첫 번째는 사람이 너무 쉽게 더 좋은 여건에 적응해버린다는 사실이다. 부채만 있을 때는 선풍기가 아쉬웠는데, 선풍기가 생기니 이번에는 에어컨이 없으면 불만이 생긴다. 두 번째는 상대적 소득수준이다. 실제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남들이 2만달러 받을 때 5만달러 받는 것이 좋고, 남들이 20만달러 받을 때 10만달러 받으면 기분 나쁘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평등을 내세우는 북한이 남한보다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남과 북의 행복지수가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자유를 찾아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어떠한가. 백과사전에 자유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서술돼 있다. 하지만 자본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탈북자가 몇이나 될까.

    조사에 따르면 탈북자 대다수가 기초생활비로 연명한다. 비록 직업은 있어도 월평균 수입은 100만원 이하가 86.9%다. 101만~200만원이 12.1%, 201만원 이상은 1%에 불과하다. 남들처럼 놀이동산도 못 가고 횟집 한번 가기 힘든 탈북자들이 진정 자유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질적 풍요 속에 상대적 소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남한 사람과 다른 것은 ‘부채를 쓰던 곳에서 선풍기가 있는 곳’으로 왔기 때문에 선풍기와 에어컨만 구경한 이곳 사람보다는 상대적으로 행복해하리라는 점이다. 당장은 현재의 삶이 북한에 있을 때보다는 나은 것이기에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만족감이 일생을 갈 수 있을까. 한국에 정착한 기간이 오랜 탈북자일수록 더욱 좌절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본 적이 있다.

    그들에게 ‘선풍기를 안고 부채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겠냐고 물으면 답은 두 부류로 갈릴 것이다. 여기서 에어컨을 꼭 장만하겠다는 부류, 그리고 부채 가진 사람 앞에서 선풍기를 가지고 뿌듯하게 살겠다는 부류로 말이다. 처벌받을 두려움만 없다면 여기서 번 돈으로 북한에 돌아가고 싶은 탈북자가 많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한다. 그러나 가족이 그리울 때, 명절을 홀로 보낼 때, 탈북자라는 편견을 받을 때면 행복하지 않다.

    편지 한 장에 눈물 쏟아본 적 있는가

    한국에서 태어나 어려운 형편에서 신분상승의 꿈이 좌절된 사람에게는 한국에서의 삶이 절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벌어봤자 한 가족의 생계조차 빠듯한 현실이 무슨 행복이랴. 그런 사람이 보건대 잘난 것 없이 물려받은 자산으로 저절로 돈을 불리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고 질투날 것인가.

    북한에도 조상 잘 만난 덕에 승용차 타고 거들먹거리는 간부들을 미워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 누가 나에게 남과 북 어느 곳이 더 살기 좋으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 물론 누가 봐도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발전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9시가 넘도록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해야 하는 남한의 생활이 물질적 번영에 비례해 행복하지만은 않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아침마다 지나치는 지하철 공사장에는 이런 구호가 걸려 있었다. ‘남과 같이 해서는 남을 앞설 수 없다!’ 공사장 직원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지하철 계단 하나 만드는 것이 뭐 그리 거창한 일이란 말인가. 그 직원들만 아니라 한국인 대부분은 별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동영상으로 마주보며 전화를 하는 IT 기술 수준은 한국이 세계적이다. 대신 북한 사람은 휴대전화 증후군을 모르고 산다. 집으로 퇴근한 이후에는 전화로 이곳저곳에서 찾는 일도 없다. 부산에 있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가며 휴일을 보내는 일도 없다.

    한국은 강릉이니 목포니 차만 있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다. 북한 사람은 도로에서 운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늘 걸어 다니는 북한 사람은 비만을 모른다. 한국은 메일과 메신저로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사람과도 수시로 연락할 수 있다.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러나 북한에서처럼 편지 한 장에 눈물을 쏟는 감성은 잃어버리고 있다.

    당신의 삶, 만족하십니까?

    한국인의 삶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황폐화하고 있다. 대다수가 수치, 지표와 개념에 파묻혀 치열하게 살고 있다. 행복은 ‘살아남자’는 구호가 비장하게 울리는 곳을 피해 달아난다. 남한이 ‘경쟁에서 살아남자’라면 북한은 ‘굶지 말고 살아남자’이다.

    생존이라는 문제에서 보면 남한이 조금 낫기는 하다. 그런데 서울 사람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을 잊은 것 같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그러니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인사가 없다. 집에 문 닫고 들어오는 순간 ‘아, 드디어 안전지대에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집밖에 나서면 다시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이런 것이 한국이 경쟁력을 얻은 대가로 잃어버린 것이다.

    남쪽 사람의 삶에는 30년간의 근대화 과정이 남긴 해악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능률과 경쟁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대가가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얼마나 위축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전국민적인 검토가 있었으면 좋겠다. 경쟁의 논리를 지상 최대의 선으로 생각하고 살지 않는지, 지나치게 삶의 가치를 물질적인 부에 놓고 살지 않는지 말이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한국에는 행복한 사람이 훨씬 많아질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로스웰과 코언이 제시한, 행복하기 위한 일곱 가지 방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자신에게 시간을 쏟아라 ▲흥미와 취미를 추구하라 ▲밀접한 대인관계를 맺어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라 ▲현재에 몰두하고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라 ▲운동하고 휴식하라 ▲항상 최선을 다하되 성취 가능한 목표를 가져라.

    이 가운데 남한에서만 가능하고 북한에서는 가능하지 못한 조건은 하나도 없다. 남한 사람은 이 가운데 만족스러운 것이 몇 가지나 될까.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돈은 공짜로 생기진 않는다. 그러나 삶의 목표를 물질에만 둔다면 그만큼 잃는 것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훨씬 행복해지지 않을까.

    내가 살아본 남한은 절대 낙원이 아니다. 낙원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자에게 어디든 찾아간다는 것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경험한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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