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구두쇠 경영으로 70년간 가구 공룡 통치

이케아 창업주 잉그바르 캄프라드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4-01-21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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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원이 좁은 차 트렁크에 탁자를 집어넣으려고 탁자 다리를 뜯어내는 것을 본 잡화상 주인이 있다. 이 광경에서 싸고 편리한 조립식 가구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이를 번창시켜 세계 5위 거부(巨富)가 됐다. 하지만 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와 막대한 재산에도 대중교통과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애용한다. 세계 가구 가격의 거품을 걷어내고 유통업계에도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킨 혁신적인 경영인 잉그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창업주 얘기다.
    “가구 공룡이 몰려온다.” 2013년 4월 기준 세계 41개국에서 341개 매장을 운영하는 스웨덴의 세계적 가구업체 ‘이케아(IKEA)’가 올 하반기 경기도 광명시 KTX 역세권에 한국 1호점을 낸다. 지하 2층, 지상 2~4층(2개동)에 면적도 25만6168㎡에 달해 백화점 4개가 들어설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이케아의 본산인 북유럽, 세계 최대 소비 시장인 북미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만 일본,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 태국 등 각국에 이케아 매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 매장 개설이 늦은 편이다. 그간 한국 가구업계는 이케아의 한국 진출에 거세게 반발해왔지만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케아가 2013년 말 경기도 고양시의 2호점 부지까지 매입하자 이케아의 빠른 팽창으로 한국 가구업계가 고사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도대체 어떤 업체이기에 국내 가구업계가 이토록 불안에 떠는 걸까. 이케아는 저렴한 가격과 단순한 디자인으로 세계시장에서 연간 40조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가구업계의 ‘공룡’이다. 직원 수만 15만 명이 넘는다. 단순히 침대, 소파, 책상, 식탁 같은 가구만 파는 게 아니라 주방기구와 욕실용품 등 각종 생활 소품까지 취급해 소비자가 고를 수 있는 품목이 무려 1만여 종에 달한다. 이 다양한 상품을 소개한 이케아 카탈로그는 매년 2억1200만 권 넘게 발행된다.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찍는 인쇄물이 이케아 카탈로그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케아 카탈로그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횟수도 연간 600만 건이 넘는다.

    이케아는 가구 공룡이지만 특이하게도 완제품 가구를 파는 업체가 아니라 소비자가 스스로 조립하는 방식(DIY·Do It Yourself)을 택했다. 덕분에 가격이 싸고 이동과 보관이 편하다. 북유럽 특유의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도 소비자를 유혹한다. 상대적으로 가구의 내구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으나 가격이 워낙 싸고 디자인이 우수하다보니 이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국도 가구가 꽤 비싼 나라인지라 이런 상황에서 이케아가 물량 공세로 한국 시장을 공략하면 업계의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싫든 좋든 이제 이케아의 한국 입성은 눈앞의 현실이 됐다. 미국 등에서 유학생이나 주재원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잘 알지만 워낙 매장의 규모가 크다보니 이케아에서 가구 하나를 사려면 최소 서너 시간 넘게 매장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무료로 배송해주지도 않는다. 집에 와서는 고객이 직접 조립까지 해야 한다. 한마디로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이 ‘간 큰 기업’의 가구를 사는 불편함을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이케아 매장에 가는 것을 ‘스웨덴식 디즈니랜드’에 간다고 표현하는 고객이 상당수일 정도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명절에 이케아 매장에 간다는 건 사람들로 가득 찬 일종의 쇼핑 지옥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실제 2004년 9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이케아 매장에서 2만 명 이상이 매장으로 돌진하다 3명이 밟혀 죽고 16명이 부상하는 참극까지 벌어졌다.

    대체 이케아는 어쩌다 세계 가구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공룡이 됐을까. 또 이 대형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 잉그바르 캄프라드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캄프라드 회장은 2013년 8월 말 기준 501억 달러(약 53조1500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세계 5위 부자다. 드러난 재산 외에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재단 관련 재산이 워낙 많아 이를 합하면 그가 세계 1, 2위 거부로 유명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나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마저 나온다.



    스웨덴 농부의 강철 생활력 지녀

    1951년 스웨덴 남부 말뫼 출신의 디자이너 일리스 룬드그렌은 곤경에 처했다. 신생 가구회사 이케아에서 일하던 그가 자신의 차로 조그만 탁자를 운반하려다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도 그의 좁은 차 트렁크 안에는 다리 4개가 달린 탁자가 들어가지 않았다. 룬드그렌은 투덜거렸다. “세상에…. 이 조그만 탁자가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다리를 잘라 상판 아래 붙여버리자.”

    무모함에 가까웠던 한 젊은 디자이너의 번뜩이는 재치가 세계 가구 및 유통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대부호를 탄생시키는 일로 이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리를 자른 탁자’는 ‘가구 부품을 납작한 상자에 담아 운반하고 이를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게 하는 가구’라는 콘셉트를 지닌 플랫 팩(flat pack) 가구로 발전했다. 당시만 해도 가구란 부자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 한번 사면 죽을 때까지 써야 하는 것, 부모님께 물려받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룬드그렌의 아이디어를 사업에 적용해 세계적인 거부가 된 인물이 바로 이케아의 창업주이자 그의 상사인 잉그바르 캄프라드(88)다. 그는 약 70년간 이케아라는 거대 유통기업을 소유하면서도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형 경영자다.

    캄프라드는 1926년 3월 스웨덴 알름훌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년의 절반이 눈보라에 휩싸이는 척박한 시골마을이었기에 주민들은 생활력과 자립심이 유달리 강했다. 소년 캄프라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돈벌이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했다. 다섯 살 때부터 성냥, 엽서, 연필 등을 팔아 돈을 벌었다. 17세인 1943년에는 고향 집 앞 창고에서 시계와 크리스마스카드를 팔면서 일종의 잡화상인 이케아를 창업했다. IKEA라는 기업명은 그의 이름인 잉그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 그가 유소년기를 보낸 농장의 이름 엘름타리드(Elmtaryd), 엘름타리드가 존재한 마을 아군나리드(Agunnaryd)의 머리글자인 I, K, E, A를 각각 따서 만들었다.

    1948년 가구업에 본격적으로 손을 댄 그는 1951년부터 카탈로그 인쇄를 시작했다. 1950년대 스웨덴 정부는 주택 100만 채 건설이라는 정책을 내놔 이케아의 성장을 간접 지원했다. 캄프라드는 1958년엔 오늘날 이케아 매장의 토대가 된 가구 전용매장을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오로지 가구만 파는 매장은 찾아보기 힘들 때였지만 고객들은 가구를 만들 재료를 납작하게 포장해 이를 승용차에 싣고 집에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 열광했다. 캄프라드는 스웨덴 굴지의 사업가로 부상한다.

    해외 진출과 스위스 이주

    저렴하고 실용적인 이케아 가구가 큰 인기를 끌자 스웨덴의 다른 가구업체들은 이케아를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경쟁자들은 이케아에 납품하는 하도급업체나 가구 장인을 협박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가구업계 박람회를 열 때도 이케아에 공간을 주지 않았다.

    국내 확장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본 캄프라드는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1970년대부터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위스 등 이웃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진출해 이케아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킬 발판을 만들었다. 특히 이때 생산 전진기지로 폴란드를 택한 점이 주효했다. 스웨덴보다 인건비와 부동산 가격이 훨씬 싼 폴란드에서 가구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싼 이케아 제품의 가격이 더 낮아졌다. 이케아는 창고와 매장 면적, 운송비용을 줄여 제품 가격을 더 내렸고 그럴수록 고객은 더 몰려들었다.

    폴란드의 인접국으로 유럽 최강 경제대국이자 이케아 매장 수가 가장 많은 독일에서 사업이 번창하면서 이케아의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이때부터 이케아는 매년 전 세계 각국에 10개 내외의 매장을 꾸준히 냈다. 세계 최대 소매시장인 북미에 진출한 뒤에는 홈디포, 로우스 등 미국의 쟁쟁한 대형 유통업체를 누르고 ‘가구 쇼핑은 이케아에서’라는 공식을 확립시켰다.

    캄프라드는 해외 점포 확장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케아 본사도 다른 나라로 옮겼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북유럽 국가는 사회복지가 우수하지만 그만큼 세금도 많이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웨덴은 한때 기업가의 소득에 무려 85%의 세금을 물렸다. 1000원을 벌었는데 850원을 세금으로 내고 내 손에 쥐는 게 150원밖에 없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결국 그는 엄청난 세금을 줄이기 위해 고향 아군나리드에 있던 이케아 본사를 네덜란드 델프트로 옮겼다. ‘델프트 도자기’로 유명한 이곳은 16~17세기부터 유명한 무역도시다. 캄프라드 본인 역시 재산세를 줄이기 위해 1976년 스위스 로잔 교외의 에팔링주로 집을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약 40년간 거주했다.

    캄프라드는 1980년대부터 이케아의 기업 지배구조에도 대대적인 변화를 꾀했다.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리히텐슈타인 등에 각종 재단과 신탁을 설립해 이케아의 소유구조를 극도로 복잡하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이케아는 아직까지도 비상장 회사다. 워낙 돈을 잘 벌고 유보금도 많다보니 굳이 기업공개(IPO)를 단행해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상장을 하면 투자자, 금융당국, 시민단체, 회계회사 등에 기업의 수익 상황을 낱낱이 보고해야 하고 감시와 견제도 엄청나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다.

    캄프라드가 소유구조를 복잡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절세다. 현재 이케아의 공식 소유주는 네덜란드에 등록된 공익재단 스티흐팅 잉카재단이다. 캄프라드는 1986년 최고경영자(CEO) 직을 사퇴한 후 회장의 직함만 갖고 있다. 이 잉카재단이 이케아 그룹의 지주회사인 잉카홀딩을 지배하며 이케아의 상표권, 제품 디자인 등의 소유권은 인터이케아시스템스라는 별도 회사가 갖고 있다. 각각의 회사는 서로의 지분을 상당수 보유해 꼬리에 꼬리를 문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복잡한 지배구조 덕에 그는 많은 세금을 내지 않고 별다른 견제도 받지 않으면서 70년간 이케아라는 회사를 완벽하게 틀어쥘 수 있었다.

    지독한 구두쇠 경영자

    재단 설립 당시 캄프라드는 이케아를 발전시키고 브랜드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절세와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지의 목적이 워낙 강한 탓에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웨덴 경제 잡지 ‘베칸스 아파러’는 재단 관련 재산 등 캄프라드의 실질 재산을 다 합치면 무려 900억 달러에 달해 그가 부동의 세계 1위 부자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캄프라드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케아의 놀라운 성공과 막대한 재산 때문만은 아니다. 삶의 방식 또한 유달리 독특하다. 우선 그는 말도 못할 정도로 지독한 구두쇠다. 재산이 막대한 데다 고령의 노인이지만 그는 아직도 전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한다. 심지어 한국의 경로우대증에 해당하는 시니어 시티즌 증명서를 보여주면서 할인도 악착같이 받는다. 대중교통의 운행이 뜸한 주말에는 낡은 볼보를 몰고 다니고 비행기를 탈 때는 예외 없이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 호텔도 싼 곳을 찾아 작은 객실에 묵는다. 미니바는 일절 이용하지 않고 주변 가게에서 물과 음식을 사다 먹는다. 차를 마실 때도 티백을 절대로 1번만 쓰지 않고 2번 이상 우려먹는다.

    구두쇠 경영으로 70년간 가구 공룡 통치


    일상에 필요한 물품 구입도 1년에 한 번 성탄절 직후 실시하는 대형 바겐세일을 이용해 한다. 당연히 물품 구입 장소는 가까운 이케아 매장. 그는 이케아 매장에서 떨이 상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게 취미다. 그 때문에 그가 보내는 크리스마스카드는 한두 해 전 이케아 매장에서 산 것이다. 심지어 식사도 대부분 이케아 매장에서 해결한다. 이케아 매장은 서너 시간 동안 카트를 끌고 다니며 발품을 파는 고객을 위해 간단한 식사와 간식을 비교적 싼 가격에 판다. 이것이 더 많은 가구 판매로 이어짐은 물론이다.

    캄프라드는 자신의 구두쇠 생활을 회사 직원에게도 따르라고 강력히 요구한다. 이케아 직원들은 반드시 양면지를 사용해야 한다. 회장에게 제출하는 보고서라도 예외가 없다. 아니 양면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큰 야단을 맞는다. 직원들이 400km 이하의 거리를 출장 갈 때는 비행기도 이용할 수 없다. 설사 비행기를 타더라도 반드시 이코노미석을 타야 한다.

    한번은 한 임원이 일등석을 타기 위해 캄프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코노미석이 다 팔렸고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약속이라 당장 출발해야 한다고 했지만 캄프라드는 단칼에 이를 거절했다.

    “이케아에 일등석은 없소. 대신 자동차를 이용하면 될 거요”라고 말하면서. 해당 임원은 택시를 타고 5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야 했다. 일부 임원은 볼보를 모는 회장보다 더 좋은 차를 타지 않으려고 출근할 때는 볼보를 타고, 집에서 가족들과 이동할 때는 포르셰를 모는 웃지 못 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에 절약도 좋지만 지나친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당당하게 “이건 내 삶의 원칙이다. 나는 돈 문제에선 아주 짠 사람이고 빈틈을 보이는 것도 싫다. 기업가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강조한다.

    캄프라드는 한 인터뷰에서 지독한 근검절약의 목적을 밝혔다. 첫째, 고객에게 파는 상품의 가격을 한 푼이라도 싸게 해줄 수 있다. 경비 절감은 원가 절감으로 이어지고, 원가 절감은 제품의 가격을 한 푼이라도 낮춰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논리다. 둘째, 이케아의 미래를 위해 항상 자금을 비축해야 한다. 그 돈으로 신흥시장 진출에 투자할 수 있고 굳이 상장을 단행할 필요도 없다. 셋째는 아낀 돈으로 남을 돕는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캄프라드는 상당한 기부를 한다. 그는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의 주요 후원자다.

    막대한 재산을 지녔지만 캄프라드의 인생이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탈세 논란 외에도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많았다. 캄프라드가 젊은 시절 친(親)나치 조직에 가담했고 30년 넘게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캄프라드가 많은 영향을 받은 그의 할머니는 옛 체코 지방의 독일인 밀집 지역인 수데텐 출신의 독일인이다. 독일인의 피가 흐르는 데다 젊은 시절 그의 절친이던 페르 양달도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우상화하고 나치즘을 지지한 단체까지 세운 인물이다. 이에 캄프라드는 70대가 됐을 때 “젊었을 때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나치 가담을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탈세, 친나치 논란 딛고 귀향

    이케아는 최근 논란이 된 방글라데시 의류공장과 마찬가지로 저개발국에서 노동자에게 극도로 적은 임금을 주며 이들을 착취했다는 비판에도 오랫동안 직면해왔다. 이케아의 한 전직 임원은 이런 윤리 문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책을 출간했다. 캄프라드가 근검절약 이미지와 달리 포르셰를 운전하고 거대한 저택을 소유했다는 논란도 제기됐다.

    후계 문제도 순탄치 않았다. 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복잡한 지배구조 때문에라도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의견이 회사 안팎으로 많았지만 그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세 아들을 둔 그는 이들도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됐음에도 “아직 경영권을 물려줄 때가 아니다”라며 후계자 확립을 회피했다.

    실제 그와 현 경영진은 회사 성장 전략을 놓고 상당한 견해차를 보인 바 있다. 이케아의 최고경영자(CEO)인 마이클 올슨은 2013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신규 매장 개점 속도를 현재의 연간 11개에서 20~25개 수준으로 두 배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음 날 캄프라드는 스웨덴 언론에 “그런 공격적인 경영은 불가능하다. 신규 매장의 수는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한 수준이어야만 한다”고 반대 의사를 밝혀 파문을 낳았다. 그럴수록 “스티브 잡스가 없는 애플과 마찬가지로 캄프라드가 없는 이케아를 상상할 수 없다. 그의 사후에 회사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런 캄프라드의 심경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었다. 2011년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두 번째 아내 마가레타가 사망하자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할 시점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결국 2013년 6월 캄프라드는 깜짝 선언을 발표했다. 막내아들인 마티아스 캄프라드(44)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본인은 스위스를 떠나 약 40년 만에 고향 알름훌트로 돌아가겠다고 밝힌 것. 캄프라드의 세 아들 페터(50), 요나스(48), 마티아스는 모두 이사회 멤버로 활동해왔으며 그중 그와 많이 닮았다고 알려진 마티아스가 대권을 차지했다.

    물론 그가 약 70년간 틀어쥔 경영권을 내놓고 고향으로의 귀환을 택한 것은 스웨덴이 부자세를 없애 세금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이유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여우가 죽을 때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두듯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 캄프라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발표문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스위스에 사는 일이 힘들어졌다. 가족, 옛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 올해 말 스웨덴으로 돌아간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캄프라드는 그의 지독한 절약 습관이 언론의 화제가 됐을 때 “나도 가끔은 호사를 즐긴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가 말한 호사란 계절마다 새 셔츠를 사는 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있는 작은 포도원을 찾는 일, 매년 8월 고향 알름훌트를 찾는 일이다. 포도원을 방문할 때는 직접 술 담그는 작업에 참여해 자기가 만든 포도주를 즐기고 고향 마을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토마토를 기르며 휴가를 보낸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50조 원이 넘는 재산을 지닌 사람의 휴가치고는 너무나 소박하고 볼품없지만 그토록 지독한 구두쇠의 삶을 살았기에 세계적 거부가 됐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마지막을 고향에서 보내는 그가 각종 논란에도 세계 가구업계와 유통업계에 엄청난 혁신을 단행한 경영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캄프라드의 가장 큰 유산이다.

    참고문헌 ‘이케아, 그 신화와 진실’, 엘렌 루이스 작, 이기홍 옮김, 이마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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