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30분, 손사장은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했다. 짧은 만남이었다. 손사장은 이 자리에서 인터넷 투자와 청소년에 대한 인터넷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손사장의 건의를 상당 부분 참고해 보름 뒤 신년사를 통해 모든 교실에 PC 1대씩을 보급하고 초고속통신망을 2005년까지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청와대를 나선 손사장은 저녁 비행기로 한국을 떠났다. 올 때는 일본에서 왔지만 갈 때는 미국으로 갔다.
손사장이 이번 방한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12월21일 아침이었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초청강연이었다. 그는 2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자신의 경영철학, 그리고 21세기 인터넷 비즈니스 전망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손사장의 강연에 앞서 이용태 회장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손사장의 인품과 비즈니스 스타일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회장은 “손사장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시했으며, 이 모델은 소프트뱅크를 5년 내에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기업에 투자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손사장의 투자철학도 높이 평가했다. 이회장은 “젊은 친구들이 미래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데, 손정의의 총을 맞은 놈들은 죽지 않고 날개가 생겨 오히려 더 잘 뻗어 나간다”고 비유했다.
이어 손사장이 강단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으며 얼굴엔 시종 옅은 미소를 띠었다. 좀 길지만 그의 강연내용을 옮겨보자.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놀란 것은 한국 경제가 갈수록 건전하게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의 확산과 수용 속도가 아주 빠르다. 소프트뱅크가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투자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의 인터넷혁명을 도울 수만 있다면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고 싶다.
나는 혼합된 문화에서 성장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소프트뱅크를 설립하기 전에 미국에서 작은 사업을 했다. 미국에서 교육받았고 미국에 많은 친구가 있다. 가족과 선조는 한국인이다. 나는 100%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4년전 인터넷에 눈 돌려
나는 4년 전 사업 방향을 인터넷으로 결정했다. 이전에 시스코시스템스와 합작투자도 했지만, 사실상 인터넷에 눈을 돌린 것은 4년 전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도 인터넷은 막 시작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터넷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젠 길거리의 표지판에도 ‘www’라는 월드 와이드 웹 주소가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TV와 신문 잡지의 모든 광고에도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가 씌어 있다.
거의 매달 미국에 가는데, 그때마다 미국은 변해 있다. 새로운 인터넷 기업인들이 훌륭한 아이디어로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등 정보통신계의 거물들도 요즘 젊은이들의 아이디어와 열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인류는 2만년의 역사에 걸쳐 3단계로 발전했다(손사장은 파워포인트를 이용, 자신의 강의내용을 그래픽으로 만들어 스크린에 비추며 강의했다). 농업혁명이 첫번째다. 직접 손으로 식량을 만든 시대다. 두 번째가 산업사회, 세 번째는 정보화 사회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사회가 변할 때 패러다임이 변했다. 교육이나 정부의 형태도 크게 바뀌었다. 파워를 가진 사람들도 바뀌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 토론이 활성화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났다.
이제는 3단계로 진입할 때다. 그러나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갈등 없이 새로운 사회로 진입해야 한다. 지적 혁명이 필요하다. 용감하게 새 사회로 진입하려는 결단과 선택이 필요하다.
소프트뱅크의 비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인터넷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나의 집에는 50대의 PC가 있다. 이 PC는 전자레인지 TV 자동차 등 모든 집기와 연결되어 있다. 뉴욕의 호텔에서도 집 안의 집기를 작동할 수 있다.
1992년 미국의 정보통신(IT)기업은 시가총액으로 상위 20대 기업에 한 곳도 들지 못했다. 93년 인텔이 처음으로 20위권에 들었고, 95년 마이크로소프트가 합세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정보통신 기업은 세상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4개가 정보통신 기업이다.
돈은 돈일 뿐이다. 시가총액은 하나의 척도일 뿐 기업의 모든 것을 평가하지는 못한다. 미국인 70%는 인터넷산업이 거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95%는 인터넷산업이 더욱 성장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인터넷산업은 PC산업을 훨씬 앞지르는 성장세를 보일 것이다.
2005년 중국의 인터넷 인구는 3억명에 이르러 미국을 제치고 인터넷 중심국가로 떠오를 것이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했지만 이때부터 모든 게 바뀐다. 이에 대비해 한국은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고 청소년들을 교육해야 한다.
나는 (총리 자문위원 자격으로) 일본 정부가 원한다면 모든 학생에게 PC를 1대씩 지급하고 초고속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게 무상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드는 돈은 100억달러 정도다. 이는 도쿄에 다리 하나를 놓는 정도에 불과한 액수다.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학생수가 적으니 적은 비용으로 훨씬 빨리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에는 본부(本部)가 모든 것을 통제해서는 안 된다. 돕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마음가짐과 비전을 바꿔야만 성공할 수 있다.”
어떤 기업이 초청됐나
지난해 손사장은 국내 ISP인 나우누리를 인수하려다 실패했지만, 당시 인수추진팀을 이끌던 문규학 사장이 “인터넷 투자는 ISP에서 출발한다”고까지 말한 것을 보면 이들이 ISP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다. e커머스(전자상거래)와 커뮤니티 사이버 몰, 온라인 게임, 멀티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등 인터넷에 등장하는 갖가지 장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그 베이스캠프 구실을 하는 ISP가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ISP는 기본적으로 적정선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회원을 사이버 몰 혹은 게임 쪽으로 유도하는 기지가 된다. 또 ISP를 기반으로 각종 컨텐츠 사업자와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손사장의 첫 작업은 ISP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ISP 이후 손사장이 점찍을 인터넷 비즈니스는 어떤 종목들일까. 그는 기자회견에서 “아직 투자할 기업을 확정하지는 않았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인터넷과 관련된 것이라면 증권, 금융, 전자상거래, 포털 사이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투자대상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유무선 통신회사와 PC제조업체 등 인터넷 인프라 관련 기업도 일부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옥석(玉石)은 철저히 가린다는 방침. 손사장은 “(성공을 100으로 보았을 때) 70% 정도 성장한 기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혀 기업의 성공 가능성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신생 벤처나 코스닥 등에서 이미 농익은 종목은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그가 투자해온 기업들을 보면 투자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서 야후 E트레이드 카포인트 지오시티 사이버캐시 온세일 ZDNET 등 포털과 전자상거래 쪽을 중점적으로 사들였고 킹스턴테크놀로지(메모리보드 메이커) 등 일부 하드웨어 업체도 인수했다.
그렇다 해도 향후 ‘손정의 칩’이 어느 쪽을 지향할지를 점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단편적으로 분석이 가능한 것은 방한 이튿날 조찬강연에 초청된 기업들의 면면이다. 물론 행사주관측은 “투자대상과 초청기업을 동일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지만.
초청자 150여명 가운데 순수한 인터넷 벤처기업 사장은 37명이었다. 대부분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있는 신생 벤처기업들이다. 일부는 이미 코스닥에 등록된 기업들이다. 이중 주력군은 인터넷 비즈니스의 정점에 서 있는 전자상거래 관련기업들. 골드뱅크 아이커머스 이니텍 인터파크 휴먼컴퓨터 파이언소프트 등 6개 기업과 삼보컴퓨터 관련사인 메타랜드가 초청자 리스트에 함께 올랐다.
골드뱅크는 지나친 주가 상승으로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98년 4월 인텔이 초청한 세계 인터넷기업 13개에 포함됐던 경력의 벤처. 인터파크는 골드뱅크와 함께 이미 코스닥에 등록,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상태여서 투자대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휴먼컴퓨터는 전자상거래 관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이니텍은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지불수단 등 솔루션을 주력 사업으로 하고 있다.
커뮤니티 분야에서는 5개, 게임 분야에서는 4개 기업이 각각 리스트에 올랐다. 톡톡 튀는 신세대 사이트인 아이팝콘, 여성전용 사이트인 예쓰월드, 육아 관련 사이트인 색동넷, 20대와 30대 등 세대별로 이용할 수 있게 한 인츠닷컴, 전문인 중심의 네트로21 등이 이번에 초청된 커뮤니티 사이트. 또한 스타크래프트의 국내 시합 주관사인 베틀탑과 인터넷 다마고치를 개발한 지오인터랙티브, 온라인 게임업체인 아이소프트와 NC소프트 등이 게임분야 리스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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